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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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후불벽화의 조성배경 (A Study on the Sources of Creativity in Buddhist Mural Paintings of Muwisa and Geungnakjeon in Gangjin)

  • 배종민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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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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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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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이 연구의 주제는 무위사 극락전의 건립과 후불벽화의 조성배경을 살펴본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이 건립된 것은 세종 12년(1430)의 일이었으며, 후불벽화는 성종 7년(1476)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억불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따라서 무위사에서 어떻게 극락전의 건립이 가능하였고, 누가 벽화의 조성에 참여하였는지 궁금해진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의 건립은 지유와 대화주, 그리고 시주가 주도하였다. 이들 중 가장 중요시된 것은 지유었다. 특히 지유 효영은 효영대군 이보와 동일인물로 믿어진다. 무위사 극락전의 건립은 자복사와 수륙사로 공인된 데 힘입은 불사였다. 자복사는 왕실의 명복을 기원하는 원찰의 성격을 지닌 사찰이었으며, 수륙사는 수륙재를 베풀 목적으로 특별히 지정된 사찰이었다. 수륙재는 적을 포함한 전망자와 모든 망영을 위로하는 불교의식이었다. 자복사와 수륙사에는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이 뒤따랐다. 따라서 효령대군의 무위사 불사참여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는 강진으로 낙향한 양반과 토착세력이 주도하고 대선사와 양인 부여자, 부곡민과 노비가 동참한 불사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위사가 수륙사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수륙사에서 베풀어지는 수륙재는 모든 망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왕실부터 서민에 이르는 폭넓은 참여계층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세종 2년에 수륙재가 공인된 유일한 상예가 되면서, 왕실의 구병부터 전염병의 방지를 기원하는 재에 이르기까지 그 역할과 참여계층의 확대가 이루어 됐던 것이다. 무위사가 자리잡은 남해 연안지역은 왜구의 약탈이 극심한 지역이었다 이 당시에 아미타신앙과 지장신앙이 성행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왜구로부터 당하는 혹독한 고초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이 깔려있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되고, 대웅전이 아닌 아미타여래를 본존불로 하는 극락전이 건립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이후 강진지역의 사람들은 신분의 구별 없이 무위사의 수륙재에 참여하면서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차츰 무위사 극락전을 수륙사라는 사격에 걸맞게 장엄하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 무위사 극락전이 건립된 후 45년 만에 극락전의 내부가 개조되고, 아미타후불벽화가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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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대기가 지구 기준계에 미치는 영향 : 기존 모델 분석 (Effects of Earth's Atmosphere on Terrestrial Reference Frame : A Review)

  • 나성호;조정호
    • 지구물리와물리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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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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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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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지구대기압력이 지각에 변위를 일으키는 현상은 오래 전부터 인식되었으며, 근래의 측지-측량, 특히 우주측지에서 이의 정확한 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육지에서의 대기 하중에 의한 변형은 주어진 대기압 분포와 하중함수로부터 바로 계산할 수 있으며, 해양에 근접한 지역에서는 근사적인 모델이 사용되고 있다. 지구 대기대순환의 변화와 계절별 지구 양반구에서의 대기압의 분포의 변화들이 각각 지구자전속도 변화와 극운동의 가장 큰 요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람과 대기압의 변화는 여러 주기영역에서 지구상의 지점들의 좌표의 섭동 및 지구자전상태의 큰 변화 요인이 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현상들을 기술하며 관련된 이론과 모델들을 요약하고, 또한 한반도를 지나가는 가상적인 태풍에 의한 효과를 예시하였다. 마지막으로 관련된 몇몇 문제점들과 향후 연구방향을 논의하였다.

조선후기 감로탱화 하단화를 통해 본 예인복식 연구(제1보) - 사당패 남자복식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Costumes of Male Performers in the late Joseon's Gamrotaenghwa(Part I) - Korean Nectar Ritual Painting -)

