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화, 만화, 드라마 등 장르간 넘나듦이 빈번한 시대에 소설의 영화화에 대한 탐구는 소설과 영화의 지속적인 경쟁력의 확보를 위해서도, 장르간 교섭이 빈번해진 현실에 대한 탐구라는 당위적 과제 속에서도 시의성을 갖는다 하겠다. 여기에서는 1979년에 발표되어 그 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저녁의 게임」과 이 소설을 영화화하여 2009년 유바리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오픈시어터 경쟁부문 특별상을 받는 등 큰 주목을 받은 독립영화「저녁의 게임」을 두고 소설의 영화화에서 벌어지는 창조적 변용의 구체적 사례와 방식을 탐구하였다. 1. 소설「저녁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 독립영화「저녁의 게임」은 ‘가부장적 질서와 섹슈얼리티의 대립’을 축으로 고적한 가정에서 화투놀이라는 게임으로 시간을 소모해가는 부녀간의 일상을 그린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독립영화「저녁의 게임」은 소설 원작을 뛰어 넘어 우리의 삶에서 갖는 ‘폭력’의 실체와 의미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어 주목된다. 첫째로 폭력은 ‘성’을 둘러싼 원시적 욕구충족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된다. 모든 폭력의 근저에는 성을 독점하려는 아버지 즉 수컷의 원초적 욕구가 살아 꿈틀거리며, 욕구의 대상을 폭압으로 자신의 영역에 묶어두고, 경쟁이 될 만한 다른 수컷을 영역 외로 추방시켜 버리며, 근친상간의 터부마저도 은밀하지만 집요하게 넘어서 버린다. 한마디로 독립영화「저녁의 게임」은 원시적 욕구충족이 횡행하는 동물적 성의 세계에 드러나는 폭력을 집요하고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으며, 그것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왜곡된 이데올로기와 접합되며 나타날 때 갖는 폭력의 혹독함이나 광기를 그리고 있다. 둘째로 독립영화「저녁의 게임」은 폭력을 해석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폭력과 수신자 언어의 우선성’을 직시하고 있다. ‘폭력’의 실체와 심각성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넘어서기 힘든 아득한 격차를 확인하는 것 속에서, 동시에 ‘폭력’이 피해자의 삶에 끼치는 치명적 영향력과 그것이 수신자의 언어 세계 속에서만 온전히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속에서 ‘폭력’은 선명하게 조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독립영화「저녁의 게임」은 폭력의 한 특징적 면모로 인간의 신체에 각인된 신화적 기억을 그림으로써, 폭력이 가진 폭압성과 중독성을 드러내고 있다. 폭력의 기억은 신화적 기억처럼 우리의 신체에 지울 수 없는 각인으로 새겨진 것이며, 그것에 노출된 인간은 기계적인 반응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 구체적으로 폭력의 폭압성과 중독성은 폭력을 둘러싼 현장의 모두에게 숙명의 굴레처럼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린 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소설「저녁의 게임」에서 슬픔과 질곡으로 무너져 내린 그녀에게 관능은 육체와 자아를 일깨우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이며, 그녀의 관능은 천상에 닿아 있다. 그녀에게 관능은 절실한 갈망으로, 휘파람 소리와 마른 꽃 향으로 즉 청각과 후각 그리고 시각을 동원하여 온 몸을 자극하며 다가서며, 여전히 19살의 푸릇함으로 남아 ‘벗은 채로’ 성적 환상을 자극한다. 독립영화「저녁의 게임」역시 소설「저녁의 게임」이 힘주어 그린 관능의 의미를 여전히 견지하지만 독립영화「저녁의 게임」은 중요한 차이점을 보인다. 그 가장 중요한 축이 성적, 관능적 판타지와 관련된 장면이다. 관능과 꿈 그리고 판타지가 어우러진 장면은 첫째로 관능을 아버지와 가정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적 혹은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그렸는데, 체제나 지배질서로부터 가장 멀리 추방된 범죄인을 관능적이고 자애로운 이상향적 인물로 그림으로써 자본주의적․가부장적 질서가 강요하는 질서 특히 여성에게 강요하는 폭압적 태도와 왜곡된 성적 이데올로기의 강요에 맞서는 저항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판타지 장면은 <물웅덩이에서 관능과 성애에 젖는 장면> → <천상에서 하강하는 장면> → <남성에게 이끌려 몽환의 세계로 나아가는 장면> → <어린 남녀가 평화롭게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의 서사구조가 말해주듯 관능과 성애에 젖는다는 것이 자아를 일깨우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거침으로써 자아와 욕망이 합일되는 이상적 세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3. 소설「저녁의 게임」은 결말부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위압적 존재 등이 가져 온 삶의 질곡과 관능에의 갈망, 그리고 자유와 꿈을 향한 갈망 사이에서 조용하지만 치열하고, 절망적이지만 절박하게 비상하려는 그 혼돈스럽고 지난한 몸짓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립영화「저녁의 게임」의 결말부는 소설「저녁의 게임」의 결말부가 갖는 그 혼돈스럽고 격렬한 삶의 굴곡들을 여전히 중시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그녀의 필사적인 저항의 몸짓을 한결 고양시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몽타주 기법과 그녀의 안드로지니적 형상이다. 정사 후의 귀가 신과 목욕 신들의 몽타주는 그녀가 자신에게 가해진 질곡을 매우 당당한 몸짓으로 또 절박한 자세로 부딪혀 간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거스름의 근원에는 관능이 전적인 힘이 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동시에 몽타주는 그녀의 몸짓이 섣부른 치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반성적 사고와 깊이 있는 고민의 결과임을, 그래서 버텨낼만한 힘과 여유가 있음 역시 그리고 있다. 아울러 격정적인 자위행위 신은 그녀가 관능적이면서도 자애롭고 여전히 젊은 이상적 남성상을 끊임없이 갈구한다는 사실 역시 분명하지만, 그 한편으로 이미 그녀는 혼자서도 관능의 열락으로 접어드는 길을 훔쳐 본 셈이고, 그 여유 있고 능숙한 몸짓 속에는 매우 도발적이고도 의미 있는 저항의 포즈가 들어 있는 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바로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건강한 본능과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긍정적 형상의 인물로 그려진 <자유를 찾아 도피하는 탈주범>과 <관능과 자유를 꿈꿀 때의 나(성재)>가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남녀의 특성이 결합된 안드로지니적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탈주범은 탄탄한 육체로 건강한 남성미와 함께 날카로운 눈매로 예의 고압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적인 다소곳함과 부드러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처연한 눈빛과 유연한 몸놀림 등은 전통적 의미의 부드럽고 온유하며 정서적인 여성상 그대로이다. 아울러 그녀의 경우도 여성적 관능미와 매력적인 육신을 드러내면서도 또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위세에 무너져 내려 슬픔에 잠긴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성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서며, 자위행위 장면에서는 탈주범의 제복을 입고 침대에 오르는 것이 상징하듯 남과 여를 넘나드는 성애의 행위에 몰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