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Chinese Brush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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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분석을 통한 전통 수록지의 서화 특성 비교 (Comparison of the Painting and Writing Properties of the Traditional Handmade Papers by Image Analysis)

  • 민춘기;조중연;이선호
    • 펄프종이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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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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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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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Hanji is a traditional handmade paper, which has been famous for its excellent qualities in strength, whiteness, gloss, and smooth feel in painting and writing in ancient Far East for many years. Nowadays, however, its old fame has declined and it has been used only in limited extent such as in traditional Korean brush painting and writing. In this study, 9 kinds of commercial handmade papers made in Korea, China, and Japan were collected and their printing and writing properties were evaluated by image analysis. Chinese handmade paper showed the best result in absorption area of China ink, the roundness and feathering of China ink blots, followed by Hanji. Abrasion coefficient of the Chineses papers was higher than that of the others, which was regarded to contribute to the difference in touch feeling of the writing brush on the papers. It was shown that absorption rate and blot area of China ink were increased by Dochim. Hanji which has recently been made by so called \"traditional method\" showed no quality difference from the modified Hanji.ied Ha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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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를 이용한 VR 융합콘텐츠 제작공정 연구 (A Study on VR Convergence Contents Creation Process ink painting)

  • 후정동;최철영
    • 한국융합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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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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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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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최근의 VR 기술을 애니메이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로 보여진다. 이러한 VR 기술을 기존의 수묵애니메이션에 활용하면 평면적인 예술 작품이 새로운 서사방식과 시청각 언어를 갖추어 새로운 애니메이션 장르로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로 개발하는 것이 아닌 기존의 평면적인 수묵 이미지를 360도 화면에 배치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는데 기존에 제작된 수묵 애니메이션의 배경 수묵 이미지에서 거리의 깊이에 따른 레이어 추출과 360도 공간에 이들을 깊이에 따른 곡면에 배치를 통해 VR 공간에 깊이감을 부여하는 VR수묵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보려하였다. 본문에서는 기존의 수묵화 이미지에서 원경, 근경, 중경 레이어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 방법들을 찾아보고 제시해보려 하였다.

조선후기 혁화의 그래픽 콘텐츠 연구 (A Study on the Graphic Contents of Hyuk-Wha in the late Chosun Dynasty)

  • 이명구;남인복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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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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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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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조선 후기인 18세기 전후에는 각종 민화(Min-Wha)들이 민중들의 생활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면서 소재나 기법에서 독특하고 다양한 작품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민화 가운데에서 특이한 표현 양식 중 하나로 혁화(Hyuk-Wha)를 들 수 있다. 혁화는 그 기법으로 볼 때, 서예의 표현 양식의 하나로 분류되는 비백서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버드나무 껍질이나 갈대류의 줄기를 바르게 펴서 붓 대용품으로 써서 작업한 비백서의 다소 거친 질감과는 시각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혁화의 발전 과정은 민화 전체의 발전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도교적인 길상문자 문자도 및 유교적인 효제문자도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형식의 창의적이고 차별화 된 문자도 형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문자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한자의 뛰어난 조자력을 상징적으로 조형화 한 혁화는 오늘날 그래픽 분야의 워드 마크(Word Mark)나 브랜드 로고타입(Brand Logotype) 등에 응용되는 픽토그래피(pictography)와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민중의 집안을 꾸미고 장식하는 용도로 성행했던 혁화는, 오늘날 다양한 장식용품의 등장과 현대화된 주택의 발달로 그 용도는 거의 소멸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동안 민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고 서예 및 문자도 와 더불어 발전해 온 혁화가 서구에서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는 현시점에 비추어 볼 때, 그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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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가 황씨 사형제의 작품세계 (Artworks of the Hwang Brothers, Writers and Painters)

