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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문학과 신선 (Literature of Korean Verse, Sijo and Taoist Hermit)

  • 김명희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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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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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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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사대부들의 전유물인 시조에서 신선은 어떤 역할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고찰하였다. 시조에서 선어들이 빈도수가 많음을 기존의 연구사를 통해 밝혔고 시조라는 장르를 통해서는 신선에만 집중하였다. 그중 적송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적송자는 사대부들이 좇아가는 적송자로 표현하고 있어 '적송자를 좇으리'가 관용어구처럼 쓰이고 있다. 이것은 적송자를 좇아야만 비로소 신선 대열에 낄 수 있다는 등식처럼 되어버린 결과다. 중국의 장량이나 범려도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적송자를 찾아 신선이 되어 영원 불사했다는 역사적 사건이 변모되어 전설로 신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시조를 즐기는 사대부들도 마치 장량이나 범려처럼 자신들도 적송자를 좇겠다는 관념어적인 어투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하면 이태백은 한국문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태백은 시선이며 주선으로 시조 문학에서는 비상 모티브를 가진 신선 또는 상천 모티브로 쓰이는 주선으로 노래 부르고 있어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들에게 친근하게 인용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반면에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는 신선으로는 진시황과 한무제를 들 수 있다. 두 황제는 불로초를 찾고 봉래산을 찾은 인물로 현실정치에서는 실각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불로장생을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인물이어서 사대부들은 그런면에서 이상적인 이상향은 없다는 다분히 현실적으로 다가가 유교사상에 입각해 현실에 만족하며 살자는 자족형으로 시조를 부르고 있었다. 따라서 두 황제의 역할은 부정적 이미지다. 시조에서 여선들도 등장하는데 그중 마고선녀, 서왕모, 무산신녀, 항아가 있다. 마고 선녀는 장수를 관장하는 할머니로 때로는 미녀로 쓰이고 있으며 서왕모는 불사약을 가지고 있는 신선으로 무산신녀는 운우의 정을 대변하는 미녀로 항아는 남편을 배반하고 외롭게 월궁에서 지내는 신녀로 표출되고 있다. 이들 선녀의 특징은 미녀이며 자상하고 섬세하며 애정시에 두루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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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두선(象頭山) 바위글씨의 특징과 경관의미 (The Characteristics and Landscape Meanings of Letters Carved on the Rocks of Mt. Sangdu)

  • 노재현;이정한;허준;김정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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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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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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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전라북도 정읍시와 김제시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상두산 일대 바위글씨의 형식과 내용을 검토하고, 바위글씨가 새겨진 공간의 특성을 파악함으로써 바위글씨의 경관적 의미와 가치를 구명하고자 하였다. 상두산(象頭山, 575.3m)은 석가모니가 수행하던 인도의 동명(同名)산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이때, '상두(象頭)'는 상서로움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고지도와 문헌에서는 풍수도참과 관련된 다수의 명당개념이 전해지고 있어 상두산의 상서로운 이미지를 견고히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상두산에는 총 4개 수계에 한자로 새겨진 41개의 바위글씨가 존재하는데 바위글씨의 입지는 주로 계곡상 평석 형태의 너럭바위 또는 낙폭이 1m미만인 소폭(小瀑)과 와폭(臥瀑)주변에 새겨져 있는 특징을 보인다. 서체는 전서(篆書)를 비롯한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등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일부는 각자인(刻字人)의 성명과 집자(集子)한 바위글씨의 서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인식될 정도로 높은 완성도와 예술성을 갖춘 것으로 파악된다. 바위글씨를 새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동초(東樵) 김석곤(金晳坤)을 비롯한 청계시회(淸溪詩會) 회원과 후암(厚庵) 김창석(金昌碩), 월계(月溪) 송영조(宋榮祚) 등으로 이들이 새긴 바위글씨는 조선시대 선비의 덕목인 수신(修身)과 관련된 내용이 25건으로, 비록 일제강점기이나 선비로서의 자존(自存)을 지키고자 하였음을 보여주며 또 일부는 '물외(物外)에서 노니는 탈속(脫俗)의 경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일제강점기하 선비와 식민지인으로서의 갈등을 표상(表象)한다. 이처럼 상두산 바위글씨는 단지 물리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민족성을 고취시키는 내용이자 경관상징성을 배가시키는 문화경관 요소로써의 보존적 가치가 크다고 사료된다.

