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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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릉(貞陵) 사각 장명등(四角長明燈) 양식의 원류와 전개 -사찰 석등과의 비교를 통해 - (The Origin of the Square-Shaped Jangmyeongdeung of Jeongneung Royal Tomb and Its Stylistic Development -In Comparison with the Buddhist Temple Stone Lanterns-)

  • 김지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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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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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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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장명등은 능묘의 능침 앞 중앙에 놓여 사자(死者)를 지키고 밝혀주는 상징적인 기능과 함께 뛰어난 조형성으로 능역을 장식하는 역할도 담당했던 중요한 석물로서, 석등의 한 범주에 속한다. 정릉 장명등은 조선왕릉 장명등 중 최초로 조성된 장명등이며, 조선 전 중기 왕릉 장명등 가운데 유일한 사각 장명등(四角長明燈) 형태를 이루고 있다. 대석, 화사석, 옥개석 형식이 기본적으로 사각을 이루고 있어 팔각 장명등(八角長明燈)형식과는 완연하게 구분된다.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을 1매의 통석으로 마련하고, 화사석은 1매의 통석으로 전후로 화창을 표현하였다. 정릉 장명등은 고려 현 정릉 장명등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으나, 이보다 뛰어난 조형성을 보이고 있어 조선 개국 이후 최초로 조성되었던 왕릉 장명등으로서의 격조를 무리없이 보여준다. 본고에서는 정릉 사각 장명등 양식의 원류를 파악하는 데 연구 목적을 두고 고려 왕릉 장명등과 더불어 사각 장명등의 연원이 되는 사찰 사각 석등과의 비교 고찰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고려 말 회암사지 지공선사 석등 및 나옹화상 석등, 조선 초 회암사지 무학선사 석등 및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석등과 다음의 공통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대석, 화사석, 옥개석 등이 기본적으로 사각을 이루고 있는 점, 둘째, 간주석이 낮아지면서 대석부분이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는 점, 셋째, 화사석의 경우 대석 위에 양측으로 석재를 세워 자연스럽게 전후로 화창을 구성하는 방법, 넷째, 옥개석이 사모지붕 형태를 하고 있는 점 등이다. 한편 정릉 장명등에는 불교적 요소가 다분히 내제되어 있는데, 간주석의 삼주문(三珠文)표현이 그것이다. 삼주문은 밀교와 관련된 상징물의 하나로서,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불화 및 조선 초기 보살상의 보관에 표현된 예가 확인된다. 정릉 장명등은 이후 묘 사각 장명등 조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15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점차로 정릉 장명등의 영향에서 벗어나 팔각 장명등 형식이 보다 많이 가미된 경향으로 변모해 나간다. 정릉 사각 장명등은 고려왕릉에서 조선왕릉으로의 능제 계승, 사찰 사각 석등 양식의 수용, 그 시대 불교사상의 반영 등 당대의 시대상과 문화의 흐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담겨진 산 증거물로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

한국 인삼시의 전개와 의미망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 하응백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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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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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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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한민족은 역사 기록 이전부터 인삼을 복용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한시(漢詩)는 신라, 고려, 조선 지식인들의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문학 양식으로 발전, 전개되었다. 본 논문은 '인삼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한국인의 한시는 어떤 것이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인삼(人蔘), 산삼(山蔘), 홍삼(紅蔘), 백삼(白蔘) 등을 키워드로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를 검색해 인삼에 관한 시를 찾아내어 그 의미망을 살펴보았다. 인삼관련 한시를 편의상 '인삼시(人蔘詩)'로 명명(命名)했다. 2021년 11월 현재, 검색을 통해 찾아진 '인삼시'는 삼국시대 2편, 고려시대 2편, 조선시대 23편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삼시의 시초는 6세기경 고구려에서 백성이 노래로 불렀던 「고려인삼찬(高麗人蔘讚)」이란 시다. 고려시대 인삼시는 안축(安軸)의 시로 대표된다. 안축은 인삼 조공의 부작용을 사실적인 관점에서 노래했다. 조선시대의 인삼시는 전기 서거정과 후기 정약용으로 대표된다. 서거정의 인삼시는 인삼의 신비적인 약리작용을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용재 성현의 「인삼(人蔘)」이라는 시도 인삼의 신비한 약효를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다산 정약용의 인삼시는 실학자답게 대단히 실용적이다. 다산은 가장 많은 다섯 편의 인삼시를 남겼다. 다산은 직접 인삼 농사를 시도했고 그 과정을 시로 남겼다. 그 시에서는 인삼 농사 실패와 성공의 스토리를 지켜볼 수 있다. 다산의 인삼 농사는 정조 이후 자연삼의 고갈과 재배삼의 보편화에 따른 전국적 현상이기도 했다. 19세기 초반부터는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로 인삼 농사가 성행했고, 여타 지역에서도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특이한 것은 김진수의 시다. 청나라의 수도 북경 동인당에서 조선의 인삼이 '松嶽山蔘(송악산삼)'이란 상표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시로 표현했다. 매천 황현도 1900년 한시로 된 인삼시를 남겼다. 한국 한시의 전통에서 인삼시의 전개를 의미망으로 파악하여 도식화하면 이렇게 된다. 1) 위민(爲民) 정신의 인삼시 - 고려의 신흥사대부(안축) 2) 낭만적 인삼시 - 조선 초기의 관학파(서거정, 성현 등) 3) 실용적 인삼시 - 조선 후기의 실학파(정약용, 김진수, 황현 등) 한국 인삼시의 전개를 살피면서 그 의미망을 추출해 보았다.

