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Chosun Literary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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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국풍속화에 나타난 식생활문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Food Culture of Chosun Period Appearing in Korean Genre Painting)

  • 고경희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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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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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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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This present study suggests a wider view of our ancestors' food culture by examining the generality and peculiarity of the food culture of the Chosun Period by associating the culture with genre paintings made in the $18th{\sim}19th$ century in Korea. People in the Chosun Period outwardly advocated the Confucian idea reflecting the life philosophy of Chinese. However, the vitality of common people's frank and simple lifestyles saturate genre paintings and display Korean food culture and sentiments of the age. Initially this paper examines the history of food sociology through Namjong literary artists' paintings. The meaning and philosophy of drinks are considered in relation to the trend of declining tea culture among scholars in the mid-Chosun Period with the policy of promoting Confucianism and oppressing Buddhism. Secondly, this paper investigates the background of genre paintings in the late Chosun Period, and examines the unique food culture of Koreans appearing in paintings, particularly with regard to the abundance and variety of seasoned vegetables appearing in genre paintings, our ancestors' sentiment appearing in milk-gathering painting, humanity in guest reception, food culture and view of nature in farm villages, fishing life history, food distribution culture, soybean-curd culture, etc.

고정옥의 '장시조론'과 작품 해석의 한 방향 - "고장시조선주"를 중심으로 - (A direction on the analysis of the literary work and 'the Theory of Jangsijo' of Gojeong-ok)

  • 김용찬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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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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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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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이 논문은 국문학자인 고정옥의 저서 $\lceil$고장시조선주$\rfloor$를 검토하여, 그것의 특징과 문학사적 중요성을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동안 고정옥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월북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한국문학사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국문학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그의 저서들은 아직까지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고정옥과 그의 저서들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며, 국문학 연구사에서도 그의 연구 업적에 걸맞는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저서인 $\lceil$고장시조선주$\rfloor$를 통해서 그의 문학적성과를 다루고자 한다. 고정옥이 '장시조'라 칭한 사설시조는 조선 후기문학사를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갈래이다. 그는 이 책에서 사설시조 50수를 뽑아 주석을 붙이고 작품의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와 더불어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사설시조에 대한 이론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lceil$고장시조선주$\rfloor$와 다른 저서들에 드러난 고전 시가에 대한 그의 인식을 살펴보고, 특히 '장시조'에 대한 이론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를 검토하기로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의 문학관이 자연스럽게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주석과 함께 소개되어 있는 작품 분석을 검토함으로써, 구체적인 작품 해석의 면모를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고전시가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보다 정밀하게 검토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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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에 나타난 조선 시대 선원 조직과 항해술 (Manning Structure and Navigation Skills of the Period of Chosun appeared in POHAE-Rok)

  • 김성준
    • 한국항해항만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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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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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7-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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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조선시대의 선원 조직과 항해술과 관련해서는 조운선의 선원 조직과 선단 편성 등만이 알려져 왔고, 일반 선박의 선원 조직이나 항해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조선 성종대 바다에서 표류한 경험담을 기록한 최부의 $\ulcorner$표해록$\lrcorner$은 그동안 국문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연구된 바 있지만, 정작 바다에서 조선의 선원들이 어떻게 항해하여 안전하게 중국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었다. 이 소고에서는 최부의 $\ulcorner$표해록$\lrcorner$에 나타난 조선 시대 선원 조직과 항해술에 대해서 상세히 도출해 내고, 조선 영조대의 장한철의 $\ulcorner$표해록$\lrcorner$과 비교함으로써 두 선박이 상이한 표류 결과를 내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일본 한국문학사에 나타난 항일문학과 친일문학 기술양상 (A Study on the Aspects of Anti-Japanese and Pro-Japanese Literature Shown in Japanese Korean Literature History)

