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Historical reconstr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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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 목탑의 기단 및 심초부 축조기법에 관한 고찰 - 백제 사지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ructure of the Foundations of Wooden Pagodas in Ancient Korea)

  • 정자연;탁경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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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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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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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지금까지 한국 고대 목탑에 대한 연구는 발굴조사와 사료를 통한 평면 배치계획, 사리장엄구, 복원 등에 중심을 두고 진행되어 왔다. 이에 비해 목탑의 기단 및 심초부 축조기법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조사된 삼국시대 사찰 중 목탑지로 확인된 유구의 검토를 통해 각각 기단토 구축방법과 심초석의 형태, 안치 방법, 심주의 입주 등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목탑지 기단 구축방법은 지상성토형 굴광판축형 지상삭토형으로 구분되며, 심초석은 지하(반지하)와 지상에 안치되는 형식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심초석의 위치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상승함에 따라 심주의 위치도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목조건물의 구조 변화에 따른 것으로 특히 7세기 백제 무왕(武王)대에 목탑이 대형화되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대형화된 목탑의 조탑술은 신라 황룡사지 목탑, 일본 백제대사(百濟大寺) 목탑의 건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 연지(蓮池)의 입지 및 공간적 특성 고찰 (A Study on the Locational and Spatial Characteristics of Lotus Ponds of Fortress Wall of Seoul(漢陽都城) during the Joseon Dynasty)

  • 길지혜;손용훈;황기원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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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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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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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고지도를 보면 한양에 동지, 서지, 남지 등 큰 연못이 표기되었는데, 이는 궁궐이나 공해시설, 일반 민간 저택 내 원지들과는 달리 국가 소유의 필지였으나 공공에게 개방된 연못이었다. 동지, 서지, 남지는 한양도성과 연결된 연지로, 본 연구는 여러 지도 및 도면 자료와 회화 자료, 고문헌, 문학작품을 수집해 종합 분석하여 물리적 차원에서의 연지의 조영 경위와 이후의 운영상황, 연지의 입지 및 공간 특성을 고찰하고자 했다. 연구 결과, 첫째, 서지와 남지는 비보, 명당수 확보, 화기 진압, 방화수, 수경시설로의 목적 하에 조영되었고 동지는 비보, 명당수 확보 외에도 수구막이로서의 기능이 중시되었다. 둘째, 주변 지형과 연지의 수원을 보았을 때 서지는 계류와, 동지, 남지는 구거와 연결되어 연못의 수량 확보에 차이가 있었다. 셋째, 서지와 남지는 도시지역에, 동지는 전원지역에 위치하였는데 이 같은 입지적 특성은 연지를 이용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넷째, 연지의 형태는 모서리가 둥근 방형이나 자유로운 형상으로 궁궐이나 공해시설의 원지와 구분된다. 다섯째, 연지는 지속적인 유지 관리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고, 조선시대 매몰과 수축의 과정이 반복되었다. 길게는 오백 년 이상 동안 유지되었던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연지들은 개국 초기에는 비보풍수적 의미가 강조되면서 조성되었지만, 점차 도시에서 넓은 수공간이라는 공공 오픈스페이스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거주민과 행락객들이 애착을 갖는 문화공간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SNS 사진과 사진측량을 이용한 정원유산의 3차원 형상 재현 가능성 연구 - 명승 제40호 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을 대상으로 - (A Study on the Reproducibility of 3D Shape Model of Garden Cultural Heritage using Photogrammetry with SNS Photographs - Focused on Soswaewon Garden, Damyang(Scenic Site No.40) -)

