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the actual view landscape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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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금시당(今是堂) 12경의 문화경관 해석 (Interpretation of Cultural Landscape at the Geumsidang(今是堂) sibigyung(12 Landscapes) in Miryang, Gyungnam)

  • 엄태건;김수진;박정임;강한민;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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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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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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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조선 중기 밀양의 부호세력이었던 여주이씨 일가의 금시당 이광진 유적을 중심으로 그림, 시문, 기문 등에 나타나고 있는 문화경관으로서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금시당 이광진은 사회적 혼란기였던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중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응천강변의 백곡에 터를 잡고 금시당을 건립하여 별서를 경영하고자 하였는데, 그가 경영한 금시당은 숙부이자 스승인 월연 이태로부터 자연관과 효행, 산수경영 등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금시당십이경도는 이경홍이 병환으로 위중한 아버지 이광진을 위로하고자 금시당 주변의 아름다운 12경관을 그린 것으로 구전되며, 꾀꼬리봉, 용두산, 무봉사, 마암산, 월연대, 사인당 마을, 영남루, 밀양읍성, 배나무 소, 밤나무 숲, 밀양강변, 삼문동들 등 당시 여주이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었던 땅과 관아를 경관 대상으로 하여 소상팔경이나 사시팔경의 관념적인 산수화가 아닌 실경을 담고 있는 산수화이다. 금시당십이경시는 금시당십이경도에 근거하여 작성된 제화시로서 이광진의 11대손 이용구가 지은 것으로 시간과 계절 그리고 기상의 변화를 노래하였다. 시 12수 모두 칠언절구로 글자 수가 모두 28자로 이루어졌으며, 단순히 그림의 외형적인 묘사가 아닌 작자의 개성에 의해 재산출되었기 때문에 그림에서 보이는 요소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금시당십이경도는 단순히 효행의 의미뿐만 아니라 밀양의 부호세력으로서 여주이씨 일가 소유의 장원을 나타내고 있으며, 금시당십이경시는 그림을 재산출하여 특정한 명승지로 변화시켜 여주이씨 일가 소유의 영역성을 보다 강화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와유문화의 전개와 전통조경공간의 조성 (A Study on the Development of the Culture of Mental Stroll about Nature and the Building of the Traditional Landscape Architecture Space in Choseon Dynasty)

  • 김수아;최기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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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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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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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조선시대 문인들의 조경공간과 관련한 기록을 대상으로 조선시대 다양한 전개양상을 보인 와유문화와 전통조경공간과의 문화사적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현실의 유교적인 삶과 자연의 도교적인 삶을 절충하며 살아야 했던 조선시대 문인들의 산수자연에 대한 태도는 다방면의 문화가 난숙해지면서 점차 철리적(哲理的)인 태도에서 심미적(審美的)인 태도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산수자연관의 변화와 명말청초 시은(市隱)하고자하는 성시산림(城市山林)의 문화가 전래되면서 산수자연을 일상공간에서 쉬이 즐기고자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그러한 바람은 현실 속에서 소요유(逍遙遊)한다는 의미를 갖는 와유문화(臥遊文化)에 주목하게 되고 다양한 와유문화의 양상들을 만들어냈다. 국문학분야에서는 일상공간에 앉아 산수의 감흥을 글로 즐길 수 있는 산수유람기(山水遊覽記)가 발달하고, 미술분야에서는 이상향을 그렸던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가 실제의 경관을 옮겨 핍진(逼眞)한 산수의 미를 즐길 수 있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로 발달하게 되었다. 조경분야에서는 개인의 이상(理想)을 표현할 수 있는 일상공간에 산수자연을 담아 감상의 측면에서 가장 생생함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였다. 또한, 전통조경공간은 방안에 누워서도 꿈꾸고 싶은 대상으로 실제 산수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남종화(南宗畵)의 예술심미 고찰 (The foundation and Characteristic on the Aesthetic of EuiJae Huh BaekRyun' Namjonghwa)