경기도 지역 석탑의 전개과정과 조영 특징 (The Development Process and Construction Characteristic of the Stone Stupa in Gyeonggi-Do)

  • 이서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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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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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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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은 경기도 지역 석탑의 건립 현황과 양식 분석을 통해 경기도 지역 석탑이 갖는 특징과 의의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경기도 지역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불상, 석탑, 승탑, 마애불 등 다수의 불교 조형물이 조성되었으며, 이 가운데 불상과 더불어 신앙적인 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불탑이다.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지역에도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으며 그에 따른 석탑 건립도 성행하였다. 본 논문은 경기도 지역 내 지정된 석탑을 기본으로 48기의 석탑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분포 현황을 보면 한강을 기준으로 경기 북부보다는 남부에 집중 건립되었는데, 중심이 되는 지역은 안성, 이천, 용인, 여주 등이다. 이는 지역적 특수성도 기인하지만, 북부에는 석탑을 건립하는 대형 불사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별 특징을 보면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석탑이 남아 있어 석탑이 꾸준히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고려시대 석탑이 집중 건립되었는데, 고려 전기에 남부 지역에서 활발히 건립되었으며, 고려 후기에는 경기도 전역에 걸쳐 석탑이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가까운 지역 및 왕실과 관련이 깊은 사찰들에 석탑이 건립되어 당시 시대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석탑은 지역적 특수성, 즉 교통의 요지인 곳에 주로 건립되었는데 안성, 이천, 용인, 여주 등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목되는 지역에 불사가 성행하였고 그로 인해 석탑 건립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술사적 의의를 살펴본 결과, 성주사지 석탑의 영향을 받아 어비리 삼층석탑에서 별석 초층탑신받침이 확인되는 점, 고려시대 석탑 중 백제계 석탑은 확인되지 않고 주로 신라계 석탑과 고려 양식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점, 탑신 결구 방식과 탑신 제작 방식에서 전국적으로도 사례가 많지 않은 특징이 나타난다는 점, 마지막으로 석탑 장엄조식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조선전기 관경십육관변상도에 보이는 고려 전통의 계승과 변용 -정토인식과 왕생관의 변화를 통해- (Study on the Inheritance and Transformation of the Goryeo Tradition in the Illustrations of the Sixteen Contemplations of the Amitayurdhyana Sutra of the Early Joseon Dynasty -with the Focus on the Concept of Rebirth in the Pure Land-)

