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조선총독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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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의 분류 체계에 대한 시론 (The Classification System and its Code on Archives of the Government-general Museum of Joseon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오영찬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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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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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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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고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에 대해 '기능적 출처'의 개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분류 체계와 분류 기호를 제시하였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조선총독부에 소속된 기관이므로 조선총독부 공문서 체계에 부합되고 편입이 가능하도록 문서 분류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점, 기능적 출처주의에 입각하여 총독부박물관의 조직과 기능에 부합하는 분류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점, 그러한 분류 체계에 기반하여 체계적이고 간명한 분류 기호가 부여됨으로써 문서의 검색과 활용에 편의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조선총독부의 공문서 분류 체계에 맞춰 총독부박물관의 대기능은 학무국으로, 중기능은 학무국 산하의 과 단위로 설정하였다. 아울러 '기능별 출처' 개념에 입각하여 총독부박물관의 업무 기능은 서무, 고사사, 명승천연기념물, 고적, 박물관으로 분류하였으며, 각 계별 문서는 업무 내용에 따라 다시 2차 분류를 실시하였다. 마지막으로 대기능, 중기능, 소기능, 세부기능의 순으로 분류 기호를 설정하였다. 총독부박물관 문서는 조선총독부 공문서의 분류체계에서 'A 학무'에 해당된다. 중기능 분류 기호는 학무국 내 과별 조직의 변천과 기능을 고려하여 학무(01), 편찬(02), 종교(03), 사회교육(04), 박물관(05), 기타(06) 등으로 설정하였다. 소기능은 총독부박물관의 기능을 분석하여 추출하였으며, 2자리 숫자를 부여하였다. 서무(01), 고사사(02), 명승천연기념물(03), 고적(04), 박물관(05)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는 계별 업무에 해당된다. 세부 기능과 그 아래 하위 기능은 계 내에서 업무 분장과 연결하여 다시 주제별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분류 체계가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를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활용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낙랑군 인식과 평양부립박물관 설립 (Japanese perception of Nakranggun and the Establishment of Pyongyang Governor General Museum in Japanese colonization)

  • 국성하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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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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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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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일제는 고조선의 멸망과 동시에 중국의 한나라가 한반도에 낙랑을 중심으로 한 한사군을 설치하였다고 인식한다. 평양 인근에 있었던 낙랑군은 이 인식의 기초였으며, 낙랑군의 유적의 조사를 통해 확대되었고, 평양부립박물관의 설립을 통해 고착화되었다. 첫째, 조선총독부는 낙랑군을 확실한 실체로 인식하고 있었다. 낙랑군 곧 중국인들의 조선인 지배를 통해 조선인들은 문화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으며, 이후 조선의 문화적 기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았다. 둘째, 낙랑군 인식은 인식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실증적인 증명절차를 거치는데, 이것이 바로 고적조사 보존사업이다. 고적조사보존사업은 ${\ulcorner}$고적조사위원회${\lrcorner}$, ${\ulcorner}$조선고적연구회${\lrcorner}$등이 주도해 갔고, 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 때 발견된 유물들의 해석을 통해 낙랑군의 인식은 더욱 확대된다. 넷째, 낙랑군과 관련된 유물의 수집과 그 보존에 대한 평양부립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진다. 실증적인 자료들이 박물관 안에 전시된 것이다. 전시는 곧 그 유물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것이었고, 이는 그 역사를 고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일제의 낙랑군 역사 인식을 증명하는 곳이 바로 평양부립박물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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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북한지역 고건축물 목록을 통해 본 조선총독부 학무국 고건축 조사의 성격 (A Study on Characteristics of the Survey for Architectures by Joseon Government-General through its List of Architectural Heritages in North Korea)