  • 홍나영;민보라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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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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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4-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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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This study is focused on the man's costumes of Sadangpae(the troupe of performers) shown in Gamrotaenghwa (감로탱화) during the late Chosun dynasty. Originally Gamrotaenghwa was used as a painting for a Buddhist praying ceremony, 또Young-ga-cheon-do-je(영가천도제). It shows us the lives of the commoners in those days. Gamrotaenghwa reflects the changes of costume style in the late Chosun period. The early styles of po(포, coat) for male performers in the 17th century were changeui(창의) and dopo(도포), which had the front panels(seop) overlapped deeply and sleeves that got wider as time passed. After the 18th century, Male performers wore a simpler coat such as sochangeui(소창의), which had narrow sleeves and long slits on the both sides. Especially the coats of acrobats were fastened on the center front with buttons. Heuklip(흑립: black hat), somoja(소모자: small cap) and jeonlip(전립: wool hat) were used as hats for the male performers. Originally, heuklip was the hat that represented the noble status: yangban(양반). However, it was popularized among the commoners in the late Chosun period. As time passed on, the heuklip became more popular and its shape also changed. Somoja and jeonlip were shown throughout the entire Gamrotaenghwa. Unlike heuklip, those were common hats for Sadangpae. The costumes of entertainers shown in Gamrotaenghwa were very similar to those of the commoners. However, it seems that there were some differences of the costumes depending on the roles they performed.

하회탈 제품 개발을 위한 소비자의 감성 이미지 비교 연구 (Comparative Study on Sensibility Image to Develop Products of Hahae Mask)

  • 김윤희
    • 감성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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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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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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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본 연구는 하회탈이 갖고 있는 감성적 요인에 대해 알아보고 문화상품과 관련한 제품디자인 개발에 도움이 되고자 시도되었다. 하회탈 이미지 평가를 위해 감성 형용사 어휘 32개를 추출하여 분석한 결과 첫째, 32개의 감성 평가 어휘로 하회탈 이미지에 대해 알아본 결과, '매력성', '향토성', '흥미성', '역동성', '정교성'의 5개 요인이 나타났다. 둘째, 하회탈 종류에 따라 향토성과 흥미성에서 감성 차이가 있었다. 특히 양반탈이 초랭이탈보다 향토성이 강하며, 중탈, 백정탈 및 부네탈보다는 흥미성이 더욱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하회탈 상품의 재질에 따라 정교성에서 감성 차이가 있었고, 특히 유리 재질에 대해 정교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넷째, 하회탈의 감성이미지는 인구통계학적 특성(나이, 성별, 학력)과 제품 특성(재질, 탈 종류)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본 연구를 토대로 향후 하회탈 관련 문화상품 개발시 5가지 감성적 요인을 고려한다면 소비자의 니즈에 부합하는 제품 디자인 개발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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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천구곡의 지형경관 (The Geomorphological Features of Dongcheon-gugok in Korea)

  • 기근도
    • 한국지형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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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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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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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동천구곡은 자연지형과 인간 심성활동의 결합체이다. 본 논문은 동천구곡의 장소성과 경관 이미지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 지형경관의 특성에 대하여 조사 확인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우리나라 동천구곡은 주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산지 지역에 주로 입지 분포하며, 이는 인근에 위치한 양반의 계거촌과 관련이 있다. 동천구곡이 자리 잡은 지역의 기반암 특성이 지형경관 특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화강암과 퇴적암 경관이 이를 가장 대표한다. 우리나라 동천구곡은 산지 내부를 흐르는 곡류하도에 주로 입지하여, 곡류하도 주변에 나타나는 다양한 지형요소들이 주요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주요 지형요소로는 봉우리, 소규모 평탄면, 토르, 수직절벽, 폭포, 여울, 소, 포인트바, 그리고 너럭바위, 거력, 암설사력퇴, 마식된 암반하상과 포트홀 등이 있다. 이를 동천구곡에서는 대(臺) 암(巖) 봉(峰) 벽(璧) 벼리(遷) 학(壑) 반석(盤石) 천(泉) 폭(瀑) 담(潭) 연(淵) 추(湫) 소(沼) 천(川) 탄(灘) 등으로 칭한다.

한국 한시에 나타난 노비 (Slaves Observed in Chinese Poem)

  • 박동욱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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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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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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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노비에 대해서는 그동안 양반의 일기나 노비 문서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문학에서도 충노담(忠奴談) 또는 전(傳), 야담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충분할 만큼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시에 나타난 노비의 모습을 통해, 실제 노비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통상 어린 종은 다루기가 몹시 까다로웠다.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한 천민 계층이기도 했고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다. 어린 종의 반복적이고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되면 마음의 평정심을 잃고 심하게 화를 내거나 매질을 하기도 했다. 그런 뒤에 반성을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린 종이 병이 들기라도 하면 구호(救護)하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도망간 노비는 노동력의 상실과 정서상의 배신감을 함께 가져왔다. 도망간 노비를 돌아오게 만드는 주술이 있을 정도였다. 추노(推奴)를 하기는 했지만 현실적인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서 소귀의 성과를 거두기는 힘들었다. 도망간 노비에 대한 야속한 감정과 함께 자신이 노비를 대한 방식에 문제가 없었나 하는 자책을 함께 하기도 했다. 노비의 죽음에서는 가족의 죽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상실감을 보인다. 함께 한 세월이 오랠수록 그러한 상실감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특히 늙은 종의 죽음에 대해 깊이 아파했다. 가문과 가족을 위해 봉사하다 죽었기 때문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유년기를 공유했기에 유년기의 휘발(揮發)으로까지 느껴졌다. 노비에 대한 인식이 시대별로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다 해명하지 못했다. 더 많은 자료를 충분히 검토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추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

