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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Nagaoka 육상 대수층에서 시간차 $CO_2$ 물리검층으로부터 $CO_2$ 포화도의 추정 (Estimation of $CO_2$ saturation from time-lapse $CO_2$ well logging in an onshore aquifer, Nagaoka, Japan)

  • 설 자구
    • 지구물리와물리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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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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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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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일본 최초의 파일럿 규모의 $CO_2$ 지중저장 프로젝트가 Niikgata 현 Nagaoka 시 근처 육상 염수 대수층에서 착수되었고 시간차 물리검층이, 주입된 $CO_2$의 도착과 저류층내의 $CO_2$ 포화도를 평가하기 위해 관측정들에서 실시되었다. $CO_2$는 20-40톤/일 의 속도로 1,110m 심도에 위치한 얇은 투수층에 주입되었다. 2003년 7월에서 2005년 1월까지 주입된 $CO_2$의 총량은 10,400 톤이다. 파일럿 규모의 시험은 3 개의 관측정들에서 시간차 물리검층을 수행함으로써 다공성 사암 저류층 내에서의 $CO_2$ 유동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관측정 OB-2 에서 fiberglass 케이싱을 넣기 전과 넣은 후의 중성자 검층의 비교는 대상층 내에서 좋은 일치를 보였고 저류층 내에서 셰일 부피의 농도가 높을수록 두 물리검층 결과들 사이의 차이도 커졌다. 확인가능한 $CO_2$ 는 전자유도검층, 음파검층, 중성자검층에 의해 발견되었다. 음파검층으로부터 P 파 속도의 감소가 Nagaoka 현장에서 채취한 코아 시료에 대한 실험실 측정과 매우 잘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세 개의 관측정 중 두 개에서 $CO_2$ 가 확인된 후, 음파 검층의 P파 속도와 추정된 $CO_2$ 포화도의 변화 추이를 성공적으로 맞출 수 있었다. 음파 속도의 시간변화 부합 결과는 sweep 효율성이 약 40%였음을 제시한다. 전기비저항에 대한 $CO_2$ 의 작은 영향으로 인하여 저류층이 부분적으로 포화되었을 때 전자유도검층에서는 작은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CO_2$ 부존층에서 $CO_2$의 포화도는 $CO_2$ 주입의 일시 중지 시에도 반응함을 발견하였다.

일본 Nagaoka의 육상 대수층에 주입된 $CO_2$의 관찰을 위한 시간차 시추공간 탄성파 토모그래피 (Time-lapse crosswell seismic tomography for monitoring injected $CO_2$ in an onshore aquifer, Nagaoka, Japan)

  • ;신강 대;동 굉행;설 자구
    • 지구물리와물리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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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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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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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일본의 첫 번째 파일럿 규모의 $CO_2$격리실험이 Nagaoka 에서 약 1,100m 깊이의 육상 대수층에 10,400 톤의 $CO_2$를 주입하면서 행해졌다. 주입된 $CO_2$ 의 모니터링을 위해서 그 지역에서 행해진 다양한 측정들 중, P 파 속도의 변화를 이용하여 2 개의 관측정 사이에서 대수층 내의 $CO_2$ 분포를 알기 위해 시간차 시추공간 탄성파 토모그래피가 실시되었다. 이 논문은 탄성파 토모그래피에 대한 예비적인 결과들이다. 시추공간 탄성파 토모그래피 측정이 3 회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한 번은 기준 조사로서 주입 전에, 나머지 두 번은 모니터링 조사를 위해 주입 중에 이루어졌다. 모니터링 조사로부터의 속도 분포도를 기준 조사 속도 분포도와 비교하여 속도 차 분포도가 만들어졌다. 속도 차 분포도는 주입된 $CO_2$가 퍼져있다고 예상되는 주입정 주변 대수층 부분에서 소도 감소 지역을 보여준다. 비록 탄성파 토모그래피가 $CO_2$주입에 따른 속도 감소 지역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속도 차 분포도에서 다소 이상한 속도 분포 지역이 관측되었다. 그러한 현상의 발생을 조사하기 위해서 조사 지역을 모사하는 수치모형 실험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속도 차 분포도에서 발생한 이상한 속도 분포는 인위적인 오차이거나 이 지역에서 행해진 시추공간 탐사의 송수신기 배열에 의한 고스트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토모그래피에 의해서 얻어진 최대 속도 감소 비율은 음파검층에 의해 관측된 것보다 아주 작았다. 비록 탄성파 토모그래피에 대한 수치모형 실험에 의해서도 불일치가 확인되었으나 음파검층에 의해 획득한 속도 값에 비교될 수 있는 좀 더 정확한 속도 값을 얻기 위해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조선시대 궁궐 후원 농경지(農耕地) 조영의 특성 (Studies on the Construction Characteristics of Rear Garden Farmland at Joseon Palace)

