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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삼시의 전개와 의미망 (The Development and Sementic Network of Korean Ginseng Poems)

  • 하응백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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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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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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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한민족은 역사 기록 이전부터 인삼을 복용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한시(漢詩)는 신라, 고려, 조선 지식인들의 생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문학 양식으로 발전, 전개되었다. 본 논문은 '인삼을 소재로 하거나 주제로 한 한국인의 한시는 어떤 것이 있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 인삼(人蔘), 산삼(山蔘), 홍삼(紅蔘), 백삼(白蔘) 등을 키워드로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를 검색해 인삼에 관한 시를 찾아내어 그 의미망을 살펴보았다. 인삼관련 한시를 편의상 '인삼시(人蔘詩)'로 명명(命名)했다. 2021년 11월 현재, 검색을 통해 찾아진 '인삼시'는 삼국시대 2편, 고려시대 2편, 조선시대 23편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삼시의 시초는 6세기경 고구려에서 백성이 노래로 불렀던 「고려인삼찬(高麗人蔘讚)」이란 시다. 고려시대 인삼시는 안축(安軸)의 시로 대표된다. 안축은 인삼 조공의 부작용을 사실적인 관점에서 노래했다. 조선시대의 인삼시는 전기 서거정과 후기 정약용으로 대표된다. 서거정의 인삼시는 인삼의 신비적인 약리작용을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용재 성현의 「인삼(人蔘)」이라는 시도 인삼의 신비한 약효를 찬양하는 낭만적 인삼시다. 다산 정약용의 인삼시는 실학자답게 대단히 실용적이다. 다산은 가장 많은 다섯 편의 인삼시를 남겼다. 다산은 직접 인삼 농사를 시도했고 그 과정을 시로 남겼다. 그 시에서는 인삼 농사 실패와 성공의 스토리를 지켜볼 수 있다. 다산의 인삼 농사는 정조 이후 자연삼의 고갈과 재배삼의 보편화에 따른 전국적 현상이기도 했다. 19세기 초반부터는 개성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로 인삼 농사가 성행했고, 여타 지역에서도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특이한 것은 김진수의 시다. 청나라의 수도 북경 동인당에서 조선의 인삼이 '松嶽山蔘(송악산삼)'이란 상표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시로 표현했다. 매천 황현도 1900년 한시로 된 인삼시를 남겼다. 한국 한시의 전통에서 인삼시의 전개를 의미망으로 파악하여 도식화하면 이렇게 된다. 1) 위민(爲民) 정신의 인삼시 - 고려의 신흥사대부(안축) 2) 낭만적 인삼시 - 조선 초기의 관학파(서거정, 성현 등) 3) 실용적 인삼시 - 조선 후기의 실학파(정약용, 김진수, 황현 등) 한국 인삼시의 전개를 살피면서 그 의미망을 추출해 보았다.

정읍 무성서원과 선비문화 원류 최치원 (Choi Chi-won, the Originator of Jeongeup Museongseowon and Scholar Culture)

