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연원

검색결과 230건 처리시간 0.023초

영희전 감실 및 이안소의 공간 구성과 오봉산병풍의 특징 (Interior Settings of a Chamber and a Temporary Place of Enshrinement at Yeonghuijeon and Features of the Five Peak Screens for the Hall)

  • 손명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6권2호
    • /
    • pp.100-121
    • /
    • 2023
  • 본 논문은 조선 후기 설립된 영희전 감실 및 이안소의 공간 구성과 이곳에 사용된 오봉산병풍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18세기 중엽 태조진전이 영희전의 예를 따라 오봉산병풍을 배설한 내용과 18세기 이전 태조진전의 감실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영희전 감실 구성의 연원도 살펴보았다. 영희전 감실은 태조진전 및 선원전과 달리, 당가 없이 온돌바닥 위로 난간이 달린 평상 형태를 한 대형의 용상을 놓았다. 이 용상 위로 4첩 오봉산병풍을 가운데 2첩은 뒤로 펴고 좌우 각 1첩은 나누어 펴 '⊓' 형태로 배설하였다. 난간을 단 평상 위로 첩병풍을 펼치는 배설 방식은 영희전 감실 조성 당시 태조진전이 아닌, 빈전 영침의 구성을 참조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한편, 어진의 이안 시에는 용상보다 규모와 장식을 간략하게 한 난간평상을 사용했다. 이안소에는 감실과 같이 4첩 오봉산병풍을 '⊓' 형태로 설치했으나 평상 위에 올리지 않고 뒤편에서 난간평상을 감싼 형태로 펼친 후 어진을 봉안한 흑장궤를 그 위에 올렸다. 이 같은 배설 방식이 반영된 감실과 이안 소용 오봉산병풍은 모두 대형의 4첩 왜장 병풍으로 가운데 두 폭이 넓고 좌우로 접어 펴는 1·4폭이 좁은 형태였다. 장황은 별도의 하회장 없이 병풍 가장자리를 따라 회장을 둘렀다. 감실과 이안 소용 오봉산병풍은 장황과 배접 등의 재료에 일부 차이를 두어 배설 장소의 위상을 반영하였다. 문헌 기록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근현대기를 거치며 본래의 이력과 기능을 잃은 채 전하는 병풍 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일월오봉도>와 <인정전오봉산병풍>이 영희전 병풍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두 병풍은 배설 방식을 고려해 세 개의 봉우리와 해·달 등을 가운데 2·3폭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나머지 두 봉우리와 적송을 1·4폭에 그렸다. 한편, <인정전 오봉산병풍>은 병풍틀의 배접지로 1840년 답안 일부를 포함한 감시낙폭지를 사용해, 1858년 영희전 증건 시 향후 순조어진의 이안을 대비해 만든 이안청 병풍으로 추정되었다.