리얼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가 재현한 가족에 관한 연구 (Meanings of Family Reproduced by the Real Entertainment Program )

  • 전미경;이정원;김지욱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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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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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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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연구의 목적은 <삼시세끼> 어촌편 1이 재현한 가족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야기 전개구성과 등장인물의 관계 특성을 서사분석을 활용해 분석하였다. <삼시세끼>는 '기상-자유시간-아침-점심-저녁-휴식-취침'의 비교적 단순한 전개구성을 보였다. 각 등장인물에게는 주된 공간과 역할을 배치함으로써 '차줌마', '바깥양반', '호주니'의 캐릭터를 완성해갔다. 출연진이 모두 남성임에도 이들에게는 아내/주부/엄마, 남편/가장/아빠, 아들의 가족지위가 부여되었고, 매우 고정된 감정과 획일적 행동의 가족실천이 탄탄한 관계구조 속에서 반복되었다. 동시에 유자녀 가족, 양부모 가족, 이성애가족, 핵가족이라는 전형적 근대가족, 정상가족, 표준가족을 연출하였다. 즉 <삼시세끼>는 스위트 홈의 표상을 적극 차용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시켰다.

향화인의 조선 정착 사례 연구 - 여진 향화인을 중심으로 - (Some Instances of Manchurian Naturalization and Settlement in Choson Dynasty)

  • 원창애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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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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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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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고려 말에 동북면에 들어와서 거주하던 토착여진과 요동 지방 내륙에서 남하하여 두만강 유역 부근에 자리잡은 알타리 올량합 올적합 등의 여진족이 향화하였다. 향화한 여진인에게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우대 정책이 시행되었다. 특히 향화인에게 과거 응시를 허락한 것은 이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인정한 단적인 예이며, 이들이 과거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향화인 가운데 성공적으로 조선에 정착하여 양반으로 성장한 사례가 있는데, 청해 이씨와 전주 주씨이다. 청해 이씨는 여진의 대추장으로서 관하민도 500호나 되었으며, 개국공신 회군공신 배향공신으로서 조정에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혜택을 충분히 받았다. 게다가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 역시 공신으로서 그의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고, 종친과의 혼인으로 왕실과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이지란과 이화영이 마련한 기반 위에서 양반 가문으로서 계속 성장된 것은 이화영의 아들 이효양(李孝讓)과 이효강(李孝綱) 집안이다. 이 두 가문에서 배출된 과거 급제자는 문과 7명, 무과 15명, 생원 진사시 16명 등이다. 청해 이씨의 주된 거주지는 서울과 경기 지역이었으며, 일부 함경도 지역에도 남아있었다. 전주 주씨는 함흥에 같이 정착했던 주만(朱萬)은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주인(朱仁)은 중앙으로부터 서반직을 제수받았다. 전주 주씨는 함흥에 토착하여 재지 세력으로 성장되었다. 16세기부터 문과 급제자가 배출되기 시작하여 17세기 이후로 문과 급제자 22명, 생원 진사시 입격자 40명을 배출한 문인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전주 주씨의 관직 진출을 보더라도 서북 인사에게 통청되기 어려웠던 언관직 진출이 많았다. 전주 주씨는 함흥을 중심으로 재지 기반을 확고히 하고 언관과 같은 청직에 진출되면서 함경도의 명문 성관으로 부상되었다.

