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경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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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공화국 대통령 경호의 역사적 재조명: 경호책임자, 대통령경호특별수칙, 대통령경호대를 중심으로 (An Historical Reconsideration of Korean Presidential Security Service during the 1st and 2nd Republic: Focused on the Chief of the Presidential Security, the Law of Presidential Security Special Order, Presidential Security Organization)

  • 김은정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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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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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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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한국 경호사에서는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의 대통령 경호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이에 기존의 선행연구에서 논하지 않은 세 가지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첫째, 제1공화국의 경호책임자는 제1대 김장흥 제2대 서정학 제3대 김국진 제4대 곽영주이다. 그러나 곽영주의 과오로 인해서 그동안 제1공화국의 경호책임자들에 관한 언급이 배제되었고, 제2공화국 당시에도 경호책임자에 대한 임명을 기피한 측면이 나타난다. 둘째, 제1공화국에서 내무부훈령 제52호로 "대통령경호특별수칙(1953)"이 제정되었다. 선행연구에서 누락된 이 수칙은 기존의 "경호규정(1949)"과 달리 대통령 경호에 초점을 맞췄으며, 제3공화국의 "대통령경호실법(1963)"보다 10년 전에 등장했다. 셋째,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경호대의 발족을 공포하였다. 제1공화국의 대통령 경호를 담당했던 경무대 경찰서가 폐지된 이후, 제2공화국에서 등장한 대통령경호대는 제1공화국과 차별화된 대통령 경호기관 설립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 이제까지 한국 경호사에서는 제3공화국의 경호실장 "대통령경호실법(1963)" 대통령경호실을 기준으로 하여 제1 2공화국과의 흐름이 단절된 것으로 보았으나, 제1공화국의 경호책임자 "대통령경호특별수칙(1953)"과 제2공화국의 대통령경호대를 통해서 제3공화국 대통령 경호와의 역사적인 연계성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제1 2공화국의 대통령 경호에 있어서 경무대 경찰서 및 경찰관들의 활동이 경호인식 속에 내재되었고, 제3공화국 이후에는 군인들이 관여하면서 오늘날 한국의 경호 인식속에 경찰과 군(軍)이 포함되는 복합적인 양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한국 경호사에서 경호실장 "대통령경호실법(1963)" 대통령경호실로 인해 주목받아 온 제3공화국에 비해서 적합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제1 2공화국의 대통령 경호에 대한 재평가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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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소장 미술품의 4·19 이후 처리경위 -대통령기록관 소장 「이박사(李博士) 재산태장(財産台帳)」(1970)의 검토 (The Management of Artworks in the Collection of Ihwajang House after the April 19 Student Revolution: An Examination of the "Property Ledger of Dr. Rhee" (1970) in the Collection of the Presidential Archives)

  • 윤인수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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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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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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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고에서 소개할 자료는 1970년 청와대 비서실에서 작성된 「고이박사 재산처리」의 첨부문서인 「이박사(李博士) 재산태장(財産台帳)」이다. 이 자료는 1970년 2월 청와대에서 소장하고 있던 집기와 미술품을 이승만 전대통령의 유족에게 인계하면서 작성된 목록으로 총 311점이 기술되어 있다. 이 자료가 작성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60년 4·19이후 이화장에 소장되어 있던 미술품을 포함한 동산은 이후 조사가 진행되었고 한때 국립박물관으로 이관을 검토하였으나 일괄하여 청와대에서 활용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63년 이를 다시 국립박물관으로 이관하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이 중 사유물로 분류된 것은 이화장으로 반환한다. 1970년에는 청와대에서 소장하고 있던 집기·미술품에 대해서도 이화장으로 반환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 「이박사(李博士) 재산태장(財産台帳)」은 당시 작성된 목록이다. 본 대장에는 조선시대부터 당대를 아우르는 작가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나 사진이 첨부되어 있지 않고 기술사항도 소략하여 개개작품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60년 전후 경무대·이화장 소장 미술품의 규모를 일정부분 확인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또 이들 미술품의 소유권 귀속을 둘러싼 시비와 그 전개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다.