  • 김도영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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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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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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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호남 남종화의 상징적 거목이자 호남문화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의재 허백련(1891~1977)은 진도출신으로 소치 허련의 방계이며, 미산 허형의 제자이다. 전통 남종화 정신과 그 기법에 충실한 화격(畫格)을 자득(自得)·자화(自化)하였다. 의재(毅齋)는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발족시켜 후진양성을 도모하였고, 해방 후 무등산 아래 산장을 짓고 다도인으로서, 그리고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던 사회교육자로서의 또 다른 면모도 보였다. 그는 한시와 화론에 조예가 깊었고, 서예에 있어서 독특한 심미경지를 구현하는 등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의 전형적 서화가였다. 의재(毅齋)는 특히 산수화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화풍은 예황풍(倪黃風)의 갈필(渴筆)로써 기존 화법을 준수하면서도 문기(文氣)를 중요시 여겼으며, 탈진습기(脫盡習氣)하여 새로운 실험정신으로 끊임없이 도전했다. 의재(毅齋)의 작품세계는 화풍이나 추구하는 관점의 변화를 작품에 사용한 낙관(落款)을 기준으로, 고법(古法)과 사의간원(寫意簡遠)의 숙련기였던 '의재(毅齋)'시대, 실경(實景)과 남화(南畵)의 융합 화풍으로 절정기를 보였던 '의재산인(毅齋散人)'시대, 청담평안(淸談平安)한 신품경지(神品境地) 구현으로 독자적 화풍을 이룬 '의도인(毅道人)'시대 등 총 3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의재(毅齋)의 공헌은 동양회화의 지류인 한국회화문화의 정통 남종화에 대한 한 축을 이어왔다는 미술사적인 평가를 넘어 남도화의 보편적 정신과 지역적 특성을 바탕한 실경과 정서를 살린 창의적 계승을 통하여 현대를 잇는 조종(祖宗)이었음을 인식하고, 그의 예술정신과 전통에 대한 열정과 실험정신을 계승해야 할 것이다.

<동궐도(東闕圖)>의 러버쉬팅변환을 통한 창덕궁 돈화문 지역의 입체적 식생 경관 추정 (Estimation of the Three-dimensional Vegetation Landscape of the Donhwamun Gate Area in Changdeokgung Palace through the Rubber Sheeting Transformation of )

  • 이재용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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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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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8-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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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의 분석을 통해 창덕궁 돈화문 지역의 식생 경관을 입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으며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궐도>에 묘사된 수목은 17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수목 표현 입문서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을 토대로 유형의 구분이 가능하였다. 분류 결과에 따라 <동궐도>의 돈화문 지역에 표현된 수목은 10종 50주로 확인되었다. 둘째, <동궐도>의 입면 제작 축척을 이용하여 그림에 묘사된 수목의 실제 크기를 산정할 수 있었다. 산출된 수목의 수고는 최소 4.37m에서 최대 22.37m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동궐도> 제작 이전부터 창덕궁에 생육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노거수와의 비교를 통해 그림에 묘사된 수목들이 과도하지 않게 현실감 있는 크기로 제작된 것이 확인되었다. 셋째, <동궐도>의 러버쉬팅변환(Rubber Sheeting Transformation)을 통해 현재 수치지형도에 <동궐도>의 식재 평면도 제작이 가능하였다. 특히, 변환 지역의 세분화와 통제점 추가를 통해 제작된 평면도의 정밀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작성된 <동궐도>의 식재 평면도를 통해서 수목의 위치와 밀도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동궐도>에서 취득된 수목의 형상 정보와 식재 평면도를 이용하여 3차원 식생 모델의 제작이 가능하였다. 3차원 모델은 실제 사람의 눈높이에서 조망축, 스카이라인, 주변으로의 개방과 차폐 정도 등 현황과의 입체적 경관 비교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당시의 조망 특성을 검토하는데 유용하였다. 본 연구는 기존에 논의되어 온 <동궐도>의 사실적 표현을 입증하고 이에 근거하여 기록화에 묘사된 동궐의 식생 경관의 원형을 규명하기 위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8~19세기 정원 예술에서 현대적 시각성의 등장과 반영 - 픽처레스크 미학과 험프리 렙턴의 시각 매체를 중심으로 - (Modern Vision in the 18~19th Century Garden Arts - The Picturesque Aesthetics and Humphry Repton's Visual Representation -)

