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Historical Da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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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패션에 표현된 글래머 룩에 관한 연구 (제1보) (A Study on Glamour Look Expressed in Fashion (Part I))

  • 한수연;양숙희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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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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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88-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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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Glamour in fashion, which stands for attractive physical feature with certain mystique, has been used without accurate analysis thereof. This thesis is purported to provide comprehensive study of glamour in fashion and to contemplate glamour look reflected in fashion history, thereby to establish the styles of glamour expressed in fashion trends and to provide the basis which can be utilized in the categorical basis of fashion design. For such purposes, this thesis first provides the study on the glamour in fashion, and to conduct a case study by analyzing photographic materials. The glamour expressed in the fashion design can be classified into the following six aesthetic values: luxury, excess, masquerade, appropriation, sensuality and decadence. In the modern history, glamour looks in fashion design started out as so-called Blooming Age Glamour Look, dating from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o the late 1920s, which was represented by luxurious haute couture style of courtesans. Thereafter Golden Age Glamour Look appeared in the movie costumes in the Hollywood from the late 1920s to mid-1950s. Sensuality, decadence and masquerade are the central features. Subsequently, Pop Age Glamour Look appeared with fashion styles of pop stars, which can be characterized by appropriation and excess. In the 1980s and the 1990s, Glamour Renaissance Look appeared as glamour looks which were spread out to people in various classes, which is characterized by luxury and appropriation. Based upon the foregoing historical survey, there are four representative styles in glamour looks, including (1) luxury glamour derived from Blooming Age Glamour Look, (2) hyperfeminine glamour derived from Golden Age Glamour Look, (3) kitsch glamour derived from Pop Age Glamour Look, and (4) romantic glamour derived from Glamour Renaissance Look.

Historical Changes of Sediment Accumulation in Lake Shirarutoro Due to Land Use Development in the Forest Catchment, Kushiro Mire in Northern Japan

  • Ahn, Young-Sang
    • 생태와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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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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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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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Eleven lake sediment core samples were obtained and analyzed to develop a chronology using $^{137}Cs$ (in 1963) and two tephra layers (Ko-c2 in 1694 and Ta-a in 1739). Sedimentation rates estimated for the past ca 300 years in Lake Shirarutoro indicated that catchment development has influenced the shallowing process in the lake by increasing sediment production. The sediment yield under initial land-use development conditions for the first two periods was estimated as 514 tons $yr^{-1}$ from 1694 to 1739 and 542 tons $yr^{-1}$ from 1739~1963. The development of the Shirarutoro catchment intensified in the 1960s with deforestation and agriculture activity leading to an increased sediment yield of 1261 tons $yr^{-1}$ after 1963. The sediment yields after intensified land use development, such as forestry and agricultural development, were about 2 times higher than that under initial development conditions, leading to accelerated lake shallowing over the last ca 50 years. Sedimentation rates differed with location in the lake because of spatial variation in the sediment flux from the contributing rivers and their catchments. The sedimentation rates before 1963 were low in all sites except for one site close to the Shirarutoroetoro River. The sedimentation rate in 1739~1963 was accumulated mostly at the inflow of the Shirarutoroetoro River by sediment production associated with forestry for charcoal production and initial agricultural development. The sedimentation rate after 1963 increased. In particular, the southern zone of the lake near the conjunction with the Kushiro River had a high sedimentation rate, which is attributable to sediment inflow back from the Kushiro River during floods.

Dating Sun's Locations at Equinoxes Inscribed on Cheonsang Yeolcha Bunyajido

  • Sang-Hyeon Ahn
    • 천문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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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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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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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The inscription of Cheonsang Yeolcha Bunyajido (天象列次分野之圖) has the sun's locations at the equinoxes, which must have been copied from the astronomical treatises in Chinese historical annals, Songshu (宋書) and Jinshu (晉書). According to the treatises, an astronomer Wang Fan (王蕃, 228-266 CE) referred those values from a calendrical system called Qianxiangli (乾象曆, 223 CE), from which it is confirmed that it adopted the sun's location at the winter solstice of the $(21{\frac{1}{4}})^{th}$ du of the 8th lunar lodge Dou (斗) as the reference direction for equatorial lodge angles. This indicates that the sun's locations at equinoxes and solstices in the calendrical system are the same as those in Jingchuli (景初曆, 237 CE). Hence, we propose that the sun's location at the autumnal equinox in Cheonsang Yeolcha Bunyajido should be corrected from 'wu du shao ruo' (五度少弱), meaning the $(5{\frac{1}{6}})^{th}$ du, to 'wu du ruo' (五度弱), meaning the $(4{\frac{11}{12}})^{th}$ du, of the first lunar lodge Jiao (角), as seen in Jingchuli. We reconstruct the polar coordinate system used in circular star charts, assuming that the mean motion rule was applied and its reference direction was the sun's location at the winter solstice. Considering the precession, we determined the observational epoch of the sun's location at the winter solstice to be to = -18.3 ± 43.0 adopting the observational error of the so-called archaic determinatives (古度). It is noteworthy that the sun's locations at equinoxes inscribed in Cheonsang Yeolcha Bunyajido originated from Houhan Sifenli (後漢 四分曆) of the Latter Han dynasty (85 CE), while the coordinate origin in the star chart is related to Taichuli (太初曆) of the Former Han dynasty (104 BCE).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 - 문헌에 기록된 석실과 회격의 구조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ructural Features of the Joseon Royal Tomb Tumulus)