  • 송희경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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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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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7-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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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우석 황종하(우석(友石), 인왕산인(仁王山人) 황종하(黃宗河) 1887-1952), 우청 황성하(又淸, 黃成河, 1891-1965), 국인 황경하(菊人, 黃敬河, 1895-?), 미산 황용하(美山 黃庸河, 1899-?)는 네 살 터울의 형제들이며 모두 서화가로 이름을 남겼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특별한 교육기관에 몸담지 않고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나 선배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지만 각자 선호하는 기법과 잘 그리는 소재가 달랐다. 즉 황종하는 호랑이 그림을, 황성하는 지두화를, 황경하는 인삼도를, 황용하는 사군자화를 잘 그린 것이다. 각종 전람회나 전시회에 참여하는 태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사형제전을 함께 개최하거나 합작도를 자주 제작하면서 형제간의 우의를 쌓아 나갔다. 특히 1922년에 그들의 고향인 개성에서 창립한 ${\ll}$송도서화연구회${\gg}$는 후배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자 스스로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는 문화의 장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이렇듯 황씨 사형제는 서로의 생각과 취미를 공유할 수 있었던 친구들이였고, 동시에 각자 개성 있는 작품세계를 펼쳤던 예술가였다. 그리고 구한말에 태어나 역사의 격변시기를 경험하면서도 전통 한국화의 맥을 지켜왔고, 타계할 때까지 평생 지필묵을 고집하면서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며 화제를 썼던 작가들이었다.

朝鲜秋史与清文人学术交流之小考 -以翁方纲與阮元为中心 (A Study of Korean Kim Jeonghui and Qing Dynasty Scholars Academic Exchanges -Focus on Weng Fanggang and Ruan Yuan-)

  • 최창원
    • 산업진흥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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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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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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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After the Qing Dynasty overthrow of the Ming dynasty, this is far-reaching influenced on the Ming Dynasty's Sovereign state of the Joseon dynasty. Not only did regulations prohibit the entry into various books published by the Qing Dynasty, In addition, the "Northern Expedition" of Song Siyeo put forward the mainstream political proposal of the Northern Expedition and Qing Dynasty.Even in this context, Representatives of scholars such as Hong Daeyong, Bak Jega, Kim Jeonghui on the Joseon dynasty peninsula at the time, put forward the idea of "Learning from Central Plains" through several visits to Shuntian Prefecture (now Beijing), And gradually formed the well-known Silhak (Practical Learning) ideological of "Bukhak, (Northern Learning)" in the Joseon dynasty history. the Joseon dynasty Silhak ideological scholar of Kim Jeonghui also was under the influence of the Weng Fanggang and Ruan yuan other famous Qing Dynasty Textual scholar, Fruitful achievements in Chinese Classical Studies Epigraphy, Calligraphy.He founded the "Chusa-che" style of calligraphy Chusa, the "Chusa-che" styled is although born out of the clerical script, but more composition and See also asymmetrical in harmony, Strong and vigorous brush strokes, Every word vibrant, Make it a master of gold stone calligraphy in the Joseon Dynasty.This study based on some records of Kim Jeonghui's visited to Shuntian Prefecture(now Beijing), this article examines the academic activities of seeking truth to facts in Korea and the Qing Dynasty at the time, and the impact on these activities on calligraphy and painting in the Joseon Dynasty.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남종화(南宗畵)의 예술심미 고찰 (The foundation and Characteristic on the Aesthetic of EuiJae Huh BaekRyun' Namjonghwa)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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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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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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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호남 남종화의 상징적 거목이자 호남문화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의재 허백련(1891~1977)은 진도출신으로 소치 허련의 방계이며, 미산 허형의 제자이다. 전통 남종화 정신과 그 기법에 충실한 화격(畫格)을 자득(自得)·자화(自化)하였다. 의재(毅齋)는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켜 후진양성을 도모하였고, 해방 후 무등산 아래 산장을 짓고 다도인으로서, 그리고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던 사회교육자로서의 또 다른 면모도 보였다. 그는 한시와 화론에 조예가 깊었고, 서예에 있어서 독특한 심미경지를 구현하는 등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의 전형적 서화가였다. 의재(毅齋)는 특히 산수화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화풍은 예황풍(倪黃風)의 갈필(渴筆)로써 기존 화법을 준수하면서도 문기(文氣)를 중요시 여겼으며, 탈진습기(脫盡習氣)하여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끊임없이 도전했다. 의재(毅齋)의 작품세계는 화풍이나 추구하는 관점의 변화를 작품에 사용한 낙관(落款)을 기준으로, 고법(古法)과 사의간원(寫意簡遠)의 숙련기였던 '의재(毅齋)'시대, 실경(實景)과 남화(南畵)의 융합 화풍으로 절정기를 보였던 '의재산인(毅齋散人)'시대, 청담평안(淸談平安)한 신품경지(神品境地) 구현으로 독자적 화풍을 이룬 '의도인(毅道人)'시대 등 총 3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의재(毅齋)의 공헌은 동양회화의 지류인 한국회화문화의 정통 남종화에 대한 한 축을 이어왔다는 미술사적인 평가를 넘어 남도화의 보편적 정신과 지역적 특성을 바탕한 실경과 정서를 살린 창의적 계승을 통하여 현대를 잇는 조종(祖宗)이었음을 인식하고, 그의 예술정신과 전통에 대한 열정과 실험정신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소치 허련(1808~1893)의 사의(寫意) 묵란화 (A Study on Xieyi (寫意) Ink Orchid Paintings by Sochi Heo Ryun)