  • 이명준;배정한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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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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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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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픽처레스크 미학과 풍경화식 정원은 자연을 그림과 같이 정태적으로 감상하게 만드는 이른바 회화적 자연관의 전범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시각 문화를 선원근법에 의존하여 설명한 데에서 연유한다. 실상 당시는 새로운 시각 매체의 발명에 따라 종래의 원근법에 기반했던 시각성이 '유동적인 시각'과 '시점의 상대성'으로 요약되는 '움직이는 시각성'으로 변모해가는 바로 직전의 시기였다. 이 연구는 그러한 시각 문화의 변동에 주목하여 픽처레스크 미학과 험프리렙턴의 시각 매체에서 나타나는 '움직이는 시각성'의 징후를 읽어내고자 한다. 18세기 독일의 정원 이론가 히르시펠트는 풍경화식 정원은 구불구불한 선을 이용하여 움직임의 환영을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다른 예술 형식보다 우월하다고 분석했다. 18세기 말 야기된 픽처레스크 논쟁에서 아마추어 이론가들은 회화에서 복잡하고 다채로운 시각의 변주를 중요하게 여기고, 정원도 그러한 시각적 자극이 만들어지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렙턴의 "레드북"에 수록된 스케치에서는 움직이는 시각성이 반영된 다양한 재현 전략들이 발견된다. 렙턴은 속도의 차이를 고려하여 여러 유형의 길을 체계적으로 설계했고, 인간의 시각장을 표현하기 위해 회화적 프레임이 아닌 파노라믹 뷰를 활용하였으며, 현실에서의 움직임과 유사한 시각적 경험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스케치들을 전략적으로 배열하였다. 이와 같이 픽처레스크 미학과 렙턴의 시각 매체는 당대 시각 문화에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움직이는 시각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김택영(金澤榮)의 1909년 귀국(歸國)과 안중식(安中植) 필(筆) <벽수거사정도(碧樹居士亭圖)> (Kim Taek-yeong's Return to Korea in 1909 and Scholar Byeoksu in a Pavilion by An Jung-sik)

  • 강민경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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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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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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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심전 안중식(1861~1919)이 그리고 창강 김택영(1850~1927)이 제시(題詩)와 기문(記文)을 지었으며 석운 권동수(1842~?)가 글씨를 쓴 <벽수거사정도>는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에서 처음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안중식의 드문 실경산수이며, 20세기 초 서울 상류주택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그러나 또한 이 작품이 당시 지식인의 교유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벽수거사정도>를 그리게 한 벽수 윤덕영(1873~1940)은 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의 백부이자 훗날 국권피탈에 일조한 인물이었다. 순종이 윤덕영에게 "벽수거사정"이란 현판을 하사하자, 그 기념으로 윤덕영이 만든 작품이 바로 <벽수거사정도>이다. 한말(韓末) 한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김택영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1달 전 가족을 이끌고 청의 강소성(江蘇省) 남통(南通)으로 망명을 떠났었는데, 1909년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의 귀국에는 이재완(1855~1922)과 윤덕영 등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김택영은 역사서 편찬을 위한 자료수집의 목적을 품고 귀국하였지만, 그와는 별도로 평소 알던 사람들, 새롭게 알게 된 이들과 끊임없이 만나며 교유하였다. 그 범위는 서울을 넘어 지방에 살던 인물, 나아가 일본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었다. 이는 당시 시문을 매개로 교유하던 지식인들의 관계망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신분, 국적과는 별개로 작동하고 있었다. <벽수거사정도>는 그러한 19세기 말~20세기 초 지식인 사이에서 일어났던 지적 교류의 한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타자'들의 잔혹사 : 연상호 애니메이션 (Brutal history of 'The Others' : Yeon Sang-Ho's Animation)

