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Wooden Chamber Tom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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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식 적석목곽묘의 구조복원 재고 (The Structual Restoration on Gyeongju-Style Piled Stone-Type Wooden Chamber Tombs)

  • 권용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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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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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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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적석목곽묘는 목곽 외부에 석재를 쌓거나 채운 다음 목개 위에 일정한 두께로 적석하고 점토로 밀봉한 구조이다. 경주 중심부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 거의 모든 지배자가 지속적으로 한 묘제를 사용하였다는 점, 타 지역에서 확인되는 적석 형태와 전혀 다르다는 점 등에서 경주식 적석목곽묘로 정의하고자 한다. 적석목곽묘는 경주 중심부에서 5C 전반대부터 축조되기 시작한다. 평면형태, 목곽, 이중곽, 석재충전, 석단, 순장 등은 이전시기의 목곽묘에서 계보를 잇고 있다. 이외에 석축과 목주, 적석, 성토분구는 적석목곽묘의 출현과 함께 새롭게 나타나는 요소이다. 특히 석축과 목주는 황남대총을 비롯한 지상식 초대형분에서만 확인된다. 석축과 목주, 적석은 모두 성토 분구 축조과정 속에서 하나의 공정을 이루고 있다. 석축은 지상에 설치된 목곽의 외벽을 견고하게 유지시켜 주면서 성토 분구의 하중을 분산 수용한다. 목주는 석축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보조장치로서 횡가목, 버팀목 등과 함께 사용되었다. 적석은 일정 크기의 석재를 갖고 일정한 두께로 목개 상부에 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점토로 밀봉한 다음 분구를 성토하였다. 적석은 경주지역의 입지적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경주 중심부의 적석목곽묘는 하천부지가 넓고 평탄한 형산강 동안을 따라 분포한다. 기반층은 대부분 모래와 냇돌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성토분구는 모래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목개를 횡가한 다음 바로 성토할 경우 유수에 의한 붕괴 가능성 또한 크다. 고분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내부구조물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적석과 점토밀봉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상부의 봉토가 유실되더라도 하부의 적석은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토분구는 국가 혹은 단위정치체가 성장단계에 진입하면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이다. 국가 출현단계 이후 성장단계에 진입하면서 사회구조에 변화가 나타나고 이와 맞물려 새롭게 출현한 지배등급에서 전대의 목곽묘와는 다른 적석목곽묘를 축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분구를 함께 성토한 것으로 파악되며, 지배등급의 성격에 따라 규모와 구조에서 차이를 보인다. 평면형태, 곽과 석단, 순장자의 수, 유물의 양과 질 등은 지배등급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적석목곽묘는 신라가 성장단계에 접어든 시점에 전대의 묘제로부터 분화 발전된 양상을 보이면서 나타난것으로 생각된다.

