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근대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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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사건축기술연구소의 유네스코회관 초기 계획안(1959)에 관한 고찰 (On the Initial Plans (1959) of UNESCO House in Seoul, Korea by Kuzosa Architects & Engineers)

  • 우동선;김태형;이수민
    • 건축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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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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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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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This study examines the design intent and the construction background of the UNESCO House in Korea planned in the 1950s, with a focus on the initial plans of the House by Kuzosa Architects & Engineers in 1959. To this day, the House has been evaluated a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an office building in the 1960s, and an early case of introducing curtain walls in Korea. However, only its technical characteristics have been explored with less emphasis on further research data. This study attempts to demonstrate the social and cultural expectations and the demands of the construction of the House by examining the documents produced at the time and the initial plan. This study also highlights the fact that the House was the first project of the architect Pai Ki Hyung to realize high-rise reinforced concrete construction in Seoul's dense center. In the 1950s, the House was planned as a modern building with a complex of various cultural facilities and offices due to the character of activities of the Commission, and the lack of public cultural facilities in Korea. The plan of the Kuzosa Architects & Engineers was selected through a design competition held in 1959. The House was completed in 1967, which took about eight years from planning to completion with design modification in the 1960s. The initial plan submitted before the design modification shows that Pai used the vocabulary and logic of modern architecture and planned the House not as a simple office building but as a complex cultural facility.

냉전과 일본의 자유주의- 마루야마 마사오의 냉전자유주의와 리얼리즘 (Cold War Liberalism in Postwar Japan: An Interpretation of Maruyama Masao's Realistic Liberalism)

  • 장인성
    • 동북아역사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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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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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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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글은 '진보주의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냉전자유주의'를 해명함으로써 패전과 냉전 초기의 일본에서 영위된 진보적 자유주의의 실체를 해명한다. '민주'와 '평화'가 모색된 패전과 냉전 초기의 공간에서 일본의 자유주의가 냉전적 현실에 투사되는 양상을 마루야마의 리얼리즘과 내셔널리즘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마루야마의 냉전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냉전적 존재양태와 냉전의 자유주의적 해석의 두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냉전적 존재양태가 근대일본의 자유주의의 시간적 계승의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라면, 냉전의 자유주의적 해석은 냉전 상황에서의 자유주의의 공간적 표출을 포착하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냉전자유주의는 내셔널리즘과 리얼리즘을 매개로 표현된다. 마루야마는 냉전적 현실에 대응하여 '민주'와 '평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냉전 구조에서 생겨난 반공 논리에 근거한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을 비판하였고,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평화를 모색하였다. 마루야마에게 냉전체제의 '두 개의 세계'를벗어나는 길이 '중립'과 '평화'였다면, 파시즘을 벗어나는 길은 '공평한 판단'과184 | 동북아역사논총 59호'자주적 결사'였다. 마루야마의 냉전자유주의에서 주체는 '시민'보다는 '국민'을지향하는 것이었고, 국민 형성을 지향하는 내셔널리즘은 '민주'와 '평화'를 위한조건이었다. 마루야마의 비판적 자유주의는 내셔널리즘과 리얼리즘을 매개로작동하였다.

젠더, 노동, 감정 그리고 정치적 각성의 순간 - 여성 사회주의자 정칠성(丁七星)의 삶과 활동에 대한 연구 (Gender, Labor, Emotion and Moment of Political Awakening - A Study on Life and Activities of Female Socialist Chung Chil-sung)

  • 노지승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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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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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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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자본주의화된 식민지 조선에서 기생은 위기감 속에서 경제적 구원자가 될 남성에 의존해서 사는 처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와 자본주의가 부여한 변신의 기회를 갖기도 했다. 사회주의자 정칠성도 정치적 각성을 통해 그러한 변신의 기회를 활용한 사람 중 하나였다. 정칠성의 정치적 각성은 3.1운동이라는 역사적 계기와 십여 년 간 기생으로서 경험했던 개인의 노동 체험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다. 3.1운동은 민족주의라는 외연을 띤 거대한 정치적 사건이었지만 정칠성이라는 한 여성의 개인적인 분노의 감정을 이끌어낸 계기이기도 했다. 또한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업을 가진 여성들은 직무 상의 역할 이외에도 순종적이면서도 아량이 넓어야 한다는 정서적인 역할을 강요받았다. 즉 초기 직업 여성들은 공적 영역에서 젠더 위계와 젠더 권력 속에 무방비로 노출됨으로써 분노와 수치, 모멸감 등의 감정을 겪어야 했고 이러한 감정들이 정칠성의 사례에서 나타나듯 어떤 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함을 알 수 있다. 노동 경험과 감정의 문제를 매개로 한 정치적 각성은 정칠성으로 하여금 다른 여성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라는 이슈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이해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언어는 정칠성에게 자신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상대적으로 가장 적절한 언어였지만 그녀의 체험은 엘리트 사회주의 언어로서는 설명될 수 없는 지점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삶은 엘리트 중심의 사회주의 운동을 넘어서, 하층민 여성의 삶이 새로운 감성으로 분할되고 등재되어 정치적으로 가시화될 필요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대한제국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초기(1906-1915년)까지 사용되었던 과학교과용 도서의 조사 분석 (A Study of School Science Textbooks which was used from 1906 to 1915 in Korea)

