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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룽족 여성의 얼굴 문신 문화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Chinese Dai Tattoo Culture)

  • 후어타오;임희경
    • 한국응용과학기술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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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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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8-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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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문신은 인류에게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문화 형태다. 인류의 여러 문화권에서 전승되고 발전해온 전통적인 문신 풍습은 역사, 예술,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연구 가치를 가진다. 두룽족은 중국 남서부 윈난(雲南)성과 근처 지역에 사는 소수 민족 중 하나로 안면문신을 위주로 하는 '얼굴문신(文面)' 풍습을 가지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1949년 전까지도 원시사회 형태를 유지한 두룽족의 전통적 문화는 문자가 없는 구전(口傳)의 형태로 전해 졌으나 두룽족의 신비로운 문신문화에 대한 보존자료가 없어 연구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따라서 본 연구는 근현대 문헌과 윈난성 지역 현장 탐사 두 가지 방법으로 수행되었다. 얼굴문신 풍습의 정확한 이유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6년 중국 문화 대혁명으로 금지되어서야 사라지게 되었다. 얼굴문신의 상징과 기능에 대해서는 현지 탐사과 근현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크게 신앙숭배, 성년 의례, 심미 장식, 민족 사회 역사의 4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문신을 하는 시기는 7~8세 부터이다. 얼굴문신은 지역에 따라 상류 여성은 비교적 복잡한 도안으로 구성되었으며, 하류 여성은 간단한 도안으로 구성되었다. 문신은 주로 친족이 시술하며 주로 대나무 꼬챙이와 솥바닥에서 추출한 회즙 재를 재료로 사용한다. 현재 두룽족의 얼굴문신을 한 여성은 25명 미만으로, 대부분 고령화되어 있어 수십 년 안에 모두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두룽족의 독특한 얼굴문신 문화에 대한 문서화가 시급하다.

세종대왕의 유불화해의식에 관한 연구 (A Study on King Sejong's Amicable Consciousness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 조남욱
    • 윤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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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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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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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이 글은 조선왕조 제4대 군주 세종대왕의 정신세계를 고찰하는 일환으로 그에게서는 유교와 불교가 동시에 중시되었다는 점을 밝혀 보려는 것이다. 왕조실록에서는 세종이 '해동의 요순(堯舜)'으로 평가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부처를 숭신했던 사례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왕실에서 생명의 위험성이 다가오면 구병(救病)을 위한 기도행사를 펼쳤으며 선왕의 사당에는 불당까지 겸비할 것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세종의 유불화해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신(儒臣)들은 숭유억불의 기조를 따라 유교문화 확장의 차원에서 부단히 척불론을 전개했다. 특히 왕실의 불사(佛事)에 대해서는 군주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불교의 역사성과 현재성, 그리고 자신의 종교체험 등에 유의하여 그 적폐를 제거하면서도 불교 자체의 존재가치를 긍정하였다. 그렇다고 유교사상을 내세워 불교를 비난하거나 불교정신을 따라 유교를 경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즉 그는 유교를 높이면서도 불교를 버릴 수 없는 것으로 보고, 또 불교를 긍정하면서도 유교적인 삶의 태도를 중시했다. 현실적 삶의 태도로서는 유교윤리를 추구하고 생사 초월의 신앙적 측면으로는 불교를 높이며 융화해가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특히 생사문제 등 인간으로서의 한계의식이 깊어질 때는 유교의 천명사상이나 제사의례뿐만 아니라 부처에의 믿음으로 위안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세종에서 유불화해의식의 절정은 선왕을 모시는 사당 문소전에 반드시 불당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와 같은 화해의식이 작용하게 되는 원인으로는 첫째 유교와 불교는 모두 왕조국가의 기조를 튼튼히 하는 데에 긴요하다고 인식되었다는 점, 둘째 기도에 대한 감응을 얻으며 안심입명의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 셋째 인간 평등의 가치관이 중시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세종 유불화해의식이 가지는 의의로서는 ① 사람들의 정신적 상황 그대로를 긍정하여 평화적 삶의 기반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것, ② 도덕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의 포괄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 ③ 여러 가지 사회적 대립형상을 예방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인의 안전 의식에 내재된 문화인지 구조 연구 - 교통문화를 중심으로 - (An Exploratory Study on Cultural Cognition Structure of Korean Traffic Culture)