  • 전나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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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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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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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사료를 통하여 조선왕릉의 내부와 외부 구조를 분석한 후 시각적으로 구성하고, 조선왕릉의 특징을 고려 왕릉, 조선 사대부 무덤과 비교하여 본 논문이다. 조선왕릉은 구조적으로 견고한 건축의 성격을 지닐 뿐만 아니라 내부와 외부에 수호를 상징하는 미술 장식을 넣어 오래도록 왕과 왕후를 수호하도록 기원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는"세종실록 오례의"와 "국조오례의"가 남아 있어 이 사료를 통하여 조선왕릉의 내부는 석실이고, 외부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조가 자신의 능에 석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 이후로 조선왕릉의 내부는 모두 회격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 조선왕릉의 조성 과정을 작성한 사료는 영조 때 편찬한 "국조상례보편"이 있다. 이 책에는 조선왕릉을 회격으로 조성하는 구체적인 과정이 나타나있다. 조선 후기에 조성한 왕릉의 병풍석은 십이지상을 새겼던 기존과 달리 모란을 새겨 넣는다. 모란은 궁궐의 장식화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조선왕릉에 모란이 나타난 점은 조선왕릉이 왕의 일상 공간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점으로 볼 수 있다.

용주사(龍珠寺)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연구의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검토 (A Review Examining the Dating, Analysis of the Painting Style, Identification of the Painter, and Investigation of the Documentary Records of Samsaebulhoedo at Yongjusa Temple)

  • 강관식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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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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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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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용주사 <삼세불회도>에 대한 연구는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네 가지 핵심 사항이 실증적인 근거와 일관된 논리 아래 모두 일치되도록 정합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용주사 <삼세불회도> 연구에서 제기된 19세기 후반 화승 제작설과 1790년에 제작된 원본을 1920년대에 일반화가가 서양화법으로 개채한 것이라는 소론은 실증성과 논리성이 결여되어 성립되기 어렵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祝願文)은 세자(世子) 책봉을 받지 않은 원자(元子)만 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관습대로 의례적인 삼전(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주사로 지우고 다시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자궁저하수만세(慈宮邸下壽萬歲), 왕비전하수만세(王妃殿下壽萬歲), 세자저하수만세(世子邸下壽萬歲)"라는 특별한 내용과 예외적인 순서로 개서(改書)했는데, 이는 조선후기 불화의 축원문 형식과 내용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정조대 왕실의 전례(典禮)를 면밀히 분석해 볼 때, 현존하는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졌던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삼세불회도의 형식(形式)과 도상(圖像), 양식(樣式), 미감(美感), 화격(畫格) 등을 18~19세기 불화나 궁중화원 양식과 다각도로 비교분석해 보면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1790년경 전후에만 나타나는 특징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축원문(祝願文)에 대한 분석 결과와 일치한다. 특히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종교적 위상에 따라 존상의 크기가 결정되고 화면 구성도 근하원상(近下遠上)의 고식(古式) 원근법에 따라 관념적, 평면적 조형 위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이 <삼세불회도>는 투시법적 원근법의 논리에 따라 구축된 입체적 공간 속에 존상들을 매우 체계적으로 배치한 뒤 서양화(西洋畫)의 음영식(陰影式) 명암법(明暗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흰색 하이라이트와 그림자까지 표현함으로써, 마치 삼세불회(三世佛會)의 장엄한 세계가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투시법적 원근법의 내적 질서와 음영식 명암법의 외적 착시는 골육합체(骨肉合體)처럼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흰색 하이라이트만 떼어내서 후대에 개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구나 이 <삼세불회도> 같은 고도의 서양화법과 높은 화격(畫格)의 창의적 융합은 조선후기 회화사상 김홍도와 이명기, 김득신 같은 정조대의 궁중화원만이 이룩할 수 있는 고도의 양식이자 화격이다. 용주사 주지 등운(等雲)이 창건 이래 용주사에 전해져온 기록을 토대로 『용주사사적(龍珠寺事蹟)』을 정리하며 김홍도가 <삼세불회도>를 그렸다고 기록한 것은 이것이 당시의 역사(歷史)이자 실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공식 기록인 『일성록(日省錄)』과 『수원부지령등록(水原府旨令謄錄)』에는 김홍도와 이명기, 김득신이 감동(監董)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의례 화승(畫僧)들이 그려왔던 불화를 관원 신분의 화원에게 그리도록 하는 것이 엄격한 관직 체제나 운영상 부당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명분상 감동으로 발령한 뒤 실제로는 불화를 직접 그리도록 했던 데서 나타난 결과였다. 영정조대의 어진(御眞) 도사 과정에서 감동으로 불러들인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과 강세황(姜世晃)에게 국왕이 직접 그릴 것을 요구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감동(監董)'과 '집필(執筆)'은 경우에 따라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개념으로서 '감동'이 '집필'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주사사적』의 기록은 『일성록』이나 『수원부지령등록』은 물론 황덕순의 「닫집 원문」 기록과도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행간의 의미를 찾아 복합적으로 읽으면 각각의 맥락과 필요에 따라 동일한 내용의 표리를 다르게 기록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네 가지 핵심 사항을 모두 실증적인 근거와 일관된 논리 아래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의 나이: 재평가 (The Age of the Earth: Reappraisal)

