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Imji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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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간행된 한문본 <시경(詩經)> 판본에 관한 고찰 - 명본(明本) 복각본(覆刻本) 『시전대전(詩傳大全)』을 중심으로 - (A Study on Various Editions of Chinese Version - Focusing on 『Shijundaquan』, the reverse engraved editions from Ming Books -)

  • 안현주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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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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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7-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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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연구는 조선시대에 간행된 현존하는 한문본 <시경>의 판본의 조사를 통해, 판본 42종을 대상으로 형태적 특징에 따라 계통별로 구분하여 분석하고자 하였다. 연구 결과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는 명(明)의 영락판(永樂板) "시전대전(詩傳大全)" 을 저본(底本)으로 한 복각(覆刻)본과 활자본 및 활자본의 복각본이 전체의 69%를 차지해 가장 자주 간인(刊印)되었고 널리 유통되었다. 그 중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명본 복각본은 14종이 있는데, 초기본부터 임진왜란 직후에 간행된 판본들은 영락판과 거의 동일한 형태적 특징을 보여 주는데 후대로 갈수록 복각이 거듭되면서 영락판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어진 판본도 생겨났다. <시경>은 시기별로는 18세기에 가장 빈번하게 간행되었고, 지역별로는 경기지역과 경상지역에서 가장 많이 간행되었는데 경기지역에서는 활자본이, 경상지역에서는 감영본이면서 명본 복각본이 주를 이루었다.

「동사수창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Dongsasuchangrok)

  • 박문열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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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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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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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연구는 영조 39(1763)년에 파견된 통신사의 "동사수창록"에 수록된 시편들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1) 통신사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공식적 외교사절로, 통신사절에 참여한 인사들은 일본 현지에다 서화 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일본에서 겪은 견문기록을 남겨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2) "동사수창록"에는 4제에 걸쳐 조엄 이인배 김상익 남옥 성대중 원중거 김인겸 홍선보 등 8인의 도합 28수의 수창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수록된 시편들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과 일본의 사정과 회한 및 감회 등을 읊은 것으로 특히 작가들이 친필로 서사하고 낙관한 것을 후일에 장첩한 것이다. (3) "동사수창록"은 시편들의 내용과 작가 친필본임을 고려할 때,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연구하고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 전기 도가사상 연구 - 「심기리편(心氣理篇)」과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도가'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aoism Theory in the Former Half of Joseon Dynasty)

  • 김윤경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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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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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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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조선 도가사상 연구는 지금까지 조선후기를 중심으로 다루어져 왔다. 조선시대 5권의 "노자" 주석서와 2권의 "장자" 주석서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조선전기의 도가사상 전개를 고찰하기 위한 1차 작업으로 개국초기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정도전의 "심기리편"과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에서 임란 이전까지 200여년 간의 사료 안에서 도가 사상에 대한 언급을 발췌하고 이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도출하였다. 정도전과 권근은 도가를 '도덕이 없는 양생술의 추구'로 비판하였다. 도교와 불교의 비판 위에서 성리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도가는 세 가지 단계로 변용(變容)된다. 첫째는 '노자'를 장생의 사술, 신선의 방술, 도교의 최고 신으로 환치시켜 이단시하고 배척하는 단계이다. 둘째는 1차적인 배척의 논의에서 벗어나 도가사상의 핵심으로서의 "노자"와 '신선술' 및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는 '도교 신'인 '노자'와 분리해서 보려는 단계이다. 셋째 3차 논의는 "노자"의 정치술과 처세술에 대한 존숭으로 드러난다. 즉 조선 전기 도가 사상은 건국초기에서 15~16세기에 이르기까지 초기의 강력한 벽도불에서 벗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전개된다. 이러한 점은 조선 전기의 도가를 단순히 성리학의 도통관에 따른 이단논리로 해석할 수 없는 지점이다. 건국 초기의 벽이단론에서 도가에 대한 온정적 태도를 취하게 되고, 유학과 사상적으로 융합되는 처세술과 정치술을 수용하는 변화를 보인다. 즉 '노자(老子)'는 비도덕적인 장생불사(長生不死)의 탐욕을 가진 이단(異端)에서 유교국가의 처세술과 정치술로 수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용은 조선 후기로 가면 도가서(道家書)에 대한 적극적 해석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화약기술발전의 사적고찰에 관한 연구 (한국의 고대 화약기술) (A Study of the Korean Historical Development of Explosives Technology(Korean Traditional Explosive Technology))

