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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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사회복지 정신 (Confucian philosophy on social welfare)

  • 김기현
    • 사회복지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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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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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7-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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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유교를 봉건사상으로만 여기는 한 우리는 거기에서 사회복지 정신을 말하기가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교에서 풍부한 인간학과 사회철학을 알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문제는 우리가 유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먼저 그 동안 유교가 어떻게 오해되어왔는가를 살피고, 이어 인간학과 사회철학적 관점에서 유교의 본질을 밝히려 한다. 우리는 거기에서 유교의 사회복지 철학을 추출해낼 수 있다. 유교는 공동체적인 인간관을 토대로 갖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사회적)인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주의를 일종의 '악덕'으로 여긴다. 이는 유교가 개인주의에 토대를 둔 서양과 다른 복지철학을 갖고 있음을 추측케 해준다. 그리하여 그것은 개인주의가 많은 문제점으로 노정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게 해줄 것이다. 유교는 물질복지를 중시하지만,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정신복지를 지향한다. 복지를 행복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유교는 진정한 행복이 물질이 아니라 정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정신'은 사랑, 의로움, 예절 등 도덕가치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그리하여 유교의 복지정신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이상으로 꿈꾸었다. 그것이 실현하고자 했던 가정적 사회의 이상이 이를 잘 말해준다.

전북 진안 남학계(南學系) 금치인(金致寅)의 삶과 유불선(儒佛仙) 상합론(相合論) 일고(一攷) (A Study on the Kim Chi-in's Life and Confucianism-Buddhism-Taoism-Unity of Namhak line on Jinan in Junbuk)

  • 박순철;이형성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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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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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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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조선은 19세기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인해 큰 충격과 시련을 겪는다. 당시 사상계는 유불선(儒佛仙) 삼교가 서로 융화되지 못하였다. 몇몇 선각자는 사상과 시대를 반추하고서 유불선 삼교를 합일(合一)시켜 민생의 삶과 심정을 어루만져주면서 궁극적으로 국가의 태평성대를 도모하였다. 그들의 유불선 합일은 심신수련과 체험에 입각한 것이 많았다. 연담(淵潭) 이운규(李雲圭)는 유불선 합일사상으로 새시대를 갈망하였다. 그의 사상은 두 계열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광화(光華) 김치인(金致寅)으로 계승되는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정역(正易)"을 저술한 일부(一夫) 김항(金恒)의 계열이다. 본 논문은 김치인의 삶과 유불선 합일사상을 다루었다. 김치인은 이운규의 아들 이용래에게 나아가 수학한 이후 여러 영산(靈山)들을 찾아 심신을 수련하면서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자신의 교학(敎學)를 세웠다. 그는 이론적 교학을 세우는 데 도(道)를 중시한다. 도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그 도는 인간의 사유양상으로 인하여 '유교'와 '불가 선가'로 구분되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이다'는 것이다. 그 '하나'임을 설명할 때 성리학적 개념 즉 '음'과 '양', 그리고 '체'와 '용'을 원용하였다. 즉 '도'의 양면으로 '음'과 '양' 그리고 '체'와 '용'이 있는 것처럼 김치인은 유불선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음'이고 '체'인 '불가 선가'의 신령설(神靈說)을 중심으로 '양'이고 '용'인 유교의 윤리설을 합설하여 하나의 구심을 찾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심신을 수련하는 데 노래를 읊조리고 춤을 추는 영가무(詠歌舞)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유교의 윤리나 불가 선가의 수련은 궁극적으로 구심이 없는 당시 민초나 처사들에게 도의 실현을 촉구하면서 참다운 선을 지향하도록 것이었다. 김치인의 유불선 합일 사상은 전통적 고유사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고찰은 김치인과 그 후학들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줄 것이다.

효(孝) 윤리를 통해 본 유가(儒家)의 연속적 사유 (The Concept of Continuity in Confucianism through filial piety(孝) Ethics)