  • 정우진;심우경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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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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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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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조선시대 궁궐 내에 조성된 농경지 조영의 양상과 공간적 특성을 분석하여 유교적 농본 중심의 시대상이 궁궐 안에서 특수한 권농의 공간으로 반영되었음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대상지는 경복궁 후원, 창경궁 후원과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이 되며, 문헌조사를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궁궐 후원 농경지는 "농사직설"의 편찬, 친경례와 기곡제의 설행으로 대변되는 조선 통치집단의 권농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임금이 자신의 거주지인 궁궐 안에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할 포지를 조성한 것이며, 국초부터 일제 강점기 직전까지 각 궁궐에서 운영되었다. 조선시대 후원 농경지 4개소에 대한 분석 결과로는 첫째, 세종 때 조성된 경복궁 후원 농경지는 현 향원지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선진농법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포지로 조성되었다. 성종이 조영한 창경궁 후원 농경지는 조선 최초의 친경례 직후에 조성되어 적전친경의 맥락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인조는 경덕궁이 임시로 거처했던 시어소임에도 불구하고, 체류의 기간이 장기화되자 정전의 뜰을 파고 농포로 조성하였는데, 조선시대 정치사에서 후원 농경지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고종이 조성한 경농재 일곽의 농포는 선대의 권농행보를 계승하면서 창경궁 후원 농경지의 공간 구성을 그대로 가져온 특성을 보이고 있다. 둘째, 관수와 수체계, 관경대의 명칭, 입지에 있어서 일정한 공통점이 도출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농본공간의 보편적 형식으로 판단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후원 농경지 외에 궁궐 내에서 내관들에 의해 관리되던 채전과 국가의 큰 제사에 쓰일 과일을 위한 궁궐 내 과수원의 운영 양상을 고찰하여 조선시대 궁궐 조경이 엄숙함, 질서정연함이나 장식성에만 치중되지 않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생산적 조경공간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또한 궁궐에서 왕실의 주도로 생산적 조경의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고, 임금이 솔선수범하여 선진농법을 시험하였다는 점은 우리의 고유한 궁궐조경의 일면이 되며, 조선의 독자적인 궁궐문화로서 그리고 여타의 유교 국가에는 없었던 유일한 애민농본의 조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종이멀칭 이앙재배에서 잡초발생과 벼의 생육 및 수량 (Weed Occurrence and Yield of Rice in Transplanting Rice Culture with Paper Mulching)

  • 이변우;최일선;이학래
    • 한국잡초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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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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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68-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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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
  • 국내에서 개발된 멀칭지에 의한 벼 멀칭이앙재배시 멀칭의 분해, 잡초 발생, 벼의 생육 및 수량을 1996년과 1997년 2년에 걸쳐 검토하였으며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멀칭 후 15일에 질소 사용량의 25%을 분얼비로 시용한 1996년 실험의 경우 멀칭지가 50% 분해되는데 멀칭지의 종류 및 시비량에 다라 28-50일이 소요되었는데, 습윤지력 증강제를 처리한 멀칭지가 처리하지 않은 멀칭지에 비하여 분해가 늦었으며 또한 질소 18kg/10a시용구 보다 12kg/10a시용구에서 분해가 늦었다. 그러나 기비중점 시비를 하도 분얼비를 생략한 1997년 실험의 경우 50% 분해에 42일 이상 소요되었다. 2. 1996년 실험의 경우 벼 생육 초기에는 종이 멀칭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잡초가 방제되었으나 후기에는 여뀌바늘 등이 발생하여 잡초 방제효율이 떨어졌다. 1997년 실험의 경우 무멀칭 잡초 방제구를 포함하여 모든 처리구에서 잡초발생이 미미하여 멀칭지의 잡초 발생 억제 효과를 판단할 수 없었으나 멀칭지의 분해 정도로 판단해 볼 때 잡초방제 효과가 충분히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3. 1996년 실험의 경우 무멀칭 잡초 무방제구의 수량은 약 185kg/10a인데 비하여 습윤지력 증강제를 처리한 멀칭지 멀칭구의 경우 질소18kg/10a였다. 1997년 실험의 경우 무멀칭 제초제 처리구와 종이 멀칭구 간의 수량 차이는 없었다. 4. 이상의 결과를 종합하여 볼 때 종이 멀칭 재배는 멀칭 후에 분얼비를 시용하는 경우 멀칭지의 분해를 촉진하여 후기의 잡초 발생이 다소 우려되나 기비 중점시비를 하고 분얼비를 생략하면 잡초를 효율적으로 방제할 수 있으며 수량 또한 제초제에 의하여 잡초방제를 하는 경우와 차이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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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회화식 고지도를 통해 본 평양성의 인문경관 특성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Humanistic Landscape in Pyongyang Castle through Pictorial Maps in the Late Joseon Dynasty)

