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인삼 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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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고려홍삼 무역량의 변동과 의미 (The changes and meanings in the volume of Korea red ginseng trade in late chosun dynasty)

  • 이철성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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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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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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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이 논문은 1797년 고려홍삼 무역이 포삼제(包蔘制)라는 공식적인 제도로 시행된 이후 그 수출량과 홍삼세의 규모를 살핌으로써 고려홍삼 무역의 변동과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고려 홍삼무역은 조선 정부가 받아들이는 세금만으로도 공무역의 비용을 능가하였다. 조선은 인삼을 재배하는 농업기술과 저장 기간을 늘리는 홍삼 증포 기술을 바탕으로, 은화의 유출을 막고 중국의 완제품 및 원료를 들여와 국내 상업계와 수공업 및 광업부문을 자극했다. 더우기 조선정부는 고려 홍삼수출로 19세기 후반 매해 20만 냥에 달하는 재정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한때는 중국에서 말굽 모양의 은을 사와서 호조에 비축하기도 했다. 세도정권하에서도 상업계가 전반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개성상인 의주상인 서울상인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은 이러한 사정에 따른 것이다.

베트남의 고려인삼 인식에 대한 소고 (The history of awareness for ginseng in Vietnam)

  • 옥순종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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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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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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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역사상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의 교역은 활발하지 않았다. 한중일 동북아 중심의 역사 서술과 지리적으로 멀어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동남아 국가 중에 베트남은 한국 사신들과 교류가 많았다. 유권 문화권, 한자 문화권으로 정서가 통하고 언어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베트남 양국은 서로 관심을 보여 왔으며 사신들의 활발한 접촉으로 국교 수립과 관계없이 문물이 전파되고 우호적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세기 전반 베트남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명으로 꼽히는 민망시대에 고려인삼은 지금의 한류처럼 인기를 끌었다. 142명의 자손을 둔 민망황제의 정력이 인삼에 기인한다고 믿었다. 민망황제는 공을 세운 신하나 연로한 신하에게 선물로 인삼을 하사하여 충성을 유도했다. 이같은 전통은 후대 황제에게 까지 이어졌다. 또한 태국, 캄보디아, 프랑스와의 전쟁에 파견된 장군 및 병사들에게도 인삼은 지급되었다. 베트남은 국가 이념강화에 인삼을 적극 활용했다.이 같은 전통으로 고려인삼은 베트남에서 프리미엄 인삼으로서 인식되었다. 인삼의 베트남 유입은 1) 중국 황제의 하사 2) 북경으로 조공을 간 베트남 사신의 구매 3) 사무역 4)국제 무역이 활발했던 류큐, 일본의 중계무역 5) 조선-베트남 사신의 교유 등 5가지 경로를 유추할 수 있다. 베트남이 인삼을 본격 구매하기 전에 인삼의 효능에 대한 인식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 이는 교역으로서가 아니라 양국 사신들의 교유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5세기에서 18세기 말까지 북경에서 조선과 베트남의 사신, 선비들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1760년 북경에 온 베트남 고관 여귀돈이 조선사신에게 편지를 보내 고려인삼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 것은 18세기에 이미 베트남에서 고려인삼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높았음을 확인해준다. 양국 사신의 교유를 통해 상대 나라의 풍습과 특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베트남 황실에서도 인삼에 대한 지식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경으로 사행을 간 사신들 중에 인삼에 조예가 깊은 서거정, 서호수 등 실학자들이 많았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베트남에서는 신라 시대에 인삼에 대한 인식이 성립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9세기 중반 안남도호부의 책임자로 파견돼 베트남을 10년간 통치했던 당의 고병은 신라인 최치원과 친밀한 관계로 고병이 인삼에 대한 지식을 베트남 상류층에 전했을 수도 있다. 이로써 베트남의 인삼인식은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멀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베트남의 인삼 인식시기 추정은 양국의 접촉 과정에 유추한 가설로서 이를 문헌으로 실증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베트남의 역사서와 문집에서 인삼의 흔적을 찾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고려 시대 인삼과 의약서에 대한 기록 (Records on Ginseng and Medical Book during the Goryeo Dynasty)