  • 이병준;박정현
    • 문화예술교육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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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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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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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최근 교통안전규제 영역에서 문화이론에 대한 논의가 있다. 이는 운전자들의 문화적 편향이 어떻게 형성되어있는가에 따라서 운전자들의 법규의 해석, 법규 위반행위의 위험인식, 규제 불응에 따른 비난의 대상 등이 달라진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문화이론에 의하면 개인을 둘러싼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인 세계관(world view) 또는 우주관(cosmology)이 형성되며, 이러한 세계관이 개인의 행동과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Ch. Wulf의 역사문화적 인간학 연구에서 제안하는 문화인지와 문화적 학습 이론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문화인지와 문화적 학습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기제는 신체성, 미메시스, 연행성, 의례, 이미지 다섯 가지로 체계화된다. 본 연구는 Ch. Wulf의 다섯가지 핵심기제를 분석틀로 하여 교통법규에 대해 한국인들이 문화적으로 인지하는 방식과 교통법규 위반 경험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교통법규를 위반으로 인해 교육받은 경험이 있는 운전자들을 대상으로 교통문화인지에 대한 심층인터뷰를 하였고, 그 결과를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분석하였다.

보로부두르 주악도와 한국의 불교 악가무 (The musical Iconography of Borobudur and today's performance culture in Indonesia)

  • 윤소희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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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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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37-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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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8~9세기 무렵 인도네시아는 세계3대 불교 유적에 드는 보로부두르 대탑을 건설하였지만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불교신자를 만날 수가 없고, 인구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이슬람적 사회·문화 풍토 속에 불교적 산물인 보로부두르의 공연 예술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현지 조사를 통하여 조명해 보았다. 불교왕국이었던 샤일렌드라왕조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문화는 이어지는 힌두왕조와 융합적 관계를 유지하며 존속하였다. 16~17세기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이 유입될 당시 합리적 온건주의인 수니파 독경사(讀經師)들은 기존의 신행을 문화로 포용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아랍풍 이름 보다 "쉬리, 라마, 시타, 아르주나"와 같은 인도풍 이름과 함께 라마야나 주인공들이 행하는 인도문화적 덕목을 추구하고 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불교 인구는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보로부두르에 새겨진 주악도는 인도네시아의 공연 문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보로부두르 부조에 보이는 궁중악사의 춤사위와 똑 같은 동작으로 춤 추는 악인들이 있었고, 각종의 공연예술에서도 부로부두르의 주악도를 연상시키는 모습들이 발견되었다. 그런가하면 한국의 사찰에서 발견되는 긴나라나 가루다, 간다르바 등, 힌두 신화속 뮤즈들이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가믈란은 종교의식 및 궁중·마을 행사에서 시작되어 현재는 그림자극, 인형극, 타악 앙상블 등 여러 장르로 분파되었다. 이는 대부분의 전통 공연이 무속을 비롯한 기타 종교의식에서 출발하여 공연예술화 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 사찰에서의 법기 타주와 이에 수반되는 의례악가무는 조선시대 억불을 맞아 걸립패와 유랑악사들의 탁발의 도구가 되었고, 오늘날 풍물놀이, 사물놀이 및 기타 공연예술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인도네시아의 타악합주 가믈란과 한국불교의 법구 타주는 다양한 예술장르를 파생 시키는 문화 예술의 원류로써 중요한 키워드이다.

