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Ancient Rem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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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적가시도 분석을 이용한 신라시대의 산성 입지와 감시체계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urveillance System and the Location of Fortress of the Sil-la Dynasty by a Cumulative Visibility Analysis)

  • 김충식;이재용;김영모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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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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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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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상호가시성 분석을 통해 신라산성의 입지와 감시체계를 해석하였다. 분석을 위해 Arcview 3.2에서 $10{\times}10m$ 그리드의 지형표고모형이 제작되고, 명활산성, 남산신성, 서형산성 등의 위치가 표시되었다. 4개의 연구결과가 도출되었다. 첫째, 신라 왕도(538개 조망점)의 누적가시도(cumulative visibility, 累積可視度)에서 왕도에 면한 산성구간이 높은 피시빈도(被視頻度)를 보였다. 이는 산성이 왕도에 대한 가시를 확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3개 산성별 누적가시도에서 산성의 내부지역은 전시에 지휘가 유리하고, 외부지역은 산성간 상호감시체계가 형성되었음을 밝혔다. 셋째, 3개 산성 합산 누적가시도에서 산성이 없는 왕도 북쪽에서 높은 피시빈도가 나타났다. 왕도 북쪽은 명활과 서형산성에서 적군의 감시와 지원이 용이한 4km 내외에 포함된다. 신라 왕도는 산성으로 인해 견고한 감시체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효율적인 감시와 방어를 위해 산성이 왕도에서 봉우리로 상승하며 입지되었음을 추론하였다. 이는 7~8부 능선 입지설을 대체할 수 있는 실용적 산성 입지설이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 사용한 누적가시도 분석기법은 추후 경관고고학적 입지 분석에 실증적인 도구가 될 것이다.

판축토성(版築土城) 축조기법(築造技法)의 이해(理解) - 풍납토성(風納土城) 축조기술(築造技術)을 중심(中心)으로 - (A Study on the Construction method of Stamped earthen wall)

  • 신희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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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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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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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판축법은 판으로 틀을 만들어 그 안에 흙이나 모래 등을 층층이 부어 다짐 방망이 등으로 찧어서 단단하게 쌓아 올리는 대표적인 고대 토목기법으로, 토성이나 건물 기단, 담장과 같은 시설을 축조하는 데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이글의 목적은 풍납토성 축조에 이용된 다양한 기술의 분석을 통해 우리나라 판축토성의 축조 방법과 원리를 이해하는 데 있다. 토성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지작업을 실시하고 기초를 단단히 조성해야 한다. 점성이 강한 흙을 깔아 기저부를 형성하는데, 구덩이를 파고 다시 메꾸어서 기초를 다지는 기조의 원리가 이용된다. 때로는 지정목을 박거나 잡석을 깔아 기초를 다지기도 한다. 풍납토성은 중심토루의 안팎으로 여러 겹의 판괴를 비스듬하게 연접하여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비록 고정주와 협판, 달구질 흔적 등의 뚜렷한 판축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판축틀의 일부로 추정되는 목재가 결구된 상태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층에서는 판괴 내의 결합력을 높이고 수분을 유지하여 지내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부엽층도 확인되었다. 중심토루 외벽에서는 역경사 판축법을 이용한 호성파도 관찰된다. 이밖에 성벽 축조를 마무리하면서 부석과 석축으로 전체 성벽의 유실 방지와 방수, 배수 등의 효과를 꾀하였다. 습기를 통제하거나 판축토 내의 수분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불다짐하기도 하였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고대 토성에서 판축의 정형을 찾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풍납토성 등에서 확인된 판축의 증거들을 향후 발굴될 여러 유적들과 면밀히 비교 연구해 나가면 판축토성의 축조 방법과 원리를 밝히는데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몽골 시베트 하이르한 유적 선비 시기(1~3세기) 고분 출토 직물의 섬유와 염료 분석 (Analysis of an ancient textiles from the Xianbei period tombs of the Shiveet Khairkhan site, Mongolia)