  • 박종석;정병훈;박승재
    • 한국과학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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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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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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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
  • 본 연구에서는 대한제국 후기부터 일제 식민지 초기에 사용된 과학교과용 도서의 목록과 그 출판 현황을 밝혀 당시의 과학교육에 대한 구체적 실태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를 시하기 위하여 한국의 초기 과학교육에서 기반의 전환이 있었던 대한제국 후기 과학교육의 현실을 보여줄 수 있는 과학 교과서의 출판실태를 1906-1915년을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학 교과서 목록을 작성하고 당시의 출판 상황 및 사용 내역의 실태를 조사하는 데는 학부( 部) 및 총독부에서 발간한 "교과용도서일람"(敎科用圖書一覽)의 $4{\sim}9$판을 기본 사료(史料)로 하고, 당시에 발간된 관계 자료와 이에 대한 연구 자료를 통하여 내용을 확인하여 보완하였다. "교과용도서일람"은 을사늑약 이후 학부에서 발간하기 시작하여 한 합방 이후에는 총독부에서 계속 발간한 것이다. 이 책자에는 당시 사용하던 교과용 도서 체가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서 1906년부터 1915년 사이에 사용된 과학 교과서는 이과, 이 학, 물리, 화학, 박물, 생리, 위생, 생리위생, 동물, 식물, 천문, 지문, 광물, 지질 등 다양한 름을 가졌다. 이들 교과서명은 정부에서 정한 교육과정 속의 과학교과명인 이과, 박물, 물리, 화학보다 범위가 넓었고, 오히려 각종 사립학교에서 정한 과학 교과명에 일치하였다. 따라서 이때 발간된 과학 교과서는 사립 학교에서 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 과학 교과서 중 한국에서 발간된 것은 주로 1906년 이후부터 등장하며 이때 애국계몽운 동 영향으로 학교가 설립되고 교육을 받는 대상도 증가된다는 점에서 한국의 실질적인 과 교육은 1906 년 이후에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개화기 한국에서 발간된 과학 교 는 학부 또는 총독부로부터 그 사용에 대한 통제를 받았다. 1908년의 사립학교령과 교과 도서검 정규정, 그리고 1909년의 출판법은 교과서를 통제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한국에서 간된 62종의 과학 교과서중 사용금지를 당한 것은 18종인데 2종은 불인가, 13종은 검정무효 그리고 3종은 검정무효 및 검정불허가 처분을 중복으로 받았다. 이는 과학 교과가 학부나 총독부의 검열로부터 다른 교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일제가 점차 교 서 통제를 강화하면서 과학 교과서에도 통제를 가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국의 근대 과학교육은 1906년에 이르러 실질적인 체제가 확립되면서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실시되었 데 이 시기에 비록 번역된 도서가 많이 있었지만 동시대적 지식을 담고 있었던 62종의 과학 과서가 한국에서 발간되었고, 76종에 달하는 일본의 과학 교과서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으며, 40여명의 한국인이 과학 교과서를 번역 또는 편술하는 등 한국 과학교육에 종사하였다는 에서 한국 과학교육의 자생적인 성장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10년 제에 주권을 상실 당하면서 그 성장력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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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한국의 초기 고등수학 발전과정 비교연구 (Comparison of early tertiary mathematics in USA and Korea)

