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선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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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선전영화의 이미지 재현 전략 비교연구: 1960년대를 중심으로 (A Comparison of Image Representation Strategies used in Propaganda Films in South and North Korea: Focused on the 1960s)

  • 김승
    •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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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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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4-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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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1960년대는 남북한 모두에게 체제 안정화가 필요했고 선전영화가 그 최선봉에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한은 군사정부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정권의 시대적 사명에 복무할 것을 요구했으며 북한은 수령의 무결점과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역설했다. 본 연구는 1960년대의 대내외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그 시기의 남북한 선전영화의 이미지 재현 전략을 다루고 있다. 연구 결과 첫째, 남북한은 정통성 확립을 위해 통치자의 이미지를 각각 강한 지도자와 친근한 지도자로 구축했다. 둘째, 남북한은 자신의 관점에서 명징한 시대 정신을 배태하기 위해 동일한 사건에 다른 관점으로 이미지화를 꾀했다. 셋째, 당시 선전영화는 바람직한 국민(인민)상을 제시하고 무결점의 정부를 시각화했다. 1960년대 남북한의 권위적인 정권은 선전영화를 통해 이른바 공식사회를 위한 촉진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소비자의 심볼반응이 의류제품 브랜드자산의 강화에 미치는 영향 -캐주얼브랜드 “빈폴”을 중심으로-

  • 이지원;나수임
    • 복식문화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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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식문화학회 2004년도 정기총회 및 춘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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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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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소비자들은 매일 수많은 브랜드를 접하며 브랜드를 매개로 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상인 제품을 구매한다 브랜드는 출처를 표시하고 품질을 보증하며 광고선전을 담당하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기업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매우 중요한 자산으로 부각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생활용품과 같은 소비재에서부터 산업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제품이 브랜드화 되었으며 이전에 브랜드화 되어 있지 않던 농산물, 축산물과 같은 원료성 제품들도 브랜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Stobart, 1994).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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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과 식민지 과학기술 (Eunsa Memorial Science Museum and Colonial Science Technology)

  • 정인경
    • 과학기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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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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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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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이 글은 일제에 의해 이식된 은사기념과학관의 사회적 역할을 살펴보았다. 식민지 과학관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일제는 과학사상을 보급한다는 미명아래 과학관을 식민지 지배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식민지 과학관은 '위대한 과학제국' 일본을 부각시켜 열등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과학관의 전시와 강인 실험, 과학영화 등은 이러한 식민지 지배이데 올로기를 선전하였다. 식민지 과학관의 이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남았다. 첫째, 과학관이 정치권력의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식민지 과학관의 건축, 전시, 운영의 모든 면이 공공연하게 권력의 정책방향을 선전, 옹호하고 그것이 '개발, '발전'이라는 장미빛 환상을 심었다. 둘째, 식민지 과학관에서 과학기술은 '결과와 '도구'로 취급되었다. 일제는 과학이 사회적 위기를 해결했던 역사적, 문화적 산물임을 부정하고 '도구적 합리성'만을 주입시켰다. 셋째, 식민지 과학관에서 다루었던 과학기술은 매우 수준 낮은 것이었다. 생활의 과학화를 내세우며 교육했던 것은 근대적 규율을 내면화시켜 권력이 요구하는 노동자형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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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 복식의 (탈)정치적 특성 -선전 포스터에 나타난 사례를 중심으로- ((De-)politicization Characteristics of the Chinese Dress Represented in Propaganda Posters)

  • 오단;임은혁
    • 한국의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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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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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7-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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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This study analyzes Chinese dresses featured in propaganda posters since the mid-$20^{th}$ century as well as explores the political characteristics of dress. This study used an in-depth interview method to investigate information from 10 Chinese familiar with public awareness and donning practices of the Chinese from 1949 to present. Interviews and analysis provided the following conclusions. First, Zhongshan-zhuang, Liening-Zhuang and Bulaji were widely worn in the Reconstruction because of the revolutionary spirit; in addition, Huayishang also became simultaneously popular as a means to reflect the new aspects of socialism. Second, Jufu/Junbianfu were the most common dresses during the period of Cultural Revolution because the government used various mechanisms to control public opinion. Third, Western fashion began to enter the Chinese market and suit wearing by the Chinese became a symbol of the Reformation and Open-door policy. Traditional dress is no longer a symbol of Feudalism and is a part of Chinese culture that has been reaccepted in the Reformation and Open-door times. Finally, during these 60 years, Chinese dress has obvious political characteristics, but began to change. The changes of political characteristics were, de-politicization expressed by the introduction of Western ready-made, permissions for traditional dress and diversification/ individualization.

