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War history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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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국가교육과정에서 시민성 교과의 출현과 지리교육의 동향 (A Continuous Concern of Citizenship Education in British Geography Education)

  • 조철기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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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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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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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본 연구는 영국 지리교육계의 시민성교육에 대한 관심의 역사 및 범위를 국가교육과정에서의 시민성 교과의 출현과 관련하여 고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주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한 국가정체성 중심의 시민성교육에 치중하였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개인적 가치와 가치 입장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사회정의에 초점을 둔 로컬 및 글로벌 시민성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리교육의 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시민성 교과의 출현이라는 외적인 요인이 시민성교육에 대한 관심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이후 영국지리교육계에서는 지리교과가 시민성교육을 계속 주도하도록 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이론적 정당화의 논리 구축뿐만 아니라, 교사들의 실천적 연구와 지속적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최근 영국 정치 및 사회문화 지리학계에서는 차이와 정체성을 만드는 시민성의 공간에 주목하고 있으며, 국가 스케일에서 로컬 및 글로벌 스케일에 초점을 둔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성으로 관심을 전환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지리교과를 통한 시민성교육 역시 국가정체성 중심에서 탈피하여 사회정의의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로컬 및 글로벌 시민성교육에 더욱 치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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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사운드스케이프의 특성과 재현 (On the Characteristic and Representation of Kyodong Island Soundscape)

  • 김지나;조경진;권병준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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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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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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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사운드스케이프를 통해 시각적 풍경 이면에 축적되어 있는 지역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전통을 경험할 수 있으며, 사운드스케이프를 문화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사운드스케이프는 M. Schafer가 비판적, 미적 관찰 대상이 되는 소리 환경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으로 시각뿐만 아니라, 다양한 감각을 사용함으로써 경관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는 이러한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평화의 섬'을 비전으로 하고 있는 DMZ 접경지역의 교동도에서 사운드스케이프를 조사, 분석한 후, 지역주민 교육과 방문객 경험을 위한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재탄생시키고자 하였다. 교동도는 DMZ 접경지역이자 섬 전체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격변을 겪었으며, 최근에는 지역활성화를 위한 민관의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한강하구중립수역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을 문화적으로 해석하여 '평화의 섬'으로서 새롭게 장소마케팅이 되고 있다. 교동도의 사운드스케이프 조사를 위해 먼저 사운드아티스트와 함께 사운드스케이프의 개념과 기술에 대한 워크샵을 실시하였으며, 이어 관찰조사, 청취조사, 문헌조사를 진행하였다. 녹음결과물은 Schafer의 사운드스케이프 개념에 맞추어 기조음, 신호음, 표식음으로 구분하여 분석하고 사운드맵으로 기록하였으며, 교동도의 지역특성과 비전을 반영하여 사운드스케이프 작곡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스튜디오 작업을 진행하였다. 최종결과물은 '화합과 평화에 대한 희망과 염원'이라는 전체 주제를 바탕으로 '교동도와의 만남', '전쟁과 긴장', '교동도의 일상', '화합과 평화를 찾아서'로 세부 주제를 구성하였고, 전시와 YouTube를 통해 공유하였다. 이를 통해 교동도의 역사 및 지역정체성을 보존하고, 새로운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매체로서 사운드스케이프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본 연구결과물을 교동도에서 역사적,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기존 장소들을 활용하여 전시함으로써 공간활용을 제고하고, 지역 역사와 문화를 담은 관광자원뿐만 아니라, 교육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의의를 가진다.

군사훈련으로서의 가라테 가치와 국방 체육적 효과 (Value of Karate and Effects of Defense physical as Military Training)

