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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간호교육자의 역할과 이를 위한 준비 (Roles and Preparation for the Future Nurse-Educators)

  • 김수지
    • 대한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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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4호통권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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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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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
  • 기존 간호 영역 내 간호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급격히 팽창 확대되어 가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건강관리체계가 부적절하게 분배되어 있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건강관리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어 수준 높은 양질의 건강관리를 전체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혹 건강관리의 혜택을 받는다고 해도 이들 역시 보다 더 양질의 인간적인 간호를 요하고 있는 실정이다. 간호는 또한 간호영역 자체 내에서도 급격히 확대되어가고 있다. 예를들면, 미국같은 선진국가의 건강간호사(Nurse practitioner)는 간호전문직의 새로운 직종으로 건강관리체계에서 독자적인 실무자로 그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의사의 심한 부족난으로 고심하는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들에서는 간호원들에게 전통적인 간호기능 뿐 아니라 건강관리체계에서 보다 많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기대하며 일선지방의 건강센터(Health center) 직종에 많은 간호원을 투입하고 있다. 가령 우리 한국정부에서 최근에 시도한 무의촌지역에서 졸업간호원들이 건강관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한 법적 조치는 이러한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기존 간호영역내외의 이런 급격한 변화는 Melvin Toffler가 말한 대로 ''미래의 충격''을 초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역동적인 변화는 간호전문직에 대하여 몇가지 질문을 던져준다. 첫째, 미래사회에서 간호영역의 특성은 무엇인가? 둘째, 이러한 새로운 영역에서 요구되는 간호원을 길러내기 위해 간호교육자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셋째 내일의 간호원을 양성하는 간호교육자를 준비시키기 위한 실질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전략은 무엇인가 등이다. 1. 미래사회에서 간호영역의 특성은 무엇인가? 미래의 간호원은 다음에 열거하는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지금까지의 것과는 판이한 환경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1) 건강관리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컴퓨터화되고 자동화된 기계 및 기구 등 새로운 기술을 많이 사용할 것이다. 2) 1차건강관리가 대부분 간호원에 의해 제공될 것이다. 3) 내일의 건강관리는 소비자 주축의 것이 될 것이다. 4) 간호영역내에 많은 새로운 전문분야들이 생길 것이다. 5) 미래의 건강관리체계는 사회적인 변화와 이의 요구에 더 민감한 반응을 하게 될 것이다. 6) 건강관리체계의 강조점이 의료진료에서 건강관리로 바뀔 것이다. 7) 건강관리체계에서의 간호원의 역할은 의료적인 진단과 치료계획의 기능에서 크게 탈피하여 병원내외에서 보다 더 독특한 실무형태로 발전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미래 간호영역에서 보다 효과적인 간호를 수행하기 위해 미래 간호원들은 지금까지의 간호원보다 더 광범위하고 깊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보다 발전된 기술환경에서 전인적인 접근을 하기위해 신체과학이나 의학뿐 아니라 행동과학 $\cdot$ 경영과학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훈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행동양상면에서 전문직인 답게 보다 진취적이고 표현적이며 자동적이고 응용과학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간호원은 효과적인 의사결정자$\cdot$문제해결자$\cdot$능숙한 실무자일 뿐 아니라 소비자의 건강요구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이 요구에 효과적인 존재를 발전시켜 나가는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2. 미래의 간호교육자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간호교육은 전문직으로서의 실무를 제공하기 위한 기초석이다. 이는 간호교육자야말로 미래사회에서 국민의 건강요구를 충족시키기는 능력있는 간호원을 공급하는 일에 전무해야 함을 시사해준다. 그러면 이러한 일을 달성하기 위해 간호교육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간호교육자는 두가지 측면에서 이 일을 수정해야 된다고 본다. 그 하나는 간호교육기관에서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간호교육자 개인적인 측면엣서이다. 우선 간호교육기관에서 간호교육자는 1) 미래사회에서 요구되는 간호원을 교육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2) 효과적인 교과과정의 발전과 수정보완을 계속적으로 진행시켜야 한다. 3) 잘된 교과과정에 따라 적절한 훈련을 철저히 시켜야 한다. 4) 간호교육자 자신이 미래의 예측된 현상을 오늘의 교육과정에 포함시킬 수 있는 자신감과 창의력을 가지고 모델이 되어야 한다. 5) 연구 및 학생들의 학습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의사결정에 학생들을 참여시키도록 해야한다. 