  • 안영훈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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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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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43-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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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전라북도 정읍은 한국 사상사에서 주목을 요하는 지역이다. 또한 정읍은 문학사에서 '최초'를 기록한 작품이 많은 지역이다. 백제 노래 <정읍사>가 그렇고 조선시대 사대부 가사 <상춘곡>이 그렇다. 그리고 이 지역 태수를 지낸 최치원(857~?)의 선정과 풍류의 전통이 전해오는 고장이기도 하다. 이 논문에서는 정읍의 무성서원의 성립과정과 선비문화에 있어서 최치원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최치원이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고을 사람들이 선정에 보답하는 의미로 태산사라는 생사당을 건립하였고 그것이 근원이 되어 후대에 무성서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최치원은 자신의 포부와 역량을 정읍에서 실현하였다. 특히 조선중기 무성서원의 건립과 사액 과정에 최치원의 역할은 결정적이었기에 최치원은 이 지역의 상징적 인물로 되살아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영정의 이안(移安) 작업을 통해서 최치원의 형상도 보다 유학자, 유학적 선비의 모습으로 좌정해나가는 것도 볼 수가 있다. 최치원이 남긴 시문을 통해서도 유학적 선비(지식인)로서 자각을 읽을 수 있다. 그의 시세계가 다양하지만 특히 유학자 지식인으로서 현실에서 오는 시름과 고뇌, 비판적인 내면의식 등을 표출한 작품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치원은 남다른 포부와 각고의 노력으로 당대의 우뚝한 문사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는 하였으나, 그 자신 주변국의 한 시인으로서의 지역적, 정신적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세계인식 면에서의 치열성은 자연히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강한 서정성을 가지게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치원의 문집에는 당대의 말기적 현상에서 초래된 다양한 형태의 병리적 현상을 강한 어조로 비판한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는 가난하고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가 하면, 왜곡된 생산관계 속에서 결국 희생되고 마는 가련한 백성들의 삶의 실상을 형상화함으로써 당대의 잘못된 사회의 단면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로 읽을 수 있다. 선비의 사전적 정의가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키는 유교용어'이고, 오늘날 의미로는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요, 시대사회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을 개인 내면에서나 사회질서 속에서 확립하는 원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할 때, 최치원의 문학에서 고뇌하는 모습은 곧 선비(지식인)의 고뇌이고 '선비(士)'로서의 책무를 자각하였기에 나오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최치원은 가장 이른 시기의 선비(지식인)의 원류라고 보아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20세기 한국 문화재 인식의 이데올로기적 영향과 변화 (Ideological Impacts and Change in the Recognition of Korean Cultural Heritage during the 20th Century)

  • 오춘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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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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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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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문화재 인식의 출발점이 되는 문화재 '선택'에는 당시 지배 권력의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반영된다는 가정을 세웠고, 이를 20세기 한국의 사례를 통해 증명하였다. 먼저 대한제국 후기(1901~1910)에는 조선시대부터 가져오던 과거 유적들에 대한 관점을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국가가 중요하게 보호하려 한 대상은 왕릉과 왕실기록물들이었다. 이 시기에 한국 유적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조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에 자극받은 계몽주의 지식인들에 의한 주체적 문화재 인식 시도가 있었으나 제도화되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1910~1945)에는 일본인들 주도로 문화재 조사와 제도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현재 한국 문화재 관리체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고적 조사, 지정, 보호, 선양 활동은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합리화함과 동시에 식민주의 사관을 반영하는 것들이었다. 국내 민족주의자들이 계몽적 차원에서 고적애호 운동을 벌였으나, 이는 일본인들이 기획한 고적조사 성과에 기초하였다는 한계가 있었다. 해방 후(1945~2000)에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문화재 복구와 복원 활동들이 있었고, 여기에도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었다. 그리고 1997년의 '문화유산 헌장' 제정은 문화재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수단이 되는 것을 넘어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가 되는 일이었다. 지난 20세기 동안 한국에서는 정치권력의 선택에 따라 문화재의 내용이 변하였다. 이 선택에는 당시 권력이 문화재에 대해 가지는 문화적인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었다. 이런 문화재 선택의 배경에는 개념어와 사회의 상호 보완적 관계, 즉 집합기억의 이데올로기적 특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지배집단은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집단에 각인시키려 하는데, 그 수단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인식시킬 수 있는 전통문화에 관련된 집합기억, 즉 문화재 선정과 활용에 관여함으로써 이를 실현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학문(學問) 개념의 근대적 변환 - '격치(格致)', '궁리(窮理)' 개념을 중심으로 - (How has 'Hakmun'(學問, learning) become converted into a modern concept? focused on 'gyeogchi'(格致) and 'gungni'(窮理))