  • 윤은영;유지아;박세린;안보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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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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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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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시베트 하이르한 유적은 알타이지역 바양 울기 아이막 가운데 쳉겔 솜에 위치하며 다양한 유적이 확인된 유라시아 초원의 중요한 지역이다. 본 연구에서는 몽골 시베트 하이르한 유적의 1~3세기 선비 시기 고분에서 출토된 직물의 섬유와 염료의 특성을 조사하였다. 섬유 식별을 위해 현미경 관찰과 감쇠전반사 푸리에 변환 적외선 분광기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 녹색과 황색 직물은 견직물로 확인되었다. 염료의 분석은 비파괴 분석이 가능한 자외-가시광분광광도계를 이용하여 염직물의 표면 반사도를 측정하였다. 그 결과 녹색 직물은 인디고 염료의 반사스펙트럼과 유사하게 나타났다. 또한 기체 크로마토그래피-질량분석기를 이용한 성분 분석 결과에서도 인디고 염료의 이사틴과 인디고틴이 검출되었다. 이사틴과 인디고틴은 인디고 염료의 특성 성분으로 선비 시기 고분의 녹색 직물은 인디고 염료를 사용하여 염색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색 직물은 반사스펙트럼과 기체 크로마토그래피-질량분석 결과 염료의 종류를 규명하기 어려웠다. 인디고 식물은 수천 년 전부터 청색계 염색에 사용하는 염료이자 전 세계에 다수 종이 분포한다. 선비 시기 고분에서 출토된 직령의(直領衣)는 약 1,800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녹색 직물에서 인디고 염료 성분인 인디고틴과 이사틴이 잘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직물 문화재에 대한 과학적 조사는 보존처리, 원형 복원, 전시 및 보존환경 조성 등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앞으로도 관련 연구가 활성화되어 당시 생활 문화 해석과 직물 문화재의 보존처리 및 보존환경 조성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당산숲 구성요소인 돌탑의 기원 유래 고찰 - 안동 서지리 성황당 돌탑을 중심으로 - (Study on the Origin of Stone Tower as a Component of Dangsan Forest - Focus on Village Shrine at Seoji-ri, Andong -)

  • 최재웅;김동엽;권진량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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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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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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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논문의 목적은 삼첩석, 이첩석 및 돌탑으로 이루어져 있는 '안동 서지리 성황당'을 사례로 하여 당산숲의 구성요소인 돌탑의 조형 양식에 대한 유래와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세개의 돌탑은 옛당산숲으로 보이는 마을 안쪽의 개천변 소나무 동산 정상에 있다. 세 돌은 일직선상으로 9m 거리에 걸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을 바라보며 왼쪽에 삼첩석, 가운데에 이첩석, 오른쪽에 돌탑이 있다. 삼첩석의 제일 아래 쪽은 길이 2.5m, 폭 1.8m, 높이 1.3m이고, 이첩석의 아래 자연석은 길이 1.3m, 폭 1.5m, 높이 0.9m이다. 돌탑은 지름 3m의 원추형에 높이 1.8m로서 작은 돌을 쌓은 것인데, 일명 '모관석'은 현재 이첩석의 맨 위에 있던 것이 떨어져 나간 것으로서, 현재의 이첩석은 원래 삼첩석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까닭은 우리나라 고대 조형 방식의 원리인 삼재사상(三才思想)에 비추어 볼 때, 짝수로 이루어진 조형물은 예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안동 서지리 성황당'이 청동기시대의 거석문화와 후대의 민간신앙이 이어져 오는 과정을 보여 주는 예가 되는 것과 같이, 시기적으로 볼 때 돌탑은 청동기시대의 거대석인 왼쪽의 삼첩석을 기원으로 하고, 가운데에 위치한 좀 더 작은 크기의 삼첩석(현재는 이첩석)을 거쳐, 후대에 오른편에 있는 작은 크기의 보통 돌탑으로 그 조형 양식이 변화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 서지리 성황당'은 돌탑의 기원이 청동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귀중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죽방렴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비즈니스적 가치 탐색 연구 (A Research of Cultural Heritage and Business Value of the Juk-Bang-Ryeum(Fishing Instrument made-by Bamboo Weir))