  • 이상구;설한국;함윤미
    • 한국수학교육학회지시리즈E:수학교육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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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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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77-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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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초등(elementary), 중등(secondary)교육에 이어지는 대학 및 직업 교육을 총칭하여 고등(tertiary) 교육이라고 한다. 본 연구는 미국에서의 고등(tertiary)수학과 한국에서의 고등수학 초기 발전과정을 비교 연구한다. 미국 대학에서의 수학 강좌개설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버드대 학장인 던스터가 1640년 산술과 기하를 예비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지도한 기록이 남아있다[10]. 이 기록에 의하면 미국 대학과정의 수학은 1636년 설립된 하버드 대학에서 1640년부터 실질적인 강의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수학자로는 1870년 'Linear Associative Algebra'를 발간한 하버드의 벤자민 퍼스가 비로소 수학에 대한 학술적인 기여를 통하여 처음으로 유럽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미국의 경우 세 번째 연구중심대학으로 시작한 시카고대학의 성장과 함께 학술적으로 유럽 수학계의 인정을 받고 미국 수학연구의 존재를 학계에 알린 미국인 수학자로 G.D. 버코프를 꼽는다. 1912년 하버드대 수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하버드대 수학과의 역할을 교육에서 연구로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즉, 미국 수학이 교육에서 연구 단계로 진화하는 과정에 무려 200년 이상이 걸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버드에서 대학 과정이 설립될 즈음 조선에서의 고등수학의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한반도에서는 조선산학과 구한말의 대학부 및 연희 전문학교 수물과를 거쳐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일제식민통치하에서 벗어난 1945년 4년제 대학에 수학과가 처음 설립된다. 일제 강점기에는 중학교와 전문학교 이과에서 일부 직업교육 또는 대학수학이 다루어졌다. 한국의 경우 경성대의 이임학이 1947년 막스 존의 미해결 문제를 풀며 한국 근대수학자의 존재를 서양에 알리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미국과 한국의 초기 고등수학 발전과정을 수학자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여 발전 단계를 진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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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신문 기사제목의 형성과 발전: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Article Titles in the Beginning Period of Korean Newspapers: Focused on The Independent, The Korea Daily News and The Dong-A Ilbo)

  • 최창식;채백
    • 한국언론정보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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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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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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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연구는 한국 근대신문의 기사제목이 형성, 정착되는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그 변화의 양상과 의미를 규명해보고자 하였다. 1890년대의 "독립신문", 1900년대의 "대한매일신보",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동아일보"를 대상으로 이들 신문 기사제목 체제의 변화와 그 표현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독립신문"은 창간 초기 "한성순보"와 마찬가지로 제목 없이 유목만으로 지면을 구분하다가 1898년 7월에 처음으로 제목을 사용하였다. "대한매일신보"의 경우 1910년부터 제목을 별행 처리하여 본문과 확연히 구분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본문의 서체와 제목의 서체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제목 크기는 1단만 사용하여 기사의 중요도를 가늠하는 기능은 찾아볼 수 없었다. 1920년대의 "동아일보"는 다단과 다행, 본문과 확연히 구별되는 크기의 제목활자 등을 사용하며, 지면 레이아웃을 도입하는 등 오늘날의 신문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 오면 제목의 크기가 더욱 커지면서 지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전에 비해 확연하게 늘어났다. 이는 1930년대 민간지의 선정주의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신문에서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중대해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는 편집진의 시각이 개입된 주관형 제목이 각각 44.4%, 28.3% 정도 나타나고 있는 데 반해 1920년대의 "동아일보"는 주관형이 4.2%로 크게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당시 신문들에서도 객관 저널리즘이 정착되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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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통감부 건축재료의 물리화학적 특성과 평가 (Evaluation and Physicochemical Property for Building Materials from the Japanese Ministry of General Affairs in Joseon Dynasty)

  • 박석태;이정은;이찬희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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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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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7-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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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근대건축으로 알려진 조선통감부 자리의 콘크리트와 토관 및 벽돌을 대상으로 3시기로 세분하여 물리화학적 특성과 평가를 검토하였다. 콘크리트는 모두 비슷한 가비중과 흡수율을 보였으며 다량의 골재와 석영, 장석, 방해석 및 포틀란다이트가 검출되었다. 벽돌의 공극률은 1907년의 것이 1910년 및 1950년 벽돌보다 높았다. 토관도 유사하나 초기의 것이 보다 치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벽돌과 토관은 암적색에서 암갈색을 띠며 많은 균열과 기공이 관찰되나, 상대적으로 토관의 기질이 균질하다. 벽돌에서는 석영, 장석 및 적철석이 검출되었으며, 토관에서는 석영 및 장석과 뮬라이트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모두 1,000~1,100℃의 소성온도를 거친 것으로 해석된다. 콘크리트는 유사한 CaO 함량을 보이나, 벽돌과 토관은 1907년 시료에서 SiO2는 낮고 Al2O3가 높다. 그러나 이들은 유사한 지구화학적 거동특성을 갖는 등 성인적 동질성이 높다. 콘크리트 기초의 초음파속도와 반발경도는 잔존상태에 따라 다르나 물성은 다소 낮았다. 이를 일축압축강도로 환산하면 1차 증축구역이 평균 45.30 및 46.33 kgf/cm2로 가장 높고, 2차 증축구역이 가장 낮은 평균치(20.05 및 24.76 kgf/cm2)를 보였다. 특히 CaO 함량과 흡수율이 작을수록 초음파속도와 반발경도가 높았다. 조선통감부 건축에 활용한 콘크리트는 시기별로 비슷한 배합특성과 비교적 일정한 규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과 토관은 거의 동일한 점토질 원료를 사용하여 유사한 제작과정을 거친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식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Chinese Socialism and Nationalism)