  • 이행훈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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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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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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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근대 이전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지적 체계와 학문은 인간과 자연을 통일체적으로 사유하는 가운데 인간의 본성을 발현함으로써 사회적 실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특히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송대 신유학은 '이기(理氣)' 개념으로 인간과 사회, 우주와 자연을 일통의 유기적 구조로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철학체계 내에서 인간학과 자연학은 통합되어 있었다. 동서의 충돌과 교류는 동아시아의 지적 체계에 균열을 일으켰고, 전통적 학문 개념의 전이와 변용을 가져왔다. 개화와 진보의 욕망을 내면화하고, 동도(東道)와 서기(西器), 신학(新學)과 구학(舊學) 논쟁을 거치면서 유학은 비판과 쇄신, 부정과 폐기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 본성의 자각과 도덕 실천의 이상(理想)은 문명개화와 근대 국가 설립의 제한적 수단으로만 논의될 뿐 더 이상 학문의 본령으로서 위상을 갖지 못했다. 서구 근대의 광휘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를 규준했던 학문의 내용과 방법은 물론 목적까지 변화시켰다. 근대 계몽기 서구 문명 수용과정에서 한자(어)로 구성된 전통 학술 용어나 개념은 외래 학문을 번역, 소개하는데 여전히 유효한 기제였다. '격치(格致)'와 '궁리(窮理)'는 자주 인용되었는데, 인간과 우주 만물에 내재한 본성을 탐구하는 전통적 의미는 점차 퇴색되고, '격치학(格致學)', '궁리학(窮理學)' 등 개별 학문을 지칭하는 명사로 변환되었으며, 때때로 철학(philosophy), 과학(science) 등 상이한 학문 영역을 넘나들며 사용되었다. 학문 개념과 지적 체계의 이러한 변동은 외래 학문의 수용 양상을 보여주는 한편 동아시아 전통 학문이 지닌 특성을 드러낸다. 이제 가치와 사실의 분리, 인간학과 자연학의 분리, 학문의 분과화를 진행해 온 근대학문은 또 하나의 전통이 되었고, 계승과 극복의 양가적 대상이다.

독일의 실천철학교과 분석을 통한 가정과 교육에서의 논술교육 연구 (The study of Essay Writing Education in Home Economics Education Through Practical Philosophy Curriculum Analysis in Germany)

  • 김은정
    • 한국가정과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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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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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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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이 연구는 가정과교육에서 교육의 과정을 통해 학습자 스스로 지식의 흐름을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논술교육에 적합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지금까지의 교육이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들은 배우는 일방적인 형태였다면 앞으로의 교육은 함께 생각하고 탐구하는 상호적이고 쌍방향적인 과제가 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교육과 정의 구성뿐만이 아니라 그에 적합한 다양한 교육방법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 연구에서는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논술교육을 독일의 실천철학이라는 교과의 교육과정을 참고로 가정과교육에 적용해보았다. 이 교과의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실천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능력 신장을 도모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논술교육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교과는 개인적 관점, 사회적 관점, 이념사적 관점의 3가지 관점을 토대로 학습자들이 경험 할 수 있는 7가지 물음 영역을 통해 질문을 주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논술을 하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학습자들은 개인적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그 배경에 있는 이념사적 관점에 대한 통찰을 통해 개인의 삶의 변화는 물론이고 나아가 사회, 문화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지성인으로 양성되는 것이다. 독일의 이 교과는 실천철학에 입각하여 실천적 추론에 따른 교육과정을 모색하고 있는 가정과교육에서 논술교육을 도입 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즉 가정과교육은 삶의 다양한 상황을 폐쇄적인 사고 즉 단답형의 사고가 아니라 다각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며 해법을 도출해내는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교과이기 때문에 학습 자들의 지성계발을 그 목적으로 하는 논술교육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가정과교육을 통해 다양한 영역에서 지식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실천으로의 논술교육을 병행하여 실시함으로 학습자들의 지적 만족감을 충족시킴으로써 학생들의 역동적인 수업 참여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교육방법에만 머무르지 않고 교육방법을 다양화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가정과교육의 영역은 더욱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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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10년대 가정 교과서에 관한 연구 -현공렴 발행 "한문가정학", "신편가정학", "신정가정학"을 중심으로 (A Study of Home Economics Textbooks in 1900-1910's : an analysis of "Hanmun Gajeonghak", "Sinpyeon Gajeonghak" and "Sinjeong Gajeonghak" published by "Hyun Kong-Ryeom")