  • 손지연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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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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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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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글은 일본에서 저술된 한국문학사 가운데 항일문학, 친일문학 기술 부분에 주목하여, 항일과 친일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인식차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분석 대상 텍스트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집필된 본격적인 한국근현대문학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에구사 도시카쓰의 "한국문학을 맛보다"와 시라카와 유타카의 "조선근대문학의 발자취"이며, 여기에 통시적 시좌의 문학사 저술은 없지만, 한국근현대문학 일본인 연구자의 최전선에 자리하는 오무라 마스오의 인식을 시야에 함께 넣어 조망하였다. 주요 검토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저술 한국문학사에는 '친일문학'이라는 프레임이 매우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중국이나 북한의 관점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지점이며, 기본적으로 남한문학사의 서술체계에 따르고 있지만 항일문학과 친일문학에 대한 평가 부분에 이르러서는 남한문학사와 분기점을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둘째, 기본적으로 한국문학사의 서술체계를 따르고 있지만, 항일문학이나 친일문학에 대한 기존의 한국 학계의 평가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다른 방식의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졌다. 예컨대, 한국 학계에서는 김종한, 이석훈 등에 주목하여 그들의 문학을 높이 평가한다든가, 반대로 한국 학계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이광수의 친일적 요소는 크게 중시하고 있지 않는 점이 그러하다. 셋째, 탁월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작가나 일본어 창작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점이다. 그로 인해, 장혁주, 김사량, 이석훈, 김용제 등을 동일한 '일본어 문학'이라는 자장 안에 녹여냄으로써 각기 다른 친일의 내적 논리를 희석시켜 버리는 한계를 노정한다. 넷째, 김종한이나 이석훈에게서 이광수, 장혁주, 김용제 등 노골적인 친일 협력 문인들과는 다른 내면을 읽어내고자 하는 점이다. 이 같은 특징들은 보다 치밀한 분석을 요하는 부분으로 후속 과제로 이어가고자 한다.

문학 작품을 통한 향토 음식 콘텐츠 개발 - 충무공 '현충(顯忠) 밥상', 추사 김정희 '추사(秋史) 밥상' (Development on Native Local Food Contents through Literature)

  • 김미혜;정혜경
    • 동아시아식생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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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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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9-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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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is study attempted to research the local food of various regions at a personal level by discovering how food has developed das part of a region's culture base. Discovery of the characteristic story behind the making of a region's characteristic food as local delicacies can inspire self-esteem in the culture, and enhance the real-life image as appropriate to a region, and thereby be made a part of local tourism and thus contributing to the local economy. For this reason, the native foods of the region of Chungcheongnam-do were researched in terms of the cultural sensibilities that inform the unique history of that region. The study was designed so as to aid in understanding food's characteristic value in Chungcheongnam-do and to give a historical representation of Chungcheongnam-do's image by means of storytelling techniques; thus, the local food's character can be presented alongside a story that appeals to the five senses. For this purpose, Chungcheongnam-do's representative native rice table was cast as the 'Hyunchoong rice meal table' - after the figure of admiral Yi Sun Shin of Asan area region, a representative image of Chungcheongnam-do - and 'Choosa rice meal table', after the figure of 'Choosa' Kim Jeong Hee of Yesan region, of which various literary works form a representative image of Chungcheongnam-do. 'Hyunchoong rice meal table' was composed of a health food centered menu which could supply sufficient nutrition as a food ration in times of war or winter shortage, thus providing an image of nutrition and power as appropriate to these situations. Also, to assess the health effectiveness of each rice table, the functionality of the ingredients were investigated as reported in 'Sik-ryo-chan-yo : a dietary treatment' which was published by Soon-Ui Cheon in the Chosun era and by which the foods of the early Chosun era won recognition as being both healthy profitable.

조선시대 '김치(沈菜)'문화의 원형연구 (A Study on the Cultural Archetype of Kimchi in the Chosun Dynasty)

  • 강용중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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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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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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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이 논문은 조선시대 기록문헌인 "한국문집총간",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이상은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를 활용함) 등을 대상으로 김치 관련 어휘를 확보하여 용례를 검출하고 문화사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존의 김치 관련 문헌자료는 일부 요리 전문서에 국한되었으나 본 연구에서는 기존의 국한성을 극복하고 종합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조선시대 고문헌은 주로 한문 고문으로 기록되어 가독성이 떨어지며, 자료 확보 이후에 번역 작업에 많은 시간과 공력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필자는 이 부분에 중점을 두어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이상의 자료들을 주제별, 문헌 출처별 분류를 진행하여 조선시대 김치문화의 문화원형을 재구성하였다.

