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Zen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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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淸平寺) 선원(禪園)의 시대적(時代的) 형성(形成)과 변천상(變遷相) (The Periodical Formation and Phase of Change of Cheongpyeongsa Temple Zen Garden)

  • 윤영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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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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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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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청평사는 고려 초 창건되었지만 현재와 같은 공간의 틀은 고려 중기 진락공 이자현(1061-1125)이 1089년 입산해 선사상을 바탕으로 구축한 것이다. 이 연구는 이자현이 청평사의 기반을 구축한 문수원 이후 형성, 발달했던 선원 내 인공유적의 출현과 존속의 시대사적인 변천과정을 고문헌을 근거로 하여 개념적으로 구현해 보고자 하였다. 이자현의 문수원 때 조성된 경외 8암자 중 식암, 견성암, 양신암 등 세 암자만이 조선 후기까지 복원, 수리를 거쳐 건재하며 상징적 암자로 보존되어 왔다. 또 이자현 때 조성된 영지도 고려시대 연못의 원형적 의미를 지닌 소중한 조경유적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자현이 식재했다는 구송은 후계수를 이어가며 1800년대 중반까지 살아있었다. 조선 중기 보우대사(1509-1565)는 이자현이 구축한 문수원을 기반으로 청평사로 개칭하고 중창하면서 경내를 능인전(대웅전)만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짓고 확장하여 현재와 같은 경내 공간구조로 만들었다. 또 경외 영지의 개축, 궁원으로부터의 조경식물 이식 등 경관의 질을 한층 높여 청평사를 역대 가장 번성한 모습의 선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인 1800년대 중반 이후 청평사는 더 번성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선원의 건축물은 경내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멸되고 기타 시설물들은 방치된 채로 현대까지 남아 있었다.

무소오 소세키(夢窓疎石)의 작정기법 (A Study on the Architectural Method of Mus${\bar{o}}$ Soseki)

  • 최미영;홍광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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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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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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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무소오 소세키의 작품을 통해서 그의 작정기법을 밝히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무소오 소세키의 삶과 종교관을 통해서 무소오 소세키를 인간적으로, 종교적으로 이해하고자 했으며,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라고 생각하는 에이호지, 에린지, 사이호지, 텐류지 등 4사찰을 대상으로 무소오 소세키가 추구한 작정관과 작정기법을 찾아보았다. 연구결과, 무소오 소세키는 불교의 선사상을 기본으로, 본인이 터득한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공간구성으로 상징화하고, 석조와 지천이라는 두 가지 정원요소를 통해서 구체화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처의 세계를 형상화한 석조와 마음 심(心)모양의 지천 구성기법에서 작정자의 절대적인 종교미를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작정기법은 당시 중국을 모티브로 한 일본 정원에서 벗어나, 선 공부를 위한 전용공간, 즉 방장정원을 고안하였으며, 이는 대표적인 일본정원 형식이 되었다. 만약 무소오 소세키의 작정술이 일본정원에 도입되지 않았다면 일본정원은 지금과 같이 상징적 개념을 가진 사유정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선승 셋슈와 무소오 소세키를 비교연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 대해서는 다음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왕유의 자연미와 망천별업의 조경사적 의의 (The Meaning of Wangwei's Natural Beauty and His Garden, Wangchuan Villa)

  • 박희성;조정송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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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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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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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Beginning in the Wei-Chin and Liu Ch´ao era(AD. 220-589), an awareness of natural beauty emerged as the major interest of scholars which created such a social atmosphere that served as the foundation of prosperous Chinese art. During the T´ang period, the desire to achieve natural beauty began to dominate every field of art including gardening. This study covers the T´ang period when scholars began to be conscious of aesthetics. The main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ignificance of natural beauty as interpreted by Wangwei, an artist representative of the period, and of Wangchuan Villa in relation to aspects of garden theory. This study is mainly based on Wangwei´s anthology, landscape painting describing Wangchuan Villa, and historical records related to the Villa. The summary of conclusions of this study is as follows: 1) Wangwei´s concept of natural beauty is a combination of objective natural beauty and pastoral beauty, which stresses the essential beauty of nature. Moreover, he considered nature as a religious Utopia. 2)Wangchuan Villa, where Wangwei stayed until his death, was a place of seclusion representing his idea of natural beauty. There, he was able to realize the paradise of Buddhism full of zen aspirations. 3)From the perspective of garden theory, Wangchuan Villa can be classified as a suburb villa in terms of location, as a landscape garden in terms of elements, and as a villa based on a typical private land system in terms of forms. In addition, it may be considered as a garden that laid the foundation to realize a field of non-visible image and non-visible landscape, which is fundamental element of scholarly garden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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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 소세키(夢窓疎石)가 작정한 정원에 나타난 사상 (Ideological Background the Garden of Mus$\bar{o}$ Soseki)