  • 전미경
    • 한국가정과교육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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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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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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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이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인가 교과서라 할 만한 현공렴 발행의 가정교과서의 외형적 내용적 측면과 함께 발행인 등 교과서가 발간되기까지의 배경을 분석하고 이들 가정교과서의 母本에 해당하는 일본의 가정교과서와 그 교과서의 저자에 대하여 살펴보는데 있다. 구체적인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학부는 '교과용도서일람'을 발간함으로써 수업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교과서와 사용할 수 없는 교과서를 구별하였다. 가정교과서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1910년 현재 학부인가 가정교과서는 현공렴 발행의 '한문가정학'과 '신편가정학'이지만, 1912년에 들어서면 이 교과서는 불인가교과서가 되며, 1914년에는 불인가 가정교과서 목록에 현공렴 발행의 '신정가정학'이 추가된다. 2. 정부인가 및 불인가 교과서를 발행한 현공렴은 조선전기부터 유명한 역관집안 출신이었다. 당시의 역관은 외국어에 능통하다는 이점으로 외국의 서적을 조선의 지식충에게 소개하는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 3. 현공렴이 발행한 '한문가정학', '신편가정학', '신정가정학'은 목차를 비교해 볼 때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이 교과서는 1902년 7월 즈음에 중국에서 오여윤에 의해 발행되었고, 이 교과서를 현공렴이 1907변 12월 조선에서 한문본 '한문가정학',과 국한문본 '신편가정학'으로 발행하였다. 오여윤이 발행한 가정교과서의 모본은 1900년 시모다 우타코(하변가자)에 의해 발행된 '신선가정학', 상하권이다. 4. 현공렴 발행의 가정교과서는 '총론' '가인의 감독' '일가의 풍범', '위생', '일가의 재정' 등 5단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러한 내용은 그 모본에 해당하는 시모다의 '신선가정학' 교과내용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는 중국에서 발행된 오여윤에 의해 이루어졌다. 5. 가정 교과서에 나타난 가정은 (1)국가의 기본단위로서의 가정, (2)교육의 장으로서의 가정, (3)휴식의 장으로서의 가정, (4)소비의 장으로서의 가정으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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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인삼상인의 근대기업화와 ESG 경영이념 (Modern Enterprise & ESG Management philosophy of Gaeseong Ginseng Merchant)