동해안 오구굿 중 판염불에 나타난 불교음악의 영향 - 김장길의 소리를 중심으로 - (The influence with buddhist music appearing in PanYeombul out of Ogu exorcism of East coast - focused on the song by Kim Janggil -)

  • 서정매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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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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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7-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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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동해안 오구굿 중 김장길이 소리한 판염불의 악곡 중 6곡을 대상으로 선율을 분석하여 무가(巫歌) 판염불에 나타난 불교음악의 영향을 살펴본 것이다. 그 결과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2016년 10월 16일에 연행된 김장길의 판염불의 구성은 <창혼>, <예불>, <망자축원>, <장엄염불>, <대다라니>, <오방례>, <지장보살 정근>, <법성게>, <극락세계십종장엄>, <아미타불 정근>, <지옥가>로 구성된다. 다만 판염불은 같은 양중이 연행한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더 추가되고 생략될 수 있으므로 그 절차구성은 매우 유동적이다. 그러나 김용택의 것과 비교했을 때 <지옥가> 외에 <대다라니>가 공통되는 것으로 보아 동해안 오구굿의 판염불에는 <대다라니>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대다라니>는 불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칭하고 있고 김용택도 이 명칭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데 반해, 김장길은 '염화장구대다라니'라고 하여 차별되는 명칭을 사용한다. 염화는 '손가락에 꽃을 집어들었다'는 뜻으로 불가적 의미이지만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이 아니다. 이로보아 김장길은 불경의 '대다라니'를 수용하되 차별된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불교의례와는 구별되는, 무의례만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동해안 오구굿의 판염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의 <판염불>과 후반부의 <지옥가>이다. <판염불>은 양중이 앉아서 직접 징 반주를 하며 독송하고, <지옥가>는 양중이 꽹과리를 들고 일어서서 독송하는데 이때 악사들이 삼공잽이 장단으로 반주한다. 노래와 반주가 이중주처럼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음악적으로도 가장 고조되고 강조된다. <판염불>은 판염불 지옥가로 구분해서 보기도 하지만, 한 명의 양중에 의해 독송되는 절차이므로 일반적으로 하나의 절차로 해석한다. 넷째, 김장길의 판염불에서 반주역할을 하는 징은 악구를 구분하고 악곡의 단락을 짓는 역할이다. 일자일음의 염불을 노래할 때, 숨을 고르거나 목을 가다듬는 등 호흡의 정리가 필요한데 이때 징이 그 사이를 메운다. 징은 악구를 구분하여 음악적 단락을 지어주므로, 가사의 전달을 명확하게 한다. 징의 리듬은 균등한 2소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3소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암쇠(♩♪)보다는 숫쇠(♪♩)의 빈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또한 당김음이 자주 사용된다. 균등한 2소박의 반주에서도 엇박 또는 단장(短長) 리듬을 자주 사용하여 단조로운 균등리듬에 변화를 주어 음악적 활력을 준다. 이와 같은 엇박과 단장리듬은 긴장감을 자아내는 숫쇠리듬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양중 김장길만의 리듬특징으로 보아진다. 다섯째, 모든 악곡은 mi, sol, la, do, re의 5음구성이며, do'${\searrow}$la${\searrow}$sol${\searrow}$mi의 하행선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행선율은 슬픈 느낌을 자아내는 것으로 망자에 대한 슬픔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한 것이므로, 김장길의 음악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악곡은 전체적으로 la${\searrow}$sol${\searrow}$mi의 완전4도 하행에서 sol의 시가가 짧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메나리토리로 이루어져 있다. 여섯째, 김장길은 기존 염불의 가사를 수용하되 그대로 부르지 않고 그 사이사이에 '원왕생'이나 '나무아미타불' 등과 같은 가사를 삽입하였고 한문으로 구성된 예불가사에서는 '합소사~'와 같은 한글가사를 추가하였다. 또 슬픈 느낌을 표현하기위해 '이이이이이이이~'와 같은 구절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이는 망자를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염원을 극대화함과 동시에 불교의 색채를 감소시키고 무속적인 느낌을 주고자한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불교의 색채를 감소시키고자 하는 특징은 가사붙임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다게>의 끝 가사와 <칠정례>의 시작가사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휴지를 주어 단락을 구분하지만, 김장길은 오히려 휴지 없이 하나의 곡조로 진행하여 불교 독송의 색채감을 배제하였다. 선율도 일반 불교독송의 것과는 차별된다. 이는 불교의례문을 수용하되, 불가식의 염송과는 구별되는 무의례만의 특징을 부여하고자 하는 김장길의 의지로 해석된다. 여덟째, 분석한 곡목은 크게 4가지 장단으로 나눌 수 있다. 일정한 장단이 없는 <창혼> <망자축원>, 2소박의 균일한 장단의 <예불> <대다라니>, 3+2+3+2의 혼소박으로 된 10/8박자의 엇모리장단으로 된 <지장보살 정근>, 3+2+3의 혼소박으로 구성된 삼공잽이 장단의 <지옥가> 등 악곡에 따라 각기 구분되는 장단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중 <지장보살 정근>은 불가에서도 자주 연행되는 의식이지만, 엇모리장단으로 되어서 무속적인 느낌을 자아내며, <지옥가> 역시 삼공잽이 장단으로 연주되어 동해안 무의례만의 특징을 이룬다.