고종 연간에 조성된 궁궐 후원 다용도 공지(空地)의 활용양상 (A Study on the Status of Multi-functional Vacant Ground at the Palace Rear Garden during the Era of King Kojong)

  • 정우진;권오만;심우경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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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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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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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후원에 위치한 다용도 공지의 조영역사를 구명하고, 이와 내적 맥락을 같이 하는 고종 연간의 다용도 공지를 고찰한 것으로서, 중건 경복궁 및 경운궁 임어기에 후원 공지를 조성한 배경과 그 이용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궁궐 내의 다용도 공지는 조선의 정치무대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적 공간이자, 국가운영의 기반시설이 되었다. 조선이 성립된 후로 창덕궁에서 왕실의 행사를 거행하는 공지로는 광연루(廣延樓)와 해온정 사이의 공터, 열무정(閱武亭) 일대, 서총대와 춘당대(春塘臺)가 조사되었으며, 여기서 활쏘기, 과거시험, 군사훈련과 다양한 연회가 이루어졌다. 고종 즉위 후에는 중건 경복궁에 경무대(京武臺)가 조성되었고, 경운궁에 환어한 고종 34년 뒤에는 경희궁이 영외 후원처럼 사용되었다. 두 공간의 특징으로, 신무문(神武門) 밖 후원의 경무대는 창덕궁의 공간구성이 이입된 특성이 있으며, 경희궁의 경우 원활한 공간 연계를 위해 운교(雲橋)가 설치되었다. 특히 고종 시대 후원 다용도 공지는 과거시험이나 시사(試射)와 같은 이전에도 있었던 국가적 행사장의 의미를 넘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 침탈이 가속화 되는 시점에서 일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국왕의 위엄과 권위를 보여주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또한 다용도 공지가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관병식(觀兵式) 등의 군사조련장으로 주로 활용된 사실은 시대성을 반영한 결과로 간주된다.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 (A Study on the Guard System in the Last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 이성진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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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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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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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구한말의 호위제도 고찰은 개항 이후의 고종의 친정,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시대의 왕실호위제도에 대한 고찰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호위제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0년간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문란해진 왕권을 강화하고 국방력강화와 비변사를 폐지하며 종전의 삼군부로 부활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왕권 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허약했던 중앙군을 강화하여 상비군을 늘리고 군기를 숙정하게 되었으며 신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대원군 실각 후 고종이 친정을 했다고 하나 대원군과 민비세력과의 불화로 인한 불안에 대처하여 궁궐 숙위를 전담하는 무위소를 설치한 이래, 2군영 제도 실시의 친군영, 용호영의 부활, 시위대 친위대 등으로 이어진 갑오개혁까지의 호위체제의 변화는 법제적인 것이 아니었고 일본, 청국, 러시아 등 외세의 변화상황에 따라 주체적으로 힘을 다한 것이었다. 일본이 침략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독무대가 되는 상황의 변화로 인해 대내의 국가수호에 대한 노력의 효과가 약화되었으며, 더욱이 갑오개혁 이후 경무청 내에 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경무서를 둔 것과 대한제국시대의 경무서를 경위원과 황궁경위국으로 개편되었던 제도역시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어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역경에서 이루어진 그 노력과 분투의 과정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따라서 왕실을 호위하는 세력이 일본에 넘어간 대한 제국시대의 호위제도와 모든 상황전개는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게 수립되어 있을지라도 국력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할 때 왕실의 호위제도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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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의 카메라를 이용한 3차원 비전 검사 방법 (A 3D Vision Inspection Method using One Camera)

  • 정철진;허경무
    • 전자공학회논문지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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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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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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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본 논문에서 우리는 기존의 2차원 비전검사 시스템에 적용시킬 수 있는 1대의 카메라를 이용한 3차원 비전검사 알고리즘을 제안한다. 부품의 패턴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여 이를 토대로 회전되어진 물체의 형태를 예측 가능하다면 충분히 하나의 이미지로 3차원 비전검사가 가능하다. 우리는 제안된 알고리즘에 3차원 데이터베이스, 2차원 기하학적 패턴매칭 그리고 회전변환 이론을 사용하였으며, 그 결과 물체의 회전각도를 예측함으로써, 각도가 틀어진 물체의 검사 가능성이나 전반적인 물체의 인식 등을 해결하였다. 또한 우리는 알고리즘을 전형적인 IC와 커패시터에 적용시켰으며 기존의 2차원 비전검사 및 3차원비전 알고리즘인 특징공간궤적 방법과 비교하였다.