  • 서효원
    •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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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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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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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analyze the "朝鮮古建築物", the list of architectural heritages in Korea during the early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list included architectural heritage of the region of North Korea in the colonial era. A process of listing was showing the meaning of an architectural heritage for the Japanese General Government through the criteria of selecting buildings registered on the list. This study revealed the process of a survey for making list and explored the criteria of the list. The result of this effort will contribute to determining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North Korea's architectural heritage in the early days.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포천 출토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소고 (An Inquiry into the Iron Seated Buddha Excavated from Pocheon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강건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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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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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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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철조여래좌상은 한동안 미등록 상태로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가 최근 본관9976으로 유물번호가 새롭게 변경되었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포천 철불'로 불리는 철조여래좌상(본관9975)과 함께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백운리 흥룡사 일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필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공문서와 유리건판 사진 등을 비교·검토하여 두 구의 철조여래좌상이 동일한 절차를 거쳐 1925년 12월 17일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철조여래좌상은 높이가 105cm, 어깨폭은 57cm, 무릎폭은 77cm에 이르고,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착의법에 옷주름은 물결무늬식으로 새겨서 유려하다. 철조여래좌상의 얼굴은 타원형으로 이목구비의 묘사가 잘 남아있다. 양감 있는 볼에 넓게 타원형을 그린 안와, 수직으로 길게 뻗은 눈, 짧은 코와 도툼한 입술은 9세기에 제작된 전라북도 남원 실상사(實相寺) 철조여래좌상, 경북 예천 한천사(寒天寺) 철조여래좌상, 강원도 동해시 삼화사(三和寺) 철조여래좌상 등과 유사하다. 또한 결가부좌한 다리와 편단우견의 착의법, 물결무늬식 옷주름은 8세기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시킬 만큼 조각수법이 우수하다고 생각된다. 철조여래좌상의 존명은 유리건판 사진(원판번호 M442-2, M442-7)을 통해 알 수 있다. 유리건판 사진을 보면 오른쪽 손바닥은 위를 향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약기(藥器)를 받치고 있다. 지금까지 원주 출토 철조약사좌상(본관1970)만이 철로 만든 유일한 약사불상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약기를 든 철조약사여래좌상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철조여래좌상은 혜철의 제자 도선(道詵)(827~898)이 밀교신앙의 영향을 받아 사찰을 보호하고 국토를 비보(裨補)하기 위해 9세기경에 조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흥룡사의 전신인 내원사에는 도선이 백운산 등 중요한 세 곳을 택하여 비보사원을 세우고 다시 약사여래삼존상을 조성한 후 사원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선암사중수비」에는 도선이 비보를 위해 도량을 세우고 철불 등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흥룡사가 소재한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고려시대에 약사(藥寺)라는 사찰이 창건되었다는 점에서, 이 일대는 약사도량과 관련된 지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강점기 문화재 정책 형성과정 연구 -위원회 구성과 목록 변화를 중심으로- (Study on the Formulation of the Cultural Property Polic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ith the Focus on the Composition of the Committee and Changes in the Listing of Cultural Properties-)

  • 오춘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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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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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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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일제는 그들의 통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 문화재에 대한 조사와 제도화를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일본인 관료와 학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몇 번의 변화를 거쳐 체계화 되었고, 1916년에 제정된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과 1934년에 지정된 문화재들은 현재 우리나라 문화재 정책의 시작점이 되었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주도로 진행된 문화재 정책을 문화재에 관한 전반을 심의하던 '위원회'의 인원 구성과 '문화재 목록'의 변화상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사항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조선총독부는 문화재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기 위한 심의기구로 '위원회(보존회)'를 두었는데, 제도와 인적 구성 면에서 조선총독부 관료를 과반 이상 두도록 하여 조선총독부의 정책이 관철되도록 하였다. 이 속에서 조선인은 극소수가 참여하였는데, 그들마저 형식적인 구색 맞추기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조선총독부가 조사하여 목록화한 문화재는 목록화 계기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목록(1909~1916)은 등 급제로 대표되는 세키노타다시에 의해 주도되었고, 두 번째 목록(1917~1933)은 대장법으로 대표되는 구로이타가쓰미에 의해 주도되었다. 구로이타가쓰미는 문화재 제도를 입안하고 목록을 공식화 하면서 세키노타다시의 영향에서 멀어지려 하였는데, 이러한 정황이 제도와 실제 목록 내용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세 번째 목록(1934~1945)은 1934년 지정문화재 목록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단계에서는 세키노타다시의 조사 성과도 반영이 되었으며, 종전의 규정에서 제외되었던 현존사찰의 중요 문화재도 포함이 되었다. 이렇게 1934년을 기점으로 현재 우리나라 문화재 목록의 기본적 체계가 만들어졌다.