  • 강영주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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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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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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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소치 허련(小癡 許鍊,1808~893)은 조선 말기 대표적 남종 문인서화가이며 남도 문인화의 시조로,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문인의 학문적 면모와 화원의 능숙한 화법을 모두 체득해 '사의화(寫意畵)'를 이룬 직업형 문인화가였다. 허련의 산수화는 그의 화격을 높이 산 김정희의 지도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추사 사후 그의 나이 70세경에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묵란화는 '추사란(秋史蘭)'의 양식과는 관련이 없고, 전체적으로는 고법(古法)을 따르면서도 거칠고 호방한 필치의 사의성을 띠고 있어 주목된다. 허련의 묵란화는 사군자류 중 화란법(畵蘭法)을 남길 만큼 관심을 가졌던 분야임에도 전체적인 작품의 조사나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화란법과 제발(題跋), 인문(印文)에 나타난 난화관(蘭畵觀)을 통해 그의 묵란화 인식을 살피고, 화보를 임방하고 당대 화풍을 수용하면서도 개성적인 필묵의 운용으로 형성된 소치란(小癡蘭)의 면모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특히 허련은 당시 묵란화의 대가인 이하응이나 조희룡과 화우(畵友)로 지내지만 난 그림에 있어서는 김정희의 난화론을 바탕으로 삼아 초기 지두란(指頭蘭)을 그리는 등 자신만의 화란법을 형성하고 예술세계를 구축한다. 또한 난화는 유가적 전고(典故)를 바탕으로 그리지만 제발과 인장의 내용을 통해서는 유가적 성격뿐만 아니라 도가 불가적 의미까지 더해져 허련의 인생 지향과 사유세계를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다양한 철학과 심미의식이 반영된 허련의 묵란화는 시기에 따라 변화 과정을 거치며 만년에 사의 묵란화를 형성한다. 즉 그는 직업형 화가였음에도 말년에 더욱 활발히 제작했던 사의란을 통해 조선 사대부의 이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음을 알 수 있고, 소치란은 문인의 표상을 실현하려는 사의적 시각과 의지의 발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석재 서병오(1862-1936)의 1889년작 난죽석도 연구 (A Study on the 1889 'Nanjukseok' (Orchid, Bamboo and Rock) Paintings of Seo Byeong-o)

