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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pretation of Praying Letter and Estimation of Production Period on Samsaebulhoedo at Yongjusa Temple

용주사(龍珠寺)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의 축원문(祝願文) 해석(解釋)과 제작시기(製作時期) 추정(推定)

  • Received : 2019.09.17
  • Accepted : 2019.11.22
  • Published : 2019.12.20

Abstract

Samsaebulhoedo(三世佛會圖) at Yongjusa Temple(龍珠寺), regarded as a monumental masterpiece consisting of different elements such as Confucian and Buddhist ideas, palace academy garden and Buddhist artist styles, unique traditional and western painting styles,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works that symbolically illustrate the development and innovation of paint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However, the absence of painting inscriptions raised persistent controversy over the past half century among researchers as to the matters of estimating its production period, identifying the original author and analyzing style characteristics. In the end, the work failed to gain recognitions commensurate with its historical significance and value. It is the particularly vital issue in that estimating the production period of the existing masterpiece is the beginning of all other discussions. However, this issue has caused the ensuing debates since all details are difficult to be interpreted to a concise form due to a number of different records on painters and mixture of traditional buddhist painting styles used by buddhist painters and innovative western styles used by ordinary painters. Contrary to other ordinary Buddhist paintings, this painting, Samsaebulhoedo, has a praying letter for the royal establishment at the center of the main altar. It should be noted that regarding this painting, its original version-His Royal Highness King, Her Majesty, His Royal Crown Prince主上殿下, 王妃殿下, 世子邸下-was erased and instead added Her Love Majesty慈宮邸下 in front of Her Majesty. This praying letter can be assumed as one of the significant and objective evidence for estimating its production period. The new argument of the late 19th century production focused on this praying letter, and proposed that King Sunjo was then the first-born son when Yongjusa Temple was built in 1790 and it was not until January 1, 1800 that he was ascended to the Crown Prince. In this light, the existing praying letter with the eulogistic title-Crown Prince世子-should be considered revised after his ascension to the throne. Styles and icons bore some resemblance to Samsaebulhoedo at Cheongryongsa Temple or Bongeunsa Temple portrayed by Buddhist painters in the late 19th century. Therefore, the remaining Samsaebulhoedo should be depicted by them in the same period as western styles were introduced in Buddhist painting in later days. Following extensive investigations, praying letters in Buddhist paintings in the late 19th century show that it was usual to record specification such as class, birth date and family name of people during the dynasty at the point of producing Buddhist paintings. It is easy to find that those who passed away decades ago cannot be revised to use eulogistic titles as seen by the praying letters in Samsaebulhoedo at Yongju Temple. As "His Royal Highness King, Her Majesty, His Royal Crown Prince" was generally used around 1790 regardless of the presence of first-born son or Crown Prince, it was rather natural to write the eulogistic title "His Royal Crown Prince" in the praying letter of Samsaebulhoedo. Contrary to ordinary royal hierarchy, Her Love Majesty was placed in front of Her Majesty. Based on this, the praying letter was assumed to be revised since King Jeongjo placed royal status of Hyegyeonggung before the Queen, which was an exceptional case during King Jeongjo's reign, due to unusual relationships among King Jeongjo, Hyegyeonggung and the Queen arising from the death of Crown Prince(思悼世子). At that time, there was a special case of originally writing a formal tripod praying letter, as can be seen from ordinary praying letter in Buddhist paintings, erasing it and adding a special eulogistic title: Her Love Majesty. This indicates that King Jeongjo identified that Hyegyeonggung was erased, and commanded to add it; nevertheless, ceremony leaders of Yongju Temple, built as a palace for holding ceremonies of Hyeonryungwon(顯隆園) are Jeongjo, the son of his father and his wife Hyegyeonggung (Her Love Majesty)(惠慶宮(慈宮)). This revision is believed to be ordered by King Jeongjo on January 17, 1791 when the King paid his first visit to the Hyeonryungwon since the establishment of Hyeonryungwon and Yongju Temple, stopped by Yongju Temple on his way to palace and saw Samsaebulhoedo for the first and last time. As shown above, this letter consisting of special contents and forms can be seen an obvious, objective testament to the original of Samsebulhoedo painted in 1790 when Yongju Temple was built.