용주사(龍珠寺)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의 축원문(祝願文) 해석(解釋)과 제작시기(製作時期) 추정(推定) (Interpretation of Praying Letter and Estimation of Production Period on Samsaebulhoedo at Yongjusa Temple)

  • 강관식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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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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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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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유교적 이념과 불교적 이념, 궁중화원 양식과 산문화승 양식, 고유한 전통화법과 외래적 서양화법 같은 다양한 이원적 요소들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이룩된 기념비적 걸작으로서 조선 후기의 회화 발달과 혁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의 하나이다. 그러나 화기(畫記)가 없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와 작가를 비정하고 양식 특징을 분석하는 문제를 놓고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가 심해 지난 50여 년 간 논쟁이 끊이지 않음으로써 회화사적 의미와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모든 논의의 기본적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화기(畫記)가 없고, 작가에 대한 기록이 문헌마다 다르며, 화승들의 전통적인 불화 양식과 화원들의 혁신적인 서양화법이 혼재되어 있어 작가와 양식을 일치시켜 이해하는 문제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특히 논란이 많은 쟁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현존 <삼세불회도>는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수미단 중앙에 왕실(王室) 존위(尊位)의 축원문(祝願文)을 써놓아 주목되며, 애초에 썼던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전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지우고 '자궁저하(慈宮邸下)'를 '왕비전하(王妃殿下)' 앞에 추가해서 고쳐 써넣어 더욱 주목된다. 따라서 이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객관적 단서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최근에 새롭게 제시된 19세기 후반 제작설은 1790년의 용주사 창건 당시에는 순조(純祖)가 '원자(元子)' 신분이었고 1800년 1월 1일에야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세자(世子)'라는 존호가 쓰여있는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세자 책봉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형식과 도상이 19세기 후반기 화승들이 그린 청룡사나 봉은사의 <삼세불회도>와 유사하고 서양화법은 후대에 개채된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는 19세기 후반기의 화승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불화(佛畫) 화기(畫記)의 축원문을 광범위하게 조사해보면, 불화 제작 시점에 왕실에 실존한 인물의 신분(身分)과 생년(生年), 성씨(姓氏)까지 구체적으로 쓰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19세기 후반에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처럼 수십 년 전에 승하한 사람들을 생전의 존호(尊號)로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1790년 전후에는 원자(元子)나 세자(世子)의 유무(有無)와 무관하게 의례적으로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쓰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에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존호가 쓰여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왕실 위계와 달리 '자궁저하(慈宮邸下)'가 '왕비전하(王妃殿下)'보다 앞에 쓰여있는데, 이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극으로 인한 정조와 혜경궁(자궁(慈宮)), 왕비 세 사람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정조가 혜경궁의 왕실 위상을 왕비 앞에 오도록 하여 정조대에만 사용된 특별한 왕실 전례였기 때문에 현존하는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정조대에 개서(改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애초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불화 축원문처럼 의례적인 삼전(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지우고 다시 '자궁저하(慈宮邸下)'라는 특별한 존호를 넣어 개서(改書)하는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는 현륭원(顯隆園)의 재궁(齋宮현륭인 용주사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부인인 혜경궁(惠慶宮)(자궁(慈宮))임에도 불구하고 축원문에 의뢰적인 삼전(三殿)만 쓰여있고 혜경궁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정조가 지시하여 개서(改書)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개서(改書)는 정조가 현륭원과 용주사가 준공된 뒤 처음으로 현륭원에 원행(園幸)하여 원소(園所)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용주사에 들러 <삼세불회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견했던 1791년 1월 17일에 정조가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이 특수한 내용과 형태로 이루어진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진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용주사(龍珠寺)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연구의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검토 (A Review Examining the Dating, Analysis of the Painting Style, Identification of the Painter, and Investigation of the Documentary Records of Samsaebulhoedo at Yongjusa Temple)