대순사상의 인문정신과 인류평안의 이념

  • 잔스촹
    • 대순사상논총
    • /
    • 제21권
    • /
    • pp.199-254
    • /
    • 2013
  • 대순사상은 인간의 행위와 정신적 틀, 즉 몸과 마음을 닦고 세상을 다스리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도리를 설파하고 있다. 우주 공간의 질서와 깊은 연관을 맺는 이러한 도리는 인간 자신의 인지(認知)와 심신 수양의 내용을 포함하며, 사람이 사회와 우주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 나갈 것인지에 관한 문제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대순사상을 인문이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서양의 인문주의와 비교해 볼 때, 중국 전통의 인문정신은 인류 개체의 창조력과 그 성과를 인정하고, 인격적 수양과 개선을 주장하며, 사회의 조화를 강조하는 한편, 인류가 반드시 천지인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개체와 전체의 생존을 파악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문정신은 『전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하나가 모악산과 단주(丹朱)에 대한 서술인데, 모악산은 산 즉 '간'(艮)괘이며 단주는 적색에 상응하니 곧 '리'(離)괘가 된다. 이 두 괘가 서로 조합하면 '비(比)'괘가 되며, 『주역』의 비괘와 연관하여 서로 간의 모순을 없애고, '바둑'을 두는 기법을 거울삼아 심성을 다스리며, 인격을 완성하고, 인신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며, 사회를 안정시킬 것을 말한다. 대순 신앙의 최종 목표는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것인데,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격수양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인격수양의 목표는 바른 도인이 되기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수도 공부를 해야만 한다. 수도는 춘추시기 노자 이래로 유구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것이지만, 대순진리회는 한국사회 역사의 경향과 현실의 필요에 부응하여 수도 이론을 새롭게 수립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대순진리회는 수도자가 '성(誠), 경(敬), 신(信)'에 힘쓰는 품격 함양을 매우 중시한다. 또 도인들이 가정의 화목에 힘써야 하며, 솔선수범하는 도인으로서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대순진리회는 '인도'(人道)를 함양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은 전통적인 유가에서 말하는 '수신, 제가' (修身, 齊家)의 정신과 그 의미가 맞닿아 있다. 또한 중국 도교의 '선도(仙道)를 이루고자 하면 먼저 인도(人道)를 행하라'는 사상적 취지와도 일치한다. 대순진리회에서 수도의 최종 목표는 도통이다. 도통은 수도자가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었을 때 가지는 특수한 능력과 정신의 경지이다. '도통'에 대한 기록은 『장자·제물론』, 『문자』의 「부언편>(符言篇)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대순진리회가 말하는 도통은 중국의 도가 전통에 보이는 도통과도 연관되지만 강한 인륜수양(人倫修養)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것은 대순진리회가 가지는 중요한 인문적 함의라 하겠다. 대순진리회는 수도 공부로써 광제창생·보국안민·지상천국건설의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조화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토대는 대순진리회의 종지 첫 번째인 음양합덕이다. 음양합덕은 대순진리의 인문 취지의 이론적 기초를 형성하는 사상이다. 음양합덕의 철학적 사고는 종지 두 번째인 신인조화(神人調化)의 이상으로 이어진다. 신인조화는 『상서·순전』(尙書·舜典)의 신인이화(神人以和)에서 그 사상적 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다만 신인이화가 율려 조화의 '결과'를 표현한 것이라면, 신인조화에서 중시하는 것은 '과정'이며 인간과 신의 상호작용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신인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며, 그 배후에는 인본(人本)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종지 세 번째인 '해원상생'의 내용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신인조화가 인간과 신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면, 해원상생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긴 역사의 과정 속에서 맺힌 원을 풀어 우주의 기운을 잘 통할 수 있게 하고 인간 사회의 정상적인 교류를 이루도록 한다. 이러한 내용은 사회적인 인문적 관심과 배려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의 종지 네 번째인 도통진경은 수도의 가장 높은 경지를 말하는데, 이러한 이념은 노장 일파의 도가 학자들이 말한 순박한 본성으로 회귀하자는 정신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는 한진(漢晉)시대 이래 중국 도교가 추구했던 '진경' 의 의미와도 합치된다. 그러나 시대와 환경이 다름으로 인해, 대순진리회의 '진경'은 사회생활의 의미까지 내포한다. 비록 대순진리회의 경전이 인본(人本)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대순진리회의 요의(要義) 중 하나인 인존사상은 대순진리회의 인문정신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존사상의 직접적인 기능은 평안(平安)으로서 삶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대순진리회는 우주대원의 진리를 '도'라 하였는데 이러한 '도'는 중국의 도가에서 말하는 '도'와 동일하며, 여기에는 '안(安)'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대순진리회의 신조 중 '안심', '안신'은 마음을 정(靜)하게 하고, 몸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심신의 공포와 두려움을 떨쳐내어 안전과 보호를 얻는다는 의미도 있으므로 결국 평안이 전제가 된다. 이렇듯 대순진리회에서는 '평안에 대한 희구'를 근본으로 하여 신앙인들이 열심히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대순진리회가 인류 평안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라는 점에서, 반드시 세인들의 환영을 받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염재(念齋) 송태회(宋太會) 서화의 연원과 예술세계 (Yeomjae Song Tae-hoe Origin and art world of calligraphy and painting)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 /
    • 제9권5호
    • /
    • pp.255-262
    • /
    • 2023
  • 고창 서화는 20세기 초에 들어서 사호 송수면(宋修勉, 1847-1916)의 제자이자 한때는 양자였던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 1872~1941)가 고창으로 이주하며 초석을 다졌고 본격적인 흐름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염재는 전남 화순 출신으로 조선 말기와 근대기의 학자이자 서화가로서 고향인 화순과 고창을 중심으로 한문과 서화 교육자로 근무하면서 창작활동을 하며 고창 서화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서예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16세에는 진사시에 합격(동몽진사)하여 최연소로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의 그는 구한말 부정부패의 만연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인해 크게 낙담하여 세상을 등지고 낙향하여 서화로 시름을 달래었다. 고창과 전주를 기반으로 전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민족정신과 역사를 배양시키기 위해 고창고등보통학교(현, 고창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염재는 사호 송수면(宋修勉, 1847~1916) 화풍의 절대적 영향을 받아 강건한 필치의 산수화를 그렸고, 화조화와 사군자 등 남종문인화의 다양한 화목을 다루었다. 특히 한국적 풍토미를 바탕으로 한 근대지향적 실경산수의 구현과 더불어 신문물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림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초창기 근·현대를 아우르는 대표적 서화가로서, 근·현대 고창 서화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는 10대 후반에 염재로부터 묵화의 기본을 사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다양한 예술적·사회적 활동에 비해 지역작가로서의 한계와 평가에 그치고 있는 점은 아쉽다.