  • 박용성;이경행;박상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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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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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7-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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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 논문은 가라테의 역사와 군사훈련으로서의 활용, 그리고 국방체육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고찰하였다. 가라테는 오키나와에서 기원한 무술로, 근대 들어 일본 군대의 훈련에 도입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백병전에 대비해 가라테 훈련을 강화하였고, 전후 주일 미군을 통해 가라테는 서구 사회에 전파되었다. 현대 군대에서도 가라테를 포함한 각종 무술이 군사훈련에 활용되고 있다. 미 해병대의 MCMAP, 이스라엘 군의 크라브마가 등이 대표적인 군사무술 프로그램이다. 이들은 가라테, 유도, 복싱 등 다양한 무술의 기술을 융합해 실전에 최적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다. 군 교육에서 가라테는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능력 향상과 부대 전체의 전투력 강화에 기여하고 있다. 격렬한 수련을 통해 체력과 정신력을 기를 수 있고, 백병전 상황에 대비한 실전 기술 습득이 가능하다. 나아가 동료와의 호흡을 맞추는 단체훈련을 통해 전우애와 단결력도 다질 수 있다. 다만 현대전의 양상 변화로 군 교육에서 무술 훈련의 비중과 방식에 대한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첨단 무기의 발달로 개인 간 격투보다는 팀 단위 작전 수행 능력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전통 가라테의 기술체계를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현대전에 맞게 변형·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체력, 불굴의 정신력, 전우애 등 군인의 핵심 자질을 함양하는 데 있어 가라테를 포함한 무술 수련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앞으로도 각국 군대는 시대 변화에 맞춰 무술 훈련 체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군정의 문화정책과 미술, 1945~1948 (A Study on the Fine Art and Cultural Policy under the U.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1945~1948)

  • 안진이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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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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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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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This study is about the cultural policy related to fine art under the U. 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 from September 8, 1945, to August 15, 1948. Drawing on the previous studies of Korean art history in the 'Liberation Period', this study especially concentrates on intention, attitude and activities of the USAMGIK. Particularly the historical documents, stored at the National Archives at the College Park, Maryland, U.S.A., were valuable to do research on the cultural policy of USAMGIK. The cultural policy was subordinated to the political objectives of occupation that can be summarized to building a stronghold of anti-communism in South Korea. Under the U.S. Military government control, cultural matters were assigned to the Cultural Section, the Bureau of Education, which later turns into the Bureau of Culture, the Department of Education. The Bureau of Culture dealt with matters of the ancient Korean art treasures and of the Korean contemporary art. USAMGIK reopened the Korean National Museum which had been closed by the Japanese since the World War II period. After that, U.S. Department of State sent arts & monuments specialists to South Korea for investigating ancient Korean art and culture. Although some of the destructed art treasures were restored during the occupation, th ere were many negative cases including intentional destruction of historic sites or loot of art treasures by U.S. army. In contrast to their interest in the Korean antiquities, USAMGIK payed little attention to promoting the Korean contemporary artists and their arts. USAMGIK distrusted and suppressed the artists of leftism, while they kept good relations with the pro-American artists and the right-wing artists. In conclusion, the visual-cultural policy of USAMGK was mainly planned and carried out in order to preserve the national interest of the United States. This period produced long-term effects on the fine art and visual culture of South Korea, in terms of institution, policy, and reorganization of art community based on anti-cummu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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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의 기술경영 논의의 진화: 한국에 대한 시사점을 중심으로 (A History of Management of Technology in the United States: Implications in Korea)

  • 김병윤;정철우;김길선
    • 기술혁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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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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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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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미국에서의 기술경영 분야의 발전과정을 통해 기술경영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미국에서 기술경영은 2차 대전 전후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기술과 사회의 관계의 변화에 따라 내용을 달리해왔다. 본 연구에서는 (1) 2차 대전 전후의 'R&D 관리' 또는 '프로젝트관리' 단계, (2) 70-80년대 초반의 혁신에 대한 이론화 전개 단계, (3) 기술 경영논의의 확대 및 기술경영교육의 확산 단계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 기술경영의 개념 및 이해가 시대적 문제해결 과정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면서 진화해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복수적 정체성은 그 자체가 병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기술과 사회의 접점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기술경영교육의 측면에서는 다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함의를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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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공정성과 권력의 탐구 (A research of fairness and power in sport)

