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Goryeo(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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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문신(文臣) 이승휴(李承休)의 영정복식 재현 제작 방법 -편복(便服)을 중심으로- (The Production Method for Recreating the Historical Costume of Civil Official Yi Seung-hyu from the Late Goryeo -Focusing on Everyday Attire-)

  • 최정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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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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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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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reproduce the ordinary attire of Yi Seung-hyu, a civil official and writer of the late Goryeo, which will be used to make a his portrait. The reproduced costume consists of a single-layered pyoui (表衣) and jungdan (中單), lined jeogori and baji, and geon (巾), created with reference to historical documents, materials, and portraits. The pyoui was made with samcheokbe, with an H-shaped neck-shoulder band, an oblique single collar, and rectangular gussets. Two skirts were attached on the inside at the back, similarly to dopo. The jungdan also has an oblique single collar, but has an I-shaped neck-shoulder band and triangular gussets. A flat felled seam stitch, whip stitch, and French seam stitch were used in the hemlines and seams of the pyoui and jungdan. The jeogori and baji were made with toju (土紬), and small ties were attached to stabilize them. The geon is a long, oblique hat, which has folded side lines, and was made with flexible black hangra and using a French seam stitch and backstitch. The results include the elements of "restoration, historical research, and portrait costume", and will be maintained as the cultural heritage of Samcheok City.

14세기 원 건축의 영향과 고려의 수용 (The Architectural Influence from the Yuan Dynasty and the Acceptance of Goryeo Dynasty in the 14th Century)

  • 홍병화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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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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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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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The architectural influence from the Yuan had impact on the Goryeo Dynasty in earnest during Yuan intervention period in the 14th century. The representative examples which were influenced by the Yuan architecture are the Eungjinjeon in Seongbulsa(成佛寺) temple, the ten-story stone pagoda of Gyeoncheonsa(敬天寺) temple site, the Bogwangjeon in Simwonsa(心源寺) temple, the Hoeamsa(檜巖寺) temple and so on. Notwithstanding the changes of relationship between two countries, it can be comprehended that there was a selective acceptance of the Yuan architectural peculiarities in Goryeo Dynasty. It means that the adoption of foreign culture in Korea has not been inevitable from the unilateral demand, but been autonomous by perceiving as the advanced culture. This tendency was maintained even though the government had been changed.

경기도 지역 석탑의 전개과정과 조영 특징 (The Development Process and Construction Characteristic of the Stone Stupa in Gyeonggi-Do)

  • 이서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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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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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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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은 경기도 지역 석탑의 건립 현황과 양식 분석을 통해 경기도 지역 석탑이 갖는 특징과 의의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경기도 지역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불상, 석탑, 승탑, 마애불 등 다수의 불교 조형물이 조성되었으며, 이 가운데 불상과 더불어 신앙적인 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불탑이다.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지역에도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으며 그에 따른 석탑 건립도 성행하였다. 본 논문은 경기도 지역 내 지정된 석탑을 기본으로 48기의 석탑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분포 현황을 보면 한강을 기준으로 경기 북부보다는 남부에 집중 건립되었는데, 중심이 되는 지역은 안성, 이천, 용인, 여주 등이다. 이는 지역적 특수성도 기인하지만, 북부에는 석탑을 건립하는 대형 불사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별 특징을 보면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석탑이 남아 있어 석탑이 꾸준히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고려시대 석탑이 집중 건립되었는데, 고려 전기에 남부 지역에서 활발히 건립되었으며, 고려 후기에는 경기도 전역에 걸쳐 석탑이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가까운 지역 및 왕실과 관련이 깊은 사찰들에 석탑이 건립되어 당시 시대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석탑은 지역적 특수성, 즉 교통의 요지인 곳에 주로 건립되었는데 안성, 이천, 용인, 여주 등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목되는 지역에 불사가 성행하였고 그로 인해 석탑 건립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술사적 의의를 살펴본 결과, 성주사지 석탑의 영향을 받아 어비리 삼층석탑에서 별석 초층탑신받침이 확인되는 점, 고려시대 석탑 중 백제계 석탑은 확인되지 않고 주로 신라계 석탑과 고려 양식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점, 탑신 결구 방식과 탑신 제작 방식에서 전국적으로도 사례가 많지 않은 특징이 나타난다는 점, 마지막으로 석탑 장엄조식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 간행(刊行)의 불경판화(佛經版畵) 연구(硏究) (A Study on the Buddhist scripture published in the Goryeo Dynasty)