간호교육자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교육자 자신들이 능력있고 신빙성있으며 간호의 이론$\cdot$실무$\cdot$연구면에 걸친 권위와 자동성$\cdot$독창성, 그리고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자질을 갖추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 3. 미래의 간호원을 양성하는 능력있는 간호교육자를 준비시키기 위한 실질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전략은 무엇인가? 내일의 도전을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있는 간호교육자를 준비시키기 위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전략을 논함에 있어 우리나라의 실정을 참조하겠다. 전문직 간호교육자를 준비하는데 세가지 방법을 통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간호원 훈련수준을 전문직 실무를 수행할 수 있는 단계로 면허를 높이는 것이고, 둘째는 훈련수준을 더 향상시키기 위하여 학사 및 석사간호교육과정을 발전시키고 확대하는 것이며, 셋째는 현존하는 간호교육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방법은 정부의 관할이 직접 개입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현존하는 교과과정을 발전시키고 그 질을 향상시키는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미래의 여러가지 도전에 부응할 수 있는 교육자를 준비시키는 교육과정의 발전을 두가지 면에서 추진시킬 수 있다고 본다. 첫째는 국제간의 교류를 통하여 idea 및 경험을 나눔으로서 교육과정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서로 다른 나라의 간호교육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생각과 경험을 교환하고 연구하므로서 보다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발전체인(chain)이 형성되는 것이다. ICN같은 국제적인 조직에 의해 이러한 모임을 시도하는 것인 가치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국가간 또는 국제적인 간호교육자 훈련을 위한 교육과정의 교환은 한 나라안에서 그 idea를 확산시키는데 효과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충분한 간호교육전문가를 갖춘 간호교육기관이 새로운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그렇지 못한 기관과의 연차적인 conference를 가지므로 확산시킬 수도 있으며 이런 방법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그 나라 그 문화상황에 적합한 교과과정 개발에도 효과적일 수 있다. 간호교육자를 준비시키는 둘째전략은 현존간호교육자들이 간호이론과 실무$\cdot$연구를 통합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당면하는 여러가지 요인-전인적인 간호에 적절한 과목을 이수하지 못하고 임상실무경험의 부족등-을 보충하는 방법이다. 이런 실제적인 문제를 잠정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1) 몇몇 대학에서 방학중에 계속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현직 간호교육자들에게 필요하고 적절한 과목을 이수하도록 한다. 따라서 임상실무교육도 이때 실시할 수 있다. 2) 대학원과정 간호교육프로그램의 입학자의 자격에 2$\~$3년의 실무경험을 포함시키도록 한다. 결론적으로 교수와 학생간의 진정한 동반자관계는 자격을 구비한 능력있는 교수의 실천적인 모델을 통하여서 가능하게 이루어 질수 있다고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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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거문고 연구 재검토 (A Re-examination the study on the Gogureoy Geomungo)

  • 최헌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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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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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0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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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거문고는 고구려에서 기원한 악기로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선비등 지식층의 애호 악기가 되어 '백악지장(百樂之丈)'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거문고의 우리 음악문화에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하겠는데, 이 악기의 기원이 외래의 와공후(臥??)라는 것을 넘어 고구려의 거문고 자체가 부정되고 와공후(臥??)만을 인정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에 대한 한국 학자들의 반대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의 거문과와 관련된 연구는 여러 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는데, 그 연구 주제는 주로 왕산악(王山岳)의 거문고 제작설을 인정하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거문고류 현악기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결국 초기에 부정되던 거문고 와공후(臥??) 기원설은 임겸삼의 주장대로 고구려 거문고가 모두 부정되는 것이 아니고, 왕산악이 진(晉)의 와공후(臥??)를 개조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와공후(臥??) 기원설을 인정하고 그 시기가 언제인가에 연구의 초점을 둔 연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여럿의 거문고류 현악기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조금씩 달랐다. 이들을 비교하고 고구려 고분벽화의 거문고류 악기를 다시 검토해본 결과 8개의 고구려 고분에 나타나는 10개의 고구려 거문고류 현악기는 단순히 금(琴), 쟁(箏), 축,(筑) 와공후(臥??), 거문고로 단정 짓기 쉽지 않았다. 