청대 전기의 활자인쇄 (The Type Printing of First Ch'ing Dynasty Term)

  • 조형진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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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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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5-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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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The type printing of first Ch'ing dynasty term in China is worthy to be studied because the type printing during that period included metal type, wood type, and clay type as well as the development phase was similar to Chosun dynasty culturally and technologically. This paper studied typography during the first Ch'ing dynasty term, including Shunzhi(1662-1722), Yongaheng(1723-1735), Qianlong(1736-1795), Jiaqing(1796­1820) period. The main results of the study is as follows. 1. The main body of type printing was bookstore, lecture-hall, and individual as well as the royal court that is the central government. 2. The content of type edition covers classics, history, philosophy, and literary works. Specifically, even though Wuyingdienjuzhenban series is excluded, the content includs study of the classics, class of the history, class of the philosophy, literature works that include collection works and novel and government official bulletin. 3. The printing technique of bronze type was very popular In Beijing. Jiangsu, and Taiwan. It's scale and production technique was more elaborate than in Ming dynasty. 4. Wood type was very popular in Beijing, Jiangsu, Zhejiang, Anhui, Sichuan, and Fujian. In addition to wood type, chinese ware type was applied to book printing in Shandong. However, most of them were wood type and they were used after Qianlong period. 5. The production technique of type was skilled enough to present the fine view of a style of type. The typesetting technique was improved as much as woodblock printing. With regard to the making technology of Chinese ink, the light and darkness of chinese ink was not even sometimes. But, the technology was improved significantly when comparing with the failure experience of printing that chinese ink was not developed in early type invention. 6. In case that the book was printed in bookstore with the intention of profit and the number of book was large, the proofreading attitude was rough. However, overally, it was made correction carefully applying the various methods of proofreading. 7. The support of government made a great contribution in the area of all printing technology, including production, typesetting, and brushing of ty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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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시조(時調)의 특질(特質) (The Features of Daseuk Ryu, Yeungmo's Sijo)

  • 박규홍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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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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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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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국문학사상 최다의 시조를 지은 다석 유영모와 그의 시조를 처음으로 국문학계에 소개한 필자는 이 후속 연구를 통해 그의 시조가 지니는 국문학사적 의의와 특질을 좀 더 세밀하게 밝히고자 했다. 독자적인 신관(神觀)을 수립한 종교사상가 다석은 자신의 사상을 2,200여 수의 시조로 읊었다. 국문학사상 종교를 수용한 시가문학은 적지 알았지만 다석의 시조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조선조의 불교가사는 향가 이후 가장 대중화된 종교적인 시문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석은 가사를 발표한 적도 있지만, 그가 20년간이나 꾸준히 그의 사상을 담아낸 문학양식은 시조였다. 시조에 종교사상을 이처럼 담아낸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다석은 종교계뿐만 아니라 국문학계에도 분명한 족적을 남겼다. 다석 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는 시조의 시어에 내포된 의미뿐 아니라 그 시어의 표면적 의미까지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시조 시어 하나하나에는 고농도의 종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 극도로 절제된 시적 표현은 매우 특이한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다석은 한글을 자신의 사상을 온전히 표기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도구로 여겼고, 시조는 그것을 담을 가장 적당한 문학양식으로 보았다. 난해한 그의 시조는 누구에게 보이느냐는 것보다 진리의 말씀을 얼마나 충실히 담아내느냐는 것에 관심을 가진 결과로 판단된다. 시어 하나하나의 해득이 어렵다고 하여 그의 시조를 더 이상 방기할 수는 없다. 계속 후속 작업이 이어져 국문학사상 최다일 뿐 아니라 가장 독특한 그의 시조문학을 국문학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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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고려인삼 인식에 대한 소고 (The history of awareness for ginseng in Vietnam)