  • 석혜영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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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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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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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고려시대 제작된 불교 경전에 포함된 판화와 관련된 개괄적인 현황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고려시대 간행된 판화본 중 해인사 소장 대장경에 포함된 것은 ${\ll}$화엄경(華嚴經)${\gg}$ 주본(周本) 80점(5점 중복), 진본(晉本) 12점을 비롯하여 ${\ll}$예수경(豫修經)${\gg}$ 3종 44점과 송광사에 ${\ll}$천태은사한산습득시집(天台隱士寒山拾得詩集)${\gg}$의 판화 1점이 현전한다. 또한 초조대장경 중 현재 일본 남선사에는 소장된 ${\ll}$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gg}$ 권1-10까지에는 50개의 판화가 현전하며, 이것은 권11-20까지 중복해서 사용 되었으며, 권21에는 불전도(佛傳圖) 형식의 판화가 3점 포함되어 있다. 이 외에 본고에 다룬 고려시대 간행된 불경 판화는 12종 19점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불경 판화의 모티브를 차용하면서도 고려인들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도상을 만들어 내었다는 점과, 특히 조선 초기 제작된 다양한 불경 판화의 원형을 제공해주고 있어 그 시원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야은(壄隱) 전록생(田綠生)의 의리사상(義理思想)과 경세론(經世論) (Yaeun(壄隱) Jeon Nok Saeng(田祿生)'s Idea of Justice and Theory of Governing)

  • 정성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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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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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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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무신란(武臣亂) 이후 고려 말에 이르는 시대상황은 대내외적으로 위기가 점증되는 시대이다. 정치기강의 문란, 사회윤리의 이완, 사상계의 침체 그리고 중국에서의 원나라의 쇠퇴와 명나라의 발흥 등 14세기 후반은 긴장과 혼란이 연속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삶을 영위한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의 의리사상과 경세론을 탐구하려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원명교체기에 처하여 국권이 위협당하였던 고려의 상황 아래에서 전녹생의 의리사상은 '배원친명론'으로 표현되었으며, 그것은 국가의 안위(安危)를 문제삼고 고려 한 나라의 주권을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전녹생은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려면 일을 꾸미거나 번잡하게 만들지 말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전녹생은 당시의 시대여건이 마치 실타래와 같아서 급하게 서둘수록 저절로 꼬이기 쉬우니 아주 조금이라도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고 차분하게 민생안정을 도모할 것을 강조하였다.

고려말 사경의 감지(紺紙) 재현과 수리 - 이화여자대학교 소장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을 중심으로 - (The Restoration and Conservation of Indigo Paper in the Late Goryeo Dynasty: Focusing on Transcription of Saddharmapundarika Sutra(The Lotus Sutra) in Silver on Indigo Paper, Volume 7)

  • 이상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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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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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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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고려시대의 사경은 어느 시기보다도 정교하고 화려한 기록물로 우리나라 서지학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감지(紺紙) 바탕에 제작된 사경은 장식성과 귀족들이 선호하였을 법한 품위와 격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기에 제작된 많은 양의 사경들은 감지에 권자본(卷子本)과 절첩본(折貼本)의 장황 형태가 대표적인 것이다. 권자본은 유연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 자체가 갖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취급에 있어 불편함과 손상을 야기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절첩 형태로 바꿔 제작함으로써 편의성과 구조적인 안정성을 꾀하여 단점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절첩 형태는 병풍의 형태와 유사하여 접었다 펼 수 있는 구조로 한 면의 크기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아무리 작은 크기라 하더라도 얇은 한지로 제작하면 취급에 어려움이 따르고, 형태를 유지하기 힘든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통상 절첩형의 사경은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 첩의 구조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하였으며, 표지는 내지보다 더 두껍게 제작되어 내지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절첩형'은 종이에 두께를 주어 강도를 유지해야 하는 특성에 맞게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양의 한지를 진하게 염색 가공하는 것은 오롯이 장인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비단에 비해 흡수량이 몇 배 이상이고, 수십 차례 염색을 하여야만 진한 감색을 얻을 수 있는 '감지 제작 기법'은 구체적으로 문헌에 남아 있지 않고, 기법도 명맥이 끊긴 지 오래이다. 최근 한지장인과 천연염색가, 수리복원가에 의해 제각기 시도는 되고 있으나 유물에서 보이는 질감과 깊은 색감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다. 본 연구에서는 고려 말 사경을 보존 처리하기 위해 실제 유물에 적합한 보강지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염색장과 한지장, 그리고 수리복원가의 협업으로 고려시대 감지를 재현하는 일련의 과정을 소개하고, 감지의 재현·제작 방법을 유추해보고자 한다.

고려~조선시대 귀이개 형태와 장식기법 (A study on the shape and decorative techniques of earpick during the Goryeo-Joseon Period)

