본고에서는 소월 시에 나타난 아토포스적 타자성을 `혼`의 타자성을 중심으로 이해, 문학을 순수한 문학내적인 자발성이 아니라 담론적 대상으로 정립, 이를 민족개조라는 사회적 자장의 영역에서 다룬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과 대비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친일과는 다른 윤리적 선택을 고수하였던 소월 시의 특성을 아토포스적 타자성으로서 사랑의 시학으로 이해하였다. 이때 소통의 맥락에서 소월의 시는 주체 욕망에 영합하지 않는 `혼`의 타자성을 통하여 계몽주의가 발화하는 소통의 정치화나 서구 사조 주의에 의해 유입된 낭만적 주체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월은 시「초혼」에서 보여지 듯 단순히 대상을 호명하는 행위와는 다른 타자의 부름의 소리, 즉 혼의 소리에 응대하는 자로서 화자와 청자라는 주체의 이분법적 소통의 경계를 역행하는 이질적인 목소리를 통해 소통의 정치화에 의한 담론 수행을 거부, 시적 언어의 주술성을 의미하는 `혼`의 타자성인 시혼(詩魂)을 통해 동일자의 언어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아토포스적 타자성을 노래하였다. 소월 시의 주술적 성격은 이러한 맥락에서 아토포스적 타자성이 비언어적인 특성을 갖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소월의 시는 계몽적 사랑관과 변별되는 지점에서 이별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사랑의 연속성을 통해 전쟁담론과 계몽담론의 주체 욕망의 세계를 부정, 자아의 동일성 욕망을 중단시키는 계기로서 사랑을 노래하였다. 소월의 시가 님과의 만남보다 사랑하던 님과의 이별을 주제로 하는 시를 창작한 것은 과잉된 사랑의 열병을 찬양하는 나르시시즘적 주체의 낭만적 감정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세계를 중단시키는 존재의 사건으로 사랑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월의 시에서 사랑의 힘을 통해 님과의 사랑을 노래하면서도 합일이나 현실적인 가능태로서의 결합을 형상화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타자성을 질식시켜버리는 주체의 소유욕망을 인식, 이러한 계기를 공백으로서 타자성의 근원거리-시「산유화」-를 통해 부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푸코가 생권력으로 지칭한 18세기 이래 특수한 권력 체제인 헤테로토피아적인 식민 공간이 권력의 공간화를 의미한다고 할 때, 바로 이러한 권력의 헤테로토피아들은 계몽의 커뮤니케이션, 즉 권력 담론에 의해 재생산되기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내선 일체와 대동아공영의 논리는 환상과 배제의 원리로서 근대 문명 공리를 통해 조선에 헤테로토피아적인 식민지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명 공리를 통해 근대=주체=문명=아버지=일본제국주의=합리성과 반근대=소외=낙후=고아=조선인=비합리성의 도식을 구축, 일본은 조선 뿐 아니라 동아시아 공간을 헤테로토피아적인 식민 공간으로 재배치함으로써 조선의 영토 뿐 아니라 역사 및 문화를 왜곡·날조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근대에 대한 환상 속에서 일본은 속세의 권력으로서 제국주의 국가 권력을 천황 폐하가 상징하는 천상의 권력 모델과 뒤섞음으로써 초월적인 권력으로서 아감벤이 지적한 환속화의 권력을 통해 조선 뿐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대동아 지형도를 재구축하였다. 이때 소월의 시는 헤테로토피아와 같은 주체의 공간화 개념을 폐지하는 아토피아의 부정성을 통해 상실된 고향의 장소성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공간이 권력의 특권적인 장소로서 기능한다고 할 때, 1920년대 식민공간에 거주하던 소월에게 `고향`과 서울의 공간성은 식민담론을 통해 공간을 재배치하고, 근대 미학화의 담론을 통해 전통을 전근대적인 것에서 낙후된 것으로 평가절하함으로써 조선은 계몽의 조건에서 비위생적이고 낙후된 부정적인 식민 공간으로 표상되었다. 소월의 시「산」, 「朔州龜成」, 「故鄕」등 여러 시편들에서 `不歸`의 상황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대한 천착을 보이는 것은 소월이 낙후된 공간이라 할지라도 `고향`이야말로 영원한 존재의 기반을 의미하는 것이라 인식했기 때문이다. 아토피아의 부정성으로서 소월 시에 나타난 `고향`의 장소성을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문명의 위치에서 용인된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니라, 소월의 시가 생명의 기원으로서 `고향`의 복원을 염원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경성`이라는 지명이 표방하듯 식민지 조선의 모든 공간은 헤테로토피아의 무한한 주체 권력의 자장 안으로 편입될 위기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식민 자본주의는 돈을 통해 경제적 법칙이 강제하는 동일성의 지옥 안으로 삶의 모든 차이와 이질성을 제거하고 평준화하는 주체 권력의 또 다른 자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소월은 시를 통해 주체의 공간화와 식민 자본주의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저항으로써 생활의 자유- 시「옷과 밥과 자유」-를 염원함으로써, 생활의 실천으로서 자유를 삶의 영역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비록 주체의 공간화 속에서 식민 자본주의의 자장 안으로 흡수될 위기에 처할 일이지만, 아토피아의 부정성을 통해 소월의 시는 생존의 위기 속에서 계몽 주체의 긍정성의 요구를 거부하는 숭고의 부정성을 통해 저항으로서 시적 의의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월의 시는 계몽과 제국주의 전쟁욕망이 내세운 주체의 공간화와 소유욕망을 부정하고 아토포스적 타자성으로서 사랑의 시학을 통하여 에로스의 정치로서 저항의 시적 의의를 지닌다. 나아가 자본주의와 포르노에 의해 성애화된 사랑을 경험하게 된 오늘날, 소비의 대상으로서 헤테로토피아적인 주체의 긍정성만이 전유될 수밖에 없게 된 위기 속에서 타자성의 위기야말로 에로스의 종말을 초래한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할 때, 아토포스적 타자성으로서 사랑을 노래한 소월의 시는 현대적 의미에서도 그 시사적 의의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