  • 김미정;소현수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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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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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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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조선후기 회화식 고지도가 제작 당시 선조들이 인지했던 장소명이 표기된 개념도라는 점에 착안하였다. 이에 평양성(平壤城)의 회화식 고지도 다섯 점을 대상으로 하여 역사적 고도(古都), 상업 도시, 풍류 도시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평양성의 인문경관 특성을 다음과 같이 도출하였다. 첫째, 평양성의 역사적 정통성은 제례·종교시설이 대표하였는데, 국가의 시조와 관련된 '단군전(檀君殿)'과 '기자궁(箕子宮)', 고구려 유적인 '문무정(文武井)', 그리고 '사직단(社㮨壇)', '평양강단(平壤江壇)' 등 국가 제사를 지내던 곳, 교육과 제례 기능을 담당한 향교와 서원, 불교 사찰과 도교 시설들, '용신당(龍神堂)', '산신당(山神堂)', '제신단(諸神壇)'과 같은 민간신앙 공간이 포함되었다. 소중화(小中華) 의식과 기자 존숭 풍조로 평양성의 상징이 된 기자 관련 시설이 평양성 전체 영역에 분포된 반면, 북성에는 고구려 동명왕 관련 시설, 대동강 변에는 기복신앙 공간이 분포한다. 둘째, 평안도 경제 중심도시 평양의 상업 경관은 물류·교통시설로 드러났는데, 운수 기능을 담당한 대동강에 '양명포(揚命浦)', '청룡포(靑龍浦)', '왜성진(倭城津)' 등 포구와 주요 교통로를 연결하는 '영제교(永濟橋)', '강동교(江東橋)' 등 많은 다리가 있었다. 외성 영역에 물류 운반과 관리에 편리하도록 '정전도로'가 펼쳐지고, 주요 성문의 도로변과 감영 근처에 평양부 관할 읍의 이름이 붙여진 많은 창고들이 분포하였다. 또한 위계를 가진 도로로 질서정연하게 구획된 시가지와 평양성 주요 진입 도로변에 조성된 버드나무의 '북장림(北長林)'과 느릅나무가 포함된 혼합림으로 구성된 '십리장림(十里長林)'이 만든 선형 경관이 특징적이었다. 셋째, 풍류 도시는 위락시설의 분포로 가시화되었다. 내성에 인접한 대동강변은 성 안쪽으로 연결되는 운하와 축대를 쌓은 접안시설, 화물선이 정박한 포구 등 인공경관 특성을 보이지만, 자연스러운 하안을 가진 북성 주변은 '부벽루(浮碧樓)', '을밀대(乙密臺)', '최승대(最勝臺)', '함벽정(涵碧亭)' 등 다수의 누·정·대와 '청류벽(淸流壁)', '장방호(長房壺)'라는 바위글씨가 있었다. 대동강이 보이지 않는 내성에는 '오순정(五詢亭)'과 '벽월지(壁月池)', '사창(司倉)' 인근 반월지, 방지 내 섬에 조성된 '애련당(愛蓮堂)'이 수경관을 연출하고, 중성 서쪽 성곽에는 실용적 목적으로 지당들이 배치되었으며, 기자와 관련된 버드나무 식생 경관이 반복되었다. 또한 칠성문(七星門) 부근에 입지한 기생들의 장지 '선연동(嬋娟洞)'은 문인들의 시제로 사용되며 평양성의 풍류 이미지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헤오르테'(heortē)와 '스콜레'(scholē)로서 놀이 (Play as heortē and scholē)