  • 김지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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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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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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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고는 귀이개라는 특정 공예품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통해 당대의 물질문화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2장에서 귀이개에 관한 용어 정리를 하고, 조선후기 단편적인 문헌을 통해 귀이개의 사용 문화를 살펴보았다. 귀이개는 첫 번째로 개인의 수신을 위한 위생도구였고, 두 번째로 남성들의 선추에 다는 구성품으로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다. 3장에서는 시대별로 귀이개의 형태를 분류하고, 각 형태별 특징적인 장식기법을 살펴보았다. 고려시대 귀이개는 사용목적이 위생도구였으며, 형태에 따라 단독형, 복합형으로 구분된다. 단독형에는 각봉형, 손잡이형, 판형이 있으며, 복합형에는 족집게일체형, 리벳분리형이 있다. 손잡이형 귀이개에서 고려시대의 장식기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선각, 금도금, 바탕에 누정기법으로 찍은 첩호(疊弧)문, 납입사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조선시대 귀이개는 사용목적에 따라 위생도구와 장신구로 크게 분류된다. 위생도구는 단독형, 복합형으로 나뉘고, 장신구로 사용되는 귀이개 종류로는 뒤꽂이, 노리개, 선추 등이 있다. 귀이개 장신구는 성별에 따라 여성은 뒤꽂이, 노리개로, 남성은 선추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귀이개의 장식기법은 주로 귀이개 뒤꽂이에서 볼 수 있었다. 칠보기법으로 다양한 색을 내거나 보석감장으로 장식하였다. 그동안 공예품 중 일상도구에 관한 연구가 미진하였다. 일상도구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읽고 물질문화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고려시대 왕실호위제도의 사적 고찰 (Historical Review on the Security Service for the Royal Household in the "Goryeo" Era)

  • 이성진;김의영;이종환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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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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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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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고려시대의 왕실 호위라 함은 오늘날로 보면 국가원수에 대한 경호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독특한 정치제도가 완성되기까지는 신라시대나 태봉국의 제도를 답습하여 왕의 신변을 중심으로 경호가 실행되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과 6위라는 8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2군은 6위보다 위였으며 이는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으로서 이를 근장(近仗)이라고 불렀다. 이를 오늘날의 공경호와 관련을 지어보면 근접경호에 해당된다. 고려 귀족 사회의 안정기에 귀족문화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그 뒤로 귀족분열과 상극대립으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무신란이 일어나고 무신들이 집권함으로서 왕의 신변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최씨 무인집권시대에 이르러 무인집권의 안전을 위하여 도방을 설치했고 최우 시대에는 그의 문객들을 모아 사병들뿐만 아니라 정방, 서방, 등의 문신을 거느려 인사행정을 담당케 했다. 몽고에 항쟁하던 시대에는 무신통치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를 중심으로 항쟁했다. 최씨 정권시대의 그들 나름의 국가관과 국가 호위의 정신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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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 병서(兵書)의 유입과 지식인들의 이해 양상 - 무경칠서(武經七書)를 중심으로 - (Acceptance of the Chinese Books on Military Art and Understanding Patterns of Literati)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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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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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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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유사 이래 갈등과 전쟁에 대비하는 별도의 연구와 학문이 출현하기 마련인데 이것을 전통 학문으로 분류한다면 '병학(兵學)'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먼저 선행 연구를 기초로 중국의 병학사를 개괄하고, 문헌 검색을 통하여 우리나라 삼국시대부터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병서의 수용과정과 지식인들의 이해 양상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향후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병학의 전반적 특성을 조명하기 위한 시론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손자"를 비롯한 중국의 병서가 전래되어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혀졌으며 유학적인 소양을 기반으로 다양한 병법을 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상으로 보면 비록 중국의 병서에 의존한 바 크지만 한편으로는 독창적인 병법을 운용하고 있다. 고려말에 이르면서는 '병학'이 학문적으로 정립되면서 중앙의 성균관뿐 아니라 지방 향교에서도 유학과 함께 가르치게 하였다. 다만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그러한 전술 경험이 실제 병서의 간행으로 이어졌는지, 또는 고려말까지 얼마나 많은 병서가 출간되었는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병서의 편찬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 우리나라의 병학이 전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살수(薩水)대첩이나 고려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귀주(龜州)대첩을 이룬 과정에서 나타난 전략과 전술, 리더십은 결코 우연일 수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 가구재료 연구 (A Study on the Material of Furniture in Goryeo)

  • 조숙경
    • 한국가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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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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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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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is paper studied the materials of the furniture which the noble men used in Goryeo, based on the furniture material category of solid wood furniture, 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 and hardware. As for the solid wood furniture, the wood and furniture types are inferred based on the documents. The trees used for the wood furniture were zelkova, korean willow, pine, royal paulownia, maidenhair tree, korean pine, chinese juniper and elm. The furniture types were table, chair, wooden bench, small portable table, writing table, and folding screen. As to the types of 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 most of them were hams with top, which were made of abalone shells. The features of the 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 were in detail and elaborate like the pattern of the full bloomed chrysanthemum. Writing tables were also made of lacquerware as pieces of furniture. Distinctively, the mother-of-pearl furniture material was popular enough to be used even in a horse saddle. Regarding the metal feldspar used as both a practical use and decoration, there are drop handle, hinge, the front basis, and lock seen in the artifacts, which were made of cast iron, bronze, and brass. Their manufacture techniques were eojamoon, bratticing and sheet metal. Through this study of the furniture materials used in Goryeo, it seems that Goryeo furniture focused on the functions rather than on the decorations, and in turn the forms were simple and basic. The technique of mother-of-pearl, a bit elaborate one, was used in the props furniture like kitchen wares, hams, or writing talbes. Probably, the solid wood is inferred to be used in a low wooden bench, a chair, and a table based on the docu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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