해월의 동학 도통전수 담론 연구 - 문헌 고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Discourse Regarding the Lineage Transmission to Haewol in the Eastern Learning: Focused on Document Verification)

  • 박상규
    • 대순사상논총
    • /
    • 제48집
    • /
    • pp.41-155
    • /
    • 2024
  •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傳授)한 때로 알려진 1863년 7~8월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되는 문헌은 『수운문집(水雲文集)』,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이하 『도원기서』)이다. 이 세 문헌의 수운 관련 기록은 구조, 내용, 기술 방식으로 본다면 같은 문헌에서 기원했음이 분명하다. 세 문헌이 지닌 차이는 어느 문헌이 도통전수의 실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을 초래했으며 신앙과 조직 체계 등 초기 동학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환기하고 있다. 따라서 세 문헌을 고증하여 각 문헌의 선후 관계와 성립연대, 정확성, 기술 방향, 문헌에 반영된 초기 동학 신앙체계의 특징을 밝혀낼 수 있다면 1860~1880년의 동학 전개 과정을 보다 명확히 기술할 수 있으며 여러 도통전수 담론이 지닌 의미를 보다 깊이 분석할 수 있다. 세 문헌을 비교하고 관련 문헌과 대조하여 고증한 결과, 해월의 도통전수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수운문집(水雲文集)』 계통의 문헌이 이를 명확히 기록한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과 『도원기서』의 저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과 『도원기서』가 편찬되는 시기까지 해월의 도통전수는 동학 교단 내외에서 명확하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해월의 연원이 동학의 최대 조직이 된 18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해월을 중심으로 동학의 교리가 재해석되고 조직이 재건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는 방증 된다. 따라서 해월의 도통전수를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담론으로 보는 관점에서 수운 이후의 동학은 조망될 필요가 있다. 이는 '수운의 동학'과는 단층을 이루는 '해월의 동학', 그리고 해월과 한국의 근대 신종교 운동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인원용사(人元用事)의 연원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Origin of Human Governance Periods in the Hidden Stems)