조금씩 그 형태와 연주자세, 괘와 술대의 유무, 줄의 수 등의 차이가 있는 것은 고분벽화의 정밀 묘사의 부정확성을 떠나서, 악기의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또 그 내용이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그 명칭을 금(琴), 쟁(箏), 축(筑), 와공후(臥??), 거문고라기 보다는 금(琴)류, 쟁(箏)류, 축(筑)류, 와공후(臥??)류, 거문고류라 해야할 것으로 보았다. 이는 이들 악기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거문고류 악기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유된 생각인데, 이는 고구려에서 거문고가 정착되기 전에는 다양한 거문고류 현악기가 연주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삼국사기"의 왕산악(王山岳) 거문고 제적설에 너무 경도되어 있는 것도 문제로 보았는데, 그것은 고조선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즉 공후인(??引)에 등장하는 공후(??), 즉 와공후(臥??)를 고려한다면 "삼국사기"의 왕산악(王山岳) 거문고 제작설은 믿기 어려우며, 고구려보다 더 이전 시기부터 거문고류의 현악기를 연주해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무도하가와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는 기원전 3-4세기의 악기로 신강(新疆)지역에서 공후(??)가 발굴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이 지역이 중국에 속한 곳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중국의 공후(??)는 외래 악기가 분명하고, 중국에 전래된 이후 금(琴), 슬(瑟), 쟁(箏) 등 악기의 영향으로 와공후(臥??)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시기는 위진(魏晉)시대의 고분에 괘가 있는 와공후(臥??)류 악기의 그림과 토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빨라도 한대(漢代)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중국에서는 아직 공후(??)가 전래되기 전에 이미 고조선에는 공후(??)가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 전래 과정은 중국을 거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또 와공후(臥??)가 외래의 세워 연주하는 하프류의 공후(??)를 뉘여 연주하는 악기로 개조한 중국의 악기로 주장하는 것도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즉 중국에 와공후(臥??)가 생기기 이전 또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이미 고조선에 와공후(臥??)가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문고의 기원이 된다는 와공후(臥??)의 발생지(發生地)는 혹시 고조선(古朝鮮)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 설혹 한(漢) 무제(武帝) 때 공후(??)(와공후(臥??))가 만들어 졌다는 설이 사실이고 이에 따라 뉘여타는 공후(??), 와공후(臥??)가 한대(漢代)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삼국사기"의 왕산악(王山岳) 거문고 제작이 진(晉)에서 전래된 와공후(臥??)를 개조한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고조선(古朝鮮)에 이미 와공후(臥??)로 추정되는 공후(??)가 있었으므로 고구려 사람들이 진(晉)에서 전래된 칠현금(七絃琴)(와공후(臥??)?)을 몰랐을리 없기 때문이다. 또 이 칠현금(七絃琴)이 중국 전통의 琴이라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한(漢)의 문화와 교류가 많아서 한(漢)의 고취(鼓吹)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한(漢)의 금(琴) 역시 이미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晉)에서 전래된 칠현금(七絃琴)이 금(琴)이더라도 고구려 사람들이 그 연주법을 몰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거문고를 굳이 진(晉)에서 전래된 칠현금(七絃琴)을 개조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신뢰하기 어렵다. 앞에서 살핀 여러가지 상황으로 보아 고구려의 거문고는 금(琴)이든 와공후(臥??)든 중국에서 전래된 악기를 개조해서 만들었다기 보다는 고조선에서부터 내려오던 거문고류 현악기를 개량하여 만들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다만 금(琴)이든 중국에서 만들어진 공후(??)든 혹은 쟁(箏) 슬(瑟) 축(筑) 등의 악기가 고구려에 전래되었다면 이들이 거문고 창제에 참조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그러나 거문고 창제의 원형을 굳이 외래 악기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 전래의 거문고류 현악기가 있었고 이를 토대로 외래의 현악기를 참조하여 거문고를 창제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좀 더 많은 자료를 찾아 연구해야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문제라 하겠으나, 적어도 "삼국사기"의 왕산악(王山岳) 거문고 제작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고구려 거문고를 보는 시각을 갖춰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의 자유권 제한에 대한 '해악의 원리'의 적용과 확장 - 2020년 3월 개정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중심으로 - (Application and Expansion of the Harm Principle to the Restrictions of Liberty in the COVID-19 Public Health Crisis: Focusing on the Revised Bill of the March 2020 「Infectious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Act」)

  • 유기훈;김도균;김옥주