  • 이천승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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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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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9-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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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일상에서 효 윤리의 강조와 그 연장선상에서 조상숭배의식이 강했던 유가에서 부모에 대한 효의 의미는 더욱 각별했다. 이 논문에서는 유가에서 강조해오던 효의 의미를 단절 없는 이어짐의 연속적 사유의 작동기제라는 측면에서, 특히 그 기반으로 농경문화와 긴밀히 연관되면서 더욱 진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쉽게 옮길 수 없는 정착적 생활은 상대적으로 친밀감을 형성했고 부모에 대한 효는 그러한 정감의 현실적 표출이었다. 그러나 유가에서의 효는 부모에 대한 물질적 정신적 봉양을 넘어 제사를 통해 앞선 조상으로, 다시 자손을 통해 무한히 후대로 이어진다는 관점에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기점에 효를 설정한 유가의 인식에서 볼 때, 현존하는 나의 존재는 더 이상 단절된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혈연적 유대감에 기초한 효가 가족주의에 차원에 그치지 않고 타자에 대한 배려의 정신으로 확장가능하다는 점에서 유가의 또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농경을 통한 오랜 경험과 지혜는 순환하면서 연계된다는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낳았다. 이는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가 동심원 모양의 파장으로 외연을 넓혀가듯이 부모에 대한 친밀한 정감을 보편적 인간애로 확충하는 관계망을 형성하였다. 효를 통해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통시적 사유와 주변의 모든 관계를 연계시키려는 맞물림의 정점에서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처럼 유가에서 효란 삶과 죽음을 관통하고 나와 타자를 연계시키는 도덕 주체의 정립에서 중요한 매개고리였다. 그 속에는 시공간을 관통하여 바람직한 인간다움의 전형을 모색하는 유가의 연속적 사유가 내재되어 있다. 아울러 그러한 연속의 의미에는 나와 타자의 바람직한 관계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소통[天人合一]을 지향하는 유가철학의 주요 개념을 함축한다.

정신보론(鄭臣保論) - 남송 성리학의 고려 전래와 관련하여 - (Theory of Jeong, Sin-bo(鄭臣保論) - With regard to the Introduction of Neo-Confucianism to Korean Dynasty from Southern Song Dynasty)

  • 최영성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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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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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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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고는 한국 성리학의 전래와 기원에 관한 것이다. 고려 고종 24년(1237)에 남송(南宋) 출신의 학자 정신보(鄭臣保)가 오늘의 서산 간월도(看月島)에 정착하여 고려 학인들에게 이정(二程)의 성리학을 전파하였다는 자료를 검증하고 확인하였다. 이에 따르면 안향(安珦)에 의해 성리학이 처음으로 고려에 전해졌다고 알려진 1290년보다 53년 앞선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학계에서 공인을 받으면 성리학사는 고쳐 써야 할 것으로 본다. 이 글에서는 먼저 고려 유학사의 변화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이어 정신보의 생애에 대해 집중 조명하였다. 정신보가 남송의 명문 포강정씨(浦江鄭氏) 가문의 후예라는 점과 포강정씨의 후손답게 춘추사상(春秋思想)과 의리정신에 투철하였음을 부각시켰다. 이밖에 정신보 학통의 전승 과정과 후세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해서도 추론하였다.

동무(東武)의 인심(人心)·도심론(道心論) (A Study on Iinsim(人心;ren-hsin)-Tosim(道心;dao-hsin) Thought of Lee Je-ma)

  • 강태곤;박성식
    • 사상체질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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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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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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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1. Objectives Theory of Iinsim Tosim(the Human - Mind and the Moral - Mind) that originated from "Sang-Seo(尙書)" "Dae-Woo-Mo(大禹謨)" is a relative importance point of dispute at the existing confucianism and chosun's neo confucianism. Our consideration point is that a close examination of relation between Iinsim-Tosim theory of existing confucianism's and Lee Je-ma's thought of Iinsim Tosim and his creative exposition that is related to view of human being contained theory of sasang(四象), knowledge & conduction(Jihang, 知行). 2. Methods of Research We analyze "Gyukchigo(格致藁)" that is contained confucianism's contents and Lee Je-ma's view point of human being, and consult " Dongyi Suse Bowon chobongeun(東醫壽世保元草本卷)", "Dongyi Suse Bowon(東醫壽世保元)", reference about confucianism and some other thesis. 3. Results (1) Lee Je-ma's thought of Iinsim Tosim is closely connected each other. There is close correlation between Iinsim and Tosim such as both ends. And Iinsim Tosim is not virtue and vice relation but all good concept, though each have fragility, Iinsim have weakness of laziness and Tosim have that of desire. (2) Lee Je-ma insist on having lisim(理心)-kyungsim(敬心) for overcoming each fragility that weakness of laziness and desire. And he present learning(學) and speculation(思) for acquirement of lisim(理心) kyungsim(敬心). (3) Lee Je-ma's thought of Iinsim Tosim's containing meaning is not one side but both side for nature(性) & emotion(情). therefore Iinsim Tosim is closely connected Lee Je-ma's view of human being and theory of knowledge & conduction(Ji-Hang, 知行論). That is very different from existing confucianism & MyungSunlock(Book of Illuminating Goodnes)'s thought. (4) Iinsim is connected with knowledge(知), Tosim is connected with conduction(行) (5) Lee Je-ma's thought of Affairs - Mind - Body - Objects(事心身物) is closely connected with Iinsim-Tosim. 4. Conclusions There are no parts that directly criticized by LEE JE-MA, comparing with he's thought and the existing confucianism's theory of Iinsim Tosim, a specific person's theory. but LEE JE-MA approached the theory of Iinsim Tosim with thought that is not an extension of existing confucianism's thought, but original with himself, therefore LEE JE-MA's thought of Iinsim Tosim is closely connected with the most important conceptions (theory of nature & emotion, theory of knowledge & conduction) at the Sasang Constitutional Medicine. and Iinsim Tosim is an important clue for understanding the thought of LEE J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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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紹修書院) 건립의 문화적 토대 연구 -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선비정신을 중심으로 - (A Study of the foundations of culture established the Sosu Seowon)