  • 최원호;김나현;김기승
    • 산업진흥연구
    • /
    • 제9권1호
    • /
    • pp.203-212
    • /
    • 2024
  • 이 연구는 명리학에서 지장간(支藏干) 이론의 인원용사(人元用事)에 대한 타당성을 고찰해 보는 연구이다. 첫째는 지장간의 날짜를 배속해서 사령(司令)을 적용하는 이론이 있다. 둘째로는 월지 지장간에서 투출(透出)한 간(干)으로 취격(取格)하는 이론이 있다. 이 두 이론이 서로 상충 되어 혼란스러워하는 문제가 있기에 이 연구는 고전에서 나타난 지장간 이론을 살펴 인원용사의 변천 과정과 적용에 대한 타당성을 고찰했다. 연구 결과 첫째, 지장간의 변천 과정은 배속된 날짜 수가 역법에 맞지 않고, 간(干)의 배속도 명리 고서마다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고전에는 오행을 72일 씩 분배한다 했으나, 오행 배속은 목(木)은 65일, 화(火)는 55일, 토(土)는 100일, 금(金)은 65일, 수(水)는 65일이다. 셋째, 인(寅), 신(申), 사(巳), 해(亥)월은 여기를 무토(戊土) 7일로 정했지만, 인(寅)월의 전 달은 축(丑)월이므로 여기는 기토(己土)가 되고, 신(申)월의 전 달은 미(未)월이므로 여기는 기토(己土)가 되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子), 오(午), 묘(卯), 유(酉)월은 오(午)월만 기토(己土)가 있지만, 그 근거가 합당하지 않다. 이러한 결과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오행들의 월별 날짜 배속의 정확성 때문에, 사령을 적용하는 이론보다는 투간(透干)으로 취격(取格)하는 이론이 논리적으로 합당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국민학교'로 들어온 '전(全) 국민의 과학화운동' (The "Pan-National Scientification Movement" in Elementary Schools)

  • 강유진
    • 한국초등과학교육학회지:초등과학교육
    • /
    • 제43권2호
    • /
    • pp.301-321
    • /
    • 2024
  • 이 연구의 목적은 과학교사에게 오랫동안 요청된 이원화된 업무, 즉 '과학교과수업'과 '교과 외 과학 관련 행사'의 역사적 연원을 밝히는 것이다. 1970년대에는 기초과학 중심의 제3차 교육과정과 기술교육 중심의 과학화운동 사이의 긴장 속에서 국민학교 과학교육이 이루어졌다. 문교부는 과학화운동이 도입되기 전부터 오랫동안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아서 탐구 중심의 기초과학교육 정책을 추진하였고, 특히 1973년 제3차 교육과정을 통해서 이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중 1973년에 '전 국민의 과학화운동'이 정권 차원에서 갑자기 추진되었다. 문교부로서는 갑작스러운 유신정권의 요구를 이미 진행 중이던 제3차 교육과정 속으로 편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두 가지 정책에서 비롯된 두 가지 요구가 공존하였기 때문에 이후 초등학교 과학교육 활동은 과학교과수업과 교과 외 과학 관련 행사로 이원화되어 실행되었다. 과학화운동은 교육과정 자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학교 현장의 인사조직, 활동 공간, 평가 제도에 변화를 주었다. 국민학교에 과학화운동이라는 거대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학교 내부의 인사조직을 변화시켜서 '과학주임교사제'가 새롭게 만들어졌고, '과학코너'라는 새로운 공간이 확보되었으며, '과학장제'라는 새로운 제도가 보급된 것이다. 이처럼 과학화운동 자체는 초등교육에 갑작스럽게 도입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제3차 교육과정이 목표로 삼았던 탐구 중심 과학교육이 실천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던 듯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과학화운동의 여파가 일선 교육청과 학교의 '교과 외' 자율적 활동으로 흡수된 것에 기인했다. 과학화운동 자체는 특정 시기의 정부 주도 정책이었지만, 다양한 과학교육종사자들이 오래 준비해 온 제3차 교육과정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긴급한 정부의 요청에 응답하는 방식이 교과 수업과 교과외 과학 활동으로 이원화된 것이었다. 이처럼 1970년대 과학교육현장에서 과학교육종사자들이 능동적으로 대응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과학교육계가 현재의 급변하는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순천 초연정(超然亭) 원림의 문화경관 변용 양상 (A Study on the Cultural Landscape Metamorphosis of ChoYeon Pavilion's Garden in SoonCheon City)