  • 강명화;이경주;권호종;정대율
    • 예술인문사회 융합 멀티미디어 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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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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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5-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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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경남 사천지역에 잔존해 있는 죽방렴의 실제 현황조사와 여러 역사적 문헌 고찰을 통해 죽방렴의 문화적 가치와 비즈니스 가치를 연구하여 지역문화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하고 세계농어업유산과 세계문화유산의 등재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농업과 더불어 수산업은 인류 역사에 있어 지대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하여 매우 중요한 산업으로 발전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르는 양식산업 이전 원시산업의 채집, 수렵할 때부터 이어온 여러 어로방식 중 실제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경남 남해안의 사천과 남해지역에는 오백년 이전부터 지금까지 존재하여 실제로 운영하는 '죽방렴'이 있다. 이것은 예전부터 국가의 중요한 어업자원으로 관리되어져 왔다는 것을 여러 문헌적 연구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죽방렴은 자연지리적인 해협의 조류 흐름을 이용하여 고기를 채집하는 과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것이다. 조사결과, 죽방렴과 관련한 독특한 지역공동체의 문화가 존재하였으며, 주민들에게도 중요한 자산으로 관리되어져 왔다. 죽방렴은 이러한 역사, 인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과학적 어로원리 이해교육과 해양어로작업 체험장과 같은 교육적 가치와 주변의 역사유적 및 지질환경자원과 연계하여 지역의 중요한 관광자원으로서 비즈니스적 가치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죽방렴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전승해야할 주요 자산인 것이다.

창산 김정기의 유적조사와 한국고고학 (Excavation of Kim Jeong-gi and Korean Archeology)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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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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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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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창산 김정기(昌山 金正基, 1930.3.3~2015.8.26)는 우리나라 문화재 발굴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으신 분이다. 1959년 국립박물관 직원으로 문화재와 인연을 맺으신 이후, 1987년 문화재연구소를 퇴직할 때까지 약 3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자료를 정리하며 2015년 영면하기 전까지 대학과 발굴 전문기관에서 우리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창산은 국내의 기념비적인 고고학 발굴조사를 모두 진두지휘하고 초창기 한국 고고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국내외에 알려져 있으며, 한국 고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그의 활동과 역할은 고고학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나 나름의 한계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다양한 성격의 유적이 활발히 조사되어 한국 고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기로 평가되고 있는 국립박물관의 덕수궁시기(1955~1972년)에 창산은 선사시대 패총유적이나 주거지와 같은 고고학 조사에 적극 참가하여 유적측량과 유구 실측을 비롯하여 사진촬영과 유물 제도 등을 맡아서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익힌 발굴기술을 마음껏 발휘하였고, 전국을 무대로 종횡무진 이루어진 그의 고고학조사는 학사적으로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창산의 견해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주목되는 것은 고분에 있어 수릉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과 청동기시대 문화의 이해에 "해미문화"라는 지역문화론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탁견이었다. 1969년 문화재연구실이 설치됨에 따라 그 책임을 맡은 창산은 미약한 규모인 연구실의 운영과 총체적인 책임을 맡아 찬란한 우리문화를 지켜내고자 조사와 연구에 고심하였다. 그는 불국사 복원공사와 경주 천마총, 황남대총의 발굴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이후 황룡사지, 분황사, 미륵사지 등을 조사하며 삼국시대 불교문화와 가람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창산이 기획하여 진행한 대형 발굴조사는 한국 고고학의 기틀을 다짐과 동시에 관련분야의 연구를 활성화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고고학의 계기적인 발전과정 상에서 볼 때, 다양한 발굴조사법의 시도와 체계화, 고고학 전문 인력의 양성과 발굴조사의 대중화, 조사기록의 정형화 및 자료공개 활성화 등은 이 시기 창산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성과로 손꼽을 수 있다. 한편, 유적조사에 있어서 정확한 기록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열정적으로 발굴에 심혈을 기울인 발굴왕 창산도 유적의 성격을 밝히고 유구를 해석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황남대총 주인공 논쟁의 불씨를 남겨둔 것은 그의 역할을 재음미해볼 때 매우 아쉬운 한부분이다.