20세기 중반 청송 지역의 고전소설·가사의 향유 양상 (A Study on the Enjoyment Modes of Classic Novels·Ga-Sa in Cheongsong of the Middle of the-20th Century)

  • 권미숙
    • 고전문학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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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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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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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문학 작품은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에 따라 향유 방식과 텍스트 등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문학 작품의 향유 방식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었다. 그런데 현재처럼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문학 작품을 향유할 수 있는 것과 달리 20세기 중반 즉 1950~1960년, 1970년대까지 문학 작품은 누구나 다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아는 방법은 실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을 만나서 확인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경북 북부 내륙 지역, 영덕과 울진의 사례 조사에 이어 청송지역에서는 고전소설이 어떻게 향유되었는지를 2015년 3월부터 2016년 7월까지 청송에서의 현지 조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청송 지역은 고전소설 향유 양상에 있어 북부권과 남부권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북부권이 반가의 양반이라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사나 고전소설의 향유층을 형성한 반면, 남부권에서는 반가나 동성의 집성촌이라는 의식을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전소설을 향유한 계층도 거의 없었다. 이는 사회 문화적인 문제와 경제적 이유가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청송 지역도 경북 북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전소설과 가사에 대한 장르 인식에 따른 이중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경북 북부의타 지역과 달리 고전소설에 대한 거부감이나 가사에 대한 무조건적 자긍심 등이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 예로 청송 지역에서는 고전소설을 주로 향유한 계층에서는 고전소설 작품이 비교적 다양하게 읽히고 있었는데 비해 가사를 주로 향유한 계층에서는 작품의 다양성이 없었다는 점을 들수 있겠다. 가사는 겨우 <한양가> 정도만 거론되고 있었다. 고전소설의 향유에 있어서 송소고택과 찰방공종택은 같은 가문이고 동시에 이웃해 있으면서도 고전소설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고 있었다. 송소고택에서는 어른들이 고전소설을 비교적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었기에 소설에 대해 부정적 시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찰방공종택의 경우 시어른들이 고전소설은 전혀 읽지 않았지만 가사는 직접 지어 읽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향유했다. 이 두 사례는 같은 집안이면서도 고전소설에 대해 어떻게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청송 지역의 고전소설 향유 양상에 대한 실증적 조사는 20세기 중반 고전소설이 어떻게 향유되고 있었는가를 아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아울러 현장 조사에서 일부 제보자들이 타계했거나, 혹은 나이가 많아서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점들을 고려해본다면 이러한 실증적 조사는 좀 더 일찍 이루어졌다면 하는 개인적 아쉬움도 없지 않다. 이제 고전소설의 향유 양상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더 이상의 제보자들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논문이 고전소설을 다양하게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고소설에 표출된 영웅의 양상과 그 역사적 의미 - <최고운전>, <전우치전>, <전관산전>, <일념홍>, <여영웅>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heroic side and the features of the classic novel Historical significance)

  • 조상우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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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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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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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는 고소설에 표출된 영웅의 시대별, 남녀별 차이에 드러나는 영웅의 유형화와 소설의 개별적 양상과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최고운전>, <전우치전>, <전관산전>, <일념홍>, <여영웅>을 텍스트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주인공들을 '문화영웅-최치원, 민중영웅-전우치, 내조(가정) 영웅-정소저, 친일 개화 영웅-일념홍 이형경'으로 유형화하였다. 또 이 영웅의 유형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서술하여 본고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중국과 조선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서로의 관계가 불편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것이 바로 <최고운전>의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신라의 대문장가였기에 중국 문사와 한 수 우위의 시문수창을 할 수 있었다. 조선이 중국보다 문화가 우수하다는 자부심을 표현하기 위해 문화영웅 최치원이 필요했다. 조선은 반상제도가 뚜렷한 유교사회였다. 그렇다보니 모든 중심은 양반에 치우쳐 있어서 민중들은 양반에 의해 핍박을 받았는데 이 때 민중의 영웅이 필요했다. 그가 바로 <전우치전>의 전우치다. 전우치는 도술을 통해 민중들의 원한과 바람을 해결해 주는 진정한 민중영웅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전란을 체험한 여성들이 남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렇다 보니 <강도몽유록>이나 <박씨전>, 그리고 <이학사전>과 같은 여성영웅소설이 등장한다. 무능한 남성들로 인해 울분에 찬 여성들에게 당시 작가는 작품에서나마 희망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전관산전>의 정소저는 고소설에 충실한 여성주인공보다는 진취적이지만 남편을 위한 내조를 담당하는 가정영웅이다.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의 마수에 걸려든다. 이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조로 맺은 뒤 통감부 정치를 실시한다. 이 때 친일을 부각하고자 친일신문을 발간하고 친일 소설을 연재한다. 바로 <일념홍>과 <여영웅>인데 친일개화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