  • 강병선;이승연;신상섭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5권3호
    • /
    • pp.13-21
    • /
    • 2017
  • 순천시 송광면 삼청리 왕대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초연정이 왕의 피난처, 제각, 별업, 강학공간으로 변모되는 양상에 착안하여, 시기별로 변모되는 장소성과 문화경관의 변용양상을 탐색하고 그 의미를 추적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재 송병선이 명명한 '초연'이란 정자명칭은 노자의 도덕경에 연원하는데, 순천 초연정을 비롯하여 포천 초연대, 가평 초연대, 창덕궁 후원 초연대, 유성 옥류각의 초연물외 등 정(亭), 대(臺), 각(閣) 등 공간속에 다양하게 투영되고 있어 도가적 풍류가 유가적 공간에 자연스럽게 접목되는 유불도 습합양상을 도출할 수 있다. 둘째, 초연정은 모후산 풍수경관과 수목석이 어우러진 계류풍광과 암경, 월출경, 도가적 이상향을 반영한 동천복지, 성리학적 이상향을 반영한 구곡처 등 승경향유의 요처에 절묘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왕대마을(왕의 주둔지), 유경(留京), 왕대사적 바위글씨, 그리고 오장대(장군기를 꽂아 놓은 자리), 모후산 등 고려말 공민왕의 피난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장소성을 갖는다. 셋째, 초연정의 아름다운 계류 암벽 바위글씨(趙鎭忠別業, 宋秉璿)를 통해 유가적 가치를 반영한 거점(별업)뿐만 아니라 도가적 동천복지로서의 영역성(1km 이내에 월청, 풍청, 수청 각자와 삼청동천), 그리고 외원권역을 확장하여 수변계류에 9곡 <세록교(洗鹿橋) 봉일대(捧日臺) 자미구(紫薇鳩) 운매대(雲梅臺) 와룡총(臥龍叢) 광석대(廣石臺) 은선굴(隱仙窟) 벽옥담(碧玉潭) 와석포(臥石布)>을 설정하고 산수유상과 강학, 경관미학적감수성 제고 등 수심양성을 위한 성리학적 낙토를 원림속에 담아낸 복합 문화경관 향유 양상을 보여준다. 넷째, 초연정은 1778년 대광사 승려의 수도처(水石亭)로서 선원 기능을 하던 장소인데, 1836년 조진충이 선조의 묘 앞에 제각을 지어 별업을 초창했고, 1864년 조재호는 기와로 중수하여 선조를 기리는 별업기능과 도가적 은일처로 활용하는 확장성을 추적할 수 있다. 이후 1890년 조준섭은 스승 연재 송병선에게 '초연'이라는 정자 명칭을 받아 강학처로 활용하는 등 (1)불교 수도처${\rightarrow}$(2)유교 별업처${\rightarrow}$(3)별업+도교적 풍류처${\rightarrow}$(4)별업+도교적 풍류처+강학처(성리학적 낙토)로 용도가 확장 변용되는 양상을 추적할 수 있다.

「사쿠테이키(作庭記)」의 작정원리 연구 - 풍수론(風水論)을 중심으로 - (A Study on Garden Design Principles in "Sakuteiki(作庭記)" - Focused on the "Fungsu Theory"(風水論) -)