  • 강관식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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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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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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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용주사 <삼세불회도>에 대한 연구는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네 가지 핵심 사항이 실증적인 근거와 일관된 논리 아래 모두 일치되도록 정합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의 용주사 <삼세불회도> 연구에서 제기된 19세기 후반 화승 제작설과 1790년에 제작된 원본을 1920년대에 일반화가가 서양화법으로 개채한 것이라는 소론은 실증성과 논리성이 결여되어 성립되기 어렵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祝願文)은 세자(世子) 책봉을 받지 않은 원자(元子)만 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관습대로 의례적인 삼전(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주사로 지우고 다시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자궁저하수만세(慈宮邸下壽萬歲), 왕비전하수만세(王妃殿下壽萬歲), 세자저하수만세(世子邸下壽萬歲)"라는 특별한 내용과 예외적인 순서로 개서(改書)했는데, 이는 조선후기 불화의 축원문 형식과 내용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정조대 왕실의 전례(典禮)를 면밀히 분석해 볼 때, 현존하는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졌던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삼세불회도의 형식(形式)과 도상(圖像), 양식(樣式), 미감(美感), 화격(畫格) 등을 18~19세기 불화나 궁중화원 양식과 다각도로 비교분석해 보면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1790년경 전후에만 나타나는 특징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축원문(祝願文)에 대한 분석 결과와 일치한다. 특히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종교적 위상에 따라 존상의 크기가 결정되고 화면 구성도 근하원상(近下遠上)의 고식(古式) 원근법에 따라 관념적, 평면적 조형 위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이 <삼세불회도>는 투시법적 원근법의 논리에 따라 구축된 입체적 공간 속에 존상들을 매우 체계적으로 배치한 뒤 서양화(西洋畫)의 음영식(陰影式) 명암법(明暗法)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며 흰색 하이라이트와 그림자까지 표현함으로써, 마치 삼세불회(三世佛會)의 장엄한 세계가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투시법적 원근법의 내적 질서와 음영식 명암법의 외적 착시는 골육합체(骨肉合體)처럼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흰색 하이라이트만 떼어내서 후대에 개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구나 이 <삼세불회도> 같은 고도의 서양화법과 높은 화격(畫格)의 창의적 융합은 조선후기 회화사상 김홍도와 이명기, 김득신 같은 정조대의 궁중화원만이 이룩할 수 있는 고도의 양식이자 화격이다. 용주사 주지 등운(等雲)이 창건 이래 용주사에 전해져온 기록을 토대로 『용주사사적(龍珠寺事蹟)』을 정리하며 김홍도가 <삼세불회도>를 그렸다고 기록한 것은 이것이 당시의 역사(歷史)이자 실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의 공식 기록인 『일성록(日省錄)』과 『수원부지령등록(水原府旨令謄錄)』에는 김홍도와 이명기, 김득신이 감동(監董)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의례 화승(畫僧)들이 그려왔던 불화를 관원 신분의 화원에게 그리도록 하는 것이 엄격한 관직 체제나 운영상 부당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명분상 감동으로 발령한 뒤 실제로는 불화를 직접 그리도록 했던 데서 나타난 결과였다. 영정조대의 어진(御眞) 도사 과정에서 감동으로 불러들인 문인화가 조영석(趙榮祏)과 강세황(姜世晃)에게 국왕이 직접 그릴 것을 요구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감동(監董)'과 '집필(執筆)'은 경우에 따라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개념으로서 '감동'이 '집필'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주사사적』의 기록은 『일성록』이나 『수원부지령등록』은 물론 황덕순의 「닫집 원문」 기록과도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행간의 의미를 찾아 복합적으로 읽으면 각각의 맥락과 필요에 따라 동일한 내용의 표리를 다르게 기록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네 가지 핵심 사항을 모두 실증적인 근거와 일관된 논리 아래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재일기』에 나타난 관·혼·상·제례 연구 (A Study on Coming of Age, Wedding, Funeral, and Ancestral Rites Found in 『Hajaeilgi』)