  • 김진훈
    • 한국체육학회지인문사회과학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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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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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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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연구는 스포츠에서의 공정성과 권력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였는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스포츠에서 공정성에 위배되는 도핑과 승부조작에 대한 문제점들을 인간 욕망의 산물인 권력과의 관계에 대하여 탐구하였다. 첫째, 도핑과 권력의 탐구이다. 도핑의 역사는 스포츠의 역사처럼 오래전부터 존재하였다. 선수들의 약물복용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권력과의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그 중 승리에 따른 부와 명예 그리고 기득권에 대한 유혹과 갈망은 개인, 사회,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폭넓게 자행되었다. 특히 힘의 표현이 냉전시대에서 스포츠에 투영되어 잘 반영되었으며, 이 당시의 잘못된 사고와 관행들이 아직도 도핑과 반도핑의 관계에 대한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다. 둘째, 승부조작과 권력의 탐구이다. 승부조작 또한 도핑처럼 스포츠의 역사에서 항상 존재해왔다. 스포츠와 공정성의 관계에서 승부조작은 인위적인 결과를 결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 도박이나 다른 범죄로 연결되어 문제가 되며, 이는 다시 스포츠로 영향을 미쳐 악순환의 연속이 되게 한다. 이러한 승부조작의 이유에는 권력의 요소인 자본의 형성과 이익을 위한다는 명확한 원인이 형성되어 있어 공정한 스포츠를 더욱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스포츠의 공정성과 권력의 관계에서 도핑과 승부조작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있으며,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스포츠의 물질적 가치에 매몰되어 도핑과 승부조작이 아무렇지 않게 용인하거나 묵인되면서 권력의 요소들에 의해서 스포츠 파이만을 키우기만 한다면 마냥 스포츠의 미래가 밝다고만 장담할 수 없다.

과거와의 대면 : ${\ll}$미르티스${\gg}$ 전시를 통해 기억된 아테네 대 역병 (Face to Face with the Past: Memorizing the Plague of Athens through the Exhibition)

  • 조은정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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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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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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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The exhibition was started in 2010 in the New Acropolis Museum of Athens and embarked a journey since 2011 as a travelling exhibition inside Greece and abroad. The main purpose of the exhibition was to draw attention of the general public to the value of the 'rescue excavation' and of cultural heritage of Greece, by presenting the reconstruction bust of a girl whose skull was found in Kerameikos cemetery of ancient Athens. The new Kerameikos excavation was initiated by the construction of Metropolitan Railway lines in the center of Athens between 1992 to 1998. It revealed a pit of a mass burial where about 150 people were inhumed in a very hasty way without proper funeral rites or offerings. These bodies are identified as the victims of the infamous plague of Athens in the first years of the Peloponnesian War(430-426 BC). The epidemic disease killed almost one third of the city population including Pericles, and brought extreme fear and panic to the Athens society. The traditional funerary rites were totally disrupted, and the social decorum and the morality among the citizens became enfeebled. The plague and the civil war were the decisive factors to end the Golden Age of Democratic Athens. However, the exhibition organizers did not focus on the tragic aspect of this disaster and its casualties. Their main concern was to simplify the scholarly works of archaeological excavation and microchemistry analysis so that the exhibition viewers will easily understand and empathize the living value of the scholarly works of ancient Greek civilization. The centripetal element of the exhibition was the vivid face of an 11 years old ancient girl 'Myrtis', which was carefully reconstructed based on both the scientific data and artistic imagination. Also the set up of the exhibition was structured in order to stimuli cognitive and emotional experience of the visitors who witnessed the rebirth of a vibrant human being from an ancient debris. The museologists' continuous efforts to promote projects of contemporary artists, publications, and school programs related to the exhibition indicate that the ulterior motive of this exhibition is the cultural education of the present and future generation through the intimate experiences of ancient Greek life. Also this is the reason why the various museums that held the travelling exhibition try to make the presentation as a gesture of memorial service for an anonymous Athenian girl who deceased circa 2400 years ago. The pragmatic efforts of Greek scholars and museologists through exhibition show us a way to find a solution to the continuous threat of cultural resources by massive construction projects and land development, and to overcome public indifference to the history and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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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수영복에 관한 연구 -1946년에서 1960년대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Bikinis in the United States, from 1946 to the 1960s)