1949년~1966년 시기 중국 선전화 연구 - 유화와 포스터를 중심으로 (Study of Chinese Propaganda Paintings from 1949 to 1966: Focusing on Oil Paintings and Posters)

  • 전희원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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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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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7-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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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The propaganda paintings in oil colors or in forms of posters made from 1949 to 1966 have gone through some changes experiencing the influence of the Soviet Union Art and discussion of nationalization, while putting political messages of the time in the picture planes. The propaganda paintings which have been through this process became an effective means of encouraging the illiterate people in political ideologies, production, and learning. Alike other propaganda paintings in different mediums, the ones which were painted in oil colors and in the form of posters have been produced fundamentally based on Mao Zedong's intensification of the literary art on the talks on literature at Yenan. Yet, the oil paintings and posters were greatly influenced by the socialist realism and propaganda paintings of the Soviet Union, compared to other propaganda paintings in different mediums. Accordingly, they were preponderantly dealt in the discussions of nationalization of the late '50s. To devide in periods, the establishment of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1949 as a diverging point, the propaganda paintings made before and after 1949 have differences in subject matters and styles. In the former period, propaganda paintings focused on the political lines of the Communists and enlightenment of the people, but in the latter period, the period of Cultural Revolution, the most important theme was worshiping Mao Zedong. This was caused by reflection of the social atmosphere, and it is shown that the propaganda painters had reacted sensitively to the alteration of politics and the society. On the side of formalities, the oil paintings and posters made before the Cultural Revolution were under a state of unfolding several discussions including nationalization while accepting the Soviet Union styles and contents, and the paintings made afterwards show more of unique characteristics of China. In 1956, the discussion about nationalization which had effected the whole world of art, had strongly influenced the propaganda paintings in oil colors more than anything. There were two major changes in the process of making propaganda paintings in oil colors. One was to portray lives of the Chinese people truthfully, and the other was to absorb the Chinese traditional styles of expression. After this period, the oil painters usually kept these rules in creating their works, and as a result, the subject matters, characters, and backgrounds have been greatly Sinicized. For techniques came the flat colored surface of the new year prints and the traditional Chinese technique of outlining were used for expressing human figures. While the propaganda paintings in oil colors achieved high quality and depth, the posters had a very direct representation of subject matters and the techniques were unskilled compared to the oil paintings. However, after the establishment of People's Republic of China, the posters were used more than any other mediums for propagation of national policy and participation of the political movements, because it was highly effective in delivering the policies and political lines clearly to the Chinese people who were mostly illiterate. The poster painters borrowed techniques and styles from the Soviet Union through books and exhibitions on Soviet Union posters, and this relation of influences constantly appears in the posters made at the time. In this way, like the oil paintings, the posters which have been made with a direct influence of the Soviet Union had developed a new, sinicised process during the course of nationalization. The propaganda paintings in oil colors or in forms of posters, which had undergone the discussion of nationalization, had put roots deep down in the lives of the Chinese people, and this had become another foundation for the amplification of influences of political propaganda paintings in the following period of Cultural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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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통치정책과 영화의 활용에 관한 연구 (The study about the ruling policy of Government-General of Chosun and its use of films for the political propagand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1910-1945))

  • 조희문
    • 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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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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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07-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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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일본은 1910년, 한국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통치를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내에서 입법, 사법, 행정력을 독점한 최고 권력기관이었다. 일본의 한국지배는 194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조선총독부 또한 그때까지 존속했다. 조선충독부는 일본의 한국통치 정책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기관이었으며 한국인의 반일, 항일 행위를 무마하고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도록 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갔다. 이를 위해 일본은 일본과 한국은 같은 뿌리에서 탄생한 공동운명체라는 개념을 의식화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다. 궁극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이 하나의 국가라는 개념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일본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펴나갔는데, 1910년부터 1919년까지는 억압적인 통제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같은 조치는 1919년 3월 1일을 기해 대대적으로 일어난 항일 민중봉기에 의해 전면적인 전환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에 취임한 3대 총독 사이토(濟藤實)는 보다 우호적인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한국인을 적극적으로 회유하고자 했다. 정책의 변화는 여러 가지 후속 조치들로 구체화 되었는데 민영 언론매체의 설립 허용, 시찰단 구성, 박람회 개최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일간신문의 경우 이전에는 매일신보 경성일보, Seoul Press 등 총독부 기관지만 발행되었으나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한국어 신문이 허용되었으며 잡지들도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일본파 한국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일본과 한국시찰단을 구성하여 상호방문하는 사업을 펴기도 했고, 박람회를 개최해 일본의 우수한 문물을 한국인들에게 과시하려는 시도도 나왔다. 이같은 조치의 기저는 '주지(周短)와 선전(宣衝)을 보다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영화였다 조선총독부가 활동사진반을 설치하고 홍보 선전 영화의 제작과 배급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영화의 선전기능과 효과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만주), 미국과 차례로 전쟁을 시작한 1937년 이후에는 민간의 영화제작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한편 선전영화 제작을 위한 영화사를 별도로 설립했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는 조선총독부의 조종을 받는 한개 영화사만이 존재해 선전영화만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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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와 식민지 조선에서 크로포트킨 번역의 경로들과 상호참조 양상 고찰 (Interrelationship in the Translations of the Works of P. A. Kropotkin in East Asian Countries)