  • 옥순종
    • 인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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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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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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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개성은 18세기 들어 성행한 인삼 재배와 교역으로 막대한 자본이 축적되면서 근대적 자본주의가 발달할 조건을 갖추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인삼 상인들은 인삼에서 나온 자본을 단순히 지주자본에 묶어두지 않고 산업자본, 금융자본으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근대 기업가로 활동한다. 20세기 초반 설립된 개성전기주식회사, 대한천일은행, 개성양조주식회사, 송고실업장 등은 인삼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공동 투자하고 공동경영을 맡았다. 이들은 기업이윤만을 추구하지 않고 사회 지도층으로서 개성상업학교 건립, 고려시보 창간, 개성좌 운영 등 개성의 교육, 문화발전을 위해 후원자로 나서 지역발전을 견인한다. 자유주의 경제학에서는 주주이익 우선이 기업의 목적이었지만 21세기 들어와서는 이해관계자(stakeholder)에 대한 사회책임을 강조한다. 또 재무적 성과를 중시하는 던 경향에서 비재무적 요소가 더 중시되는 ESG( 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경영이 중요해지고 있다. ESG 경영은 환경을 생각하고 사회가치를 창출 공유하며 기업의 투명성을 중시한다. 과거에는 돈을 잘 버는 기업이 좋은 기업이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사회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좋은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초반 인삼상인들의 기업활동에서는 현대 경영의 필수요소인 기업가 정신과 ESG 경영이 실현되고 있었다. 이들이 시대를 앞서 현대적 경영이념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개성의 지역성에서 비롯된다. 개성인들은 조선왕조의 정치적 차별로 관직 진출의 길이 막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신분제하에서 양반, 지식인이 상업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우수한 인력이 대거 상업으로 진출하면서 개성의 상업은 더욱 활발했고 상인의 가치관도 선진적이었다. 대표적인 인삼상인 손봉상, 공성학은 상인이면서 유학자, 문인이었다. 인삼상인 2-3 세대들은 해외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개성으로 돌아와 삼업을 잇고 인삼에서 나온 자본을 기반으로 근대적 기업을 설립했다. 20세기 초반 인삼상인들의 상업활동을 분석하면 ESG 경영이념이 배여 있는 선구적 기업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인삼처럼 개성 인삼상인의 상업활동과 근대 기업화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우담 채득기의 경천대 경영에 나타난 문화경관 요소의 해석 (Interpretation of Cultural Landscape Elements at the Management of Udam Chae Deug-gi's Gyeongcheondae(擎天臺))

  • 이유진;김수진;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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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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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7-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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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선비인 우담 채득기가 경영한 경천대 일원의 산수경영에 나타난 문화경관 요소의 해석을 목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산수경영과 자연경물에 대한 명칭부여는 동시대 지식인들의 자연관 형성에 투영되었을 뿐 아니라 정원문화의 유행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담 채득기는 경북 상주의 낙동강변에서 은거하며 산수를 경영하고,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고자 하였는데, 그가 경영한 경천대 28경은 성리학적 절의와 충절의식에 입각하여 자연경물에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미의식을 현실화하는 등 산수경영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세부적인 경관의 명칭으로는 크게 '대명의리와 충절', '신선사상' 그리고 풍유와 소요자적 삶에 따른 '산수경영의지', 마지막으로 '학문탐구' 등을 상징하였다. 또한, 경천대 일원의 28경처 중 특별히 10가지의 경관을 선택하여 자신이 실제 소요하거나 유희했던 장소를 중심으로 소상팔경의 경관어휘인 시간과 계절 그리고 기상의 변화를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환경의 변화를 통한 소우주의 섭리를 이해하고자 한 당시의 산수경영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담 채득기는 자신이 은거한 경천대 일원의 산수경영을 명 청 교체기라는 조선의 상황을 비유하여, 자연의 경물에 이름을 붙이고, 또 암울한 사회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은, 그가 평소 강조한 의리와 절개라는 조선선비들이 가져야 할 덕목을 가치 있게 내세운 성리학적 자연관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공동체에서의 문화 다양성과 억압 -중국과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Cultural Diversity and Repression in Communities: A Study on China and Latin America)