  • 김충식;이상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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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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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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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사진측량 기술을 과거의 촬영된 사진들에 활용하여 정원유산의 원형 재현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인공물과 자연물이 혼재되어 입체 형상 재현 가능성 검토에 적합한 담양 소쇄원(명승 제40호)을 연구 대상으로 하였다. 소쇄원에서 근거리와 원거리의 $360^{\circ}$ 전방향에서 장애물이 없어 촬영이 가능한 조경시설물인 매대(梅臺),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담장, 약작(略?)과 자연경물인 광석(廣石) 5개 조경요소를 선정하였다. 인터넷 포털에서 5개 조경요소에 대해 촬영날짜, 초점길이, 노출 등의 정보가 포함된 151장의 사진을 수집하여 촬영구도를 분석하였다. 수집된 사진들은 요소별로 특정한 구도에서 집중적으로 촬영되는 경향을 발견하였다. 또한 조경요소별로 이용자들이 선호하는 2~3개의 촬영구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조경요소별로 빈도가 높은 촬영구도 1개를 선정하고 그 구도에서 촬영된 사진들을 이용하여 포토스캔(Photoscan) 프로그램으로 3D 메쉬 모델을 제작하여 입체 형상의 재현 가능성을 분석하였다. 제작결과 오곡문 담장, 매대, 애양단과 같은 인공물은 비교적 입체 형상의 재현이 가능하였으나, 질감이 동일하거나 자연 경물인 약작과 광석은 입체 형상의 재현이 불가능했다. 선정된 촬영구도와 유사하게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입체 형상의 재현을 실험한 결과 수집사진에서 불가능했던 약작과 광석에서 3D 메쉬 모델이 제작되었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형상 비교를 통해 정확한 크기를 측정할 수 있고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문화재의 관람객이나 조경가 등에 의해 촬영된 과거의 사진들을 확보하게 된다면 그 당시에 입체 형상을 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술이 확산된다면 정원유산의 과거 형상을 추정하고 변화를 고찰하는데 정확성과 신뢰성을 높일 것이다.

경운궁 흥덕전의 조영 및 사용 연혁과 설행된 의례의 특징 (Characteristics of the construction process, the history of use and performed rituals of Gyeongungung Heungdeokjeon)

  • 임초롱;주상훈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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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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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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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흥덕전은 경운궁의 확장 과정에서 궁역으로 편입된 수어청 부지에 최초로 지어진 전각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어진 모사처, 임시 봉안처, 빈전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흥덕전의 구체적인 조영 과정을 밝히는 한편, 흥덕전의 사용 연혁을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설행된 의례를 분석하여 도출한 특징을 토대로 흥덕전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흥덕전은 1899년 하반기에 건립되기 시작되어, 1900년 2월 중순에서 3월 중순 사이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흥덕전은 부속 전각으로 어재실과 내재실을 갖춘 의례시설이었다. 흥덕전의 이건은 1901년 4월에 계획되어 6월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건 공사는 선원전 부속 전각의 공사 및 선원전 중건의 추가 공사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또, 흥덕전의 영건 역비와 이건비의 기록, 선원전 중건 관련 비용 내역을 비교 검토한 결과, 흥덕전의 부속 전각인 어재실과 내재실이 선원전의 어재실과 이안청으로 이건되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흥덕전은 1900년 초 영건되자마자 두 차례에 걸쳐 어진 모사처로 사용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확인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짧은 시간 동안 두 차례의 어진 모사처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및 대한제국 시기의 어진 모사와 관련하여 선례가 없는 최초의 작업들이 진행된 장소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황실 의례를 위하여 별도로 건립된 전각을 어진 모사처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흥덕전은 빈전으로 사용되었는데, 이전 시기의 빈전과는 다른 특징이 확인된다. 흥덕전은 빈전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된 의례용 전용 전각이었으며, 어진 모사처로도 사용된 다목적의 의례용 전각이었다. 즉, 흥덕전은 경복궁 태원전과 함께 조선 후기 빈전 운영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전각인 것이다. 흥덕전에서 설행된 어진 관련 의례에서도 주목되는 특징이 확인된다. 첫 번째는 짧은 기간 동안 다수의 작헌례가 설행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주로 지방의 진전에서 거행되는 속절제와 삭망일의 분향이 확인되었다는 점으로, 이는 궁궐 내 진전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마지막은 전배 및 전알, 봉심이 다수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흥덕전은 황실 의례를 매우 중시하였던 고종의 의도와 경운궁 중건 과정의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전각이라 할 수 있다.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조성기 「시주질(施主秩)」 분석 (Analysis of the Shijujils(施主秩), the records on the creation of Buddha statues, of wooden seated Vairocana Buddha Triad of Hwaeomsa Temple)