  • 나윤호;손선관
    • 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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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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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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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
  • 화약(흑색화약)의 최초로 발명된 사실은 초석 의 제법 및 그 정제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인들은 이미 11세기초부터 초석의 제법을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야말로 화약원료인 초석의 제법을 세계에서 가장 최초로 발명해 낸 사람들이다. 에지프트인들은 그것을 중국의 눈이라고 불럿으며, 초석이 유럽에 전파된 시기는 성길은오이 1218년 서정작업중 패르시아의 성첩를 공격하기 위하여 화약을 사용한데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 화약 및 초석의 제조기술이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시기는 1374년이며 화약을 최초로 한국에서 만들어낸 사람은 최무선이였다. 이조시대에 접어 들면서 초석, 화약 및 화포의 제조기술은 최해신에 의해서 매우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1597년 일본의 왜군이 한국을 침공해 왔을때(임진란) 왜군은 성능좋은 조총으로 한국군을 괴롭혔으며 이에 맞서서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한국의 수군은 거북선에 장비한 성능좋은 화포로서 일본수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한국의 근대화약기술은 1930년부터 1945년 사이에 4개의 화약공장이 건설됨으로서 매우 발전했다. 본 연구는 한국에 화약기술이 전래된 경위를 조사하였으며 차후화약기술에 대해서 연구하고져 하는 연구자에게 연구 자료를 제공 하고져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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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임(許任) 『鍼灸經驗方』 연구(硏究) (A Study of Huh-Im(許任)'s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 박문현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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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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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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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Huh-Im(許任, 1570~1647) was an acupuncture doctor of Chosun(朝鮮) era through the late 16th century and early 17th century. Even though he was a person of low birth, he participated in the loyal medication through three loyal generations, Sunjo(宣祖), Kwanghaegun(光海君) and Injo(仁祖). He was recognized of his services and became an official, 'Dangsanggwan'(堂上官) and Kyunggi(京畿) district official several times. In the early Chosun era, acupuncture medicine was focused. During the late 16th century, Imjin(壬辰) war aroused more needs about acupuncture medicine, and acupuncture doctors showed remarkable work. Under these circumstances, Huh-Im(許任)'s fame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Huh-Im(許任) wrote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in 1644 based on his lifetime clinical acupuncture & moxibustion experience. It was the first specialized book of acupuncture in Chosun era. This event took place 30 years after DongEuiBoGam - Acupuncture Chapter("東醫寶鑑-鍼灸篇") was published. But it was not influenced much by DongEuiBoGam - Acupuncture Chapter("東醫寶 鑑-鍼灸篇") in the form or contents.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and Huh-Jun(許浚)'s DongEuiBo- Gam - Acupuncture Chapter("東醫寶鑑-鍼灸篇") were the fruits of the middle Chosun, and they are complementary to each other in theory and practice. The chief distinctions of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are in it's compact and practical edition and a lot of his clinical acupuncture prescriptions mentioned in the book. Huh-Im(許任) not only accepted the existing books such as NaeKyung("內經"), DongInSuHyulChimGuDoKyung and Shin- Eung Kyung("神應經") with his point of view and clinical experience, but also showed creative operation of studies. Indicating incorrect acupuncture points(訛穴), acupuncture remedy based on the visceral pathogenesis(臟腑病機) and the channel pathogenesis, research on new acupuncture points, sorting out plenty of outer meridian acupuncture points(經外奇穴), creating supplementary and purging acupuncture method(鍼補瀉法) which is a change of hand treatment of KiHyoYangBang("奇效良方"), operating variety of acupuncture and moxibustion treatments, and application of acupuncture treatments on surgery field such as intumescences and emergency cases are the examples. Huh-Im(許任)'s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influenced on the folk remedy books(民間經驗方書) in the late Chosun era. Compact and practical characteristics of the book let acupuncture treatment be freindly to the people. It can be confirmed in JeungBoSanRimKyungJe-Emergency Chapter("增補山林經濟-救急篇") or the formation of SaAmChimBob(舍巖鍼法).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was introduced to Japan in 18th century and published twice. ChimGuJibSung("鍼灸集成"), known as an acupuncture medical book of late Qing dynasty(淸末, 1874), is confirmed to be an plagiarization of DongEuiBoGam-Acupuncture Chapter("東醫寶鑑-鍼灸篇") and ChimGuKyungHum- Bang("鍼灸經驗方") of 17th century Chosun. Confusions and errors arouse from mistaken editional trend of ChimGuJIbSung("鍼灸集成") which had not disclosed it's original author and the title of the book must be reformed. In this way, fruits of acupuncture of the middle Chosun era including Huh-Im(許任)'s ChimGuKyungHumBang("鍼灸經驗方") will take a right place in acupuncture medicine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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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시대 병선(兵船)의 해방(海防)전략·전술 (Strategic and Tactical Use of Naval Ship for Maritime Defense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 민장원
    • Strategy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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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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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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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the 'Discussion of maritime defense' which began to be discussed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to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 maritime defense system. Also it can identify changes in the aspects of the naval ship operation and their strategic tactic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Japanese raiders began a full-scale invasion from 1350 at the late Goryeo Dynasty, So the government realized the need to raise the 'Sea power' and to organize the maritime defense system for defending enemy invasion. for example, the reinforcement of naval forces, construction of warships, develoment of weapon systems and so on. which have achieved remarkable growth while continuing, have also been used to carry out a three-time 'Conquest of Daemado' in 1389, 1396, 1419. Until then, however, it is difficult to interpret that the naval forces had a systematic and organizational combat operation system. According to fighting patterns on combat reports before the early days of King Sejong's reign, Our naval forces had no advantage over the Japanese raiders in terms of their capabilities and tactics. Then, the period of King Sejong marked a watershed in maritime defense history. Based on accumulated experience of naval battles and force Projections, The paradigm shift of the naval strategic tactics for maritime defense has occurred. First, the capability of the naval vessels has improved. for example, ship speed, durability, and weather resistance. Through these efforts, navy forces were able to pursue and attack, destroy enemy's ships by taking advantage of the 'Ship speed superiority'. This has led to tactical shifts from defensive to offensive. Second, purpose to support offensive tactics, the government put a strategic plan into practice that is the forward depolyment of naval bases from the inland to the coast, considering the 'sea environment' and 'threat'. By doing so, Joseon dynasty was able to secure 'the command of the sea'. This may be a little different from the perception of the so-called 'peace period' that King Sejong's era. We need to remember that Joseon dynasty was working hard for its defense. When studying history of maritime defense, these strategic and tactical elements must be fully considered. Only then we can have a coherent understanding of the many naval battles in the past, including the Imjin War(1592-1598).