  • 이승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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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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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6-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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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전기 제작된 관경변상도는 전환기 조선사회의 시대상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정토인식이 화면의 구성과 도상에 잘 투영되어 미술사적,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조선 15세기 관경변상도는 모두 3점으로 이중 1435년 <지온지 관경변상도>와 1465년 <지온인 관경변상도>는 왕실인물과 고위승려의 발원으로 조성되었다. 이 두 작품은 1323년 <지온인 관경변상도>의 구성과 도상을 계승하면서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고려후기에 융성했던 천태종(天台宗)의 정토신앙경향을 계승하고 있다. 이는 고려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선호했던 자력적(自力的)인 정토신앙의 경향이 조선의 왕실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천태사상의 영향을 받은 정토신앙은 조선전기까지 계승되어 천태종이 불교의 통폐합과정에서 선종에 흡수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천태정토신앙의 경향은 이 두 작품이 각각 천태승 행호와 행호를 진불(眞佛)로 모셨던 왕실의 어른 효령대군이 발원하였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한편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사회가 안정화되어 감에 따라 관경변상도를 포함한 정토불화들은 점차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교학적이고 자력적인 정토인식보다는 아미타불의 힘에 의해 구원받고자 했던 타력적인 정토신앙이 확산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도상이 용선접인도상이다. 자력적인 정토왕생을 좀더 가치있다고 여겼던 시기에 제작된 <묘만지 미륵하생경변상도>의 용선접인 도상에서는 부처님의 인도를 받고 있지 않다. 이에 비해 조선전기의 용선접인 도상에서는 아미타부처님이 관음, 지장, 혹은 인로왕보살등과 함께 왕생자를 이끌고 배를 타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된다. 이는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한다는 타력왕생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전기 제작된 3점의 관경변상도는 유교주의 사회에서 타력적인 신앙을 선호하는 정토신앙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불화로서 매우 의미가 크다.

청평사(淸平寺) 선원(禪園)의 시대적(時代的) 형성(形成)과 변천상(變遷相) (The Periodical Formation and Phase of Change of Cheongpyeongsa Temple Zen Garden)

  • 윤영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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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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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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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청평사는 고려 초 창건되었지만 현재와 같은 공간의 틀은 고려 중기 진락공 이자현(1061-1125)이 1089년 입산해 선사상을 바탕으로 구축한 것이다. 이 연구는 이자현이 청평사의 기반을 구축한 문수원 이후 형성, 발달했던 선원 내 인공유적의 출현과 존속의 시대사적인 변천과정을 고문헌을 근거로 하여 개념적으로 구현해 보고자 하였다. 이자현의 문수원 때 조성된 경외 8암자 중 식암, 견성암, 양신암 등 세 암자만이 조선 후기까지 복원, 수리를 거쳐 건재하며 상징적 암자로 보존되어 왔다. 또 이자현 때 조성된 영지도 고려시대 연못의 원형적 의미를 지닌 소중한 조경유적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자현이 식재했다는 구송은 후계수를 이어가며 1800년대 중반까지 살아있었다. 조선 중기 보우대사(1509-1565)는 이자현이 구축한 문수원을 기반으로 청평사로 개칭하고 중창하면서 경내를 능인전(대웅전)만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짓고 확장하여 현재와 같은 경내 공간구조로 만들었다. 또 경외 영지의 개축, 궁원으로부터의 조경식물 이식 등 경관의 질을 한층 높여 청평사를 역대 가장 번성한 모습의 선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인 1800년대 중반 이후 청평사는 더 번성하지 못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선원의 건축물은 경내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멸되고 기타 시설물들은 방치된 채로 현대까지 남아 있었다.

조선 세종시대 병선(兵船)의 해방(海防)전략·전술 (Strategic and Tactical Use of Naval Ship for Maritime Defense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 민장원
    • Strategy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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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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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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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Discussion of maritime defense' which began to be discussed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to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 maritime defense system. Also it can identify changes in the aspects of the naval ship operation and their strategic tactic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Japanese raiders began a full-scale invasion from 1350 at the late Goryeo Dynasty, So the government realized the need to raise the 'Sea power' and to organize the maritime defense system for defending enemy invasion. for example, the reinforcement of naval forces, construction of warships, develoment of weapon systems and so on. which have achieved remarkable growth while continuing, have also been used to carry out a three-time 'Conquest of Daemado' in 1389, 1396, 1419. Until then, however, it is difficult to interpret that the naval forces had a systematic and organizational combat operation system. According to fighting patterns on combat reports before the early days of King Sejong's reign, Our naval forces had no advantage over the Japanese raiders in terms of their capabilities and tactics. Then, the period of King Sejong marked a watershed in maritime defense history. Based on accumulated experience of naval battles and force Projections, The paradigm shift of the naval strategic tactics for maritime defense has occurred. First, the capability of the naval vessels has improved. for example, ship speed, durability, and weather resistance. Through these efforts, navy forces were able to pursue and attack, destroy enemy's ships by taking advantage of the 'Ship speed superiority'. This has led to tactical shifts from defensive to offensive. Second, purpose to support offensive tactics, the government put a strategic plan into practice that is the forward depolyment of naval bases from the inland to the coast, considering the 'sea environment' and 'threat'. By doing so, Joseon dynasty was able to secure 'the command of the sea'. This may be a little different from the perception of the so-called 'peace period' that King Sejong's era. We need to remember that Joseon dynasty was working hard for its defense. When studying history of maritime defense, these strategic and tactical elements must be fully considered. Only then we can have a coherent understanding of the many naval battles in the past, including the Imjin War(1592-1598).