용주사 <삼세불회도>는 유교적 이념과 불교적 이념, 궁중화원 양식과 산문화승 양식, 고유한 전통화법과 외래적 서양화법 같은 다양한 이원적 요소들이 창조적으로 융합되어 이룩된 기념비적 걸작으로서 조선 후기의 회화 발달과 혁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의 하나이다. 그러나 화기(畫記)가 없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와 작가를 비정하고 양식 특징을 분석하는 문제를 놓고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가 심해 지난 50여 년 간 논쟁이 끊이지 않음으로써 회화사적 의미와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모든 논의의 기본적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화기(畫記)가 없고, 작가에 대한 기록이 문헌마다 다르며, 화승들의 전통적인 불화 양식과 화원들의 혁신적인 서양화법이 혼재되어 있어 작가와 양식을 일치시켜 이해하는 문제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문제는 특히 논란이 많은 쟁점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현존 <삼세불회도>는 일반적인 불화와 달리 수미단 중앙에 왕실(王室) 존위(尊位)의 축원문(祝願文)을 써놓아 주목되며, 애초에 썼던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전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지우고 '자궁저하(慈宮邸下)'를 '왕비전하(王妃殿下)' 앞에 추가해서 고쳐 써넣어 더욱 주목된다. 따라서 이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의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객관적 단서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최근에 새롭게 제시된 19세기 후반 제작설은 1790년의 용주사 창건 당시에는 순조(純祖)가 '원자(元子)' 신분이었고 1800년 1월 1일에야 '세자(世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세자(世子)'라는 존호가 쓰여있는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세자 책봉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형식과 도상이 19세기 후반기 화승들이 그린 청룡사나 봉은사의 <삼세불회도>와 유사하고 서양화법은 후대에 개채된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는 19세기 후반기의 화승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불화(佛畫) 화기(畫記)의 축원문을 광범위하게 조사해보면, 불화 제작 시점에 왕실에 실존한 인물의 신분(身分)과 생년(生年), 성씨(姓氏)까지 구체적으로 쓰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에 19세기 후반에는 용주사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처럼 수십 년 전에 승하한 사람들을 생전의 존호(尊號)로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1790년 전후에는 원자(元子)나 세자(世子)의 유무(有無)와 무관하게 의례적으로 "주상전하(主上殿下), 왕비전하(王妃殿下),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삼전(三殿) 축원문을 쓰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현존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에 '세자저하(世子邸下)'의 존호가 쓰여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왕실 위계와 달리 '자궁저하(慈宮邸下)'가 '왕비전하(王妃殿下)'보다 앞에 쓰여있는데, 이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극으로 인한 정조와 혜경궁(자궁(慈宮)), 왕비 세 사람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정조가 혜경궁의 왕실 위상을 왕비 앞에 오도록 하여 정조대에만 사용된 특별한 왕실 전례였기 때문에 현존하는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정조대에 개서(改書)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애초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불화 축원문처럼 의례적인 삼전(三殿) 축원문을 썼다가 이를 지우고 다시 '자궁저하(慈宮邸下)'라는 특별한 존호를 넣어 개서(改書)하는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는 현륭원(顯隆園)의 재궁(齋宮현륭인 용주사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와 부인인 혜경궁(惠慶宮)(자궁(慈宮))임에도 불구하고 축원문에 의뢰적인 삼전(三殿)만 쓰여있고 혜경궁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정조가 지시하여 개서(改書)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개서(改書)는 정조가 현륭원과 용주사가 준공된 뒤 처음으로 현륭원에 원행(園幸)하여 원소(園所)를 두루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용주사에 들러 <삼세불회도>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친견했던 1791년 1월 17일에 정조가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어진다. 따라서 이와 같이 특수한 내용과 형태로 이루어진 축원문은 현존 <삼세불회도>가 1790년의 창건 당시에 그려진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객관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Keywords

Acknowledgement

본 연구는 한성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 지원과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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