  • 김승윤
    • 한국조경학회지
    • /
    • 제41권6호
    • /
    • pp.1-19
    • /
    • 2013
  • 본 연구는 11세기말경 일본 헤이안 시대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조원고서 "사쿠테이키(作庭記)"를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고찰한 것이다. "사쿠테이키"는 동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조원이론서라 할 수 있는데, 대륙(한국과 중국)에서 연원한 일본 고대 정원문화의 지혜가 축적되어 있다. 정원문화와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통 작정원리 중본 연구에서는 건강하고 복된 거처를 찾는 문화에서 형성된 풍수론(風水論)에 기반을 둔 것들을 추출하여 해석하였다. 풍수론은 중국 한나라 때 음양오행론과 함께 형성되어 정원을 포함한 인간의 거처 조성에 폭넓게 활용되었다. 이 전통은 한반도를 통하여 일본에 전래되고, 또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통해 일본 문화에 통합되었다. "사쿠테이키"에 나타난 작정원리들 중 동아시아의 풍수론에 근거한 것들은 "사신상응의 땅", "사방에 나무심기", "기의 흐름", "곡선과 비대칭", "산은 제왕 물은 신하"라는 주제어로 요약될 수 있다. "사신상응(四神相應)의 땅"과 "사방에 나무심기"라는 작정원리는 풍수의 "명당론(明堂論)"에 해당된다. "사쿠테이키"에서 말하는 사신상응의 땅은 동쪽에 유수(流水), 서쪽에 대도(大道), 남쪽에 연못(池), 북쪽에 언덕(岡)으로 둘러싸인 지세를 말하며, 중국의 양택풍수서인 "택경(宅經)"에 기원한다. 이 원리에 따라 도시가 계획되었고, 그 축소 모델로 귀족의 저택이 만들어졌다. 인공으로 조성된 사신(四神)인 계류와 연못이 있는 정원(南庭)은 명당자리에 해당된다. "사쿠테이키"에서는 또한 이와 같은 사신(유수, 대도, 연못, 언덕)이 없을 경우 사방에 나무를 심어 대신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식재법은 "택경"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6세기 중국의 농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다. 또한 식재하는 나무의 숫자를 추적한 결과, 고대 역(易)의 원리인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숫자와 관계가 있고, 한국의 "산림경제"에 나오는 용도서(龍圖墅: 하도(河圖)의 원리에 맞춘 별장)의 식재원리와 연결된다. 다음 "기의 흐름"과 "곡선과 비대칭"의 원리는 풍수의 "생기론(生氣論)"에 해당된다. "사쿠테이키"에서는 순류와 역류 방향을 통해 기의 올바른 흐름이 제시되고 있으며, "사쿠테이키"에서 제안하는 구불구불한 계류의 곡선, 다리와 돌의 비대칭적 구성, 그리고 연못의 들쭉날쭉한 가장자리선 등은 모두 기가 모이도록 하는 방법으로, 풍수의 생기론과 상통하는 원리이다. 마지막 원리인 "산은 제왕, 물은 신하"는 풍수의 "형국론(形局論)"에 해당된다. "사쿠테이키"는 정원을 만드는 의미를 산은 제왕, 물은 신하, 돌은 보좌신(輔佐臣)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왕이 보좌신의 도움을 받아 백성을 잘 다스리는 상황을 돌의 도움으로 산(흙)이 물을 조절하는 생태적 현상에 비유한 것이다. 이는 자연 지형을 사회체제나 인물, 동물, 사물 등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풍수의 형국론과 통한다. 이상과 같이 "사쿠테이키"에 나타난 주요 작정원리들은 동아시아 전통인 풍수론의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사쿠테이키"는 일본의 특정시대에 특정한 정원의 작정법을 기술한 책이지만, 거기에는 일본 고대의 정원문화, 나아가 동아시아 고대 정원문화의 지혜가 종합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허규 연출 '완판 창극'의 특징과 의의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Wanpan Changgeuk' Written by Heogyu)