  • 최경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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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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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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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서병오(徐丙五, 1862-1936)는 서구적 '미술' 개념의 도입으로 일본화 내지 서양화로 기울던 일제강점기 시서화일치의 대구 문인화단이 형성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79년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의 만남을 계기로 서화계에 입문하였으나, 문인화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부터이다. 그의 예술세계는 세 시기로 구분되며, 학습기인 1879년부터 1897년까지는 관직 진출을 목표로 하였던 때문인지 중국 화보를 임모하거나 이하응의 영향 아래 사군자화를 여가에 그리는 정도였다. 발전기는 1898년부터 1920년까지로 그는 애국계몽운동 등 사회적 지도자로 활동하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삶의 방향을 문인화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중국 여행에서 다시 만난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운미란과 포화(蒲華, 1830-1911)의 묵죽법을 근간으로 새로운 화풍을 적극 모색함과 동시에 산수, 화훼, 기명절지 등의 화목도 다루었다. 완숙기인 1921년부터 1936년까지는 대구와 한양을 오가며 근대 한국 화단의 서화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묵란과 묵죽에서 윤묵의 호방한 필법을 특징으로 하는 개성적 화풍을 완성하였다. 특히 학습기의 경우 관련 기록이나 현전작품이 드물어 서병오의 창작활동이나 화풍 등에 관한 것은 추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석죽도 11점은 학습기의 화풍 연원이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889년작 난죽석도 가운데 묵란도는, 이하응이 1882년 7월 청군에 의해 체포되기 이전에 그린 초기 군란도와 석란도에서 영향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묵죽도는 한양에 널리 알려진 양주화파 정섭(鄭燮, 1693-1765)과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 1809-1892)의 화법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의 석란도 형식을 응용하여 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괴석도의 경우 직접적인 관련성은 찾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청나라의 괴석화가 주당(周棠, 1806-1876)과 여항화가 정학교(丁學敎, 1832-1914) 등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적으로 서병오의 1889년작 난죽석도는 학습기에 그려진 것으로 운현궁을 찾았던 허련과 정학교 같은 동시기 화가들이나, 한양에 작품이 유입되었던 정섭과 주당 등의 중국 작품을 실견하며 이들의 화풍을 수용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6세기(十六世紀)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畫) 이해의 확장 : <경포대도(鏡浦臺圖)>, <총석정도(叢石亭圖)>를 중심으로 (Broadening the Understanding of Sixteenth-century Real Scenery Landscape Painting: Gyeongpodae Pavilion and Chongseokjeong Pavilion)