경복궁(景福宮) 향원정(香遠亭)의 조성시기(造成時期)와 취향교(醉香橋)의 원형(原形) (A Study on the Original Form of the Chwihyanggyo Bridge and the Creation of the Hyangwonjeong in Gyeongbokgung Palace)

  • 남호현;김태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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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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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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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경복궁의 후원에 위치한 향원정과 취향교는 고종 연간의 관련 사료와 조선 후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도면에 의지하여 연구되고 있었다. 현재의 취향교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소된 것을 종전 후 임시적으로 재건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를 비롯하여 재건 위치도 정확한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과 이를 묘사한 그림엽서 따위가 일부 남아있지만 촬영 주체나 시기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여 어떤 사진이 취향교의 원모습을 담은 것인지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2017년 취향교 복원에 필요한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조사를 통해 취향교의 원위치와 교각 주춧돌의 형태가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취향교의 변화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취향교는 상판이 약한 아치를 그리는 3렬의 교각열을 가진 형태였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교각열이 늘어난 평교형태로 변화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향원지 내 가도(假島)의 성토층에 대한 AMS연대측정을 통해 향원정이 임란 이후에 조성되었음이 판정되어 기존에 제기되던 '조선 전기 취로정 전신설'은 근거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및 사료검토 결과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취향교와 향원정의 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 건청궁의 건립연대와 평행할 가능성이 높다.

호계(虎溪) 신적도(申適道)의 의리사상과 그 사상적 토대 (Hogye Sinjukdo's thoughts of righteousness and its foundations)

  • 장숙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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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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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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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호계(虎溪) 신적도(申適道)(1574-1663)는 정묘, 병자호란시 의성지역의 의병장으로 활동한 창의지사(倡義之士)이다. 그는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산림에 은둔해 있던 산림처사로서 정묘, 병자년 두차례나 기의(起義)하였으며, 병자년의 굴욕적인 강화 이후 미곡(薇谷)에 은둔하여 책을 읽고 후생을 교육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냄으로써 유가적인 의리실천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호계는 당시 관학의 지위에 있던 주자학을 의리와 강상의 실천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그것의 구체적인 실천은 군신부자의 윤리에 근본하여 효제충신의 실천을 다하는 것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의리란 간위(艱危)의 때에 오직 자식은 효를 위해 죽고 신하는 충을 위해 죽는 것임을 강조하고, 이런 의리정신이 바로 임란 때 왜병을 물리친 정신이었으며, 그 정신으로 당시의 외적을 물리쳐야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런 그의 의리실천은 인간의 도덕성에 기초하여 인륜과 강상을 실천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조선유학의 도학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그의 존명의리의 실천은 당시 조선인이 가지고 있던 문화적인 자부심에 기초한 소중화의식과 그 사상적 토대로서의 도덕중심적이며 인륜중심적인 조선유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호계에게서 보여진 이런 우리 민족의 자부심과 인륜과 강상을 지켜나간다는 도덕의식은 이후 조선말의 위기에 척사위정운동 및 의병활동, 민족종교운동 등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바탕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조 유학이 지닌 사회, 역사적인 의미를 확인 할 수 있다.