  • 김미지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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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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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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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아나키즘 사상가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 운동뿐만 아니라 지식 사상계 그리고 문학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본고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이후 한국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각 방면에서 사상적 지침이 되었던 크로포트킨 저작의 수용사를 번역 양상과 번역 경로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크로포트킨이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은 오스기 사카에 등 일본의 선구적인 번역 작업들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조선어로 번역되면서 다양한 참조와 변용 그리고 자기화의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청년에게 호소함'과 같은 크로포트킨의 저작은 불온 선전물 팸플릿으로 검열과 단속의 대상이었지만 여러 경로로 수입되고 또 번역되어 20년대 선전문 번역의 존재 양상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에 신문 잡지 미디어에 소개된 크로포트킨에 관한 글들은 초기의 번역들이 그러하듯이 대부분 일본어 중역이거나 초역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국쪽의 자료들이 참조된 경우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이라는 번역의 매개와 영향관계를 암시한다. 이후 1930년대에는 사상 운동의 차원에서보다는 문학자와 비평가로서 크로포트킨을 전유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이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문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주요한 통로이자 논거로서 크로포트킨이 자리하게 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에서 크로포트킨 번역은 대부분 일본과 중국을 매개로 하여 동아시아에서 크로포트킨이 받아들여진 맥락 안에 놓이면서도 조선어로 번역하기라는 과제를 둘러싼 고투의 흔적들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쇄기형 유전체의 양면에 평면파 입사시 다극전개를 이용한 회절패턴 계산 (Calculation of Diffraction Patterns for Incidence of Planewave on Both Sides of a Dielectric Wedge by Using Multipole Expansion)

  • 김세윤;나정웅;신상영
    • 대한전자공학회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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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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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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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 임의의 각을 가진 쇄기형 유전체의양 경계면을 E-편파된 평면화가 입사할 경우 발생하는 전자파의 회절패턴을 기하광학해와 모서리회절파의 합으로 표시하였다. 모서리 회절파의 회절계수는 물리광학근사로 구한 회절계수를 모서리 끝에 분포한 다극선전원으로 수정하여 구하였다. 쇄기각 $120^{circ}$, 입사각 $60^{circ}$ 인 유전체의 비전율을 2, 5, 10으로 변화시키고, 측정거리도 모서리 끝점으로 부터 5와 10파장인 경우에 대해 기하광학해와, 물리광학해, 다극선전원으로 교정한 수정해 순으로 각각의 회절패턴을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본 논문에서 구한 수정해는 모서리 끝점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만 유용한 점근해임을 알 수 있으나, 유전체 경계면에서 경계조건을 만족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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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chWiz Evolution

  • 양희철
    • 한국감성과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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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감성과학회 2009년도 추계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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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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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2007년 본격적으로 시장에 출시된 터치폰은 시장의 관심을 받으며, 휴대전화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전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터치폰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시장에 후발주자로서 터치폰 시장에 진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 3분기 기준 전세계 터치폰 시장의 23.9% 점유율을 차지하며 1위를 차지하고 있다.터치폰에서의 선전으로 삼성전자는 전세계 휴대전화 판매량의 20.3%를 달성하며 2위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이러한 상승 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보이며, 터치폰에서의 성공에는 TouchWiz UX가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본 세션에서는 TouchWiz UX를 통한 삼성 터치폰의 성공 전략에 대해 소개하고자한다. 우선 TouchWiz UX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서 당사의 디자인 철학이자 UX 다지인 철학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Creating Emotional Journey"라는 슬로건 아래 "Desire", "Intrigue", "Delight"라는 핵심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다음으로 TouchWiz UX를 성공 시킬 수 있었던 UX 추진 전략을 "Good UX 전략", "브랜드화 전략", "진화 전략", "확산 전략" 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첫째, Good UX 전략에서는 "Simple", "Robust", "Reliable"의 3대 원칙하에 사용성이 높고 감성을 자극하는 UX를 만들기위해 노력하였다. 둘째, 브랜드화 전략에서는 UX를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TouchWiz라는 UX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셋째, 진화 전략에서는 TouchWiz 1.0에서 2.0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유지하면서 발전시켜 나가는 전략을 선택하였다. 넷째, 확산 전략에서는 TouchWiz UX가 각기 다른 OS, Platform, 사업자에 따라 공통화, 차별화를 병행하여 확산하였다. 마지막으로, 내년에 소개될 TouchWiz 3.0에 대해 전략과 키워드를 간단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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