  • 유근자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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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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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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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논문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가운데 좌존(左尊) 노사나불상과 우존(右尊) 석가불상의 복장에서 수습한 2점의 불상 조성기인 「시주질(施主秩)」을 분석한 것으로, 두 자료는 2015년 9월과 2020년 7월의 복장조사를 통해 나온 것이다. 2015년 9월에 수습한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한동안 미공개로 화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다가 2020년 7월 노사나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이 발견되면서, 2021년 9월 '지리산 대화엄사' 특별전을 통해 함께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화엄사 두 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17세기에 조성된 불상에 관한 기존 조성기의 일반적인 낱장 또는 두루마리 형식과 다르게, 선장(線裝) 방식으로 가철(假綴)된 책자 형식으로 되어 있다. 노사나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1책 19장 38면으로,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1책 11장 22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주질(施主秩)」의 내용은 불상 조성의 목적, 제작 시기, 봉안(奉安) 연도 및 봉안처(奉安處), 존명(尊名), 소임자(所任者), 조각승(彫刻僧), 시주(施主) 물목(物目), 시주자(施主者) 등을 담고 있다. 이밖에도 당시 화엄사에 주석하고 있던 승려들까지 수록하고 있는 점에서 「시주질(施主秩)」은 약 400여 년 전 화엄사의 중창 불사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에 소상하게 알려주는 타임캡슐(time capsule) 같은 것이다.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 및 노사나불상의 대좌 기록에 의하면, 1634년(인조 12) 3월에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해 8월에 완성한 후, 1635년(인조 13) 가을에 대웅전에 봉안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제작 시기를 1634년으로 특정할 수 있게된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은 중관(中觀) 해안(海眼)이 1636년(인조 14)에 저술한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에 의존해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 시기를 1636년으로 추정해 왔는데, 이제는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제작 시기를 1634년으로 특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엄사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벽암(碧巖) 각성(覺性)의 역할을 잘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벽암 각성은 1630년에 화엄사 동오층석탑을 중수할 때는 '대공덕주(大功德主)'였고, 1634년 삼신불상을 조성할 때도 '판거사(辦擧事)' 또는 '대공덕주(大功德主)'였으며, 1653년 영산회 괘불탱을 조성할 때 역시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등 17세기 화엄사 중창 불사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화엄사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벽암 각성과 왕실과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불상의 조성과 관련하여 왕실 인물인 선조의 아들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과 사위 신익성(申翊聖),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화엄사 노사나불상과 석가불상의 「시주질(施主秩)」은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 연도, 벽암 각성과 왕실의 관계 및 벽암 각성의 역할 등, 17세기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담고 있어 미술사뿐만 아니라 향후 화엄사의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숫자로 본 대한지리학회 60년 (Sixty Years History of the Korean Geographical Society as a Numerical Record)

  • 형기주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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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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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8-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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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본 연구는 대한지리학회 60년의 역사를 그 체제, 예산, 간행물, 회원수, 전공, 논문 등을 통해서 그것이 어떻게 변하여 왔는지를 밝히고, 동시에 학회 60년 역사의 시기구분을 시도 한것이다. 한국에 있어서 서구식 근대지리학의 역사는 불과 60년, 대한지리학회가 창립(1945년 9월11일)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1960년 IGU 스톡홀름 총회 때, 겨우 국제적 회원국으로 가입하였고, 1963년에 대한지리학회 학회지 창간호가 탄생하였다. 이로부터 불과 40여년 만에 한국은 제 29차 국제지리학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면서 새천년을 시작하였으니 대한지리학회는 한국의 경제성장 만큼이나 급성장한 셈이다. 학회의 회원수는 1966년에 불과 116인이었으나 2004년 현재에 약 1000인에 이르고, 박사학위 소지자는 1960년에 단지 2인이었으나 2004년에 388인, 이중에 약$43\%$는 외국에서 받은 학위이다. 전공별 회원수는 경제${\cdot}$사회지리 분야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도시${\cdot}$인구지리 분야이다. 최근10년 동안에 생태지리학을 포함한 자연지리와 지리교육, GIS분야의 전공자수가 급증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대의 요구를 잘 반영하는 현상이다 학회지 창간호가 탄생한 것은 1963년이지만 이것이 정기간행물이 된 것은 1966년 부터이고, 1993년부터 영문판을 포함하여 계간 및 격월간으로 간행되고 있다. 학회지에 계재한 논문의 편수를 보면, 1960${\~}$70년대에는 연간 평균7편, 1980년대에 약 11편, 1990년대에 24편, 새천년에 와서 무려 52편으로 급성장하였다. 1990년대 이후 논문을 계재할 기회가 많아졌고, 회원들의 연구활동이 고무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회지에 실린 전공분야의 분포를 보면, 역시 경제${\cdot}$사회지리 분야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생태학을 포함한 자연지리학 분야, 그리고 도시 인구지리 분야이다. 앞에 지적한 전공 회원수와 함께 논문계재 편수에 있어서도 문화${\cdot}$역사분야, 지리교육 분야, 응용 및 GIS 분야는 최근에 급성장하는 추세이다. 대한지리학회는 회원수나 그 활동으로 보아서 급성장하고 있으며 국제화 되고있다. 그리고 지난 60년의 역사를 시기별로 나누어 성격을 부여한다면 (1)창립과 혼돈기($1945{\~}1959$), (2)재건기($1960{\~}1969$), (3)체제정비기($1970{\~}1989$), (4)약진기($1990{\~}1999$), (5)국제화시기($2000{\~}\;$)로 나눌 수 있다.