비무장지대(DMZ)의 생태적 가치와 국제자연보호지역 (The Ecological Values of the Korean Demilitarized Zone(DMZ) and International Natural Protected Areas)

  • 조도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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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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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2-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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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엄밀한 의미의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 DMZ)는 한국군사정전협정에 의해서 설정된 폭 4km, 길이 248km의 좁은 띠로 이루어진 육상지역으로서 서쪽으로는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장단반도의 임진강 하구로부터 시작해서 동쪽으로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의 동해안까지 이른다. 그러나 비무장지대에 인접한 민통선지역(민북지역)과 한강 하구와 서해안의 민통선지역의 생태계도 어느 정도 비무장지대의 생태계와 유사하므로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지역을 합쳐 일반적으로 "비무장지대 일원의 생태계"라고 부르고 있다. 비무장지대 일원의 식물상은 총 1,864종류로 파악되며 이는 우리나라 전체 관속식물 종류의 약 42%에 해당한다. 비무장지대 내부의 식생, 식물상, 동물상은 수많은 지뢰와 출입의 제약 때문에 정밀한 조사가 거의 불가능하다. 2001년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경의선 남북 연결 철도 건설 구간의 비무장지대 내부 식생을 조사한 결과 산림 식생은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등 참나무류가 주로 우점하는 2차림으로서 구조가 매우 단순하였고 비무장지대의 나머지 반은 과거의 묵논에 형성된 억새, 물억새, 달뿌리풀 등의 장경초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비무장지대의 대부분이 원시림으로 덮여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비무장지대 내부의 식생은 이와 같이 군사적인 활동에 기인한 빈번한 산불로 대부분 구조가 단순한 2차 천이 초기의 산림이거나 과거의 농경지에 형성된 묵논 습지 및 초지로 되어 있다. 비무장지대의 법적 보호 장치로는 통일 후 2년 동안만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환경부의 자연유보지역이 유일하다. 따라서 비무장지대의 보전을 위해서는 천연보호구역, 명승, 국립공원 등 국내법에 따르는 자연보호지역 지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국제적인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유네스코 세계유산, 람사르 국제습지의 지정에 비무장지대가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무장지대의 세계유산 신청 시에는 지난 60여 년간 산불에 의해서 2차림과 묵논 습지가 유지되어온 독특한 생태적 경관적 가치를 내세울 수 있다. 아무런 자연 보전 대책 없이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비무장지대 생태계는 순식간에 6.25전쟁 직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통일 후에도 비무장지대 생태계를 현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뢰 존치, 철조망 존치, 도로와 철도의 터널 및 교량화, 산불 유지 등의 대책이 논의되고 준비되어야 한다.

조선왕실 주조 청동활자의 복원과 과학적 분석 (Restoration and Scientific Analysis of Casting Bronze Type in Joseon Dynasty)

  • 윤용현;조남철;이승철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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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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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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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임진왜란 이전의 청동활자인 계미자, 경자자, 을해자 등 10종을 복원하기 위하여 계축자인 동국여지승람의 복원 활자를 통하여 주조할 당시의 합금비율, 주조방법과 각 주조 단계 별 미세조직 변화를 관찰하였다. 청동활자의 평균 조성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을해자의 평균 성분조성(Cu: 86.7%, Sn: 9.7%, Pb: 2.3% 등)을 기준으로 하여 구리와 주석, 납의 합금 비율을 구리 87%, 주석 15%, 납 8%로 정하였다. 주요 금속활자를 복원하기 전에 모합금을 제작한 후 다시 모합금을 용융하여 활자를 복원하였다. 1차로 복원한 계축자의 성분조성은 Cu 85.81~87.63%, Sn 9.27~10.51%, Pb 3.05~3.19%의 범위를 보였다. 2차로 복원한 계축자는 1차 주조 후 남은 가지쇠를 용융하여 주조한 것으로서 성분조성은 Cu 87.21~88.09%, Sn 9.06~9.36%, Pb 2.80~3.05%의 범위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결과는 1차로 복원한 활자에 비하여 주석과 납의 함량이 소량 감소하였으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을해자의 평균조성과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복원한 계축자의 미세조직을 관찰한 결과 청동의 전형적인 주조조직인 수지상(dendrite)조직이 잘 발달해 있으며, 납편석물들이 조직 내에 산재해 있음을 관찰할 수 있었다. 1차 주조 후 관찰한 미세조직과 남은 가지쇠를 용융하여 2차로 활자를 제작한 후 미세조직을 비교한 결과 1차로 주조한 것에 비하여 2차로 주조한 것이 일부 공석상 영역이 감소한 것으로 보이나 조직별 차이점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조선왕실 금속활자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복원 실험을 통해 활자 주조방법의 기준 및 합금조성의 비율 등을 제시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 활자 복원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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