  • 김덕삼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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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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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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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본 연구에서는 공동체에서의 문화 다양성에 대한 억압을 탐구했다. 먼저 그동안 수행한 연구와 최근의 변화를 토대로 중국 정부와 소수민족 사이에 존재하는 억압을 고찰했다. 보이는 억압에서는 한어 교육의 확대, 소수민족 언어의 제재를 비롯하여 소수민족의 정체성이 배제된 고등교육의 확대를 언급했다. 보이지 않는 억압에서는 도시화, 현대화를 앞세운 도시개발, 중앙정부의 교육을 받은 소수민족 출신 간부의 활용 등을 거론했다. 이어서 유럽에 맞선 라틴아메리카의 억압과 저항에 주목했다. 왜냐하면 라틴아메리카는 문화 다양성의 억압을 중국 소수민족 보다 먼저 경험하고, 이를 이론으로 성숙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의 고민과 경험은 중국 소수민족의 미래와 자신을 변호할 이론으로 가공되는 데 참고할 점이 많다. 물론 중국 소수민족 공동체의 문제에는 특수성이 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험과 자아 비판적 연구는 중국 소수민족 공동체의 특수성을 확장시켜 생각할 단초이다. 특히 유럽에 의해 문화적으로 잠식되어 스스로 창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과 점차 닮아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를 통해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지 그리고 바람직한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지 되돌아보고 싶었다. 중국 소수민족의 실태와 라틴아메리카의 억압과 저항을 통해 우리의 민낯을 되돌아보고, 바람직한 공동체가 추구할 현실적 방안을 찾고자 했다.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의 주장처럼 인식의 전환은 필요하다. 더하여 다양성과 자유에 대한 성찰, 상호 존중의 마음, 중국의 상황에 기초한 화이부동의 자세도 중요하다. 결국 공동체에서의 문화 다양성과 억압의 문제는 중국 소수민족 공동체와 라틴아메리카의 선주민뿐만 아니라 미국의 아시아인, 한국에서의 외국인 문제로 확장되어, 다양한 구성원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모두의 문제가 된다.

헤르만 F. 폰 퓌클러-무스카우(Hermann Fürst von Pückler-Muskau)의 풍경식 정원론의 형성과정과 의미에 관한 연구 (A Study on Hermann Fürst Pücker-Muskau's landscape gardening theory focused on its development process and meanings)

  • 조경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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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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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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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헤르만 F. 퓌클러-무스카우는 1834년 '풍경식 정원의 예시'라는 정원이론서를 출간하고, 무스카우와 브라니츠 정원을 조성한 독일 정원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무스카우 공국의 통치자였으며 작가이자 정원사로서 다면적 활동을 하였다. 그가 영향력을 끼친 독일의 풍경식 정원은 이성으로부터의 해방, 인간 본연의 자유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풍경식 정원에 관심을 가지게 것은 이상화된 자연을 표상하는 정원의 문화적 의미에서였다. 본 연구에서는 퓌클러-무스카우의 풍경식 정원관의 형성과정을 생애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고, 이를 통하여 도출된 퓌클러의 풍경식 정원론의 내용과 고유한 설계방식을 살펴본다. 이와 함께 함축하고 있는 혁신성과 현대적 관점에서의 실천적 함의를 고찰한다. 퓌클러가 풍경식 정원에 관심을 갖고 자신만의 정원론을 구축하게 된 것은 여러 나라의 경관과 정원 기행에서 비롯하였다. 계몽적 낭만주의로 대표되는 퓌클러가 살았던 시기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개인적 경험 간의 상호관계는 그의 정원론을 이해하는 기반이 된다. 첫째, 그의 풍경식 정원론은 실제와 이상이 혼재되어 있는데 이는 낭만주의와 문학적 정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정원 구현 방식에 있어서는 18세기 후반의 표현을 중시하는 영국 풍경식 정원의 영향을 받고 있다. 셋째, 퓌클러의 정원 설계에서는 그의 내면적 성향과 개인 경험이 드러난다. 넷째, 퓌클러가 지역 주민을 위한 정원을 조성하고자한 것은 진보적 사상을 지닌 귀족으로서 모순적 성격의 자기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퓌클러 풍경식 정원론의 가치는 인문학적 정원의 전통과 사회 조건의 개선을 추구하는 실용적 태도와 깊이 관련된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그의 풍경식 정원론은 이상적 공동체와 윤리적인 건강성을 지향하는 경관론이면서, 지역의 생태적, 경제적,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전략을 담고 있다. 또한 개인적 영역에서 공공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정원의 개념과 의미를 확장하고, 실용과 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종합예술을 지향한다. 이러한 통합적 관점은 오늘날 현대 조경이론과 실천에서 회복되어야 할 가치이며 지향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