'함양 용유담(咸陽 龍遊潭)', 전래명승으로서의 의의와 가치 구명 ('Yongyudam of Hamyang', the Significance and Value as a Traditional Scenic Place)

  • 노재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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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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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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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함양 용유담'에 얽힌 유래와 전설, 지리산유산기 속의 경관 인식, 지형지질학적 특성 그리고 주변 유구(遺構)와 바위글씨의 해석과 분석을 통해 이곳의 경관 특성을 밝히고 이를 근거로 용유담의 명승적 가치와 경관보존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시도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함양의 대표적인 전래승경 '금대지리(金臺智異)'가 천왕봉과 용유동에 대한 묘사이듯, 고지도나 고문헌에서 또한 엄천강의 중심 '용유동(龍遊洞) 용유담'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승경으로서 자리매김 되어왔다. '구룡과 마적도사' '가사어' 전설과 기우(祈雨)의 주술신인 '용신(龍神)의 성소(聖所)'로서의 경관적 은유는 용유담의 본질일 뿐 아니라 신령함과 장소성을 심화시키는 촉매였다. 선인들의 지리산유산기 속에 드러난 용유담의 핵심적 이미지는 '자맥질하는 용과 관련된 지형경관적 특이성', '다양한 모습과 크기의 포트홀', '와류현상에 의한 여울목의 폭음(瀑音)' 그리고 '용 전설의 경관적 은유' 등으로 이들 이미지는 용유담의 장소관성(場所慣性)을 이끌어 왔다. 또한 이곳의 장구소(杖?所) 바위글씨는 김종직을 비롯하여 김일손 조식 정여창 그리고 강대수 등 지리산을 생활경관으로 체험하고 인식하였던 경상우도 사림(士林)들의 '장구 상영지소(杖? 觴詠之所)'로서 기념비적 석문(石文)이자 추모의 표식이다. 또한 용유담 주변의 3단 층계(層階)와 '용유담(龍遊潭)' 바위글씨 그리고 샘[泉]물을 모으기 위해 가공된 수반(水盤)은 제의터로서 영역성이 감지되는 전통조경적 유구이다. 더불어 본 연구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된 용유동문(龍遊洞門), 방장제일산수(方丈第一山水) 등의 바위글씨는 선경지처(仙境之處) 용유담을 알리는 표식이자, 용유담이 지리산의 대표적 승경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밖에 심진대 영귀대 강화대 등의 대(臺)는 옛 선인들의 풍류처이자 유계(遊契)의 흔적으로 용유담의 의의를 더해 준다. 용유담의 기묘하고 독특한 경관은 수려한 자연을 바탕으로 오랜 역사를 두고 이어져 온 장소관성의 산물이자 문화경관의 총체(總體)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본 연구를 통해 지리산 용유담은 '물리적 실체' 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적 가치의 중첩을 통해 꾸준히 전승되어온 복합유산으로 명승 지정 조건에 충일(充溢)함이 확인되었다. 단언컨대 용유담이 갖는 장소성은 물론 지질지형 역사문화적 가치는 그 어떤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나 논리로도 폄하되거나 훼손되어서는 안 될 전래 명승의 진수(眞髓)이다.