    • 의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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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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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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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감염병의 팬데믹 상황 속에서, 국가의 방역 대책은 안보로서의 속성을 지니며, 공중보건과 공공의 이익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일정한 제한이 정당화되어왔다. 2020년 3월, 대한민국 국회는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으며, 이를 통해 '감염의심자'의 검사 및 격리거부에 대한 처벌의 법적 근거를 신설하고 격리위반과 치료거부의 벌칙을 상향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의 정당성 판별기준에 대한 자유주의 법철학의 논변과 원리들을 검토하고, 피해자임과 동시에 매개체로서의 속성을 지니는 감염병 환자(patient as victim and vector)에 대한 자유제한원리의 적용은 파인버그(Joel Feinberg)가 제시한 '스스로에 대한 해악(harm to self)'과 '타인에 대한 해악(harm to others)'이 중첩되는 지점에 있음을 개념화하였다. 파인버그가 제기한 자유제한원리(liberty-limiting principle)를 불확실성(uncertainty)을 지니는 팬데믹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해악에서 리스크(risk)로 해악의 원리를 확장시킬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해악에서 리스크로의 전환은, 불확실한 위기상황 하에서 국가가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사전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충분한 근거 없이 개인의 행위를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과잉범죄화(overcriminalization)의 우려를 낳는다. 본 글에서는 리스크를 지닌 개인에 대한 사전적 자유제한을 둘러싼 사전주의의 원칙과 과잉범죄화의 우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원칙들을 검토한다. 이어서 '타인에 대한 해악' 원칙이 공익과 공중보건 상황에 적용되기 위한 두 번째 확장으로, 인구집단 개념으로의 전환을 다룬다. 팬데믹과 같은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는 '개인'이 아닌 '인구집단'을 하나의 단위로 고려하는 인구집단 접근법(population approach)이 필요하며, 나아가 앞선 두 논의를 결합한 '인구집단에 대한 리스크(risk to population)'가 팬데믹 상황에서 해악의 원리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고려되어야 함을 제안한다. 논문의 마지막에서는, 앞서 개념화한 '확장된 해악의 원리' 하에서 개정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의 자유제한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검토한다. 격리위반 처벌조항은 '인구집단에 대한 리스크'에 대한 자유제한에 해당하여, 강제검사 또한 무증상 감염자라는 감염병의 특성에 의거하여 '확장된 해악의 원리'의 차원에서는 정당성이 부정되지 않음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치료거부 처벌조항은 전통적 해악의 원리뿐만 아니라 '인구집단에 대한 리스크'라는 팬데믹의 특성을 고려한 '확장된 해악의 원리' 하에서도 정당화되기 어려우며, 추가적 단서조항을 포함하여야만 정당화 근거를 획득할 수 있을 것임을 논증하였다.

'함양 용유담(咸陽 龍遊潭)', 전래명승으로서의 의의와 가치 구명 ('Yongyudam of Hamyang', the Significance and Value as a Traditional Scenic Place)

  • 노재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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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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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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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함양 용유담'에 얽힌 유래와 전설, 지리산유산기 속의 경관 인식, 지형지질학적 특성 그리고 주변 유구(遺構)와 바위글씨의 해석과 분석을 통해 이곳의 경관 특성을 밝히고 이를 근거로 용유담의 명승적 가치와 경관보존의 당위성을 확보하고자 시도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함양의 대표적인 전래승경 '금대지리(金臺智異)'가 천왕봉과 용유동에 대한 묘사이듯, 고지도나 고문헌에서 또한 엄천강의 중심 '용유동(龍遊洞) 용유담'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승경으로서 자리매김 되어왔다. '구룡과 마적도사' '가사어' 전설과 기우(祈雨)의 주술신인 '용신(龍神)의 성소(聖所)'로서의 경관적 은유는 용유담의 본질일 뿐 아니라 신령함과 장소성을 심화시키는 촉매였다. 선인들의 지리산유산기 속에 드러난 용유담의 핵심적 이미지는 '자맥질하는 용과 관련된 지형경관적 특이성', '다양한 모습과 크기의 포트홀', '와류현상에 의한 여울목의 폭음(瀑音)' 그리고 '용 전설의 경관적 은유' 등으로 이들 이미지는 용유담의 장소관성(場所慣性)을 이끌어 왔다. 또한 이곳의 장구소(杖?所) 바위글씨는 김종직을 비롯하여 김일손 조식 정여창 그리고 강대수 등 지리산을 생활경관으로 체험하고 인식하였던 경상우도 사림(士林)들의 '장구 상영지소(杖? 觴詠之所)'로서 기념비적 석문(石文)이자 추모의 표식이다. 또한 용유담 주변의 3단 층계(層階)와 '용유담(龍遊潭)' 바위글씨 그리고 샘[泉]물을 모으기 위해 가공된 수반(水盤)은 제의터로서 영역성이 감지되는 전통조경적 유구이다. 더불어 본 연구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된 용유동문(龍遊洞門), 방장제일산수(方丈第一山水) 등의 바위글씨는 선경지처(仙境之處) 용유담을 알리는 표식이자, 용유담이 지리산의 대표적 승경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밖에 심진대 영귀대 강화대 등의 대(臺)는 옛 선인들의 풍류처이자 유계(遊契)의 흔적으로 용유담의 의의를 더해 준다. 용유담의 기묘하고 독특한 경관은 수려한 자연을 바탕으로 오랜 역사를 두고 이어져 온 장소관성의 산물이자 문화경관의 총체(總體)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본 연구를 통해 지리산 용유담은 '물리적 실체' 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적 가치의 중첩을 통해 꾸준히 전승되어온 복합유산으로 명승 지정 조건에 충일(充溢)함이 확인되었다. 단언컨대 용유담이 갖는 장소성은 물론 지질지형 역사문화적 가치는 그 어떤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나 논리로도 폄하되거나 훼손되어서는 안 될 전래 명승의 진수(眞髓)이다.