고문헌과 바위글씨로 본 영평(永平) 백로주(白鷺洲)의 위상과 경관의미 (The Review of Yeongpyeong(永平), Baengnoju(白鷺洲)'s Status and Meaning Landscape by Literature and Carved Letter in the Rock)

  • 노재현;김세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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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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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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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은 영평 백로주에 새겨진 바위글씨에 주목하여 문헌분석 및 현장조사를 통해 백로주의 바위글씨가 지닌 위상과 경관의미를 고찰한 것이다. 백로주는 이백(李白)의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의 시구를 차용해 명명된 이름으로 조선시대 여러 곳에 백로주가 있었지만 영평 백로주가 가장 이름을 드날렸다. 본 논문은 문헌 분석을 통해 백로주 기사에서 바위글씨에 대한 기록이 많음을 확인했다. 이에 현장의 바위글씨를 조사해 백로주의 명승적 면모를 추찰하고 기존에 조명되지 않은 새로운 바위글씨의 존재를 발굴했다. 백로주는 조선 중기 양만고(楊萬古)가 별서를 경영하고 이명한(李明漢)이 시를 지어주면서 명승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후 금강산을 향하는 길목에 있어 유람지(遊覽地)로 주목받았고 가거지(家居地)로 활용된 사실도 확인되었다. 백로주 기사에서 특히 바위글씨의 기록이 주목되는데 이는 바위글씨가 '명현의 자취 답험(踏驗)'이란 측면에서 경관 완상과 향유의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바위글씨에 대한 기록은 서인계 문인을 중심으로 나타난 양상을 보이는데 이러한 내용은 바위글씨의 존재를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본 연구에서는 문헌분석과 현장조사를 통해 백로주 바위글씨를 고찰했다. 먼저 '백로주(白鷺洲)' 바위글씨가 조상우(趙相愚)의 것임을 확인했고, '백로주' 글씨 좌측에 추기된 2점의 시구가 존재하는 사실도 밝혀냈다. 한편 백로주 바위섬인 북진석과 동측의 설통바위에는 유기일(柳基一)의 필적이 남아있다. 백로주에는 바위글씨를 비롯한 여러 문헌기록이 전하지만 오늘날의 모습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를 드러내기에 현전하는 바위글씨에 대한 보존의 필요성도 논의되어야 한다. 본 연구를 통해 영평 백로주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가시광선을 이용한 돈분뇨 액비 부숙도 측정장치 개발에 관한 연구 (Study on the Development of Measuring System for Fermentation Degree of Liquid Swine Manure Using Visible Ray)

  • 최동윤;곽정훈;박규현;송준익;김재환;강희설;한창배;최성원;이창석
    • 한국축산시설환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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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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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7-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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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시험은 가시광선을 이용한 돈분뇨 액비의 부숙여부를 구명하고, 이를 활용한 측정 장치의 개발을 목적으로 수행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가. 돈분뇨 액비 저장기간이 경과함에 따라 pH는 증가하고 EC는 낮아졌으며, 액비를 폭기처리하므로서 무처리에 비해 pH는 더 증가하고 EC는 더 낮아지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나. 돈분뇨 액비 저장기간이 경과함에 따라 주요 악취물질인 암모니아 ($NH_3$)와 황화수소($H_2S$) 농도가 낮아지는 경향을 나타냈으며, 폭기처리를 하므로서 악취농도가 현저하게 낮아지거나 없어지는 결과를 보였다. 다. 돈분뇨 액비의 종자발아율은 무 및 배추종자 공히 초기부터 6주 경과시까지는 전혀 전혀 발아되지 않았고, 7주가 지나고부터 서서히 서서히 발아율이 높아지는 경향이었으나, 무폭기처리한 액비의 종자발아율은 무 및 배추종자 공히 초기부터 시험종료시까지 전혀 전혀 발아되지 않았다. 라. 원형여지크로마토그래피법에 의한 돈 분뇨 액비 부숙여부 반응을 조사한 결과, 폭기처리한 액비의 경우 초기부터 10주까지는 부식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10주가 지나고 톱니바퀴 모양이 조금씩 형성되면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무폭기 처리한 액비는 시험 종료시까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 돈분뇨 액비의 부숙에는 pH, EC, 종자 발아율, 악취농도 및 원형여지크로마토그래피 반응 등이 관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 색도를 이용한 돈분뇨 액비 부숙도 축정을 위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개발하였으며, 클러스터링을 이용한 액비부숙도 분석 프로그램을 완성하였다. 사. 돈분뇨 액비 부숙도 측정장치는 텅스텐할로겐, 듀테륨램프, 시료투입구, 석영셀, 분광분석기, 악취측정기, 분석소프트웨어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액비의 부숙여부를 간편하고 신속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감마선 조사된 대두분의 미생물학적 및 이화학적 특성 연구 (Studies on Microbiological and Chemical Characteristics of Gamma-Irradiated Soybean Powder)