경주지역 목관·목곽묘의 전개와 사로국 (Development of Wooden Coffin(木棺) and Chamber(木槨) Tombs in Gyeongju(慶州) and Sarokuk(斯盧國))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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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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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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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는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대까지의 목관묘와 목곽묘에 대한 구조분석과 그 변화양상을 추적하여 사로국의 정치, 사회적인 동향과 성장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가 기원전 2세기 후반 무렵 영남지방으로 파급되면서 경주지역에서도 철기가 부장된 군집묘(群集墓)가 조성되기 시작하며 이후 기원전 1세기 후반에는 한군현(漢郡縣)의 설치에 따라 대동강유역의 유이민이 진한(辰韓)으로 남하, 정착하면서 전한경(前漢鏡)과 와질토기(瓦質土器)가 부장된 중소형의 단순목관묘(單純木棺墓)가 경주지역에 등장하게 된다. 청동유물을 다량 부장한 독립묘(獨立墓)의 주인공은 군집묘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최상위 계층의 것으로 사제왕(司祭王)일 가능성이 높으며 경주의 각 곡간지역을 범위로 하는 지역집단의 수장묘(首長墓)로 추정된다. 기원후 2세기에 접어들면서 단순목관묘는 규모가 확대되고 부장유물의 종류와 양이 풍부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사라리 130호묘이다. 이것은 피장자의 주관 옆에 부장품을 넣은 목갑(木匣)을 설치하여 칠기(漆器)나 동경(銅鏡) 등의 위신재(威信財)를 부장한 것으로, 이와같은 구조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낙랑지역의 목곽묘에서 보이고 있다. 기존의 목관묘와 구조상에서 차이가 보이는 이러한 목관계목곽묘(木棺系木槨墓)의 출현은 변 진한의 철(鐵)을 매개로 한 낙랑과 이 지역과의 활발한 교섭관계를 대변해 주는 것이며 지리적으로 물류의 집산지 역할을 한 사라리 집단은 외부와의 유통과 교역을 장악하여 경주지역의 정치와 사회문화적인 거점으로서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2세기 후반대 이후 정치체의 규모가 크게 성장한 경주지역의 분묘시설에는 부장유물의 안정적인 공간을 위한 곽(槨)이라는 개념이 정착하게 되었고, 소형묘와 입지상에 있어 차별성을 가진 대형의 장방형목곽묘가 3세기 전엽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지배집단 내 계층분화의 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대형묘가 소재하는 지역이 소국의 중심지로써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 목곽묘의 평면구조가 점차 길어지는 경향은 묘곽 내에 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 3세기 후반대 부곽이라는 시설을 갖춘 경주식목곽묘(慶州式木槨墓: 동혈주부곽식목곽묘)의 등장을 가져온다. 소형의 부곽은 점차 길이가 길어져 4세기대에는 주곽의 크기에 이르는데, 이는 집단 내 계급의 분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권력의 집중화가 표면화된 것으로 경주와 주변지역 대소집단간의 통합이 진전되는 분위기 속에서 집단 내의 질서를 일원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경주지역 목곽묘의 위계구조 검토 (The Research about the Class Structure of the Wooden Chamber Tombs in Gyeongju Region)

  • 최수형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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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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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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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의 목적은 경주지역 목곽묘 축조집단의 위계분석을 통한 사회적 신분구조를 파악하는데 있다. 경주지역 목곽묘의 위계는 목곽묘 면적과 부장된 유물의 구성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상형토기, 갑주 등이 매납되고 목곽의 면적이 $15.0m^2$ 이상인 '가'등급에서 토기류만 매납되고 목곽의 면적이 $4.9m^2$ 이하인 '차' 등급까지 총 10등급의 구조로 구성된다. 이러한 위계구조는 각 등급이 축조할 수 있는 목곽의 규모나 매납품의 종류와 재질, 수량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분의 내 외적 규모나 구조 그리고 매납품의 수량 종류 재질 등의 내용은 피장자의 출생 신분과 생시의 사회적 신분(지위) 등에 따라 차등을 주는 엄격한 사회적 규제가 적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위계등급을 신라(사로) 신분 사회에 실질적으로 적용해 보면 '가'등급은 목곽의 규모나 매납 유물의 종류와 재질 등으로 볼 때 신라(사로)를 대표하는 최상위 지배층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나', '다'등급은 상위 지배층, '라', '마'등급은 중위 지배층, '바', '사'등급은 하위 지배층으로 추정된다. 또한 '아', '자'등급은 상위 일반민, '차'등급은 하위 일반민의 신분(평민)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본다면 '가'~'사'등급이 신라(사로)사회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지배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전기 적석목곽분의 묘형과 집단복합묘군의 성격 (The Nature of the Tomb Form and the Group Tomb Complex of the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 in the Early Silla Phase)