  • 송재용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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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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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35-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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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의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이 1891년 1월 1일부터 1911년 윤6월 29일까지 20년 7개월에 걸쳐 거의 매일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는 국내외 정세와 풍속, 의례, 분원 관련 각종 제반사항, 일상생활사 등을 다방면에 걸쳐 다양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특히 지규식의 신분은 양반계층이 아닌바, 이 같은 신분으로 쓴 일기는 흔치 않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하재일기"에 기록된 의례, 그 중에서도 관 혼 상 제례 관련 내용이다. 지규식은 양반이 아닌 신분으로 당시 실제로 행했던 관 혼 상 제례 관련 내용을 "하재일기"에 기록으로 남겼는바, 이러한 일기는 매우 드물 뿐만 아니라 자료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된다.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관 혼 상 제례의 일면을 엿볼 수 있어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관례의 경우, 일반적으로 정월에 행했는데, 이 시기에는 시행시기의 다변화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일부 양반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혼례의 경우, 혼사를 논의할 때 개화되어 가는 과정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파기하는 경우가 종전보다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택일도 신부 집에서 정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중인들이나 평민들의 경우,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렀지만, 부득이 한 경우에는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루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규식 자녀들의 혼례는 전통적 절차를 비교적 충실하게 밟고 있었지만, 양가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유동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 예법을 무시한 채, 상중에 혼례를 치르거나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혼례를 거행한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외래 종교 및 외래문화의 유입과 이식, 일제의 식민통치, 특히 유교적 사회질서 쇠퇴 등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이혼도 종전보다 흔했던 것 같다. 상례의 경우, 임종에서 발인하여 하관까지의 기간이 다양한바, 종전보다 다소 변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대부도 보통 임종서 발인까지 3개월인데, 여기서는 7일인바 이를 안 지키는 양반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늘날 일반적으로 행하는 3일장과 초우 재우 삼우제의 흔적을 "하재일기"에서 찾을 수 있는바, 위의 자료들은 그 가치가 매우 높이 평가된다. 제례의 경우, 제사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규식은 기제사를 지내기 전에 재계(齋戒)를 안 했으며, 심지어 제사 전날 술집에 가서 애인을 만나거나 또는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당시 양반사대부가 하고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지규식은 기독교에 입교하고 나서도 기제사를 지냈으며, 천도교에 입교한 후에도 제사를 지냈다. 한편, 지규식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식과 추석 때 직접 또는 동생이나 아들들을 보내 묘소에 가서 차례(묘제)를 지내게 했다. 그렇다고 지규식이 10월에 묘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지규식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상으로 지내는 생일제사를 생신차례라고 하여 거의 매년 지냈다. 그런데 생신차례와 제사를 별개로 지낸 적도 있어 특이하다.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일제가 강점할 무렵의 경기도 광주지역 중인출신 집안의 기제사, 차례와 묘제, 생신차례를 지내는 모습은 양반가의 제례 관행보다는 약간 다르고 덜 엄격하지만, 양반이 아닌 집안의 제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보듯, "하재일기"에 나타난 관 혼 상 제례의 내용은 자료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민속학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가정교과를 적용한 결혼이주여성 대상 가정생활문화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효과 (Development and Effects Family Life Education for Marriage Immigrant Women Applying Home Economics)