조선시대 능비(陵碑)의 건립과 어필비(御筆碑)의 등장 (Formative Stages of Establishing Royal Tombs Steles and Kings' Calligraphic Tombstones in Joseon Dynasty)

  • 황정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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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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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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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조선 초 중기, 조선후기, 대한제국기 세 시기로 나누어 조선왕릉에 건립된 신도비와 표석의 시기별 건립추이와 양식적 특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 왕실 능비(신도비와 표석)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리 건립한 시기와 주체, 후계왕의 의도에 따라 시기별 차이를 보이며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15~17세기는 왕릉 신도비의 건립과 재건이 이루어진 시기, 18세기는 신도비가 표석으로 대치되어 다수 건립되었고 국왕의 어필을 직접 돌에 새긴 어필비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이며 대한제국기는 황제국으로 격상됨에 따라 조선 개국자인 태조와 왕후, 선조들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표석 중건이 이루어진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본다면, 결국 우리나라 능비의 역사는 조선후기를 기점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릉 신도비의 형식은 삼국시대의 부정형한 석비의 초보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귀부이수'형의 당비(唐碑) 형식을 수용한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말 탑비의 퇴화된 양식에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國史)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면서 건원릉 제릉 헌릉 구 영릉 4곳에만 건립된 채 왕릉에는 한동안 석비가 건립되지 않았다. 신도비 건립이 중단된 이후 17세기에 이르러 왕릉에 아무런 표(表)를 해 둘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형식이 간소한 표석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82년 작 영릉(寧陵)의 표석은 최초로 왕릉에 건립된 표석이자 장대한 규모,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능표는 영조 재위 기간인 1740년대부터 대규모로 건립되었다. 열성(列聖)에 대한 추숭과 어필간행 등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전통성을 공표하고자 했던 영조는 제릉의 신도비를 재건하는 한편, 의릉(懿陵)을 비롯하여 총 20곳에 달하는 곳에 표석을 세우는 역사(役事)를 추진했고, 처음 친필 글씨를 돌에 새긴 어필비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어필비 제작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소실된 어필을 보존하려 한 숙종의 신념을 계승한 영조에 의해 제도적으로 추진되면서 어필을 새긴 능비가 등장한 배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시대사적으로 주목할만하다. 이러한 표석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다시 한번 다량 제작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태조의 조선 건국에 두고 태조와 그 4대 선조에 대한 추숭과 기념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고 전면과 후면 모두 자신의 글씨로 채움으로써 역대 어느 왕보다 통치자로서 권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상 언급한 왕릉의 신도비와 표석의 건립 추이는 동시대 원 묘에 건립된 신도비, 표석과 비교 고찰을 통해 시대별 특징과 왕실 조각품으로서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소셜 네트워크 분석을 통한 무형문화유산 공동체 지식연결망 연구 - 정선아리랑을 중심으로 - (A Study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Communities through a Social Network Analysis - Focused on the Item of Jeongseon Arirang -)

  • 오정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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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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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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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의 목적은 무형문화유산 일반전승자의 역할을 주목하면서, 소셜 네트워크 분석을 활용해 무형문화유산 전승공동체의 연결망과 전승활동에서 발생하는 지식 흐름의 구조적 특징을 분석하는 데 있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연구 대상을 국가무형문화재 종목들 중에서 일반인의 전승활동이 활발한 '아리랑'으로 선정하였다. 아리랑은 오랜 기간 제도권 밖에서 일반대중 활동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전승되었으며, 2015년에 전문전승자 지정 없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최초의 사례이다. 현재 아리랑은 약 60여 종, 3,600여 곡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 중에서 전문전승자와 일반전승자의 상호교류가 활발한 향토민요 '정선아리랑'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소셜 네트워크 분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노드(Node)와 링크(Link)로 모델링하여 수치화 통계화 시각화하여 해석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방법은 전통적으로 사회학에서 사회조직 및 취약계층을 연구하는 데 꾸준히 활용되었다. 