  • 서수정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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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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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7-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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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보다 있는 그대로의 비루한 현실을 재현하는 연상호 애니메이션은 사회성 짙은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으로 한국애니메이션에서 독특한 지점에 위치한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야기'로 평가받는 연상호 애니메이션이 일관되게 재현해온 이야기는 우리 사회 중심부의 이면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세계 즉 '타자'의 이야기이다. 연상호 애니메이션은 주류 공간의 뒷골목에서 사회적 타자로 살아가는 그들의 잔혹한 현실을 직설적 화법으로 재현한다. 또한 판타지가 거세된 차가운 현실풍경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욕망과 감정을 생생하게 중계하면서 후기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현미경처럼 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연상호 애니메이션을 한마디로 '타자들의 잔혹사'로 규정하고 그의 애니메이션이 형상화하고 있는 현실풍경과 인물들의 욕망과 감정을 구체적으로 탐색하였다. 우선 연상호 애니메이션이 재현하는 현실은 부조리한 곳으로, 이곳의 부조리는 견고하고 적대적인 사회시스템과 하류계급에 속한 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물들을 통해 구축된다. 그래서 희생양이나 호모 사케르로 살아가는 연상호의 인물들은 '사악한 희생양' 또는 '타락한 괴물'로 구체화되고 그들의 현실풍경은 지옥으로 형상화된다. 후기자본주의 시대가 배태하고 있는 타자의 모습, 레비나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타자의 얼굴'을 통해 우리가 외면하거나 부정해온 우리의 모습을 소환하고 있는 연상호 애니메이션은 우리 사회의 환부를 적나라하게 전시하면서 이 시대의 민낯과 불편한 진실을 들추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현실을 고발하고 진실을 탐색하는 재현언어로서의 한국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선유(船遊)와 유산(遊山)으로 본 정수영(鄭遂榮)의 《한임강유람도권》 고찰 (A Study on Jeong Su-yeong's Handscroll of a Sightseeing Trip to the Hangang and Imjingang Rivers through the Lens of Boating and Mountain Outings)