  • 최미영;홍광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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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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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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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무소 소세키의 작품을 통해서 그의 사상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현존하고 있는 무소 소세키의 작품을 고찰하고 그 작품 이루고 있는 그의 생각이나 의도를 조경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라고 생각하는 죠고지, 에이호지, 즈이센지, 텐류지 사찰을 대상으로 무소 소세키가 작정한 정원속의 사상적 배경을 찾아보았다. 이 연구대상지들의 선정기준은 깨달음의 수행을 시작한 곳에서 그 생각이 작품으로 승화되기까지 대활약을 한 장소로서 큰 의의를 가진다. 우리가 무소 작품에 집중하고 생각해야 할 것은 그의 작품을 보면서 감동하고 느낀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무소 소세키는 불교의 선사상을 기본으로, 본인이 터득한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정원에 공간구성으로 상징화하고 일본의 정원 속에 선사상의 뿌리를 확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비적인 정원미를 이루었다. 그의 중심적인 사상이 농축되어 있는 저술서 "몽중문답(夢中問答)"을 통해 그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본 연구는 무소의 작품을 통해 작품 속에 심어진 사상적 배경을 알 수 있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소의 작품은 기본사상은 세 가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첫 번째 사상은 선사상으로 정원에는 좌선석과 동굴, 참도 등 구성요소로 나타나고 있으며, 두 번째 사상은 상구보제(上求普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자비심, 용문폭 석조에 석교(石橋)을 통해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도교사상이 나타나는데, 도교사상은 무소의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다.

역사적 문화환경의 창조 -고대정원문화를 중심으로- (Traditional Korean landscape garden with special attention)

  • 민경현
    • 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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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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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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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
  • Korean Landscape Garden may be described according to its stage of development. In the primitive agricultural era, the garden was preceded by vegetable yards and at this time rock arranging (Soo-Sok garden) was initiated together with the megalithis culture of dolmens, heavenly altars and tumuli. In the early Three Kingdom period palace gardens were built on a grand scale and toward the end of fourth century temple garden were introduced along with Buddhism. These gardens evolved to the flourishment of "HWAGE"(terraced gardens) rock arrangements of ZEN, early KOR-YO period. Especially since the middle of KOR-Yo period the "IM-CHUN"(forest and pond) garden became popular, while during Cho-Son period "HWAGE" in the back yard, pond and pool garden and "IM-CHUN" style country villa became fashionable. The Korea traditional Landscape garde may be characterized that first it is a nature Landscape style, which makes the maximum accomodation with the surrounding nature. Secondly, the Korean garden is built creatively by utilizing the elements of its climate and topography, Kogu-Ryo, Paik-Je great-Kaya and Sil-Ra had developed original a castle town plans and beautiful gardens rock arrangements which precede the equivalent style of China and set the prototype for Japan. The Landscape art of waterfalls and rock arrangements at An-Ap-Chi garden of 7th century has no equals in China and set the origin of pond style of Japanes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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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은일문화의 사대부원림의 관계 -선진시대에서 당조까지- (The Relation Between the Chinese Ceclusion Culture and the Gentleman's Gardens)

  • 임상섭;조정송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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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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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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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earch into the relation between the chinese seclusion culture and the gentleman's gardens by means of the historical and aesthetic approach. The periodic limits of this study is from pre-Qin to Tand. For gentleman's gardens in Tang dynasty at once got out of the noble's gardens which had imitated the imperial gardens until Tang, and became the origin of the gardens of the literati appearing in post-Tang dynasty. The major findings are as follows : First, in pre-Qin period, the origin of the seclusion culture is classified as the metaphysical seclusion of Taoism and the physical seclusion of Confucianism. Although Pu, Yuan, and Uou which could be said the first step of the chinese gardens were inquired, the clear relation between the seclusion and them is not found. Second, during Qin-Han dynasty, the role of the gardens, as the settings of the seclusion, are comparatively minor, too. But uan Kuang-Han's garden considerably escaped from that of pre-Qin in the aspect of function, and it has the characteristics of recreation. Third, during Wei-Chin and Liu dynasty, two types of the seclusions emerged. One is the small seclusion, and the other the Great Seclusion. Though, as formerly, the contemporary gardens did not escaped from the imperial gardens, Shi Chong's garden can be the setting of the Court Seclusion. But the seven Righteous in Bamboos' and Tao Yuan-Ming's settings of the seclusion were real natural environments rather than gardens. Forth, in Tang dynasty, in spite of relatively low status, Bai Ju-Yi's theory of the middle Seclusion enabled gentlemen to make seclusion in sinecures unlike the court Seclusion. The theoretical background of the Middle Seclusion was Zen Buddhism and the State Examinations System and Bai Ju-Yi's private social position also had an important effect on it. In Tang dynasty, there being nobiliary gentleman's gardens, Bai Ju-Yi's garden, Lushan Caotangyuan, was the setting of the Middle Seclusion. It can be called a real gentleman's garden, for it is simple and small unlike the imperial gardens or the nobiliary gentleman's gard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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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노성산(魯城山)의 입석(立石) 분포와 총석사(叢石寺) 수석(樹石)의 정원적 면모 (Dispersion of Standing Stones at Noseongsan(Mt.Noseong) and Aspect of the Stone Decorated Garden(Soo-suk Jeongwon) at Chongsuk-Sa(Chongsuk Buddhist Temple) in Nonsan City)