  • 권성택
    • 암석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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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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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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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지구의 나이를 알기 위한 초기의 다양한 시도를 간략히 소개하고, 운석의 납동위원소 연대측정으로 처음으로 지구의 나이가 $4,550{\pm}70Ma$임을 밝힌 Patterson (1956)의 연구를 재조명한다. 태양계 초기의 진화과정은 성운가스가 식으면서 응축되어 만들어지는 고체입자 -> 이들 입자들이 서로 들러붙어 커지는 첨합과정을 통하여 행성 크기의 물체가 생성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또한 이때 생긴 원시지구가 화성 크기의 물체와 충돌하면서 그 잔해가 달을 만들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지구가 생성된 시기를 꼭 집어 말하기 힘들긴 하나, 현재 지구는 이 충돌의 직접적인 결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충돌시기를 지구의 나이로 정할 것을 제안한다. 기존 연구를 고려하면 충돌시기는 태양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운석물질의 나이(즉, 태양계의 나이) $4567.30{\pm}0.16Ma$와 지구와 달 암석에서 가장 오래된 나이 $4,456{\pm}40Ma$ 사이로 개략적으로 제한될 수 있다. 이 충돌시기는 태양계 초기 행성 크기의 물체가 만들어지는 시간간격을 밝히고, 충돌 이후 생성된 지구와 달의 마그마 바다의 열 역사를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보다 정확한 충돌시기를 측정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제주도 형제섬 화산체의 지질과 화산활동 (Geology and Volcanism of Hyeongjeseom (Islet) Volcano, Jeju Island)

  • 박준범;고기원;전용문;박원배;문수형;문덕철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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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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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7-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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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형제섬은 송악산에서 북동쪽으로 약 2 km 떨어진 해상에 위치한 침식 잔존 화산체로서, 하부로부터 화산쇄설층, 집괴암 및 분석층, 분화구 용암, 아아 용암류와 이를 피복하는 재동퇴적층과 해빈퇴적층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제섬 화산체는 초기 증기 마그마성에서 후기 마그마성 분출과 용암분류로 변화한 화산분화를 기록하고 있는 분출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노두로 남아있는 화산쇄설층은 응회구의 외륜 일부로 해석된다. 화산탄과 분화구 용암류는 현무암질 조면안산암의 조성(SiO2 51.3 wt%, Na2O+K2O 6.0 wt%)이며 감람석 현무암류에 해당한다. 단계별 가열에 따른 Ar-Ar 연대측정법에 의한 형제섬 용암류의 플래토 연대는 9.2±3.6 ka로서, 약 3천 7백 년 전의 분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인접한 송악산 화산체보다 앞서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여전히, 약 천 년 전 화산분화의 역사 기록에 부합되는 화산체를 찾는 숙제가 남는다.