서산(瑞山) 보원사(普願寺)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고찰(考察) (A Study on the Iron Seated Buddha at Bowonsa Temple in Seosan)

  • 강건우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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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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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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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보원사(普願寺)는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북쪽에 위치한 사찰로, 경내에는 나말여초에 조성된 문화재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은 충청남도의 고적 조사를 계획했고, 1916년(대정 5) 보원사지에 가서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현지 조사 과정에서 소옥(小屋)에 안치된 철조여래좌상(무릎너비 7척, 두께 5척 5촌)을 확인했고, 이듬해에 경복궁으로 해당 철조여래좌상을 이운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보원사지에 2m가 넘는 대형 철조여래좌상 1구만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철조여래좌상은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900~975)이 955년에 조성하였을 것이다. 탄문은 광주 고봉의 유력가문 출신으로 태조의 보살핌 속에 화엄종의 중심인물로 성장했고, 연이어 혜종(惠宗)(재위기간 943~945)과 정종(定宗)(재위 945~949)대에도 왕실의 불교행사를 주관했다. 이후 탄문은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의 후원을 받은 균여(均如)(923~973)의 등장으로 개경에서 떨어진 보원사로 이주하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충주 유씨의 후원을 받아 지지 세력의 결속을 다지고 한편으로는 광종(光宗)(재위 949~975)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대형의 철조여래좌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탄문의 비문에 나오는 '주금상지삼존(鑄金像之三尊)'도 보원사에서 철조여래좌상이 주조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철조여래좌상의 원(原) 봉안처는 보원사지 내 '건물지3'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결과 현재의 금당지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건물지로 드러났기 때문에, 철조여래좌상은 조성 당시 다른 장소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건물지3은 다른 건물지에 비해 고려시대 기와와 자기의 출토 빈도가 높고, 무엇보다도 정방형에 가까운 불단 유구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철조여래좌상은 조성 당시 고려시대 전각인 건물지3에 봉안되었다가 조선시대 중창불사를 통해 지금의 금당지로 이운되었을 것이다.

화엄사 각황전 수리공사를 통해 본 「보존령」 제정 이후 일제강점기 보물 건조물 수리공사의 현장운영과 수리방침 (The Field Operation and Policies of Repair Works for Architectural Treasures in Late Japanese Colonial era based on Repair Works of Hwaumsa Kakhwangjeon)

  • 서효원;전봉희
    • 대한건축학회논문집:계획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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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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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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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circumstances of repair works after enacting "Low for Conservation of Joseon Treasure, Historic Site, Scenic Beauty & Natural Monument (朝鮮寶物古跡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 For this purpose, the official documents produced by the Government-general Museum of Joseon were analyzed. They included the contents of repair works of Hwaumsa Kakhwangjeon(華嚴寺 覺皇 殿). As a result, this study reveals that the repair work of Hwaumsa Kakhwangjeon had become a momentum of introducing specific guidelines such as "Guidelines for Architectural Treasure's Repair 寶物建造物修理施行準則", "Regulations for administration of Hwaumsa Kakhwangjeon's repair work 華嚴寺覺皇殿修理工事取扱手續)". The guidelines and regulations systematized the planning phase of the repair works and provided to organize the field office formed by experts. In spite of these positive changes, the repair works were controlled by the central government to the certain extent, and the Japanese repair techniques were mingled with traditional techniques recklessly.