  • 김희연;송경희;홍진환;김동술;한상배;이은주;강길진;정형욱;임무혁;김창민;권용관;진명식;송인환;변명우;배동호;신일식;하상철
    • 한국식품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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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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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62-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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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분말상 원료인 대두분의 저장유통시 발생할 수 있는 품질변화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감마선 조사를 실시하고 대두분의 미생물학적 및 이화학적 특성을 연구하였다. 감마선 조사$(1{\sim}10\;kGy)$한 대두분의 미생물학적 및 이화학적 특성을 평가하기 위해 총세균수, 곰팡이, 아미노산, 지방산조성 유리당조성, 산가 등의 변화를 조사하여 살균효과 및 품질에 미치는 영향을 비교 검토하였다. 즉 2종의 수입산 대두분의 경우 $3{\sim}5\;kGy$ 조사로써 곰팡이를 완전히 사멸할 수 있었고, 총균수에 있어서도 미생물학적으로 안전한 수준이하로 살균이 가능하였다. 총아미노산의 경우 함황 아미노산인 cysteine이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유리 아미노산, 지방산은 유의적인 차이를 나타내지 않았다. 감마선 조사에 따른 대두분의 유리당 조성의 변화는 조사선량이 증가함에 따라 stachyose, sucrose가 감소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나 나머지 당들은 변화가 없었다. 이상의 결과에서 두부제조 원료로 대두분말이 허용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안전성 문제는 감마선을 $3{\sim}5\;kGy$ 수준의 선량으로 조사함으로써 품질변화 없이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인정되었다.

삼태극의 의미고찰 (Reconsideration of the Meaning of Sam-Tai-Ji)

  • 김명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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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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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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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서울 올림픽의 휘장을 비롯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문양 중의 하나로 삼태극이 사용되고 있다. 삼태극은 태극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철학적 규명없이 일부 종교단체나 지식인들에 의해 '천지인'이라는 삼재론으로 혹은 '천지인 조화사상'이라는 넓은 틀로 해석되고 있다. 이에 삼태극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보고자 하는데 본 연구의 목적을 두었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나, 이념의 테두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에서는 노장과 불교, 무속 등을 묵인하여왔다. 그리하여 태극 문양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유교적 이념이 드러나야 하는 공식적인 곳에서는 이태극 문양을 사용하고, 왕릉과 같은 사적인 곳에서는 삼태극 문양을 새겨왔음을 밝혀 놓았다. 이와 같이 문양을 분리 사용한 이유를 규명해보기 위하여 태극의 변화 발전 과정을 고찰해 보았다. 동양(한 중 일)에서는 태극 문양을 우주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양은 한당시대까지는 삼태극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도 "한서" "율력지" 속에서'음양덕(陰陽德)'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후 중국사에서 등장한 "고태극도" 속에서는 이태극 속의 흰점으로 문양이 변화되어 나타나며, 그 의미도 '음양과 생기'로 표현된다. 그러다 유가 사상이 자리 잡은 송대 이후로는 '음양과 리'로 그 해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리는 '생기'와 달리 비실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어서, '음양과 리'를 문양으로 표현할 때는 이태극으로 표현하게 되었음을 논해 놓았다. 결론적으로 삼태극은 '음양덕' 혹은 '음양생기', '음양무극' 등을 문양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영(靈)의 세계를 인정하는 도가와 불교의 사상 속에서 주로 발달하였으며 '기'를 본체로 하는 세계관이다.