최근에는 문헌정보학, 문화콘텐츠학, 경영학 등과 같은 분야에서 연구경향, 시장동향, 조직관리 등을 연구하는 데 이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여러 학문 분야에서 소셜 네트워크 분석을 이용한 연구가 증가하는 추세지만 문화재 분야에서는 관련 연구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소셜 네트워크 분석은 크게 3단계, '연결망 모델링', '데이터 수집', '데이터 분석 및 시각화'로 진행된다. 본 논문에서는 첫 번째, 2017년 기준으로 정선아리랑보존회 회원 전체를 조사 대상으로 선정하여 완전한 연결망으로 모델링하였다. 두 번째, 데이터 수집은 보존회 회원 명부를 확보해 2017년 10월 17일 면대면 조사와 2017년 12월 15일 전화 설문조사를 통해 하였다. 세 번째, 데이터 분석은 Netminer 4.0 프로그램을 이용해 중심성 분석, 구조적 등위성 분석, 커뮤니티 분석 등을 주요 지표로 하였다. 본 논문은 기존에 무형문화유산 계보조사에서 소수 사람들의 구술자료에 의존해 파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계량적인 방법으로 조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연구 의의가 있다. 그리고 무형문화유산 전승공동체 구성원들의 관계 및 지식 흐름의 구조를 지식지도(2D Spring Map) 형태로 시각화함으로써 추상적인 내용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진주검무>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의 변화에 관한 소고 (An Essay on the Change of Jinju Sword Dance after being designated as 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Asset)

  • 이종숙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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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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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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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진주검무>가 1967년 1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이래 변화되고 있는 모습과 그 변화의 특징 및 보존 전승의 현황을 파악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진주검무>가 대를 이어가면서 변화를 거듭했고, 그로써 현재의 춤을 정립하게 된 정황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진주검무>는 1967년부터 2015년 현재 3대째의 보유자를 인정하였다. 제1세대 보유자는 권번 기녀 출신 8인이 1967년 인정되었다. 보유자들 간의 불화와 일부 보유자의 사망, 개인적인 경제활동 등의 이유로 전승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전승교육과 활동의 구심점이 필요한 가운데 1978년 6월 21일에 성계옥이 제2세대 보유자로 추가 인정되었다. 비 기녀출신 성계옥의 활동 시기에는 <진주검무>의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가장 크게 보였다. 2009년 성계옥의 사망 후 제3세대 보유자는 김태연과 유영희로 2010년 2월에 인정되었다. 1966년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부터 2014년의 영상을 기초하여 비교한 춤과 그 주변의 변화 결과는 다음과 같다. 반주음악편성에 3세대 간 변화가 있었다. 1세대 영상(1970년)은 약 15분 공연했는데, 2세대 영상(2002년)는 25분여를 춤추도록 했다. 염불도드리 장단을 긴염불(상령산)로 해석하여 느리게 연주하였고, 본래 염불 15장단의 춤을 39장단까지 추가함으로써 시간을 길게 했다. 3세대(2013 2014년)에는 다시 15장단으로 환원된 춤을 추고 있다. 다만 긴염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1세대 때는 3분간 추었던 염불을 3세대에서는 5분여를 춤추고 있어서, 2세대로부터 느림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춤 구성면에서 2세대에는 긴염불을 20여 장단 추가하면서 아(亞)자 모양의 춤 대형구성이 추가되었다. 3세대 공연에서는 실시하지 않고 있다. 춤사위 면에서 방석돌이 동작의 허리재기가 눈에 띄게 유연성을 잃어가고 있는 양상이다. 또 1장단의 시가가 늘어진 경향을 보인다.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1967년에는 칼 목이 돌아가는 것을 사용했는데, 2세대 보유자에 의해 1970년대 말부터 현행과 같이 칼목이 돌아가지 않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칼의 모양도 1966년의 "조사보고서"는 반월형의 뾰족한 모습인데, 현재와 같은 직선형 칼을 사용한 것은 1970년 영상에서부터 보인다. 전립과 전복, 한삼착용의 기본 양식은 변화가 없으나, 한삼 색동 배열이 "조사보고서"와 달라졌다. 또 남색치마를 입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이상의 결과로 볼 때, <진주검무>는 지정 이후 약 50년 동안 변화가 능동적으로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제2세대 성계옥 보유자를 주축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중요무형문화재의 전승과 보존이라는 명제에서 볼 때, 춤 종목은 장단과 춤의 조화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서 검무의 오랜 전통성을 보존 전승하려는 노력이 강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동상감(烏銅象嵌)기법을 활용한 장도(粧刀)의 제작기술 및 복원연구 (Jangdo(Small Ornamental Knives) manufacturing process and restoration research using Odong Inlay application)