작업분석을 통한 합벽거푸집 구성 요소별 작업소요시간에 관한 연구 (Work Time of Basement Composite Wall Form Assembly by Work Time Analysis)

  • 허경무;김명현;김태희;김재엽;김광희
    • 한국건축시공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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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건축시공학회 2009년도 추계 학술논문 발표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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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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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Recently, construction in downtown is often done closely at the adjacent building. In this case, underground construction need to Basement Composite Wall(BCW) construction. However, generally, during the construction process of BCW form works have many problems that are narrow working space and inefficient time consuming. Despite of these problems, there was no quantitative research for the work time of BCM assembly. Therefore, in this study, work time of CBW form assembly in underground construction is identified by the work analysis. The results of this study reveal that buttress work of basement form take lots of time in the entire work process of Basement Composite Wall form assemb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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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합벽 거푸집의 시공단계별 원가 분석에 관한 연구 (Cost Analysis of Construction Phase in Basement Composite Wall Form)

  • 최오영;허경무;김태희;김재엽;김광희
    • 한국건축시공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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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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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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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최근 인구의 도심 집중화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토지이용의 극대화를 위해 지하공간의 활용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최근 건축물의 지하심도가 깊고 인접건물과 근접시공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건축물의 지하외벽은 슬러리 월 또는 흙막이가시설을 외벽 거푸집으로 사용하고 내측에만 거푸집을 시공하는 방식인 합벽으로 시공되고 있다. 그러나 지하층 합벽 거푸집공사에 대한 원가분석이 건축공사 표준품셈 등에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지하층 합벽 거푸집 공사의 원가분석을 시행하여 시공단계별 투입원가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연구결과는 수평목 설치 및 해체는 3%, 거푸집 설치 및 해체는 26%, 보강재 설치 및 해체는 12%, 지지대 설치 및 해체는 42%, 기타 작업은 17% 이다. 정확한 투입원가를 프로세스별 구분하여 정리함으로서 신기술 및 신공법 개발 시 중점을 두어야 하는 포인트를 제시할 것으로 판단된다.

중건 경복궁 후원 오운각(五雲閣) 권역으로 조명한 조선시대 궁궐 별원(別苑)의 특성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Byeolwon (別苑: A Separate Garden Made Away from Living Space) in Palace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Illuminated by the Oungak Area at the Rear Garden of Reconstructed Gyeongbokgung Palace)

  • 정우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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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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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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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고종 연간 경복궁 후원의 북쪽에 조성된 오운각 권역의 특성과 창덕궁 후원 옥류천에 구비되어 있던 기능적 요소가 경복궁 후원으로 치환되었던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오운각 권역은 샘과 천하제일복지 각자가 있던 기존의 공간을 활용하여 왕의사적인 공간으로 정비된 공간이었다. 고종은 오랫동안 창덕궁 옥류천이 담당했던 왕실의 휴식과 위락기능을 중건 경복궁에 그대로 옮기려 하였다. 그 결과, 옥류천과 유사한 기능을 하도록 조성된 오운각 권역이 후원의 별원으로 개발되었다. 양자 간에는 후원의 최북단에 조성된 입지 외에도, 건물의 구성 및 유배거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관상용 수경설계 등에서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오운각 권역은 옥련정, 오운각, 벽화실과 천하제일복지천의 수경시설로 구성되었다. 이중에서 벽화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옥류천과 직간접적인 관련성을 갖되, 지형의 굴곡, 경사, 수계의 상황 등 주어진 입지조건에 따라 조성되어 색다른 정감을 갖는 공간으로 개발되었다. 먼저, 옥련정은 남산에 이르는 서울의 경관을 조망하기 위해 높은 언덕에 입지하였고, 천하제일복지천의 독특한 형식의 수로는 위이암의 유배거의 기능을 모방한 형태로 추정된다. 한편 오운각은 옥류천의 농산정과 같이 주거가 가능한 집으로 조영된 것이었다. 이러한 구성요소는 다분히 옥류천의 기능과 위상을 경복궁에 치환하기 위한 조성목적을 표출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은 조선시대 궁궐 후원의 기능 공간이었던 별원의 특성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경복궁 후원 수림의 변화과정 및 주요 노거수군의 역사적 가치규명 (A Study on the Historical Values of the Changes of Forest and the Major Old Big Trees in Gyeongbokgung Palace's Back Garden)