  • 조봉래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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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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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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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논문은 사회주의 중국에서의 민족주의의 형성에 대한 연구다. 중국은 발달한 문명을 바탕으로 한 문화적 우월감으로 인해 일찍부터 문화적 민족주의가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이는 오랜 기간을 통해 '중화주의'로 굳어지게 된다. 그러나 아편전쟁 이후 서양의 침략으로 인해 위기감이 생겨났고 중국의 지식인들은 다방면의 변화를 통해 구망(救亡)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서양의 '사회진화론'이 소개되고 받아들여진다. 이 사회 진화론의 수용은 결국 국가 간의 경쟁에서 밀린 중국이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는 것은 당연해지는 논리적 한계에 봉착하여 점차 변형되지만 중국 지식인들에게 문화적 중화주의에서 벗어나 서양의 근대적 국가민족주의 개념을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초기에 창당과정에서 부터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았는데, 당시 제국주의 자본의 세계지배라는 조건 속에서 식민지국가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강조되었고, 중국에서의 저항적인 민족주의성격을 띤 마르크스주의는 명분을 갖게 된다. 이후 중일전쟁 과정에서 반제반봉건투쟁을 통해 중국인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된 중국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고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로서의 중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냉전이라는 국제적 여건 속에서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중국 사회주의의 발전은 자국 인민의 결집된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중국 공산당의 지속적인 애국주의의 고양으로 이어진다. 특히 개혁개방 이후 새롭게 등장한 모순들로 인해 중국은 분열을 겪게 되었고 이를 통합하는 이데올로그로 자국의 문화적 자긍심을 바탕으로 한 중화주의가 또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최근 경제 강국으로서 국제적인 위상이 높아진 중국에서는 전통문화의 우월성이 강조되면서 매우 강력한 중화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시조의 변이 양상 (The Aspects of Change of Sijo)