  • 김지욱;전미경
    • 한국가정과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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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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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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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연구의 목적은 결혼이주여성을 대상으로 가정생활의 향상 및 실천 능력의 증진을 위하여 가정생활문화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 효과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가정생활문화교육 프로그램 내용은 가정교과서의 가정생활문화 단원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프로그램 내용의 타당성은 2명의 전문가에게 검증받았다. 연구대상자는 서울시 J구에 거주하는 14명의 결혼이주여성이며, 프로그램은 서울 J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2014. 9.16-10.7일까지 총 3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의 평가는 객관적 평가와 주관적 평가(반구조화된 면접 및 설문조사)를 통해 실시하였으며, 객관적 평가 문항은 선행연구 및 가정교과서를 바탕으로 연구자가 구성하였고, 그 내용은 전문가 2인으로부터 검증받았다. 이 연구의 주요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등학교 가정교과서 '가족이 여는 행복한 가정생활문화 단원'을 중심으로 총 8회기로 구성된 가정생활문화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둘째,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가정생활문화교육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이해 및 자신들 모국의 가족문화의 이해를 도모할 수 있도록 하였고, 나아가 가족생활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고자 하였다. 셋째, 프로그램 효과성 결과를 살펴보면, 사전-사후 검사를 통한 객관적 평가에서 프로그램의 효과성이 통계적으로 유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주관적 평가 결과, 모든 참여자가 프로그램 목표달성, 프로그램 내용과 활동의 적절성, 운영만족도에서 4.0점 이상의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반구조화된 면접을 통한 주관적 평가의 결과, 결혼이주여성들은 가정생활문화와 관련 심화된 내용을 지속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의지에서 가정생활문화교육에 대한 높은 욕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결과는 가정교과를 활용한 가정생활문화교육 프로그램이 결혼이주여성의 건강한 가정생활문화 구현에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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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의 궁원(宮苑) 유락(遊樂) (Jeongjo's Enjoyment of the Palace Garden)

  • 홍형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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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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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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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본 연구의 목적은 정조가 궁원에서 즐긴 유락의 실태를 규명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화조어연'은 규장각을 위한 연회로 규례를 정하고 정례화 했다는 차별성이 있다. 정조는 다섯 차례의 행사를 열었다. 둘째, '세심대 놀이'는 정조의 비극적인 개인사를 바탕으로 하는데, 네 차례의 행사가 있었다. 셋째, 정조는 비가 내린 직후에 맑은 물이 흘러넘치는 옥류천의 '폭포 구경'을 즐겼다. 이는 일상적 경관이 아니라 많은 비가 내린 후의 임시적인 경관을 즐겼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넷째, '설중용호회'는 무신들을 위무하는 자리로 일곱 차례의 행사가 있었다. 한 겨울에 열린 이 행사에서는 참석자들이 각자 쇠 꼬치에 꿩을 꿰어 구워 먹게 했다. 또 술과 음악을 베풀어 군신(君臣)이 고락을 함께하는 것을 강조했다. 다섯째, 정조는 겨울철에 난로회를 열거나 난로회의 고사에 따라 술과 음식을 내려 문신들의 노고를 위로하기도 했다. 여섯째, 정조는 활쏘기에 능했으며 이를 즐겼다. 정조 궁중의례인 연사례를 복원하고자 하였으며 두 차례의 연사례를 열었다. 일곱째, 정조는 바쁜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후원에서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정조는 후원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만물이 생성, 변화하는 주역의 의미를 일깨우기도 했다. 여덟째, 정조는 궁원에서 '군신동락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마련했다. 정조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측근 신료들의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의 한계는 정조 관련 여러 고문헌 중 번역물에 국한하여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번역 성과물이 축적됨으로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