  • 이예영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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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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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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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Bikini, a brief two-piece bathing suit revealing the wearer's navel, was first introduced in Paris, in 1946. However, it was not until the late 1950s that Americans were ready to adopt bikinis. Therefore, I focused on the following research questions to understand the popularization process of bikinis in the United States, from 1946 to the 1960s: 1. Why were Americans initially hesitant to adopt the bikini? 2. What were the factors that influenced the popularization of the bikini among Americans in the late 1950s? Primary sources including Bazaar. Madmoiselle, Vogue, The New York Times, and Life were reviewed. I referred to secondary sources on the history of fashion and American popular culture to interpret primary sources. According to the primary sources, Americans were hesitant to adopt the bikini, partly due to the excessive demand on the wearer's figure. However, the conservative social atmosphere during Cold War would not accept immorality and obscenity which would threaten America's future. Therefore, the campaigns against the sex industry, which developed prominently after WWII, predominated American society during the 1950s. Under this atmosphere, a small number of pictures and articles on bikinis appeared in the primary sources. Bikinis were only found in advertisements including sun lotions and hair removers. However, American society had to accept the change in sexual mores by the end of the 1930s. Body-revealing fashions including miniskirts, hot pants, and see-through material reflected the change in social convention. By the end of the 1950s, the number of pictures and articles on bikinis also began to increase in the primary sources. More Americans adopted bikinis with the increasing number of private pools and European trips. The vogue of sun-tanning and movies featuring bikinis further contributed to their popularity in the late 1930s and into the 1960s.

한국 현대 치의학의 발전 1946-1969년 논문, 증례보고, 종설 및 학술강연회 연제를 중심으로 (Development of modern dentistry in Korea)

  • 신유석;신재의
    • 대한치과의사협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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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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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7-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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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Korean dentist's new mission was extended in dental practice field since the National Liberation Day of Korea. Modern dentistry development were due to the introduction of american dentistry, the development of Military dentistry, the unified academic activities koreans dental Association and improvement of korean dentist system. Modern dentistry development factors were as follows, First, Seoul National University's professors have been sent for studying abroad since May 1954. Thanks to this advanced system, each dental department established branch academy. Researchers and academic activities were increased in Seoul National University, Second, from January 1954, the military started training program to the korean dentists in the United States, and also the korean dentists were sent to the US Army hospital in korea for practical training courses (On the Job Training) so they could get chances to learn the advanced dentistry. During the korean war, the oral surgery dentists enlarged treatments to the maxillofacial field. Third, korean Dental academy meeting, special lectures and tables clinic from 1947 were contributing to the development of modern dentistry in the transmission of knowledge and skills. Since 1955 "Dentistry(齒學)" with a focus on the translation of foreign literature also developed modern dentistry. Since 1958 the International dental conference could broaden dental knowledge, it also provided opportunities to communicate with the world dentistry. On Oct 11, 1962, revised the Articles of association in Korean Dental academy and korean dental association unified meeting and enhanced the conferences. Improvement of korean dentist system in 1964 unified the dentists as new dentist education. Articles, case reports, review articles and academic meetings of korean dental association from 1946 to 1969 analyzed to demonstrate the development of korean modern dentistry, The titles and lectures were classified according to department and they were organized by topic.

송대 무학에 관한 사적 고찰 (A Historical review on Martial Study for Song Dynasty)

  • 신수용
    • 한국엔터테인먼트산업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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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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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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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연구는 병법교육을 담당하였던 송대 '무학(武學)'을 주제로 문헌적 연구를 실시한 것이다. 중국에서 무거(武擧)와 무학은 무신관료(武臣官僚) 체계와 연관이 있으며, 무술을 전통체육활동으로 취급하는 체육학에서도 중요한 사료가 된다. 무학의 설립은 송대의 관료주의와 유교사상의 기풍으로 덕(德)과 의(義)를 갖춘 유장(儒將) 개념의 등장과 확산이 단초가 된다. 무학은 최초로 1043년(慶歷 3년)에 설립되고 1072년(熙寧 5년)에 공식적인 면모를 갖추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선발하는 기능이 원활해지면서 정치상의 효과를 보아 국가의 경쟁력을 향상시켰다. 무학 교육내용은 첫째, 보병·기병·궁병의 신체 기술과 둘째, 경서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즉, 손자(孫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위료자(尉繚子),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 강태공육도(姜太公六韜), 당리문대(唐李問對)의 뜻을 이해하여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 셋째로 현실적인 문제해결 등을 시험하여 그 대책을 가르쳤다. 이러한 무학은 신체기술(人), 전쟁(事), 무기(物)의 세 가지 측면을 포괄하고, 교육·선발·승진의 기능을 담당하여 무거제의 발전과 존속을 꾸준히 뒷받침하였다. 수집된 자료를 통해 중국의 전통사회에서 체육전문인이라고 하라 수 있는 무관의 조건이 신재는 물론이고, 지도자의 통솔력과 공맹(孔孟), 그리고 병법을 강론하는 등의 지식을 겸비해야하는 사회적 요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