《해동명적》을 통해 본 조선 초기 서풍 (Calligraphy Style in the Early Joseon Period : An Examination of Renowned Calligraphy of Korea)

  • 유지복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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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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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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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이 논문은 ${\ll}$해동명적(海東名迹)${\gg}$에 실린 필적을 분석하여 조선 초기 서풍의 흐름과 그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ll}$해동명적${\gg}$은 16세기 초에 신공제(申公濟)가 간행한 서첩으로,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필적을 한데 모아놓은 최초의 집첩(集帖)이다. 필자는 선행연구에서 다양한 이본으로 남아 있는 목판본과 석판본의 간행 배경과 판본을 분석하였다. 이번 연구에서는 ${\ll}$해동명적${\gg}$에 실린 조선 초기 필적의 서풍을 분석하는 데 주력하였다.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관각(館閣)의 문서를 담당했던 사수(寫手)들의 서풍과 고령신씨(高靈申氏) 집안에 가전(家傳)되어 오던 서풍의 변화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왕희지 서풍이 건재한 가운데 원말 복고주의의 영향으로 파생된 다양한 서풍이 수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서역 변방 출신 강리노노(康里??)의 서풍이 폭넓게 수용된 흔적이 주목된다. 이는 으레 조맹부(趙孟?)의 송설체(松雪體)로 대변되었던 여말선초에 실은 다양한 원대의 서풍이 유입되고 있었다는 징표이다. 마지막으로 "패관잡기"에 실린 어숙권(魚叔權)의 기록의 진위 여부를 추론해 보았다. 어숙권은 ${\ll}$해동명적${\gg}$에 실린 박경의 필적이 실은 신자건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숙권의 출신과 정치적 입지를 기준으로 신자건과 박경의 관계성을 분석한 결과 어숙권의 주장이 타당치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과 기록자료로 본 황해도 성불사(成佛寺)의 불교조각 (Buddhist Sculptures from Seongbulsa Temple in Hwanghae-do Province as Seen through Gelatin Dry Plates and Archival Materials from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 허형욱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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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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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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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일제강점기의 유리건판 사진과 조선총독부박물관 공문서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북한 지역 소재 문화유산이 큰 피해를 입기 전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이에 최근 유리건판과 총독부박물관 문서를 활용한 북한 지역 불교조각 연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본고에서는 황해도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인 황주 성불사의 불교조각에 대해 기존 성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새로운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문헌기록을 토대로 성불사의 연혁을 정리하고 현황을 짚어본 후, 유리건판 속 존상별 제작시기와 조성배경 등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성불사 불교조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1945년 해방 이전 성불사의 불교조각은 보살상 2건, 여래상 4건, 삼존상 1건의 총 7건이 확인된다. 제작시기에서는 고려 전기 2건, 고려 후기 1건, 조선 전기 3건, 조선 후기 1건의 분포를 보인다. 이 가운데 오늘날 실물이 남아있는 2건이 주목된다. 먼저 성불사 응진전에서 촬영되었다는 고려 전기 석조약사여래좌상이다. 이 상의 당시 대좌 실측도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현재 정방산 내금강 골짜기의 옛 상원암 터에 전하는 머리없는 석조약사여래좌상 및 대좌 부재와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이 판단이 맞다면 북한 지역에 전하는 고려 전기 불교조각의 작례를 새롭게 확보하는 것으로서 의의가 크다. 다른 하나는 성불사 극락전에서 발견된 조선 1454년(단종2) 작 금동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이 상은 현재 사리원력사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조선 전기 이북 지역에서 확인되는 소형 금동불의 기년작으로서 중요하다. 본고는 성불사라는 단일 사찰에 초점을 맞추어 북한 지역 불교조각을 고찰한 사례 연구이다. 앞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자료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된다면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의 연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 불좌상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Wooden Seated Vairocana Tri-kaya Buddha Images in the Daeungjeon Hall of Hwaeomsa Temple)