  • 최병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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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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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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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고에서는 경주 월성북고분군에서 조영된 적석목곽분의 존재 양태의 두 측면, 즉 묘형과 집단복합묘군에 대해 고찰하였다. 적석 목곽분은 호석으로 한정된 봉분 안에 단위묘곽이 설치된 원형의 단위고분이 기본형으로, 그 묘형은 단일원분, 연접분, 다곽분으로 구분된다. 단일원분은 피장자 1인의 단장분이고, 연접분은 일반적으로 부부나 혈연관계인 가족의 합장분이다. 다곽분도 대개 최하위 랭크의 묘곽들로 구성된 합장분으로, 월성북고분군의 왕릉구역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쪽샘지구에서는 미고지를 따라 고분들의 소구역 군집현상이 보인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친연관계에 따라 소집단별로 미고지를 점유하여 그 축선 방향으로 중형급 단일원분이나 연접분을 조영하고 그 주변으로 다수의 소형분들을 위성처럼 배치하여 집단복합묘군을 형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대릉원지구를 비롯한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왕릉구역에서도 고분들은 집단복합묘군을 형성하였다. 왕릉구역의 집단복합묘군은 마립간 왕릉인 초대형 단일원분이나 왕과 왕비의 합장릉인 초대형 표형분을 주분(主墳)으로 그 주변에 대소형 고분들을 배치하여 형성되었다. 집단복합묘군의 피장자 중에는 신분이나 사회적 인격이 대등한 부부나 혈연관계의 가족이 포함되었겠지만, 고분들 사이의 랭크 차이가 현저하여 피장자 모두가 혈연관계였다고 볼 수는 없다. 집단복합묘군에 포함된 하위 랭크 고분의 피장자들은 주분 피장자 및 그 가족과 주종관계의 '소속인'들이었다고 판단된다.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적석목곽분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묘형과 집단복합묘군은 신라 마립간시기 중앙의 사회집단과 그 성격을 말해준다. 앞으로 이에 대한 좀 더 정밀한 분석은 당시 신라사회의 여러 측면을 밝히는 데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신라 전기 적석목곽분의 출현과 경주 월성북고분군의 묘제 전개 (The Emergence of Wooden Chamber Tombs with Stone Mound and the Changing Nature of Tombs at the Wolseong North Burial Ground of Gyeongju in the Early Silla Phase)

  • 최병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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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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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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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고대국가 신라가 성립하고 발전한 신라 조기와 전기에 경주 월성북고분군은 경주지역의 중심고분군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전체의 중앙의 중심고분군으로 기능하였다. 경주 월성북고분군은 신라 고분문화 변동의 진원이었으며, 따라서 신라 고분문화 전개과정의 이해는 월성북고분군에서 조영된 고분과 묘제들에 대한 실상의 파악이 그 출발점이다. 이글은 월성북고분군을 비롯하여 경주지역에서 전개된 신라 전기 고분문화의 전개과정을 살피려는 작업의 시작으로 작성되었다. 사로국 후기부터 목곽묘가 축조되어 경주지역의 중심고분군이 된 월성북고분군에서는 신라 조기 석재충전목곽묘의 발생에 이어 신라 전기에는 적석목곽분이 출현하여 그 중심 묘제가 되었다. 적석목곽분은 매장주체부인 목곽, 목곽 주위의 사방적석에 더해 목곽의 뚜껑 위에 가해진 상부적석과 호석으로 보호된 고총 봉토가 묘광 내 목곽과 사방적석, 그 위의 저봉토로 이루어진 석재충전목곽묘와 차별화 된 것이다. 신라 전기 월성북고분군에서는 적석목곽분이 지상적석식과 상부적석식의 두 유형으로 나뉘어 전개되었으며, 신라 조기 이래의 석재충전목곽묘와 점토충전목곽묘, 토광묘도 공존하였고, 신라 전기에 새로 발생한 수혈식석곽분도 축조되었다. 그러나 그 중 고총으로 조영된 것은 적석목곽분 뿐이었으며, 묘제들 사이에는 그 외 고분의 입지, 묘곽 형식의 분포, 구조 각부의 축조기법과 규모에서도 차등이 있었다. 월성북고분군에서는 신라 조기부터 진행된 묘제 사이의 위계화가 신라 전기에는 한층 더 강화되었던 것이다.

쪽샘유적 신라고분 분포양상과 목곽묘의 성격 (The Distributional Patterns of Silla Burial Grounds and the Character of Outer Coffin Tombs in Jjoksaem Site, Gyeongju)