  • 윤용현;조남철;정영상;장추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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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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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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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에서는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辯)", "천공개물(天工開物)" 등 고문헌에 기록된 오동 재료와 합금비, 주조 시설, 주조법 등을 확인하고 이를 기초자료로 활용하여 오동상감기법으로 장도를 제작하였다. 오동상감기법 장도 제작은 크게 오동 합금, 은땜 합금, 오동판과 은판 제작, 칼자루와 칼집 제작, 장도의 장석인 두겁 및 부속품 제작, 오동 상감, 조립의 순으로 진행하였다. 오동의 합금은 "오주서종박물고변"에 보이는 상품(上品)으로 전통방식의 진오동(眞烏銅) 합금비인 구리와 금을 20:1의 중량비로 하였다. 은땜의 합금은 상감된 문양에 사용한 경우 은과 황동(Cu 7 : Zn 3)을 중량비 5:1로, 단순 접합 사용한 경우에는 은과 황동을 중량비 5:2로 합금하여 은땜판을 제작하였다. 칼집과 칼자루 제작은 진오동 합금비로 만든 오동 괴를 풀림과 단조작업을 실시하여 오동판의 두께를 0.6mm로, 오동의 뒷면인 은판도 두께 0.6mm로 제작한 뒤, 오동판과 은판 접합, 풀림과 단조, 오동판에 문양 새기기, 은 상감하기, 오동판으로 칼집과 칼자루 모양잡기, 은땜으로 접합하기, 연마 및 광택내기 등의 과정을 거쳐 완성하였다. 붉은색의 오동판 표면을 검은색으로 부식시키는 '오동 살리기(발색하기)'는 오동 합금의 품위에 따라 발색 효과가 차이가 난다. 한지를 30일 정도 썩힌 인뇨(人尿)에 적셔 칼집과 칼자루 등에 감아 따뜻한 곳($25^{\circ}C$ 이상)에 두고 2~3시간이 경과하면 오동판의 겉면만 검은색으로 발색되고 은이 상감된 문양은 그대로 있어 오동상감기법을 재현할 수 있었다. 오동상감 복원에 사용했던 오동판, 은판, 은땜판의 합금성분과 오동의 표면 발색성분을 알기 위해 과학분석을 실시하였다. 오동 합금 분석(시료 2개)결과 고문헌 기록(Cu 95wt%, Au 5wt%)과 평균성분비가 유사한 Cu 95.57wt%, Au 4.16wt%과 차이가 있는 Cu 98.04wt%, Au 1.95wt%로 검출되었는데, 전자는 오동판 가공에 성공률이 높은 반면, 후자는 가공과정에서 터지는 등의 실패가 있었다. 오동판과 은판이 부착된 시료의 성분분석 결과 은판 부분은 Ag 100wt%로 검출되었고, 오동판과 은판이 접합된 부분은 Cu, Ag, Au가 모두 검출되어 접합이 잘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은과 황동을 합금한 은땜판은 분석결과 Ag 성분이 다양하게 검출되고 있어 성분비와 관계없이 매우 불균질하게 섞여있음을 관찰하였다. 오동판에 검은색으로 발색된 부분의 성분분석 결과 소지 금속에서 검출되지 않았던 S의 함량이 검출되어 S의 함량이 오동 색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되었다. 향후 발색에 대한 정확한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화합물, 색도 및 재현 연구 등 추가연구가 필요하다. 이번 연구를 통해 시도 및 확인된 고문헌 속의 오동합금 실험 및 재현, 오동상감기법에 의한 장도제작, 오동판 검은색 발색 메커니즘의 과학 분석결과 등은 오동상감기법의 복원을 위한 중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 안사국(安邪國) (A Study of Dohang-Ri wooden coffin and Anya-Kuk)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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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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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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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성격과 성립시기(成立時期)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 상황이나 모두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헌자료의 기록과 고고자료상에서 서로 공통적으로 관련지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며, 연(燕)의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갖춘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성립은 근본적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뿐 만 아니라 중 남부지역에 이르기까지 큰 파장을 미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철기문화(鐵器文化)의 도입단계에는 철기(鐵器)의 실용적이고 희소적인 가치에 의해서 매장유구(埋葬遺構)에는 쉽게 부장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기원전 2세기 전반경부터는 일부 한정된 철기(鐵器)만이 매장유구(埋葬遺構)에 부장되는 경향이다. 따라서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성립시기는 철기의 도입과 보편적인 활용으로 보아야하며 목관(木棺)을 사용한 서북한지방(西北韓地方)의 토광묘문화(土壙墓文化)를 포함하여 중남부지역(中南部地域)에 있어서 목관(木棺)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 단계, 즉 기원전 3세기전반대의 어느 시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한편 함안(咸安) 도항리고분군(道項里古墳群)에서 확인된 목관묘(木棺墓)는 목관(木棺)의 형태에 있어서 판재조립식목관(板材組立式木棺)과 통나무목관(木棺)의 2종류가 확인되며, 판재목관(板材木棺)의 사용 비율이 3배 이상 높은 편이다. 출토유물(出土遺物)은 비교적 단순한 조합상(組合相)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영남지역(嶺南地域)을 중심으로 한 목관묘유적(木棺墓遺蹟)에서도 모두 확인되고 있는 특징이므로 전반적으로 변(弁) 진한사회(辰韓社會)의 매장문화는 동일한 흐름 속에서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통나무로 제작한 목관(木棺)은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므로 한국식동검문화(韓國式銅劍文化)와 함께 목관(木棺)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며,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과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에서만 이러한 목관(木棺)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변한사회내(弁韓社會內)에서 양지역간(兩地域間)의 유기적인 관계를 살피는데 있어서 주목되어야 한다.