  • 신현실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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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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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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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고는 최근 74년만의 개방으로 수많은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는 청와대 경복궁 후원 공간의 변화과정을 통하여 후원 경관의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고자 조선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도성대지도, 북궐도형, 경복궁 복원기본계획 등의 사료와 도면 등을 근거로 경복궁 후원의 시원과 발달과정을 고찰하였고 이를 통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은 고려시대부터 명당으로 이름난 지역이었고 당시 남경으로 명명되며 신궁이 조성된 지역이었고 고려시대 이미 풍수도참사상과 주국의 고공기의 영향을 받아 궁성과 궁궐이 조영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전기 경복궁 후원은 궁궐의 후원으로 각광받지 못하였으나 고종 시기부터 현재까지 국가 통치권자의 생활공간으로서의 장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둘째, 후원의 경계는 도성지도, La Coree, 경무대일원, 일본지리풍속대계, 한국사진첩, 조선건축도집, 경성부 도시계획 조사서 등의 문헌을 통해 신무문 밖 현재의 청와대 권역이 경복궁의 경외에 조성된 후원임을 규명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황폐화된 지역을 고종시기 중건과정을 거쳐 공사(公私)가 결합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후원의 전각들이 이건되거나 훼철되며 법궁의 후원으로서의 장소성이 훼손되었으나 광복 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며 다시금 통치자의 장소라는 가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셋째, 경복궁 후원은 왜란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공간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지형적 변화가 가장 큰 곳은 조선총독부관저가 건립되었던 경농재 일원으로 토지의 용도변화가 빈번하였다. 반면 현 경무대지역과 소정원 옆 수림과 백악의 수림은 전통적 수림의 형태를 계승하며 보존되었다. 이를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1:1200의 경무대관저경내부지배치도와 위성사진을 신무문 기준으로 중첩하였고 그 결과 백악에서 발원한 물길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물길을 따라 오늘날까지도 수림지역이 변화하지 않고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넷째, 전통적 수림경관이 계승된 지역들은 지형의 기능적 변화가 미비하였고 더불어 주요 노거수군이 존치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노거수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는 지표수종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녹지원에 자리한 반송은 융문당 옆 식재된 반송 중 일부가 보존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국가원수와 중요 귀빈들의 만찬 시 포토존으로 활용되어온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와대 내 경복궁 후원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사료들에 대한 발굴을 통해 공간의 가치를 명확히 규명하고 시대별 정원고고학적 층위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또한 경복궁으로부터 청와대로 이어지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역사경관을 보존하기 위한 근거는 과거부터 영속되어온 청와대 경복군 후원 노거수군의 영역대를 훼손하지 않아야하며 청와대 내 수림을 전수 조사하는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경복궁 녹산(鹿山)의 성립과 경관적 의의 (A Study on the Formation and Landscape Meaning of Noksan in Gyeongbokgung Palace)

  • 이종근;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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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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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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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녹산은 경복궁 내부에 위치한 구릉 형태의 녹지로서 문화재공간으로 주목받지 못한 장소이다. 이에 본 연구는 녹산이 성립된 배경과 변화 양상을 고찰하여 경관적 의의를 도출하고자 실록, 지도류, 사진에 대한 문헌 분석과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녹산의 정체성은 풍수적 내맥(來脈), 소나무림, 사슴과 관련되며, 경관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복궁전도」 외 다수의 고지도에는 백악으로부터 경복궁 내부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묘사되었는데, 그중에서 녹산은 강녕전과 문소전으로 이어지는 내맥에 위치함으로써 형성된 숲이다. 북궐도상에서 녹산에는 육우정(六隅亭), 남여고(藍與庫), 녹직처소(鹿直處所), 그리고 남북 방향의 어구와 담장이 표현됨으로써 최소한의 시설과 숲으로 구성된 원형경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세종대에 경복궁의 북쪽 궁장이 건설되었으며, 경복궁 창건 시기에 연조 뒤쪽부터 신무문 안쪽을 후원으로 인식했던 반면에 경복궁 중건 시기는 신무문 밖에 새로운 후원 영역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녹산만 내맥의 산줄기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신무문 밖 후원에 대규모 관사가 건립되고 경무대 부지에 총독관저와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형이 크게 변화되었다. 여기에 1967년 청와대와 녹산 사이의 청와대로가 신설되면서 녹산은 백악산록과 단절되었다. 셋째, 내청룡에 해당하는 경복궁 북동쪽의 풍수적 형세가 부족하여 소나무를 심어 지맥을 배양하였던 점과 임진왜란 이전 경복궁 배치도에 '소나무밭(松田)'이라고 표현된 사실에서 녹산의 원형이 된 숲의 주요 성상을 파악하였다. 발굴조사로 확인한 상수리나무, 벚나무, 느릅나무, 밤나무가 어우러진 소나무림을 원형 식생경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녹산에는 성토로 인하여 어구가 사라지는 등 지형이 바뀌고 아까시 등 외래수종과 관상용 향나무 등이 식재되었다. 현재는 소나무림의 비중이 줄고 상수리나무림, 낙엽활엽수혼효림, 일부 가죽나무림과 버드나무림으로 구성된 숲을 이루고 있다. 넷째, '녹산(鹿山)'이라는 명칭이 신령, 장수, 영생, 왕권을 상징하는 사슴으로부터 유래된 사실을 '경복궁 녹원에서 기르던 사슴 일곱 마리 중에 한 마리가 굶어죽었다'는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통해서 확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