  • 옥순종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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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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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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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역사상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의 교역은 활발하지 않았다. 한중일 동북아 중심의 역사 서술과 지리적으로 멀어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동남아 국가 중에 베트남은 한국 사신들과 교류가 많았다. 유권 문화권, 한자 문화권으로 정서가 통하고 언어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베트남 양국은 서로 관심을 보여 왔으며 사신들의 활발한 접촉으로 국교 수립과 관계없이 문물이 전파되고 우호적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 전반 베트남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명으로 꼽히는 민망시대에 고려인삼은 지금의 한류처럼 인기를 끌었다. 142명의 자손을 둔 민망황제의 정력이 인삼에 기인한다고 믿었다. 민망황제는 공을 세운 신하나 연로한 신하에게 선물로 인삼을 하사하여 충성을 유도했다. 이같은 전통은 후대 황제에게 까지 이어졌다. 또한 태국, 캄보디아, 프랑스와의 전쟁에 파견된 장군 및 병사들에게도 인삼은 지급되었다. 베트남은 국가 이념강화에 인삼을 적극 활용했다.이 같은 전통으로 고려인삼은 베트남에서 프리미엄 인삼으로서 인식되었다. 인삼의 베트남 유입은 1) 중국 황제의 하사 2) 북경으로 조공을 간 베트남 사신의 구매 3) 사무역 4)국제 무역이 활발했던 류큐, 일본의 중계무역 5) 조선-베트남 사신의 교유 등 5가지 경로를 유추할 수 있다. 베트남이 인삼을 본격 구매하기 전에 인삼의 효능에 대한 인식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 이는 교역으로서가 아니라 양국 사신들의 교유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5세기에서 18세기 말까지 북경에서 조선과 베트남의 사신, 선비들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1760년 북경에 온 베트남 고관 여귀돈이 조선사신에게 편지를 보내 고려인삼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은 18세기에 이미 베트남에서 고려인삼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았음을 확인해준다. 양국 사신의 교유를 통해 상대 나라의 풍습과 특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베트남 황실에서도 인삼에 대한 지식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경으로 사행을 간 사신들 중에 인삼에 조예가 깊은 서거정, 서호수 등 실학자들이 많았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베트남에서는 신라 시대에 인삼에 대한 인식이 성립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9세기 중반 안남도호부의 책임자로 파견돼 베트남을 10년간 통치했던 당의 고병은 신라인 최치원과 친밀한 관계로 고병이 인삼에 대한 지식을 베트남 상류층에 전했을 수도 있다. 이로써 베트남의 인삼인식은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멀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베트남의 인삼 인식시기 추정은 양국의 접촉 과정에 유추한 가설로서 이를 문헌으로 실증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베트남의 역사서와 문집에서 인삼의 흔적을 찾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재미작가 홍언의 몽유가사$\cdot$시조에 나타난 작가의식 (A Study on Korean-American Writer Hong-Eun($1880\~1951$) focusing on Mong-yu siga(Traditional Korean Poetry, gasa and sijo of strolling in the dream))

  • 박미영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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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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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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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문학작품은 선행 작품 혹은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창작되고 있다. 당대의 문단활동을 통해서나 작가 자신의 소양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선험적인 텍스트와의 끊임 없는 대화를 통해 작가의 의식에 적절한 반응양식이 선택하여 외부로 표현되는 것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양식 또한 시대적, 개인적 필요성에 의하여 이런 과정을 속에서 되풀이된다. 본 연구에서 대상으로 삼고 있는 홍언은 미국 초기 이민자이며 재미 한인신문 $\lceil$신한민보$\rfloor$의 발행에 오랜 기간 종사한 언론인이자 문인이다. 지면을 책임지고 있는 발행인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비교적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국내문단과의 직접적인 교류나 활동은 없었고 미국 현지에서 함께 할 독자가 적은 가운데 시가만 400여 편을 발표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본 연구에서 홍언의 다양한 작품활동 가운데 1935년,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되는 몽유양식을 활용한 시가$\cdot$몽유가사$\cdot$몽유시조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고찰한다. 1935년과 1947년으로, 두 차례 $\lceil$신한민보$\rfloor$의 <사조>난에 몽유가사와 몽유시조를 싣는다. 홍언은 미국이라는 만리타국에 와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것을 모두 포기할 만큼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였으며 항시 조국의 현실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창작된다. 첫 몽유시가는 1935년 4월 25일에 <이강산>을 필두로 1935년 5월 9일 부터 1935년 7월 4일까지 동회슈부라는 자신의 필명으로 <꿈에 고국에 가셔>라는 제목 하에 연작시가 8편을 차례로 연재하는 것이다. 이는 개화 가사의 형식을 선택하고 있으며 향수와 1900년 전후의 조선 상황에서 정체된 역사의식을 담고 있어 중세적 이념을 노정하고 있다. 두 번째 몽유시가는 1947년 9월 25일 발표한 <나라와 고향>을 서시로 1947년 10월 2일부터 1947년 11월 6일까지 6 편을 연재하는 <꿈속에 강산>이다. 여기서 선택한 시형은 시조이며 그 시상의 전개가 1차 시도와 비슷하여 1차 시도를 의식하여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용은 분단된 조국현실을 직시하면서 미국과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외적 장애요인이 제거되었는 데도 고국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개인적 처지를 합리화하는 방어기제로서, 조국을 '살지 못할 곳'으로 인식하고 있다. 몽유양식은 꿈을 주요 모티브로 사용하면서 현실의 좌절된 욕망을 달성하고자 의도적으로 취하는 양식이다. 홍언은 이민 후 일제치하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독립 후에는 개인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고국방문을 하지 못했다. 고국방문이라는 간절한 소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홍언은 몽유양식을 활용하였다. 이는 중세의 지식인들이 우언의 한 양식으로 즐겨 사용했던 전통 양식이자 개화기 지식인들이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며 다양한 글쓰기 방식의 일환으로 선택되어 문학사적 사명을 다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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