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설비평’은 인간성의 중핵이지만 상징계의 원리로는 포섭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정념과 실재계적 파열의 지점을 포착하여 기존 윤리비평의 한계-즉 ‘정치적, 윤리적으로 옳아서 좋다’를 벗어나 ‘정치적, 윤리적으로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상하게 좋은데, 과연 그 이상한 초과 지점은 무엇인가’의 관점에서 시에 접근하려는 방법론이다. ‘외설비평’은 ‘윤리비평’과 차원이 다른 또 하나의 독립된 사태가 아니라 ‘윤리비평’에 근원적으로 내재된, ‘윤리비평’이라고 하는 정상성을 지탱하는 동시에 언제든지 ‘윤리비평’을 전복하는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예외지점임을 인식하려는 ‘시차적(視差的) 관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외설비평의 관점에서 2천년대 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하기 위한 개념으로 ‘무한’, ‘반복’, ‘과잉’을 제안한다. 이미 윤리적 가치판단이 전제된 ‘자아/주체’의 분석틀보다는 윤리적 전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다른 개념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에 김언, 이준규의 작품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이 둘의 작품은 표면적으로, 쉽게 이해하기 힘든 언어구조를 선보이고 있지만 ‘무한’, ‘반복’, ‘과잉’이라고 하는 2천년대 한국시의 경향을 적절하게 자기 시의 내적 동력으로 삼고 있다. 먼저 김언의 시는 세계라는 사태, 타자라는 사태가 자신에게 균열을 만들고, 욕망을 자극하고, 상처를 주고,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는, 철저하게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김언의 시적 주체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과 사건의 잠재성을 애써 과도하게 찾아내거나 이미 발생한 것을 지우고 모든 사태와 타자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중화시키기를 반복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자신을 무한으로 개방함으로써, 타자의 향유 대상으로 제공하지 않게 만든다. 자신의 현실성과 실정성을 지우면 타자의 욕망에 응답해야 할 이유도, 근거도 사라지기 때문에 타자와 대면하여 불필요한 불안에 시달릴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강박적 생각’의 반복인데 구체적으로는 모든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추론행위로 나타난다. 한편 이준규의 시는 표면적으로 불필요한 ‘반복’과 불필요한 ‘과잉’이 무의미하게, 무한히 지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준규의 시적 주체는 강박적으로 ‘의심하는 주체’이다. 이준규의 시적 주체는 ‘A/~A’라고 하는 단순한 논리를 표준모듈로, 즉 ‘긍정판단/부정판단’을 한 쌍으로 겹쳐서 눈앞의 모든 사태를 불확실한 무한으로 만들어낸다. 역시 강박증자의 원리를 미적 방법론으로 채택한 이준규의 시적 주체에게 대상과 사물들은 그것들 간의 관계가 긴밀하고 중요해서라기보다는 제각기 어떠한 정서와도 분리된 채 무심히 나열될 수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쾌락을 가져다준다. 그의 시가 한없이 길어지면서 ‘과잉’의 상태로 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준규의 시적 주체가 생각을 멈추려면 뭔가를 긍정하거나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의 고정점이 필요한 것이다. ‘의심’에서 ‘긍정’으로 옮겨가는 일은 생각을 멈추고 현실의 한 사람으로 타자를 만나고 행동하고 관계를 맺으며 세계의 일부로 존재해야함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 시의 결론을 맺는 일은 곧 현실의 자기 상처와 균열을 맞닥뜨리는 일이 된다. 따라서 타자와 세계가 자신에게 결핍을 상기시키며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준규의 시적 주체는 다시 ‘A/~A(not A)’의 문장구조를 반복하면서 자기 앞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을 반복하고 번복하면서 ‘단순한 무한’의 세계로 돌아오려고 한다. 그에게 이것은 바로 ‘과잉의 시’를 쓰는 일이다. 결국 김언과 이준규의 시가 개성적인 것은 자신과 타자와 세계를 무한으로 개방시켜 무화시키고, 어떤 것과도 관계 맺지 않고,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롭고자 하는 외설적 쾌락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설비평’의 도입은 2천년대 시인들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이후 한국 시를 훨씬 더 종합적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으며 동시에 시를 더 풍부하게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 시비평은 ‘정치적, 윤리적으로 옳아서 좋다’는 관점에 더하여 ‘정치적, 윤리적으로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이상하게 좋은 초과 지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2천년대 한국시단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은 바로 이러한 윤리적 초과지점을 도입하여 비로소 새로운 문학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