  • 윤형준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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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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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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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쪽샘유적은 사적 제512호 대릉원 일원에 속하는 신라고분군으로 학계에서는 월성북고분군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2007년부터 실시한 발굴조사는 마을이 들어서며 파괴된 신라고분의 현황을 파악하여 고분공원정비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하여 이루어 졌다. 조사결과 일제강점기에 확인한 155기 고총고분 외에 700여기 이상의 새로운 고분들이 확인되었으며, 적석목곽묘 이외에 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등의 소형묘 출토 비율이 70%에 달한다. 쪽샘유적 출토 목곽묘를 분석한 결과 묘광의 모양은 대체로 세장방형에 가까워 기존의 경주식목곽묘의 특징은 인정된다. 또한 묘광의 평면면적을 분석하여 대형, 중형, 소형의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동일 묘제 내에서의 무덤간 위계 차이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목곽묘 중 가장 이른 것은 후기 와질토기가 출토되어 3세기 대까지 올라가는 등 적석목곽묘 축조 이전에 쪽샘유적 곳곳에 목곽묘가 이미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립간 시기가 되면 선대 무덤들의 정체성은 존중받지 못한 채 파괴되기도 하는데, 이후의 목곽묘들은 적석목곽묘의 등장과 소멸과 궤를 같이 한다. 이들 후대의 목곽묘들은 적석목곽묘의 묘역에 의해 입지가 제한되는데, 죽은이의 신분에 따른 묘역 선정의 차등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적석목곽묘는 미고지에, 목곽묘는 저지대에 입지한다는 기존 견해는 쪽샘유적 발굴조사 결과 선입견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적석목곽묘 호석 최하단석과 목곽묘 등의 굴광 어깨선은 유의미한 레벨 차이가 없으며, 44호 적석목곽묘와 같이 해발이 낮은 곳에 입지하는 적석목곽묘나 B지구 목곽묘와 같이 미고지에 위치한 목곽묘등도 다수 확인된다. 목곽묘는 사로국에서 국가단계의 신라로의 발전과정에 대한 필수 연구자료로서 향후 쪽샘유적에서의 발굴조사 성과가 기대된다.

고고자료로 본 5~6세기 신라의 강릉지역 지배방식 (The Ruling System of Silla to Gangneung Area Judged from Archaeological Resources in 5th to 6th Century)

  • 심현용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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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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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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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고는 강릉지역에서 발굴조사된 고고자료를 검토하여 문헌기록과 비교하면서 신라가 강릉지역으로 진출하여 재지 세력을 지배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 가설을 세워 본 것이다. 강릉지역의 고고학적 양상은 신라가 처음 이 지역을 복속하고 재지세력들에 침투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데, 필자는 이 지역의 5~6세기 고고학적 특이양상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강릉지역은 신라 진출 이전 예국이라는 읍락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신라는 4세기 4/4분기에 처음으로 강릉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기존의 예국을 복속한 후 지역 실정에 맞게 재지세력을 통치해 나갔다. 이에 대해 고고자료와 문헌기록을 비교검토해 본 결과, 신라가 강릉지역을 복속한 후 취한 지배정책은 간접지배와 직접지배의 2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간접지배는 다시 초입기(I 단계)와 정착기(II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I 단계는 신라가 처음 강릉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로 신라는 재지세력의 자치를 그대로 허용하며 간접지배를 실시하였으며, 그 시기는 4세기 4/4분기부터 5세기 2/4분기로 보았다. 그리고 II단계는 신라가 강릉지역의 재지세력들에게 위세품을 하사하여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동시에 신라 중앙에 의해 강릉지역 중심세력인 초당동과 병산동 세력에게 위세품을 분여하여 서로 견제를 하게 만들어 재지세력간 힘의 균형을 통제하였다. 그 시기는 5세기 3/4분기에서 5세기 4/4분기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강릉지역을 북진의 전초 기지로 인식하고 나서는 직접지배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즉, 신라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상주시켜 지방제도를 확립하고 재지세력에 대한 재편과정을 거쳐 중심세력을 초당동 병산동 세력에서 신라와 친연성이 가장 강한 영진리 방내리 세력으로 교체하고 강릉지역을 완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시기를 6세기 1/4분기부터로 보았다.