전라도 석탑의 세부 기법 고찰 - 옥개석 물끊기홈과 충탁공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detailed treatment techniques of seoktap(stone stupa) in Jeollado province -in the groove for dropping water and the hole for wing bell of the okgaeseok(roof stone)-)

  • 조은경;한주성;남창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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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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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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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일반적으로 조선후기 한시(漢詩)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민간의 풍속과 민중의 생활상을 상세하게 다룬 일련의 연작형 기속시(紀俗詩)가 다수 창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속시는 그 소재(素材)와 내용에서 특정 지역의 풍토, 지리, 기후, 물산(物産), 인정(人情), 세태(世態), 생업과 노동 등 민중의 생활 현장 전반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소재의 특징에 따라 기속시는 해당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반영하고, 토속적 정서와 민중이 생활 감정을 중점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러한 기속시중 소재적 측면에서 민중의 연중행사인 세시풍속을 읊은 시를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라 하는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명절이나 세시 절기에 벌어지는 세시풍속만을 소재로 연작형을 이룬 작품이 대거 출현하게 된다. 이는 실학의 발전과 민족의식의 고조, 신분질서의 동요와 민중 역량의 성장,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른 예술사 전반의 변모와 함께 특히 한시사(漢詩史)에 나타난 '조선시(朝鮮詩)' 정신의 대두(擡頭) 등이 역사적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자의 다양한 체험과 견문, 민족과 민중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 등 작가적 체험과 의식성향이 세시기속시(歲時記俗詩) 창작의 중요한 배경적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연작형 세시기속시는 584수(首)로 확인되며, 그중 대보름 풍속을 소재로 한 시는 178수(首)로 전체의 1/3을 차지하는 분량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절기(節氣)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전래민속을 한시의 소재로 직접 수용함으로써 민족의 생활양식을 폭넓게 반영하고 있다. 특히 기층민의 현실 생활 현장에 밀착하여 그들의 질박하고 활기찬 삶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분방 발랄한 민중상을 창조하고 민중의 염원과 삶의 애환을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싸움', '노구반공양'이라는 풍속을 소재로 삶았던 것도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백제 지하저장시설(地下貯藏施設)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검토 (A Study on the Structure and Function of the Underground Storage Facility in Baekje)

  • 신종국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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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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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9-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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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최근 백제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토광형태 또는 목재나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한 지하식의 저장시설이 발견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백제시대 지하저장시설을 형태 및 축조방법별로 복주머니형(플라스크형), 목곽형, 석곽형 시설로 구분하고 각각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복주머니형 저장공은 백제 한성시기~사비시기의 금강 및 한강유역의 많은 유적에서 현재까지 600기 이상 조사된 백제의 가장 대표적인 지하저장시설로 3~7세기대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의 백제의 독특한 저장문화를 구성하는 유구로서 그 구조나 중국의 예를 통해 볼 때 곡물의 장기저장을 위한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외에도 토기의 저장 등 다양한 물품이 저장되었다고 보인다. 목곽형과 석곽형의 저장시설은 사비시기의 유적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어 6세기 이후 복주머니형 저장공의 축조가 줄어들면서 그 기능을 일부 대체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그 축조방법이나 구조상 공력이 많이 소모되는 것으로 도성이나 성곽유적에서 공적인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곽형 저장시설은 평면 장방형인 것과 방형인 것, 축조방식에 따라 가구식(架構式)과 주혈식(柱穴式)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는 축조하고자 하는 지점의 지형이나 지질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목곽형 저장시설은 관북리유적과 월평동유적의 예를 통해 볼 때 과일과 같은 식품류의 저장과 군사주둔지에서의 중요물품 저장 등 필요에 따라 다양한 품목의 물건이 저장된 것으로 보인다. 지하 저장시설의 기능적 특성상 식품류의 장기저장과 일본의 예를 통해 볼 때 화재시 중요물품의 안전한 보관과 관련하여 목곽이나 석곽의 저장시설이 채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주족과 인삼 (The Manchus and ginseng in the Qing period)