  • 강명혜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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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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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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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시조는 발생초기부터 당대의 역사 시대적 배경에 따라 그 틀과 내용이 조금씩 변하면서 융통성 있고 유연하게 적응해 왔다. 이런 점이 당대의 시대적 배경이나 사상, 실태 등을 반영해서 당시의 독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시조를 시조답게 하는 시조성만은 그대로 고수해 왔기에 '시조'라는 장르가 현재까지도 생존할 수 있었다. 어느 시대나 어떤 배경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3장이라는 정형성은 지켜졌으며, 3, 3조나 3, 4조를 유지했고, 또 종장의 첫 구 3자도 고수했다. 이러한 시조성은 시대적인 간극에도 불구하고 '시조'라는 공분모 안에 모두 수렴시킬 수 있는 동인을 마련했다. 한국시가에 있어서 시조는, 공적 기능에서 사적 기능으로 변모가 이루어진 최초의 양식으로서. 그 변이과정을 살펴본 결과. 고려말${\sim}$조선조의 평시조는 그 당시 조류에 부합해서 시조 텍스트를 재도지기(載道之器)로 보아 이중적인 의미의 채색, 상징성 부여, 다채로운 문장 수식 등은 나타나지 않지만, 명천도(明天道) 정인륜(正人倫) 지향하는 성현의 가르침을 온유돈후(溫柔敦厚)하게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주제는 주로 그 당시 상황과 부합되는, 송축, 절의, 정쟁, 훈민, 한정, 강호도가, 안빈낙도, 애정 등이었다. 조선조 후기에 오면서는 사설시조(辭說時調)가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사림파의 득세와 양란(兩亂), 실학의 도입 등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가 시가 양식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설시조는 당대의 봉건주의 파괴, 유교적 모랄에 대한 반발, 근대적 특성 보유 남녀평등등 사상, 지배층에 대한 고발 및 저항정신 둥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저항적 리얼리즘적 현실지향적인 성향을 띠며 특히 고발문학 저항문학의 지반을 형성하는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잡다한 일상사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현실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 그에 대한 사실적, 구체적 표현은 사실주의 정신의 매개항이 된다는 점에서 근대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1905년 이후 신문에, 형식이나 내용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평시조나 사설시조에서 변이된 형태를 취하는 일군의 시조가 등장했다. 변이된 형태는 시조 텍스트의 형식과 내용뿐만이 아니라, 수용적 측면에서도 일어났다. 이때부터 시조는 '읊고 부르는 형태'에서 주로 '읽는 기록물'로 인식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변이 된 시조 형태란, 당대의 시대를 풍자하는 '흥, 내지 흐응'이 삽입된 것, 종장의 어미가 생략된 것 등을 말한다 이러한 형식은 긴박한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특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고시조의 틀, 즉 율격이나 자수에서 많이 이탈되어서인지, 그 생명은 길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조 창작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는데,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작(詩作) 초기에는 서구지향의 시와 시조들 병행해서 쓰던 육당 최남선이, '조선국민문학(朝鮮國民文學)으로서의시조(時調)'라는 글을 통해 시조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언급하면서 시조부흥 운동을 선도한다. 그는 시조집, '백팔번뇌'도 출간하는데. 그의 전 시조집을 관통하는 것은 '조국 사랑'이라는 일 주제였다. 결국 육당은 고시조를 민족정신의 일환으로 보고, 시조양식을 채택하여 그 당시의 역사 사회적인 상황에 부합되는 주제를 표출한다. 결국 육당도 시조 텍스트를 재도지기(載道之器)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현대의 시조는 현대성(現代性)과 시조성(時調性)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는 어려움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전자에만 치중한다면 자유시와의 변별성이 문제가 되며, 후자를 고수하려니 고루하고. 시적 묘미가 없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많은 작가들에 의해 평시조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시조가 지니는 원형성에 대한 매력을 감지해서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 중 특히 선정주의 작품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특히 근대의식, 사회비판정신, 고발의식, 사실주의 정신 구현, 서민의식, 산문체 ·일상어 지향 등, 사설시조의 특징 및 성향을 잘 구현, 반영하면서 그 맥을 잇고 있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렇듯이 현대의 시조 작가들은 우리의 고시가 형식을 다양하게 선택해서 다양한 주제를 표출하고 있었다. 여기서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시조의 유연성은 앞으로 시조의 생명을 항구적으로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역사 시대적 변화와 상황 하에서 다시 새로운 양상을 취할 가능성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이 '시조'는 한국인의 '영원한 정형시 장르'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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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디자인교육의 기하학적인 형태에 대한 탐구 - 프뢰벨 유치원 교육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 (Research on Geometric Shape in the 20th Century Design Education - Focused on the relation of $Fr{\ddot{o}}bel$ Kindergarten Education -)

  • 방경란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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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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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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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본 연구는 20세기 디자인교육에 있어서 기하학적인 형태에 나타난 조형원리의 근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디자인 교육에 등장한 기하학적인 형태는 19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유치원 운동에서 도입된 교육사상에서부터 출발한다. 19세기 독일의 유아교육자 프뢰벨(Friedrich $Fr{\ddot{o}}bel$)에 의하여 탄생된 프뢰벨교구(Spielgaben)의 인기는 학교에서의 미술교과목에서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원리에 의하여 만들어진 프뢰벨교구는 최소한의 색채와 형태를 채택한 어린이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이었다. 19세기 기하형태의 블록놀이를 중심으로 개발된 '슈필가벤(Spielgaben)'과 '작업($Bech{\ddot{a}}ftigungsmaterial$)'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놀이프로그램은 초기모더니스트들에 의해 기하형태에 대한 선택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20세기 현대디자인교육의 시작이 되었던 바우하우스의 기초교육프로그램에서도 적용된다. 이러한 사실에서 20세기 디자인교육에서 나타난 점선면의 원리와 기하학적 형태의 선택에 대한 근원적 배경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유치원운동과 근대디자인교육과의 기하학적인 형태라는 동일한 범주 속에서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이다. 즉, 이러한 연관성에 대하여 문헌조사를 통하여 탐색하고 서로의 관계에 대하여 분석하고 비교하여 연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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