  • 노재현;허준;장일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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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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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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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논산 노성산성 일대 입석과 총석의 현황과 그 형태 및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이에 따라 노성산과 노성산성의 장소정체성과 노성산성 내외부에 산재한 입석의 분포를 파악하는 한편 입석의 밀도가 가장 높고 문화재적 보존가치가 높다고 판단되는 '총석사'를 중심으로 수석(樹石)의 배치형태 및 구성 특성을 조사 분석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佛宇條)에서의 '탑사(塔寺)' 존재의 언급, 탐문조사 결과 사찰의 존재설 그리고 '관음사(觀音寺)' 명의 와편 발굴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오래전부터 산성 내부에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총석사'라는 각자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찰조사 결과, 산성내부에 존재하는 다수의 입석지 중 제6입석지는 수석(樹石)의 규모, 수석 구성의 복합적 경향, 주변 우물(샘) 및 방지 그리고 석문 등에 이르는 계단의 조성 흔적 등을 볼 때 총석사를 중심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의 성격이 강하다. 총석사를 비롯하여 삼신암, 칠성암, 대장암 등으로 각자된 5개의 수석과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선각 마애불은 동일 공간 바위 위에서 발견된 북두칠성의 성혈(星穴)과 함께 이 공간이 불교 또는 도교와 민간신앙이 결합하여 발생한 칠성신앙 및 산신신앙적 공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로 파악되었다. 총석사 입석의 실측조사 결과, 수석의 수는 총 24개로 수석고는 29~402cm, 수석폭은 48~290cm로 규모에 있어 큰 편차를 보였으며 수석간 평균거리는 23.56cm로 나타났다. 또한 입석, 평석, 산형석 그리고 영상석 등 다양한 돌을 특치(特置), 군치(群置)하여 수석하였으나 돌의 좌향은 서향(W)으로의 일관된 지향성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국내에 알려진 정토정원의 유구와 비교할 때 수석의 배치 기법상 입석과 형상석 이외의 3개의 평석은 선원의 대표적 구성요소가 되는 좌선암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보살암을 마주하는 평석은 삼산석(三山石)을 상징화하여 조성된 것이지만 높이 및 주변 수석 배치 여건으로 보아 참선의 목적보다는 제수를 위한 공양석으로 추정된다. 총석사 수석의 구성은 입면이나 평면구성상 천지인 삼재(三才)를 형상화한 삼존석형(三尊石形)을 바탕으로 심경미(深景美)를 추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부등변삼각형의 3:5:7 복합수석법으로 일정한 지향성을 보이며 배치되고 있음을 볼 때 총석사 입석군은 사원수석의 형태로 참선을 목적으로 돌짜임된 축경적(縮景的) 정원 유구로 보인다.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 다정(茶庭)의 일고찰(一考察) - 시문과 현황 비교를 중심으로 - (A Study of Iljiam Tea Garden of Daeheung-sa at Mt. Dooryun - Focusing on the Comparison between Poetry and Current State -)