도수치료의 역사 및 개념 (History and Concept of Manual Therapy)

  • 문상호;이송;배대경
    • 대한정형외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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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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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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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도수치료는 전 세계적으로 다수의 지역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시행되고 발전되어왔던 학문으로 2,500년의 역사를 가진 아주 오래된 치료 방법이다.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도수치료는 의학계와 같이 연구하고 발전하기도 했지만 대립된 길을 걸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도수치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의학적 치료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19세기 후반에 정립된 카이로프랙틱, 정골의학, 물리치료학의 관점에서 각각 연구되고 발전되어 온 도수치료의 세 분야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작했고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 치료법임에도 불구하고 도수치료에 대한 문헌들은 많지 않고 근거 수준이 낮은 논문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그 효과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도수치료는 점점 더 많은 환자들에게 시술되고 있는 실정이다. 저자들은 이 논문에서 고대부터 도수치료의 역사와 한국 도수치료의 역사, 그리고 현재 도수치료에 대한 최신 지견을 논하고 그것을 근골격계 통증의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완판본(完板本) 홍길동전 판본 간에 나타난 목판인쇄 특징의 차이점 관찰을 통한 간행 연대의 추정 (Publication Dating through Observations of Differences in Woodblock Printing Characteristics among Various Versions of Wanpanbon Editions of Honggildongjeon (Tale of Hong Gil Dong))

  • 유춘동;유우식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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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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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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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우리나라 한글 고소설의 발생과 보급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여러 인쇄물의 간행에 관한 정보의 수집과 다양한 방법을 통한 간행 연대의 추정은 매우 중요하다. 본 연구에서는 한글 고소설 방각본(坊刻本) 중에서 전주지역에서 간행된 완판본(完板本) 홍길동전 36장본을 중심으로 판본 간의 이미지 비교를 통하여 목판인쇄과정에서 나타난 특징과 차이점을 조사하고 각각의 판본의 간행 연대를 추정하였다. 최근에 새롭게 발견된 원간계열의 판본 이미지와의 비교를 통하여 각각의 판본에서 어떠한 보각이 이루어졌고, 보각과정에서 어떠한 변화가 발생했는지에 관해서도 조사하여 정리하였다. 여러 판본의 조사를 통하여 목판인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과 목판인쇄 시기의 선후관계에 따른 인출특성의 변화와 보각이 이루어지는 원인과 과정을 추정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서 얻어진 목판인쇄의 다양한 특징들이 고서와 전적류의 인쇄방법과 간행시기의 선후관계를 추정하는 데 참고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조순의 풍고집(楓皐集)을 통해서 본 옥호정의 정원고고학적 가치 (The Garden Archaeological Value of Okhojeong through Kim Jo-sun's Punggojip)

  • 신현실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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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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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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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는 옥호정의 조영자 김조순의 풍고집에 나타난 옥호정도의 내용 전체를 분석하여 풍고집내에 옥호정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의 내용을 통해 기존 연구와 옥호정도를 비교하고 조영자와 정원과 관련된 교유관계, 조영사실 등을 규명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옥호정의 조영자인 김조순은 문인취향이 강했던 요인으로 정원의 조영과 경영에 관련된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표현하여 정원의 원형을 추정하기 용이했다. 둘째, 옥호정의 조성연대는 기존에는 을해벽의 각자를 근거로 1815년으로 추정하였으나 이성민이 동성교여집에 김조순이 장씨집을 사들인 기록을 밝혀 1804년으로 정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풍고집에 나타난 김조순의 문예취미는 철저하게 중국고사 등을 따랐으나 정원조영 부분은 사실에 근거한 정원고고학적 기록으로서 그 가치를 지닌다. 정원의 부지확장에 대하여는 옥호정 남측 부분의 경계를 김생 사호에게 양도 받아 반칸 정도 늘린 것으로 추정되고 원예활동과 정원 곳곳에 가산이나, 석상, 괴석, 분재, 수반 등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석가산을 조성하는 기법과 풍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어린 소나무의 이식에 대한 전문적 식견, 정원의 화목에 대한 애호와 풍류는 시문 곳곳에 깃들여 있다. 아울러 옥호정의 입지를 선정하기 위한 지형 지세의 파악과 기존 식생 등의 현황파악 능력, 초목을 베고 땅을 고른 과정과 기와와 초가로 지은 집들, 이 곳에서 한거하기 위한 목적과 안전을 기원하는 내용이 완벽한 옥호정 조성의 단계를 보여주고 모정인 산반루의 위치와 조성과정을 알 수 있어 정원고고학적 가치를 지닌다. 향후 풍고집에 등장한 교유인물들의 문집의 해석을 통해 옥호정의 정원원형에 대한 보다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기 위한 후속연구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