  • 이성동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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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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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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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고려인삼은 삼국시대 이래 가장 중요한 수출품 중 하나였다. 그러나 고려 시대까지 우리 역사에서 인삼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본 고에서는 고려 시대의 인삼에 관한 국제 수교 및 교역 기록과 당시 출판된 것으로 알려진 의약서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주변 국가인 발해, 송, 왜, 후진, 원나라와 외교적 예물로 또는 교역품으로 인삼이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주로 고려에서 주변 국가로 인삼이 수출되었지만 발해와 거란으로부터는 인삼을 외교적 예물로 받기도 하였다. 아라비아 상인은 고려의 대표적 국제무역항이었던 벽란항에 와서 인삼을 교역하였다. 몽골 침입 이후 원나라의 인삼 요구량이 지나치게 많아서 큰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제중입효방』, 『어의촬요방』, 『향약고방』, 『삼화자향약방』, 『향약혜민경험방』, 『향약구급방』, 『비예백요방』 등 여러 의약서가 출판되었다. 『향약구급방』은 조선시대에 중간된 것이 전해지고 있으나 나머지 책들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근 후대의 여러 의약서에 인용된 것들을 연구하여 그 일부가 복원되기도 하였다. 궁중에서 사용되었던 의약서에는 인삼을 포함한 처방의 비중이 높았던 반면 주로 평민을 위한 『향약구급방』에는 인삼 처방이 한 건도 수재(收載) 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인삼이 매우 귀하고 고가이어서 평민이 접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만주족과 인삼 (The Manchus and ginseng in the Qing period)

  • 김선민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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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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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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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만주족의 선조인 여진족은 그들이 거주하는 만주의 자연환경에 따라 채집과 수렵활동을 주된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여진족의 거주지는 대부분 삼림이 울창하고 하천이 발달하여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지로는 적합했지만 농경에는 맞지 않았다. 여진족 사회조직 역시 채집과 수렵활동에 적합한 방식으로 형성되었고 그것은 이후 청나라 고유의 사회 군사조직인 팔기제도로 발전했다. 한편 채집과 수렵으로 획득한 자연자원을 주변의 농경사회과 교환하는 일은 여진 사회의 발전에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인삼을 비롯한 만주의 자연자원을 중원의 한인들과 교역하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대외무역이 여진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만큼 확대된 것은 16세기의 현상이었다. 당시 외부에서 유입된 은은 중국 내지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나아가 만주를 비롯한 명의 변경지역의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만주의 자연환경에 기초한 수렵 채집활동이 16세기에 이르러 중원에서 유입된 은과 조우하여 변경 사회를 자극했고, 분산되어 있던 여진 부락은 경쟁과 통일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만주족으로 변모하여 1636년 청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1644년 만주족은 중원 정복에 성공하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중원으로 들어간 후에도 청황실의 만주족은 만주 인삼의 가치를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7세기 말까지 만주 인삼은 만주족의 제도인 팔기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만주에 주둔한 팔기 병사들은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여 인삼의 생산지를 한인의 접근으로부터 보호했다. 만주 인삼의 채취는 황실 내무부, 부트하 울라 총관, 성경상삼기 등 황제에게 직속된 기구에서 담당했다. 이들은 부트하 병정이나 팔기 병정을 파견하여 지정된 장소에서 정해진 액수의 인삼을 채취하여 납부하게 했다. 황실의 귀족만이 만주에 사람을 보내 인삼을 채취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고, 그조차 엄격히 제한되었다. 18세기도 만주의 인삼은 여전히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관리되었다. 청의 인삼 정책은 황실의 발상지인 만주와 그 자연자원을 민간인의 침탈로부터 보호하고 만주족 고유의 전통을 유지한다는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동시에 만주의 인삼은 국가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으로 개발되었다. 국가가 필요한 만큼의 수입을 징수하기 위해서는 인삼을 대량으로 채취해야 했는데, 부트하 병정이나 팔기 병정을 파견하는 것만으로는 안정적인 인삼세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상인들이 인삼업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청의 인삼 정책은 이후 점점 더 상인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청대 인삼의 국가 독점은 1853년에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지만, 부유한 상인이 채삼인을 고용하고 인삼을 대신 납부하는 현상은 18세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청대 만주족의 인삼 독점은 사실상 한인 상인의 참여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