  • 한상윤
    • 미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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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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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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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은 지우재(之又齋) 정수영(鄭遂榮)(1743~1831)의 《한임강유람도권(漢臨江遊覽圖卷)》이 한양 근교 지역의 여러 곳을 선유(船遊)와 유산(遊山) 여행하면서 화가의 주관적인 시각이 잘 담긴 사적인 여행 기록이라는 점을 밝힌 연구이다. 이 작품은 정수영이 1796년 무렵, 각 지역을 여행하고 총 16m 길이의 긴 화권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독립된 경관으로 나뉜 작품을 긴 두루마리의 형태로 계속 이어 붙인 점은 《한임강유람도권》이 특별한 여행이 아닌 여행에서 마주한 주관적 경험을 담았음을 보여준다. 《한임강유람도권》은 장소에 따라 선유와 유산의 두 가지 여행 형태로 구분된다. 선유 여행 지역은 넓게 한강과 임진강 수계에 포함되며, 유산 여행 장소는 북한산과 관악산 일대, 도봉산 지역이다. 정수영은 넓은 범위의 장소를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에 걸쳐서 여행했음이 확인된다. 특히 한강 수계의 장소에서 그려진 순서가 실제 위치와 다른 점은 이곳이 다른 시간대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한강변 및 남한강변은 두 차례에 걸쳐 여행한 후, 제14장면까지 그렸다. 이 중 1차 선유 여행은 첫 장면에서 제8장면까지, 2차 선유 여행은 제9장면부터 제14장면까지인 점이 확인된다. 화권의 전체 길이 상 절반을 차지하는 양으로 한양에서 가까운 근교 지역이 많이 남겨진 것을 알 수 있다. 한강 수계의 1차 선유 여행은 잘 알려진 곳보다 자신의 여행 과정에서 눈으로 직접 마주한 풍경을 표현하였다. 용문산이나 청심루, 신륵사와 같이 여주 팔경에 속하는 곳도 그렸으나 흔히 명소를 표현하는 방식이 아닌, 자기의 눈에 들어온 잘 그려지지 않았던 장소를 수평시점으로 묘사하였다. 2차 선유 여행에서는 친구의 별업을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한 순간을 담았다. 이에 더해 1차 여행에서 그린 청심루와 신륵사를 시점과 구도를 달리해 표현하였다. 정수영은 이미 그린 장소도 다른 시점과 각도에서 그리고자 했다. 한강 수계의 1, 2차 선유 여행은 길을 그대로 표현한 곳이 많아 현장감 있는 표현이 돋보이며, 배에서 경물을 수평적 바라보는 정수영의 시선이 잘 느껴진다. 임진강 수계에서는 영평천과 한탄강의 장소가 먼저 그려지고, 화권의 가장 마지막 부분은 임진강 물길에 있는 곳이 그려졌다. 이곳은 다양한 시점으로 표현되었는데, 여기서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점이다. 정수영은 영평천에 있었던 장소에서 이어지는 물길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해 부감시점으로 표현했지만, 백운담에서 수평시점으로 바위의 모습을 나타낸 것은 바위에 대한 관심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에 따라 자유롭게 시점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탄강변에 위치한 화적연은 주변의 모습과 바위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부감시점이 사용되었다. 임진강변에서는 우화정 주변의 모습이 부감시점과 파노라마 형식으로 잘 드러나며, 이보다 상류에 위치한 토산의 삼성대와 낙화암은 위로 올려다보는 시점[앙시(仰視)]으로 표현되었다. 유산 여행의 장소에서는 주로 정자와 암자가 그려졌다. 먼저 북한산의 재간정은 한강 수계의 선유 여행 경로와 이어지지 않으며, 다른 유산 여행과도 화권에서 분리되어 있기에 이전까지 정확한 장소가 밝혀지기 어려웠다. 필자는 한양 근교 중 재간정이라는 이름을 찾아 북한산 우이동구곡 중 한 곳과 손가장의 재간정으로 추정해보았다. 몇몇 기록들의 재간정에 대한 묘사가 비슷한 것은 두 곳 모두 북한산의 계곡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관악산 일대는 취향정과 일간정 두 정자와 관악산 줄기인 검지산이 그려졌다. 일간정은 관악산에서 잘 알려진 신위의 정자였으나, 정수영은 신위와 연관시키지 않고 객관적인 지리정보만 표기하였다. 취향정과 검지산에서는 담장이 묘사되어 있다. 정수영은 담장을 그리면서 <취향정>에서는 담장 안을 주제로, <검지산>은 담장 밖을 중심으로 다르게 그렸다. 도봉산에서는 망월암과 옥천암 두 암자를 담았다. 이 부분도 어느 곳을 그린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임천상의 『궁오집』을 통해 도봉산을 그린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화가들이 그린 도봉산은 도봉서원과 만장봉을 부각시켜 드러낸 것에 반해 정수영은 암자 두 곳을 표현했다. <망월암>에는 영산전과 천봉탑비가 그려지고, <옥천암>에서는 대웅전이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정수영은 화면에 암자 건물과 함께 도봉산의 봉우리 모습을 그렸으나 봉우리의 명칭은 적지 않았다. 이를 통해 도봉산의 봉우리를 배경으로만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 간취된다. 《한임강유람도권》은 정수영의 개인적인 시각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그가 지나온 여행의 흔적들을 담고 있는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