  • 최성은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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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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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0-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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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정유재란을 겪으며 전소(全燒)된 화엄사는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의 주도 아래 재건이 이루어졌다. 대웅전에는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이 봉안되었는데, 1634년에 완성하여 1635년에 점안·봉안되었다. 2015년에 석가불상 복장 <시주질>과 노사나불상 대좌 내부 판재(板材)에 적힌 <묵서명>이 조사되고, 2020년에 노사나불상의 복장 <시주질>이 조사되어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조성에 참여한 청헌, 응원, 인균을 포함한 열여덟 명의 조각승들이 밝혀졌고 선조(宣祖)의 아들 의창군 이광(李珖)을 비롯한 왕실과 종친, 천명이 넘는 승속(僧俗)의 시주자들이 동참한 대규모 불사였음이 알려졌다. 비로자나삼신불상의 본존은 높이 2.76m의 장육불상으로 당시 불교조각에서 널리 유행하던 장신형의 비례감이 아닌 두부가 크고 어깨가 좁은 고식(古式)의 단구형(短軀形) 비례감을 보인다. 주먹 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과 보관을 쓴 보살형의 노사나불상은 북송대에 고려로 전해진 전통적인 도상(圖像)이며, 석가불상이 결한 독특한 항마촉지인의 형식은 명(明)에서 전래된 경(經) 변상도에 나타난 도상이 불교조각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화엄사 비로자나삼신불상에서 나타나는 신구(新舊) 양식과 도상의 혼재는 화엄사 불사(佛事)를 맡았던 조각승들이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귀족적 전통을 계승한 조선초기 불교미술에서 화엄사 삼신불상의 범본을 구하려했던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전란으로 소실된 고려시대 비로자나삼신불상의 원(原) 모습에 가깝게 복원되기를 바라는 화엄사 산중대덕(山中大德)들의 기대가 불상조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화엄사 삼신불상의 노사나불상은 고려시대 비로자나삼신불상과 도상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화엄사에 이와 유사한 도상과 양식의 비로자나삼신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만우 휘헌의 『화엄사지』(1924)에 따르면, 화엄사는 고려 왕실의 축성의례를 거행해온 사찰로 여겨지는데, 이 전통이 조선후기까지 이어져 화엄사 재건 불사에서 새로 조성된 대웅전 비로자나삼신불상 역시 조선왕실의 축성의례를 위한 예배대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화엄사 재건에 왕실과 종친이 시주자로 참여한 점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사상사에서의 묵가(墨家) 비판 - 벽리단론(闢異端論)의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 (The Critic on Mohism in the History of Korean Thoughts Centered on the Theory of Rejecting Heterodoxy)

  • 윤무학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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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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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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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이 글은 선유(先儒)들의 묵가에 대한 비판을 개괄하고, 이를 전제로 하여 고려말부터 시작하여 조선조 후기에 이르는 묵가 비판의 전개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우리나라 고려 이전의 문헌에서는 묵가나 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를 명시적으로 배척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여말선초에 이르면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맹자의 벽이단론의 관점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양주와 묵적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불교와 노자를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조 지식인들의 묵가에 대한 이해와 비판 양상의 특징은 묵가의 이념 자체에 대한 비판보다는 주로 다른 이념이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말선초의 불교와 노자, 중후기의 문장학(과거학), 서학(천주교), 나아가 관료들의 부패 등이 포괄된다. 내용면에서 본다면, 묵가의 십대 주장 가운데 「겸애」와 「절용」(절장, 비악)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조선 중후기에 이르면서 「명귀(明鬼)」와 「천지(天志)」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중국사상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평화 이념이 반영된 「비공(非攻)」이나 운명론을 부정하는 「비명(非命)」에 대한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의 인문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 측면에서 볼 때 적극적으로 비판할 여지가 없었던 데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묵가 이념과는 별도로 묵자 개인의 묵수(墨守)와 관련된 행위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또한 후기에 이르면서 묵자서는 이념서가 아니라 유교 경전 내용을 고증하기 위한 사료로서 활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