  • 이정화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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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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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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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회헌(晦軒) 안향(安珦)은 우리나라 선비들이 성현(聖賢)의 학문을 잘 실천하여 수기(修己)의 공을 이룰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선지자(先知者)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은 선비의 학문을 좋아하여 오래도록 배움과 교육에 힘썼는데, 특히 백운동서원을 건립하여 선비들의 마음을 학문으로 진작(振作)시켰다는 점에서 학자의 소임에 충실하였다. 또한 서원 교육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조정에 상소를 올림으로써 백운동서원의 입지를 최초의 사액(賜額)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재정립한 퇴계(退溪) 이황(李滉) 역시 학자의 소임에 충실하였다. 회헌은 생전에 왕명에 의해 초상화를 갖게 되는데, 가문에서 소장해오다가 백운동서원이 건립되면서 이곳에 봉안하게 된다. 후학들이 영정에 찬문(贊文)과 시를 헌정(獻呈)하기 시작하면서 회헌의 학문정신을 근간으로 한 소수서원의 선비문화가 구축된다. 회헌의 시대는 장기간의 무인(武人) 집권과 몽고군의 침입 등으로 인하여 국운이 쇠망하고 있었다. 태평성세를 간절히 염원하였던 회헌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힘겨운 삶에 주목하게 된다. 궁핍한 백성들이 오가는 사찰이 황금과 보석 등으로 치장한 것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형상화한 것이 회헌시에 나타난 사실주의적 기법이다. 회헌은 백성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이것이 곧 주자학을 국내에 수입한 까닭이다.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염려한 회헌의 충심(忠心)이야말로 실천하는 선비상(像)의 발로였다. 회헌은 우리나라 지성사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의 임무를 띠고 합포에서 공무를 수행할 때 조정에서 지공거(知貢擧)를 맡으라는 명이 내려진다. 회헌의 염원은 태평성세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빼어난 자질과 학문을 갖춘 선비들을 기르는 것도 태평성세를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보면 회헌에게 있어 '교학(敎學)이란 인재를 기르는 힘의 원천이며 백성들을 구제하여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원동력이다.

정여립(鄭汝立)의 생애와 사상 - 반주자학적 성향을 중심으로 - (Life and Ideology of Jeong, Yeo Rip - Focused on Antagonistic Propensity to Zhu-xi's Ideology)

  • 최영성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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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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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7-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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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2009년은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난지 칠주갑(七周甲: 420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정여립에 대한 논의는 어지러웠다. 시각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평가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문제는 정여립 사상의 진보성이라는 미명 아래 각종 수식어를 동원하여 과대 포장한 것이다. 이것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해야 정여립과 정여립 사상의 본래 모습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저간에 나온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평가를 의식하여 철저하게 문헌 중심의 고증적 방법에 입각하여 고찰하였다. 지금까지 학계 일부에서는 정여립이라든지 기축옥사와 관련하여 다른 것은 다 부인하고 조작이라 하면서도 정여립이 평소에 늘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정여립을 '미완의 혁명가' 또는 '혁명적 사고를 가진 인물'로 과대 포장하였다. 그러나 '혁명적' 운운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원시유학의 이념을 천명한 것이라든지, 유학의 이념을 새롭게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여립은 관학(官學)인 주자학의 체계를 부정하고 원시유학의 이념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의 대동사상(大同思想)도 원시유학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정여립의 반주자학적 학문 성향 내지 정치사상은 성리학적 명분주의를 초월하여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이 조선사회에서 쉽게 수용될 수 없었으므로 불온한 인물로 비쳐졌고, 마침내 사지(死地)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암(眞庵) 이병헌(李炳憲)의 「경설(經說)」에 나타난 종교적 성향 (A Study on Religious Tendency shown in 「Gyeongseol」 by Jinam Lee Byeong-hun)