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에서 출토되고 있는 철기류((鐵器類)도 거의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의 그것들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도항리(道項里) 67호묘(號墓) 출토 주조철부(鑄造鐵斧)는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주조철부(鑄造鐵斧)와 같은 지금(地金)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소형철부(小形鐵斧)의 구성비율이 다른 철기류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것과 기경구(起耕具)로 이용되는 철제따비의 출토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단계에는 목제농기구(木製農器具)의 제작과 사용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에 비해 절대적으로 빈약한 철기유물은 안사국(安邪國)의 내적(內的)인 한계(限界)를 보여주는 것이며 소국(小國) 수장(首長)의 신분적(身分的)인 상징(象徵)으로서 사용하였던 동경(銅鏡)과 의기류(儀器類)의 출토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를 조영한 집단(集團)은 당시 대외문화교류(對外文化交流)의 중심적인 선진지역(先進地域)에 비해서 사회문화적(社會文化的)인 변동(變動)이 덜한 주변 지역적인 성향이 강한 집단(集團)일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후 2세기 후반경 영남지역의 목관묘(木棺墓)는 목곽묘단계(木槨墓段階)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항리(道項里)와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에서도 목관묘(木棺墓)는 2세기대를 종점(終點)으로 사라진다. 고고자료상으로도 3세기에서 4세기대에 해당되는 적극적인 유구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3세기 전반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일어났던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과 관련지어 합리적으로 추론하고자 한다. 즉 변한사회내(弁韓社會內)에서 도항리(道項里)와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의 양집단(兩集團)은 낙동강(洛東江)과 남강수계(南江水系)를 장악한 교역(交易)의 중심지(中心地)로서 서로 경제적(經濟的) 정치적(政治的)인 공조체제(共助體制)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보이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대상국은 가나(加羅)와 아라국(砑羅國)이며, 가나(加羅)는 다호리집단(茶戶里集團)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시기도 기원 3세기 전반대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전반대 이후의 사건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양지역(兩地域)에서 뚜렷한 목곽묘(木槨墓)의 축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도 두 집단(集團)이 전쟁(戰爭)의 피해를 직접 받은 당사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평점과 리뷰 텍스트 감성분석을 결합한 추천시스템 향상 방안 연구 (How to improve the accuracy of recommendation systems: Combining ratings and review texts sentiment scores)

  • 현지연;유상이;이상용
    • 지능정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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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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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9-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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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개인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개인화 추천 시스템 관련 연구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추천 시스템 중 협업 필터링은 학계 및 산업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다만 사용자들의 평점 혹은 사용 여부와 같은 정량적인 정보에 국한하여 추천이 이루어져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까지 많은 연구에서 정량적 정보 외에 다른 정보들을 활용하여 추천 시스템의 성능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리뷰를 이용한 감성 분석이 대표적이지만, 기존의 연구에서는 감성 분석의 결과를 추천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에 본 연구는 리뷰에 나타난 감성을 수치화하여 평점에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사용자가 직접 작성한 리뷰를 감성 수치화하여 정량적인 정보로 변환해 추천 시스템에 직접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알고리즘을 제안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성적인 정보인 사용자들의 리뷰를 정량화 시켜야 하므로, 본 연구에서는 텍스트 마이닝의 감성 분석 기법을 통해 감성 수치를 산출하였다. 데이터는 영화 리뷰를 대상으로 하여 도메인 맞춤형 감성 사전을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리뷰의 감성점수를 산출한다. 본 논문에서 사용자 리뷰의 감성 수치를 반영한 협업 필터링이 평점만을 고려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협업 필터링과 비교하여 우수한 정확도를 나타내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후 제안된 모델이 더 개선된 방식이라고 할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paired t-test 검증을 시도했고, 제안된 모델이 더 우수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평점만으로 사용자의 감성을 판단한 기존의 선행연구들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리뷰를 수치화하여 기존의 평점 시스템보다 사용자의 의견을 더 정교하게 추천 시스템에 반영시켜 정확도를 향상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추가적으로 다양한 분석을 시행한다면 추천의 정확도가 더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