왕흥사 목탑의 복원 연구 (A Study on the Restoration of the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 김경표;성상모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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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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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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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The form of the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site is that of the traditional form of the wooden pagodas constructed during the Baekjae Period. Likewise, it is an important ruin for conducting research on the form and type of the wooden pagodas constructed during the Baekjae Period. In particular, the method used for the installation of the central pillar's cornerstone is a new technique.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restore the ruin of the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of the Baekjae Period that remains at the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site. Until now, research conducted on the wooden pagoda took place mostly centered on the Hwangryongsa Temple's wooden pagoda. Meanwhile, the reality concerning Baekjae's wooden pagoda is one in which there were not many parallel cases pertain to the design for restoration. This research paper wants to conduct academic examination of the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to organize the intention of design and design process in a simple manner. This research included review of the Baekjae Period's wooden pagoda related ruins and the review of the existing wooden pagoda ruin to analyze the wooden pagoda construction technique of the era. Then, current status of the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site is identified to def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wooden pagoda, and to set up the layout format and the measure to estimate the size of the wooden pagoda in order to design each part. Ultimately, techniques and formats used for the restoration of the wooden pagoda were aligned with the wooden pagoda of the Baekjae Period. Basically, conditions that can be traced from the current status of the Wangheungsa Temple site excavation using the primary standards as the standard.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was designed into the wooden pagoda of the Baekjae's prosperity phase. The plane was formed into $3{\times}3$ compartments to design into three tier pagoda. The height was decided by factoring in the distance between the East-West corridors, size of the compartment in the middle, and the view that is visible from above the terrace when entering into the waterway. Basically, the origin of the wooden structure format is based on the Goguryeo style, but also the linkage with China's southern regional styles and Japan's ancient wooden pagoda methods was factored in. As for the format of the central pillar, it looks as if the column that was erected after digging the ground was used when setting up the columns in the beginning. During the actual construction work of the wooden pagoda, central pillar looks as if it was erected by setting up the cornerstone on the ground. The reason that the reclaimed part of pillar that use the underground central cornerstone as the support was not utilized, was because the Eccentric Load of the central pillar's cornerstone was factored in the state of the layers of soil piled up one layer at a time that is repeated with the yellow clay and sandy clay and the yellow clay that were formed separately with the $80cm{\times}80cm$ angle at the upper part of the central pillar's cornerstone was factored in as well. Thus, it was presumed that the central pillar was erected in the actual design using the ground style format. It is possible to presume the cases in which the reclaimed part of pillar were used when constructed for the first time, but in which central pillar was installed later on, after the supplementary materials of the underground column is corroded. In this case, however, technique in which soil is piled up one layer at a time to lay down the foundation of a building structure cannot be the method used in that period, and the reclamation cannot fill up using the $80cm{\times}80cm$ angle. Thus, it was presumed that the layers of soil for building structure's foundation was solidified properly on top of the central pillar's cornerstone when the first wooden pagoda construction work was taking place, and that the ground style central pillar was erected on its upper part by placing the cornerstone once again.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is significant from the structure development aspect of the Korean wooden pagodas along with the Hwangryongsa Temple's wooden pagoda.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construction technique which was developed during the prosperity phase of the Baekjae Period is presumed to have served as a role model for the construction of the Iksan Mireuksa Temple's wooden pagoda and Hwangryongsa Temple's wooden pagoda. With the plan to complement the work further by excavating more, the basic wooden pagoda model was set up for this research. Wangheungsa Temple's wooden pagoda was constructed as at the Baekjae Kingdom wide initiative, and it was the starting point for the construction of superb pagoda using state of the art construction techniques of the era during the Baekjae's prosperous years, amidst the utmost interest of all the Baekjae populace. Starting out from its inherent nature of enshrining Sakyamuni's ashes, it served as the model that represented the unity of all the Baekjae populace and the spirit of the Baekjae people. It interpreted these in the most mature manner on the Korean peninsula at the time.

백제정원을 주제로 한 리조트 외부 공간 계획 (Outdoor Landscape Design Proposal for a Resort using the Baekje Traditional Garden as a Theme)