  • 이수미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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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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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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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을 받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2019년)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인 <경포대도>와 <총석정도>는 조선시대 회화사 이해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지대하다. 두 작품이 1557년의 관동 유람을 계기로 그려진 병풍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어서 16세기 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밝히기 위해서 본고에서는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에 담긴 경물의 내용을 살펴보고 제작시기와 양식상의 특징을 분석한 후,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 작품에 담긴 회화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작품의 제작 배경은 <총석정도>의 발문으로 알 수 있다. 본고에서 박충간(朴忠侃)(?~1601)으로 비정한 정상일로(商山逸老)가 1557년 봄에 홍연(洪淵)(?~?)과 함께 금강산(풍악산)과 관동 지역을 유람하고 유산록(遊山錄)을 작성하였으며 시간이 흐른 뒤 그중 몇몇 명승지를 그려 병풍을 만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연은 자가 덕원(德遠)으로 1551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84년까지는 생존했던 인물이다. 박충간은 호가 남애(南崖)로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을 고변하여, 그 공으로 형조참판으로 승진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된 후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 글로 작품의 제작 시기를 1557년의 유람 후이자, 발문을 쓴 박충간이 50대 이상이 되는, 1571년 이후 곧 16세기 후반경으로 보았다. 산수나 나무 표현 등의 화풍을 기준으로도 16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과 부합한다. 전술한 발문의 내용으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가 병풍의 일부였던 것을 알수 있으며, 발문이 써 있는 <총석정도>가 마지막 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포대도>를 보면 구도면에서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편파(偏頗) 3단 구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으나 실경(實景)을 대상으로 하여 그 배치와 화법이 현실화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시점(視點)에 있어서도 여러 경물간의 관계나 경관의 특징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사선각(斜線角)의 부감시(俯瞰視), 정면시(正面視) 등을 활용하여 경포대의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다각적(多角的)인 관점(觀點)을 보여준다. 산의 형태나 태점(苔點)의 사용은 1557년작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와 매우 유사하다. 16세기 안견파의 특징인 짧은 선이나 점으로 질감을 내는 단선점준(短線點皴)과 구름 모양 운두준(雲頭皴)은 현장감 있게 변모되었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통적인 구도와 연결성을 찾을 수 있는 <경포대도>와 달리 <총석정도>는 그 구도가 매우 파격적이다. 화면에 중심축을 두고 돌기둥들이 첩첩이 도열하여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데 근경(近景)의 돌기둥, 중앙의 사선봉(四仙峯), 절벽 위의 사선정(四仙亭)을 삼단계 정도의 깊이감으로 배치하여 화면에 공간감을 조성하였다. 중앙의 사선봉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으나 수직적인 돌기둥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분질적(分節的), 평면적(平面的)인 양상으로 그려져 아직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조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기둥의 아랫부분은 희게 하고 윗부분은 어둡게 하여 고원(高遠)의 상승감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각 기둥을 묘사하는 준법을 보면 기둥으로 설정된 면에 담묵을 바르고 그 위에 농묵의 가는 선들을 그어 총석의 질감과 쪼개짐을 묘사하였다. 붓끝을 사선으로 누르며 수직으로 내려 긋고 있어서 부벽준(斧劈皴)의 초기적 양상을 보인다. 일관되게 보이는 이러한 흑백의 대조, 수직적 준법의 구사는 앞으로 전개될 절파계(浙派係) 화풍의 유행을 예시해준다. 한편 기둥의 윤곽 및 균열문이 각각 다 달라서 실제의 특징을 살리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에 올라앉은 새들의 묘사, 파도와 흰 거품의 표현 등에서 반복적인 붓질을 찾을 수가 없고 매우 생생한 묘사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경물 배치는 이후 변화를 보인다. <경포대도>는 아래쪽에 죽도(竹島)를 두고 경포호를 넘어 위쪽에 위치한 경포대 건물과 오대산 일대를 올려보는 구도였다. 이러한 배치는 경포대를 화면 아래쪽에 두고 위쪽의 바다를 향하는 18세기 이래의 전형적인 구성과 차이를 보인다. 바다 쪽에서 총석을 바라보며 그린 <총석정도> 역시 이후의 작품에서는 내륙에서 바다를 향하는 것으로 관점의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정선(鄭敾)(1676~1759)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작품이 제작된 이후, 두 사람의 구도를 따라 관동도의 유형이 정착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라진 듯 했던 16세기 <경포대도>의 구도가 조선 말기 <강릉 경포대도>에서와 같이 민간 회화에서 전승된 것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관동 지역의 명승도는 이른 시기부터 그려져 고려 김생(金生)(711~?)의 관동도(關東圖), 조선 초 안견(安堅)(15세기 활동)의 낙산사도(洛山寺圖) 등 여러 화가가 단폭이거나 여러 폭의 관동도를 병풍이나 첩 형태로 그렸던 것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록은 많으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는데 본고에서 고찰하는 이 두 점은 현존하는 관동도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관동도(關東圖) 병풍(屛風)의 제작 양상을 알게 해주어 회화사적인 의미가 크다. 특히 발문의 내용에 따라 8폭 병풍일 것으로 생각되어 16세기 후반에 이미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형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성격에 있어서 현존하는 16세기 실경산수화의 예로 거론되는 작품들이 모두 실용적, 공적인 목적의 계회도나 기록화로 제작되어 실경산수화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실제 경관을 대상으로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발문을 쓴 박충간은 유람할 때 지었던 감상시를 곁들여 자연의 진면목을 반추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기존에 알려진 실경산수화의 성격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으로 순수 감상을 목적으로 한 본격적인 실경산수화의 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이처럼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두 작품은 유람의 결과를 시화(詩畫)로 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존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예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또한 그간 확인할 수 없었던 16세기 실경 산수화의 다양한 형태와 구도 및 시점의 면모를 보여주어 한국 실경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한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