  • 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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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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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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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대둔산 일지암 다정(茶庭)의 원형적 모습을 고찰한 것이다. 이를 위해 초의(艸衣) 등의 시문에 나타난 일지암의 공간구성과 정원요소를 현재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일지암 조영의 진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 모색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초의(艸衣)'와 '일지(一枝)'라는 상징어는 물론 시문 속의 단서와 정황을 추적할 때 초의 생존시 소요(逍遙)와 선취(仙趣)를 꾀했던 자득(自得)의 터전이었던 일지암은 매우 고졸(古拙)하고 원대한 조망과 탈속(脫俗)의 미학을 갖춘 다정(茶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지암에 배치된 다천, 다조, 물확, 다림, 채원, 연지 등의 시설을 다산초당의 그것과 비교할 때, 차문화 공간으로서의 구성요소가 상호 일치하며, 이택(麗澤)을 꾀하기 위한 상 하지의 구성원칙이 동시에 발견된다. 일지암은 초의가 선과 차를 행하던 다선일여의 공간으로 장소성 역사성 조형성 경관성을 연계함으로써 복원의 진정성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년에 이루어진 진입로의 확장, 법당과 설림당 등의 대규모 불사(佛事)는 일지암의 왜소화와 다정으로서의 면모를 왜곡시키는 가장 큰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일지암과 주변을 시점장으로 하는 조망경관적 탁월성은 여러 시문에서 누차 강조되고 있음을 볼 때, 일지암 주변에 도사린 시각적 교란요인의 제거 및 저감은 일지암의 원형 보존을 위한 선결요인이다. 현존 일지암이 암자(庵子)라기 보다는 초정(草亭)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보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우홍련사가 조선시대 누정건축 양식이 접목된 특수한 조형공간으로 불교적이라기보다는 다소 도교적이고 신선적 공간으로 보인다는 견해는 초의는 물론 교유자의 시에서 드러나는 유불융섭(儒彿融攝)의 사상과 은일자적 선취(仙趣)를 상기할 때, 확정적 고증자료가 발굴되지 않는 한 수용할 수준이라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1979년 복원된 일지암은 원형 복원이 아닌 장소 복원의 성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국내 차문화 공간의 사례를 조합 유추하여 재건(再建)된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현재 건물 등의 골격이 왜곡되었다고 하더라도 원형복원을 위한 고증 자료가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 하지 연못은 방지(方池) 형태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며, 식생과 관련된 측면에서는 개선이 필요하다. 특히 설림당 주변 차밭 조성을 위해 제거된 것으로 보이는 죽림과 일지암 후면의 과원(果園) 조성, 상지 위 포도시렁의 설치, 소나무와 버드나무의 원내 도입 그리고 추녀 밑 다절구의 비치 등은 검토가 요망된다. 이 중 대부분의 시문에서 강조하고 있으며, 초의가 소중히 여겨 가꾼 죽림(竹林)은 다시 원내 적극 도입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아시아 불교미술에서 지표로서의 환경 (Environment as an Indicator in the Buddhist Art of Asia)

  • 이정희
    • 조형예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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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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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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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불교와 불교미술은 인도에서 발원하였지만, 그것들은 각 나라에 전파되면서 국제적인 환경을 만들어 냈다. 불교는 각 나라에 일종의 꾸러미의 형식으로 전파되었다. 예를 들면 불경, 불상과 불화의 도상과 양식, 건축과 그 기법, 복잡한 의식, 승려나 여승이 기거하는 사찰에서 건축적 요소와 그 기법들이 함께 소개되었다 불교의 시작은 인도의 아쇼카 왕조시기(reign of King Asoka)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후 각 나라의 정치적, 지적, 예술적, 종교적, 사회적, 자연적 환경, 지리적, 지질적 환경에 맞게 전개됐다. 불교미술은 토착화하면서 그 지역민을 닮은 상이 만들어 졌고, 또 지역마다 독특한 특색을 나타내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스투파(stupa)와 차이챠 홀(chaitya hall)은 수도원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곤 중앙아시아의 대상인들은 인도의 문화가 중국에 전해지는데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나던 교역루트의 자연환경 덕분에 화려한 색채의 벽화들이 제작되고 보존될 수 있었다. 불교와 불교 미술이 중국과 한국, 일본에 전해졌을 때, 불교는 국가 제도와 사회적 조직의 일부가 되었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거대한 불상들이 산속의 동굴에 만들어 지기도 했다. 중국은 스투파를 사각형의 기둥으로 변형시켰고, 기와를 얹은 지붕 형식의 탑을 만들어 냈다. 한국은 불교미술을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파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유한 방식으로 그것을 변형시켰다. 석굴암의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보살상들의 이미지가 그 좋은 예이다. 중국에서는 신유교 철학이 국-가의 공식적인 이념이 되면서 선종의 부흥하기도 했으며, 일본의 선승들은 신도들의 명상을 북돋기 위해 선종 형식의 정원을 만들어 냈다. 티벳의 밀교에서도 불교미술의 중요한 발전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밀교의 미술은 예술적 환경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종교적인 것에도 속한다. 한편 티벳의 신들이 그들의 배우자를 안고 있는 모습은 신과 신자들의 융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교미술은 독창적인 환경을 만들어 냈고, 여라 나라에 전파되면서, 상당한 변화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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