  • 김연금;김해경;김영모;진양교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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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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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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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롯데 부여리조트의 외부공간 중 백제 테마정원을 대상으로 한다. 리조트는 백제역사재현단지 내에 있으며, 이 사업은 '백제문화권 특정지역 종합개발 계획' 중의 하나이다. 백제정원은 역사적으로 유구할 뿐만 아니라 고대 일본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양식에서도 뛰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백제정원의 재현 방식을 공간적으로 구현했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첫째, 백제정원을 롯데 부여리조트에 조성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백제정원의 공간적 구현 방식을 설정하는 것이다. 둘째, 백제 정원의 조경사적 의미와 함께 현재까지 문헌연구와 발굴을 통해 밝혀진 백제 정원의 양식적 특성에 대한 것이다. 셋째, 리조트 외부공간에서 백제정원 재현의 공간적 실현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내용에서 재현은 구조 적용과 구성요소 차용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구조 적용에서는 임류각 공간을 주진입공간으로 하여 관북리 백제 유적을 재현한 월선정 공간을 인접하여 배치하였다. 이 두 공간을 통해서는 건축과 정원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주력했다. 후면에는 후원 성격을 지닌 익산 왕궁리 정원의 곡수로와 석조원, 비폭원을 재현하였다. 구성요소 차용은 식재계획과 건축물을 비롯한 시설물 계획에서 이루어졌다. 이외 정원주변으로는 금동대향로와 산수문전에서 표현되는 대표적 경관인 신선계의 모습과 삼산오봉(三山五峰)형 봉우리, 산 사이 맑은 시냇물, 소나무 숲(송림(松林)) 경관을 형상화하였다. 본 연구의 의의는 먼저 백제정원이라는 주제 자체가 새로운 시도라는 것이다. 백제정원에 대한 선행연구와 실제적인 공간에 구현된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백제시대에 대한 심도 있는 고증을 토대로 백제정원을 개념적 차원뿐만 아니라 계획적 설계적 차원에서 적용 재현하고자 시도했다는 것이다. 전통의 적용이나 재현을 다루는 기존 연구가 사례 중심으로 분석과 평가에 치중해왔던 것과 차별성을 갖는다. 한계는 백제정원의 사실에 대한 선행 연구가 많지 않고, 현재 관련 유적에 대한 발굴 및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진행된 연구이기 때문에 추후에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다면 본 연구에서 제시한 재현에 대한 진정성의 문제와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전통의 재현과 계승의 화두는 어느 시점에서의 완결성보다는 전통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시도가 요구되는 진행형이라는 측면에서 본 연구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발굴된 유적을 그 자리에 '원형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리조트의 외부공간에 '재현'하다 보니 그 자체로 체험의 다양성과 완결성까지 부여되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장소성과 문화경관으로 해석한 태안 백화산의 다층적 종교 관성 (A Study on the Multi-Layer of Religious Inertia Represented in Sense of Place and Cultural Remains at Mt. Bak-wha)

  • 노재현;박주성;고여빈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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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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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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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태안 태을암 마애불사원을 중심으로 한 백화산의 장소성과 문화경관 특성을 조사 분석하여 이 지역 일대에 산재하거나 내재된 경관에 대한 표현방식과 그 의미를 논의함으로써, 백화산 일대의 경관지리코드와 종교적 장소 관성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경관대상 백화산의 입지성과 골산(骨山)으로의 특이성 못지않게 백화산을 시점장(視點場)으로 조망되는 파노라믹한 서해 조망은 관음도량으로서의 백화산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고지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중요하게 읽혀지는 고성(古城)과 봉대(烽臺) 그리고 태을암은 조선조 백화산의 장소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어풍대, 영사대 등 다수의 각자(바위글씨)는 이 산의 조망성과 장소 특성에 기인한 기념성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단군 영정의 태일전 이안(移安) 사실은 백화산이 갖는 국가적 위상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삼성각에 봉안된 단군 영정 등을 통해 토착 종교와 공생하며 오랜 시간 이어져온 보편적 지역성도 공유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태을암에 모셔진 백제시대 불상인 태안마애삼존불은 관음신앙의 도량인 백화산의 존재이유이자 상징체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장소성에도 불구하고 태을암 마애불 전면에 조성된 '태을동천' 각자를 중심으로 한 계류 및 연못공간인 일소계와 감모대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암각바둑판과 조선 중기 이후 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다수의 각자 흔적을 통한 도가적 문화현상 또한 동일한 무게로 읽혀지는 것은 조선말기 팽배된 유불선의 합일사상이 기저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문화경관의 혼재사유는 백화산이 갖는 종교적 장소 관성이 꾸준히 유전하면서 시대정신에 습합해온 결과가 아닐 수 없으며, 백화산에 산재된 여러 유형의 문화경관요소는 태안 백화산의 다층적 장소성과 경관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고유의 지리코드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