  • 이상하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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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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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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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병헌은 27세 때부터 면우 곽종석을 스승으로 섬겨 한주학(寒洲學)과 접한다. 한주학파는 당시로서는 개방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병헌의 사상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병헌은 중국 강유위(康有爲)의 금문경학(今文經學)을 받아들이고 공자교(孔子敎) 운동을 전개하면서 성리학을 오히려 배척하였다. 서구문물을 접하고 강유위의 사상을 받아들인 뒤로 이병헌의 저술에서 한주학은 찾아볼 수 없다. 이병헌이 금문경학을 연구하게 된 것은 천(天), 상제(上帝) 대신 리(理)를 내세움으로써 유교를 철학으로 만든 성리학(性理學)을 떠나야 유교에 종교성을 다시 살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공자를 교조로 추숭하고, 지금까지 성리학에서 중시하던 리(理), 경(敬)과 같은 개념을 버리고 "중용"의 성(誠)과 신(神)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이 유교를 종교화하여 기도, 염송(念誦)과 같은 종교생활을 실천하였다. 그가 "중용"의 대효(大孝)를 하늘의 효자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유교를 종교로 만들기 위해 공자를 유일한 교조로 삼고 상제를 신으로 받들었다. 그가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文) 무(武) 주공(周公) 등 전통 유가의 성인들을 젖혀두고 공자만을 교조로 추숭한 것은 불교, 기독교 등 의 종교에 교주가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다. 그가 말하는 상제(上帝)는 기독교의 하느님과 통하는 것이었고, 나아가서 그는 유교 사상과 배치되는 불교의 윤회를 긍정하기도 하였다. 이병헌의 "경설(經說)"을 읽어보면, 유학이 망해가는 시대에 유학이 생존할 길을 찾기 위해 유학의 종교화를 선택한 것보다 유학이 종교라는 신념이 그의 내면에 더 먼저 자리했던 것 같다.

원굉(袁宏)과 갈홍(葛洪)의 유도(儒道)관계론 연구 (A study on the perspective of relationship between Confucianism and Taoism of Yuan-hong & Ge-hong)

  • 李溱鎔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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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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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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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중국철학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학파는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이다. 두 학파는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현실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상이한 이론체계를 세운다. 다만 중국철학의 발전을 살펴보면 이러한 상이한 이론을 하나의 체계 속에 엮으려는 다양한 시도가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위진(魏晋)시기 현학(玄學)에서는 자연(自然)과 각수(名敎)의 관계를 토론하며 유도(儒道) 두 학파의 관계 설정에 골몰한다. 동진(東晋)시기의 지식인들은 바로 전대(前代)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서, 직접적 방식으로 유도(儒道) 두 학파의 관계 설정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펼친다. 본 논문은 동진(東晋)시기 유도(儒道)관계론의 대표적 학자로 원굉(袁宏)과 갈홍(葛洪)의 이론을 살펴본다. 원굉(袁宏)은 명교(名敎)의 효용성과 가치를 충분히 긍정하면서, 다만 명교(名敎)의 근본과 근거 찾기에 골몰하여 전대(前代) 자연(自然)과 명교(名敎)의 관계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본유용(道本儒用)'의 관점을 제시한다. 갈홍(葛洪)은 신선도교(神仙道敎)의 입장에서 유도(儒道) 두 학파의 관계 및 두 학파 이론의 직접적 비교를 통해 '도본유말(道本儒末)'의 이론을 정립한다. 이들의 이론은 근본과 작용, 근본과 말단의 관계 설정으로 유가와 도가 두 학파의 관계를 설정하는 동시에, 자연(自然)과 명교(名敎)의 관계 문제를 보다 심층적 방식으로 이론적 접근을 꾀함으로써, 향후 중국철학에서 유가와 도가의 상호 보완이라는 문제의식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