  • 김선민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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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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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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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만주족의 선조인 여진족은 그들이 거주하는 만주의 자연환경에 따라 채집과 수렵활동을 주된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여진족의 거주지는 대부분 삼림이 울창하고 하천이 발달하여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로는 적합했지만 농경에는 맞지 않았다. 여진족 사회조직 역시 채집과 수렵활동에 적합한 방식으로 형성되었고 그것은 이후 청나라 고유의 사회 군사조직인 팔기제도로 발전했다. 한편 채집과 수렵으로 획득한 자연자원을 주변의 농경사회과 교환하는 일은 여진 사회의 발전에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인삼을 비롯한 만주의 자연자원을 중원의 한인들과 교역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대외무역이 여진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만큼 확대된 것은 16세기의 현상이었다. 당시 외부에서 유입된 은은 중국 내지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나아가 만주를 비롯한 명의 변경지역의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만주의 자연환경에 기초한 수렵 채집활동이 16세기에 이르러 중원에서 유입된 은과 조우하여 변경 사회를 자극했고, 분산되어 있던 여진 부락은 경쟁과 통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만주족으로 변모하여 1636년 청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1644년 만주족은 중원 정복에 성공하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중원으로 들어간 후에도 청황실의 만주족은 만주 인삼의 가치를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7세기 말까지 만주 인삼은 만주족의 제도인 팔기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만주에 주둔한 팔기 병사들은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여 인삼의 생산지를 한인의 접근으로부터 보호했다. 만주 인삼의 채취는 황실 내무부, 부트하 울라 총관, 성경상삼기 등 황제에게 직속된 기구에서 담당했다. 이들은 부트하 병정이나 팔기 병정을 파견하여 지정된 장소에서 정해진 액수의 인삼을 채취하여 납부하게 했다. 황실의 귀족만이 만주에 사람을 보내 인삼을 채취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고, 그조차 엄격히 제한되었다. 18세기도 만주의 인삼은 여전히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관리되었다. 청의 인삼 정책은 황실의 발상지인 만주와 그 자연자원을 민간인의 침탈로부터 보호하고 만주족 고유의 전통을 유지한다는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동시에 만주의 인삼은 국가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으로 개발되었다. 국가가 필요한 만큼의 수입을 징수하기 위해서는 인삼을 대량으로 채취해야 했는데, 부트하 병정이나 팔기 병정을 파견하는 것만으로는 안정적인 인삼세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상인들이 인삼업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청의 인삼 정책은 이후 점점 더 상인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청대 인삼의 국가 독점은 1853년에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부유한 상인이 채삼인을 고용하고 인삼을 대신 납부하는 현상은 18세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청대 만주족의 인삼 독점은 사실상 한인 상인의 참여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약재 생산 및 품질부문의 ISO국제표준화 등재현황 소개 및 대응방안 고찰 (Introduction of the International Standardization of ISO in the Production and Quality of Herbal Medicines and a Review of Countermeasures)

  • 김용일;강영민;한신희;허목;김영국;장재기
    • 한국국제농업개발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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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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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7-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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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고에서는 최근 중국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한약재 ISO 국제표준화에 대한 대응을 위해 최신 등재 현황을 소개하고 주요 추진상의 문제점과 대응방안들을 점검해 보았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국제표준화기구 전통의학 기술위원회(ISO TC249)는 2009년 설립이후 31개의 국가가 참여하여 한약재 국제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 중 일은 발의 문건은 90%이상을 차지하여 사실상 아시아의 전통의학 분야를 두고 경쟁하고 있으며 간사국인 중국은 약용작물의 종자 종묘에서부터 약재의 생산, 품질 그리고 침구, 의료기술 등에 이르기까지 전 한방분야에서 표준화를 주도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약용작물 재배 및 한약재 품질 관련 안건만 약 50여건에 달해 향후 5년 내에 시장 거래량 상위품목들의 국제표준화 작업이 대부분 완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2.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안건들은 한약재의 품질이나 품질평가에 관한 안건들이 대부분이다. 이 안건들이 국제표준으로 인정되면 세계 한약재 유통시장에는 새로운 질서와 우열기준이 생기고 유통 한약재의 시장가치 평가에 반영되어 각국 한약재 점유율 변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들 안건들은 직접적인 재배생산 표준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성분이나 성상 등에 대한 표준을 담고 있으므로 대부분 재배생산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일 중국 중심의 표준화가 계속해서 심화된다면 장기적으로는 국내 생산농가에 부담을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약재 국제표준화 대응은 향후 국내 생산물이 표준규격을 달성할 수 있는 범위내로 기준을 유도하는 전략을 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국내 생산물의 특성을 파악하고 선반영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3. 한약재 표준화 대응은 중국의 추진안건이 많으므로 분야별 파급영향을 고려한 선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종자 종묘 등 추가적인 제한 필요성이 낮은 분야보다는 향후 시장에서 한 중 간 경쟁이 발생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산지 변조, 농약 잔류량 이산화황 과다검출 등의 이력이 있는 약재들은 해당 표준을 강화하고 재배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도지약재들의 경우 성상이나 지표성분 등에 대한 국내약재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할 필요성이 있다. 곰팡이나 해충관리 등은 아직 각국의 관리규정이나 저온저장 시설 등 현장 인프라 구축이 충분치 않은 점들도 고려되어야 한다. 아직 국제표준을 추진하기 위한 국내의 연구결과들이 충분치 않은 부분들이 많으므로 추가적인 연구와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