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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elopment and Effects of the Project to Increase Lacquer Product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일제강점기 옻칠 증산(增産) 사업의 전개와 영향

  • 강연경 (서울공예박물관 수집연구과)
  • Received : 2022.03.31
  • Accepted : 2022.05.10
  • Published : 2022.09.30

Abstract

Lacquer, in addition to high-end crafts such as 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 was an important strategic material used in a wide range of fields such as industry, architecture, and munition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In particular, as the demand for lacquer used in munitions soared in the 1940s when the war started, a ticket system was introduced to restrict its distribution. Meanwhile, Japan experienced a chronic shortage of lacquer as a result of the rapidly increasing demand for it, and thus went on to import Chinese lacquer after the late 19th century. After the 1910s, the market share of Chinese lacquer reached 90%, and the local situation in China began to affect the supply and demand for lacquer in Japan. To counteract the issue, the Japanese government increased the production of lacquer in Joseon. As for the project to increase lacquer production in Joseon, objective indicators were prepared through a number of tests in the 1910s and 20s, which paved the way for the project to begin in earnest in the 1930s. Lacquer trees were planted and training classes on how to collect lacquer were held throughout the country. The Japanese government promoted the lacquer production industry as a promising side job for Koreans. The project, implemented in various parts of the country, reaped fruitful results, and it provided the basis for lacquer production in Korea that has continued to this day. At that time, the major regions in the southern part of the country where the project was concentrated were Wonju, Okcheon, and Hamyang, regions that are still known today as major production sites. The improved method of collecting lacquer taught to Koreans by the Japanese has now become the main method of collecting lacquer in Korea. This study attempts to identify the current status of the project to increase lacquer production through various records from the Japanese colonial era with a view to contributing to the study of modern lacquer craft history.

일제강점기 옻칠은 나전칠기와 같은 고급 공예품 외에 산업, 건축, 군수물자의 외부 도료 등 다방면으로 활용되는 중요한 전략물자였다. 특히 전시 체제에 돌입하는 1940년대 이후 군수물자에 사용되는 옻칠 수요가 급증하면서 유통을 제한하는 전표제까지 시행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옻칠 수요의 급증에 따라 고질적인 물량 부족을 겪고 있었고, 대안으로 19세기 후반 이후 중국산 옻칠을 수입하였다. 1910년대 이후에는 중국산 옻칠의 시장 점유율이 90%에 이르러 중국 현지 상황에 따라 일본 내 옻칠 수급이 영향을 받자 일제는 조선에서 옻칠 생산을 늘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에서의 옻칠 증산 사업은 1910~1920년대에 각종 시험을 통해 객관적 지표가 마련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1930년대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하였다. 전국 각지에 옻나무를 식재하고 개량 채취법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경제적 수익을 들어 옻칠 생산업을 장래 유망한 농가의 부업으로 홍보하였다. 각 도에서 수립한 옻칠 증산 사업은 효과를 거두었으며, 현재 국내 주요 옻칠 생산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남부에서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한 곳은 강원도 원주, 충청북도 옥천, 경상남도 함양으로 현재의 생산지와 일치하였다. 일제가 조선인 농가를 대상으로 교육한 개량 채취법은 현재 한국 옻칠 채취의 주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각종 기록을 통해 옻칠 증산 사업의 현황을 파악하여 근대 옻칠 공예사 연구의 공백을 메우고자 시도하였다.

Key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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