경복궁(景福宮) 배수시설(排水施設)의 조성원리(造成原理)에 관한 연구 - 경복궁 발굴조사 자료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mposition Principle of the Gyeongbokgung Drainage Facility - Focused on the review of Gyeongbokgung excavation survey -)

  • 김태민;남호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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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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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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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의 목적은 유구의 발굴조사로 확인된 자료를 활용하여 경복궁의 배수시설을 파악해보는 데 있다. 궁궐의 원활한 배수를 위한 여러 노력은 창건기 경복궁에서부터 지속되었음을 사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창건기 당시 경복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도형은 남아있지 않지만, 영조대 이후 제작된 도형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으며, 중건 이후의 모습은 "경복궁전도", "경복궁도", "북궐도형"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이 고종대 중건 경복궁을 복원 기준으로 삼고 있기에, 본고 역시 고종대의 경복궁 배수 시설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중 본고에서는 침전, 태원전, 건청궁, 소주방,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 흥복전 등 여섯 권역의 집수정과 암거를 분석해 보았다. 경복궁은 중심전각과 주변행각으로 구성된 여러 개의 권역으로 구성되는데, 배수 역시 각각의 행각과 전각에서 시작하여 권역별 중심배수로로 합수되는 방식임이 확인되었다. 기본적으로 중심배수로는 개방형 어구로 연결되고 어구로 나온 물은 최종적으로는 수문으로 출수되는 형태가 확인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경복궁의 구지형을 이용한 자연배수와 인공배수를 조화하기 위한 배치로 보인다. 배수가 시작되는 집수정은 생활하수가 다수 발생하는 지역에 설치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행각과 행각, 행각과 담장이 접하는 모퉁이에 주로 설치되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이는 지붕의 낙수 처리와 생활하수 처리를 고려한 배치로 판단되며, 특히 생활하수의 처리를 위해 행각이 끝나는 부분에 주로 주(廚)칸을 설치하는 모습도 관찰되었다. 이러한 배수시설의 설치는 경복궁의 배수가 일련의 계획 하에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5대 궁궐 건물지 기초의 고고학적 연구 (An Archaeological Study on the Foundations of Five Palaces of the Joseon Period)

  • 최인화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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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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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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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시대에는 5개의 궁궐이 있었다. 태조 4년(1395) 경복궁이 창건되고, 그 후 역사적 상황에 따라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 경덕궁(경희궁)이 추가로 중건되었다. 궁궐은 당대 최고의 건축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궁궐은 수차례 중건과 소실을 반복하며 조선왕조 500여년 건축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조선시대 5개 궁궐의 발굴 현황을 검토하여 건물의 기초인 건물지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건물 기둥의 하중을 지탱하는 핵심 시설인 '적심(積心)'에 대한 분석을 통해 궁궐 건물지가 가지는 궁궐·시기별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또한 적심의 편년을 통해 시기별 궁궐 건물 기초의 변화 양상을 확인하였다. 적심은 총 23개 형식이 확인되는데, 전반적으로 5개 궁궐 모두 I~V 형식의 일정한 적심 축조 방식을 가지고 있어 조선시대 궁궐 건물 기초 축조 방식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4~17세기에는 일정하게 통일된 재료와 축조 방식(원형 잡석 적심(I-1))이 주를 이루다가 18세기 정조대를 기점으로 다소 다양해지는 양상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19세기 고종대에는 다양한 재료와 축조 방식으로 22가지 형식의 건물지 적심이 축조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궁궐 건물지 연구는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진 경복궁 건물지가 주가 되어, 임진왜란 후 중건이 중단된 17~18세기 건물지의 편년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다른 궁궐의 건물지들을 함께 비교 검토함으로써 14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궁궐 건물 기초 축조 방식의 시대적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세계유산 신라왕경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속성 분석 (The analysis for attributes of OUV of the capital of Shilla Kingdom)