경주 쪽샘유적 적석목곽분의 특징과 과제 (Features and Issues of the Wooden Chamber Tomb Covered with Stone in Gyeongju Jjoksam-Site)

  • 박형열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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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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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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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글은 경주 쪽샘유적에서 확인된 적석목곽분의 특징을 분석하여 정리하고 향후 발굴의 방향성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경주 쪽샘유적 적석목곽분에서는 6가지의 특징이 확인된다. 첫째, 지상식과 지하식 적석목곽분이 구분된다. 둘째, 분할성토와 적석부구조 등 축조양상이 확인된다. 셋째, 호석과 경계석, 잔자갈층, 제사시설 등 호석 전면부 구조가 확인된다. 넷째, 적석목곽분 간선후관계가 확인된다. 다섯째, 기 확인된 적석목곽분 범위와 크기가 밝혀져 기존자료의 불명확성을 해소했다. 여섯째, 적석목곽분의 군집단위가 확인된다. 이 여섯 가지의 특징을 정리하면 적석목곽분의 개별단위와 군집단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개별단위와 군집단위의 확인은 연접과 중복에 의해 어지럽게 위치한 적석목곽분의 크기와 범위를 분명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단위 간의 선후관계를 통해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적석목곽분은 미고지에 목곽묘와 중층구조로 자리하며 선별적 위치선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포양상과 형성과정을 정리하면, 경주 쪽샘유적 적석목곽분은 4단계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상의 적석목곽분의 개별단위와 군집단위의 확인과 형성과정을 기초로 향후 발굴조사에서 선택적 기획발굴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신선의 왕국, 도교의 사회 신라 -적석목곽분과 그 시대를 중심으로 - (Immortality,Taoism, and Tombs in the old Silla Kingdom)

  • 김태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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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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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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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In archeological aspects the 4th-6th centuries of the Silla kingdom has been callded the era of wooden chamber tombs with pebble and earth mounds(jeokseokmokwakbun). Moreover, the era is also regarded the age of the traditional and 'primitive' Korean religion which originated from inside the Korean Peninsula or the kingdom. However, the tombs and their burial accessories reveal that it is Taoism, not shamanism, that prevailed throughout the silla kingdom and its people during the jeokseokmokwakbun period. Above all things, almost all of the tombs excavated up to date yield in great quantities cinnabar and mica, which have been considered the best elixir of life in the Taoist world. Moreover the instruments to make the medicine for the deceased has been founded inside a tomb. The jeokseokmokwakbun tombs are famous for their great amount of buried articles and their grand scale. The tombs also have a large amount of gold, silver and beads, which are all thought to be the other cure-alls in taoism. Then why the silla people made the tombs and buried those elixirs of life for the deceased? The best answer we can imagine is this : for eternal living! In other words, cinnabar and mica are for the everlasting life of the deceased, the tombs were desingned as the 'eternal house' where the dead are living a immortal life. Needless to say, immortal living, even after he or she dies, is the ultimate purpose of taoism.

부여(扶餘) 능산리고분군(陵山里古墳群) 성격(性格)에 대한 재고(再考) (Revisiting of ancient tombs in Neungsan-ri, Buyeo)

  • 김규운;양숙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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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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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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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능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몇 차례 조사되었으나 아직까지 그 전체적인 양상을 이해하기에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기왕의 조사자료에 대한 분석 자체도 부족하다. 따라서 능산리고분군이 어떻게 조사되었고, 보존되어 왔는지에 대한 검토를 통해 능산리고분군을 새롭게 이해하고 접근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능산리고분군의 일련번호는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확실한 기준이 제시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부여해 왔다. 이는 당시 조사과정에서 일련번호가 어떻게 변하였는지에 대한 검토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리고 능산리고분군은 현재 정비되어 있는 7기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일제강점기에 서쪽부터 3+4+7+5기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하였고, 현 (現)8호분의 성과를 더하면 적어도 20기로 구성된 고분군임을 제시하였다. 또한 동고분군의 경우, 현실의 규모, 고우야마키로 제작한 목관에 옻칠을 한 공정까지 중앙의 6기와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면서 6기만을 왕릉군으로 설정해 온 기왕의 인식에 변화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궁극적으로 현재 정비되어 있는 능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정비가 완료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정보를 하나도 표현하고 있지 못함을 지적하였다. 현실로 진입하는 입구시설, 호석을 덮어버리고 고대하게 과장된 봉분이 그러하고, 심지어 주위에 다른 고분들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지표조사 한번 없었던 문제점을 부각시키면서 능산리고분군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