경주 서봉총 출토 금관(보물 339호)의 보존처리와 제작기법 연구 (Conservation Treatment and Production Technique of the Golden Crown (Treasure No. 339) Excavated from Seobongchong Tomb in Gyeongju)

  • 권윤미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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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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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3-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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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고는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129호분(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보물 339호)의 보존처리와 제작기법 조사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서봉총 금관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진행한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신라 금관은 총 6점으로, 그 중 서봉총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을 보이면서도 새장식이 달린 돔형의 반구형장식이 존재하는 유일한 사례이다. 출토이후 금속재료와 접착제 등으로 수리되었으나, 형상이 일부 변형되고 수리재료로 인한 금관의 손상이 야기되어 보존처리를 진행하였다. 이 글에서는 서봉총 금관의 보존처리 및 원형복원의 전 과정과 특히 유물의 안정성을 위해 중점을 둔 접합부 보강 방법을 상세히 서술하고, 보존처리 중 조사를 통해 확인된 제작과정의 특징을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서봉총과 유사형태의 신라관의 제작기법을 비교하여 서봉총 금관과 다른 신라관의 관계성을 검토하고자 하였다. 서봉총 금관의 제작당시 기본 장식은 금제 영락이었으며, 이후 세움장식의 영락 일부를 곡옥으로 교체하고 관테에는 곡옥을 새로 연결하여 장식을 수정한 정황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다른 금관에도 적용되었는지 알아보고자 국내 신라 금관 6점의 장식기법을 모두 비교한 결과 천마총 출토 금관에서 동일한 방식의 수정 흔적과 여러 유사성을 확인하였다.

석암리 9호분 출토 청동 및 금동단추의 제작기법 연구 (A Study of Production Techniques of Bronze and Gilt Bronze Buttons Excavated from Seogam-ri Tomb No. 9)

  • 박지혜;권윤미
    • 박물관보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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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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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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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발굴되었던 석암리 9호분 출토유물의 보존처리 및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출토된 유물 가운데 청동 및 금동단추의 과학적 조사를 실시하여 제작방법을 유추하였다. 관찰 결과 청동 및 금동 단추는 반구형으로 외형적 특징이 비슷하나 걸이의 단면 형태 및 크기에서 차이점이 보인다. 걸이의 단면형태는 원형과 사각형이며 두 그룹으로 분류되고 이 그룹 내에서 길이를 기준으로 세분화를 하였다. 원형 걸이의 경우, 걸이의 형태 및 설치 위치가 다양하며 두께가 일정하지 않으며 몸체와 걸이의 경계부가 고르지 못하다. 사각형 걸이는 걸이의 형태 및 위치가 일정하며 몸체의 바닥면에 걸이가 연결되었으며 표시선으로 보이는 홈이 존재한다. 또한 X-ray 조사결과, 원형 걸이의 경계부분은 두꺼우며 이는 흙이나 이물질이 아닌 금속물질로 확인된다. 제작기법은 밀랍법으로 추측되며 걸이의 단면형태에 따라 몸체와 접합과정이 차이가 있다.

국내 뮤지엄 개념 사용현황 분석과 미래 발전방향 (Development Direction and Analysis on Current Usage of the Museum Concept in Korea)

  • 오정심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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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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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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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글의 목적은 국내에서 뮤지엄이 문화시설 개념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관련 제도와 사업이 운영되고 있는 문제점을 밝히고, 이러한 경향이 일제식민지시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추진된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의 설립 때부터 생겨났음을 분석하는 데 있다. 나아가, 국내 뮤지엄의 발전을 위해 시설 개념보다 확장된 개념으로 확대되어야 하며, 그 방안 중 하나로 콘텐츠 개념을 활용하여 미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제일 먼저, 뮤지엄 개념과 발전과정을 고찰해보았다. 다음으로, 제3장에서 국내에서 뮤지엄이 시설 개념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황을 국내 뮤지엄 정책 입안자와 실행자의 업무계획서를 통해 살펴보고, 이러한 경향이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제실박물관의 설립과정에서 생겨났음을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제4장에서 최근 선진국을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뮤지엄의 특징이 콘텐츠의 속성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콘텐츠 개념을 활용한 뮤지엄의 미래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