  • 김기형
    • 공연문화연구
    • /
    • 제20호
    • /
    • pp.5-30
    • /
    • 2010
  • 허규는 80~90년대 창극 연출을 담당하며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는 전승 5가 뿐만 아니라 실전 판소리를 창극화 하였으며, 창작 창극 작품도 다수 무대에 선보였다. 특히 '완판 창극'이라는 이름으로 1982년 <흥보전>을 무대에 올린 후 1985년 <적벽가>를 공연함으로써 전승 5가의 창극화 작업을 완결지은 것은 그가 남긴 큰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허규는 주체적 민족문화의 정립과 한국 전통연희의 창조적 계승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실천적인 연극인이다. 그는 창극을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정립하고자 노력했다. 창극 작품은 그 연원에 따라, (1)전승 5가의 창극화 (2)실전 7가의 창극화 (3)창작 창극으로 세분해 볼 수 있다. 허규가 연출한 작품에는 이 3가지 유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전승 5가를 창극화한 작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허규가 시도한 '완판창극'은 한국의 전통유산 가운데 빼어난 예술적 성과를 거둔 요소들을 집대성하여 무대에 올림으로써, 창극을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정립해 보고자한 것이다. '완판창극'에 나타난 특징은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전통을 중시하는 연출 태도, (2) 전통연희 요소의 적극적 수용, (3) 격조와 윤리의식의 중시, (4) 해학의 강조와 보조인물의 적극적 활용이 그것이다. 허규가 시도한 '완판창극'은 창극이 성취할 수 있는 예술적 수준의 한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판소리 유산을 망라하고 나아가 전통연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창극을 한국의 대표적인 공연예술로 정립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허규는 '완판창극'에서 판소리의 진정성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 대목도 빠뜨리지 않고 장면화 하려고 했다. '완판창극'의 공연 시간이 4~5시간이나 소요되었다는 것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허규가 완판창극에서 거둔 성과는 이후 창극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 시도된 '완판장막창극'도 그 모태는 허규의 '완판창극'에 두고 있다. 창본을 종합해 내고 판소리의 좋은 점을 모두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렇지만 90년대 '완판장막창극'은 대형 무대화를 지향했으며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 그리고 버라이어티한 요소를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완판창극'과 대비된다. 허규의 완판창극이 끼친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판소리의 '열린 형식'을 창극의 공연 문법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허규는 극의 전개 과정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전통연희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극적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창극 극작술의 한 방식으로 인식되어, 이후 창극연출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요즘 창극은 어떻게 하면 청중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에, '감동받는 창극' 보다는 '재미있는 창극'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공연 시간도 최대 2시간을 넘지 않으려고 하며, 관현악 반주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는 허규가 '완판창극'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창극의 지향점은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석재 서병오(1862-1936)의 1889년작 난죽석도 연구 (A Study on the 1889 'Nanjukseok' (Orchid, Bamboo and Rock) Paintings of Seo Byeong-o)

  • 최경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1권4호
    • /
    • pp.4-23
    • /
    • 2018
  • 서병오(徐丙五, 1862-1936)는 서구적 '미술' 개념의 도입으로 일본화 내지 서양화로 기울던 일제강점기 시서화일치의 대구 문인화단이 형성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79년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의 만남을 계기로 서화계에 입문하였으나, 문인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되며, 학습기인 1879년부터 1897년까지는 관직 진출을 목표로 하였던 때문인지 중국 화보를 임모하거나 이하응의 영향 아래 사군자화를 여가에 그리는 정도였다. 발전기는 1898년부터 1920년까지로 그는 애국계몽운동 등 사회적 지도자로 활동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삶의 방향을 문인화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중국 여행에서 다시 만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운미란과 포화(蒲華, 1830-1911)의 묵죽법을 근간으로 새로운 화풍을 적극 모색함과 동시에 산수, 화훼, 기명절지 등의 화목도 다루었다. 완숙기인 1921년부터 1936년까지는 대구와 한양을 오가며 근대 한국 화단의 서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묵란과 묵죽에서 윤묵의 호방한 필법을 특징으로 하는 개성적 화풍을 완성하였다. 특히 학습기의 경우 관련 기록이나 현전작품이 드물어 서병오의 창작활동이나 화풍 등에 관한 것은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석죽도 11점은 학습기의 화풍 연원이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89년작 난죽석도 가운데 묵란도는, 이하응이 1882년 7월 청군에 의해 체포되기 이전에 그린 초기 군란도와 석란도에서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묵죽도는 한양에 널리 알려진 양주화파 정섭(鄭燮, 1693-1765)과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의 화법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의 석란도 형식을 응용하여 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석도의 경우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괴석화가 주당(周棠, 1806-1876)과 여항화가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죽석도는 학습기에 그려진 것으로 운현궁을 찾았던 허련과 정학교 같은 동시기 화가들이나, 한양에 작품이 유입되었던 정섭과 주당 등의 중국 작품을 실견하며 이들의 화풍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