  • 김의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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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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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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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2019년 제정된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신라왕경은 신라 및 통일신라 시기의 수도를 일컫는 말로서 왕이 거주하고 정치하던 경주 및 그 인근 지역을 말한다. 신라왕경은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유산이며 경주역사유적지구로 등재된 5개 지구 중 월성지구와 황룡사지구, 대릉원지구에 해당한다. 신라왕경은 남산지구나 산성지구와 달리 대부분이 물리적 실체가 없는 고고학 유적(archaeological sites)으로 구성된 유산이다. 경주시는 신라왕경을 구성하는 유산들을 복원하여 관람객들에게 보다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함과 동시에 지역 관광을 진흥하고자 하였다. 2005년 월정교 복원을 시작으로 신라왕경 복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경주시는 월정교 다음으로 동궁과 월지의 서편 건물지를 복원하려 하였으나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복원을 반대하면서 차후 유사한 사업에 대한 유산영향평가를 권고하였다. 유산영향평가 절차 중 평가 대상 유산의 OUV속성 분석과정이 존재한다. 본 연구는 신라왕경에 대한 OUV속성 도출을 문헌 및 해외사례 분석을 통해 선제적으로 수행하고자 한다. 문헌연구의 경우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 및 세계유산 관리와 관련된 국내·외의 연구자료를 살펴보았고 해외사례는 폴란드 크라쿠프 역사 지구, 영국 스톤헨지와 에이브베리 거석 유적,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왕경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속성을 도출하였다. 본 연구는 향후 신라왕경을 구성하는 다른 유산의 복원사업 또는 인근 지역의 건설공사 계획 수립 과정에서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고, 기존에 수립된 신라왕경의 관리체계를 세계유산의 관점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지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문화재 보존원칙으로 본 창경궁 조경 복원정비 양상 해석 (Interpretation of Landscape Restoration and Maintenance in Changgyeonggung Palace through the Preservation Principles of Cultural Heritage)

  • 강재웅;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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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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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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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근대경관이 병존하는 창경궁을 대상으로 조경 복원정비 양상의 타당성을 해석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담관리 조직에 따른 조경 복원정비 태도 변화를 이해하였다. 1908년 어원사무국의 황실재산 국유화와 환경미화, 1961년 문화재관리국 출범과 1963년 사적 지정에 따른 문화재 보존, 1983년 창경궁사무소의 복원 후속처리로서 환경정화, 1999년 문화재청 승격과 2019년 궁능유적본부 발족 이후 전문적 조경관리와 관람환경 제공이 포함된다. 둘째, 해방 이후 '창경원 환경정화기(1954~1977)'에는 유원지 시설의 기능 복구, 벚꽃놀이를 위한 시설 설치, 국립동물원 도약을 위한 환경정화가 이루어졌다. '창경궁 중건기(1983~1986)'에는 도시공원 기능을 포함한 복원정비 공사, 완충기능의 유보녹지 설정, 외부공간의 전통적 재조성, 산림지역 통합 정비가 진행되었다. '전통조경공간 보완기(1987~2009)'는 소나무로 획일화된 녹지 경관조성, 화계 중심의 다양한 식생 경관이 도입되었고, '관람환경 개선·정비기(2010~2022)'는 활용을 전제로 한 기본계획 수립되었으나 단위 공간에 집중된 소극적 정비가 고수되고 있다. 셋째, 조경 복원정비의 타당성과 관련하여 문화재 보존원칙의 '고유성' 측면에서 권역별 궁제의 회복이 전각이 밀집한 구역에서 40여 년간 확장되지 않음을 파악하였다. 또한, 다층위의 역사를 존중하는 여부로서 '시대성'은 두 차례 창경궁의 복원기준연대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았다. 조선과 근대의 원상이 병존하는 후원 권역의 대온실 일원은 자수화단, 춘당지가 하나의 영역으로서 '완전성'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문화재 공간의 활용 실태로 파악한 '효용성'은 내·외전 권역과 다른 프로그램들로 집중된 대온실과 춘당지의 장소성 확립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