  • 이상봉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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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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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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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노동과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구성하는 놀이의 의미를 고대 희랍철학자들에게서 찾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탐색은 가장 시원적인 놀이를 신성한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키는 플라톤과 자유로운 활동을 개인 삶의 완성으로 파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놀이 개념에 대한 고찰로 구성된다. 지금까지 플라톤의 철학에서 '헤오르테'($heort{\bar{e}}$)는 근원적 신성과 소통하는 성스러운 활동으로서 '파이디아'(paidia)의 모방 활동과 구별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스콜레'($schol{\bar{e}}$)는 '노동'(ascholia)과 대립되는 단순한 여가 활동으로 인식되어 왔다. 본 연구는 먼저 플라톤의 '헤오르테'가 가장 시원적인 놀이로서 인간이 세계와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해명하며 또 공동체의 풍요로운 삶을 이루어가는 성스러운 놀이 방식이었다는 것을, 그 다음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콜레'가 노동의 부담을 벗어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학문 활동과 관조적 생활을 통해 인간의 행복을 구성하는 놀이 방식이라 것을 해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해석을 통하여 본 연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놀이가 삶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플라톤의 놀이 개념은 유아적인 것에서 신성한 '헤오르테'로 변화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놀이 개념은 오락에서 학문 활동과 관조적 생활로 변화된다. 플라톤은 놀이를 신의 축복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인간의 삶의 중심에 두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놀이를 순수한 즐거움을 주는 자유로운 활동이요 개인 삶의 완성으로 파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놀이는 단순히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놀이는 자유로운 최고의 활동으로 그것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요 하나의 완성이다. 놀이는 인간 삶의 본질이어서 인간은 놀이를 통해서만 행복해진다. 놀이는 순수한 즐거움으로 하는 활동이요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가장 지적이면서 능동적인 활동이다. 플라톤의 '헤오르테'에서 아폴로적-디오니소스적인 놀이의 양의성과 공동체의 혼연일체라는 놀이의 구조가 나타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콜레'에서는 본질적 삶의 풍요로서 기쁨이라는 놀이의 구조가 나타난다. 놀이에 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지만 놀이를 삶의 중심으로 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들이 동일하게 주장하는 것은 삶을 놀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놀이와 노동이 조화를 이룬 세계, 이것이 그들의 이상향이다.

강릉(江陵) 오죽헌(烏竹軒)의 조선시대 사회사(社會史)적 의미 (The social historic meaning of Gangneung-Ojukhen in Joseon Dynasty)

  • 이상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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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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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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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보물 제165호인 오죽헌은 강원도 내에 남아있는 조선전기 가장 이른 시기 사대부 주택의 별당이다. 집의 형태적 측면은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은 집으로 유명하다. 강릉최씨 가문에 의해 처음 지어졌으나 자녀균분상속의 관행 속에서 사위에게 상속되었고, 최종적으로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가 외손인 권처균에게 배묘조로 상속해 주었다. 권처균의 호가 '오죽헌'이었으므로 택호 또한 오죽헌이 된 것이다. 오죽헌은 조선시대의 상속과 봉사관행의 변화 양상을 조망해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오죽헌이 용인이씨, 신사임당, 그리고 이이, 권처균 등 직계가 아닌 외손들과 특별한 인연이 맺어지게 되는 것은 서류부가와 친정살이라고 하는 유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용인이씨, 신사임당은 친정인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랐다. 용인이씨는 결혼 직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친정인 오죽헌에서 살았다. 신사임당도 결혼 후 근친을 위해 친정을 자주 오가며 생활했고, 이이를 오죽헌에서 낳았다. 이이는 유년을 외조모 용인이씨 슬하에서 보냈고, 강릉을 떠나서도 어머니를 따라 외가를 자주 오갔으므로 외조모와의 정이 매우 각별하여 외조모의 봉사손이 된다. 권처균이 용인이씨 배묘손이 되는 것도 아버지 권화가 데릴사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오죽헌은 서류부가와 친정살이라고 하는 조선전기 혼인과 생활풍속을 엿볼 수 있는 집이다. 이이가 외가로 지칭했던 강릉 북평촌 최씨마을에는 권처균의 직계손인 안동권씨 추밀공파가 세거하는 동성마을이 형성되었다. 17세기부터는 부계친족집단을 중시하는 사회사적 변화가 일어난다. 오죽헌은 이러한 시점에 권처균에게 상속되었고, 최씨마을이었던 죽헌동에 안동권씨 집거지인 동성마을이 만들어지는 시발이 되었다. 오죽헌은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변화되는 상속 친족 혼인제도 등과 같은 사회의 변화상을 한눈에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감로탱에 묘사된 전통연희와 유랑예인집단 (Traditional Performing Arts and Nomadic Entertaining Troupes Depicted in "Nectar of Immortality")

  • 전경욱
    • 공연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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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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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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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감로탱은 수륙재를 거행할 때 거는 탱화로서 수륙화라고도 부른다. 중국 명나라 때의 보녕사 수륙화는 모두 139개의 족자에 장면들을 나누어서 그려 놓았다. 그러나 한국의 감로탱은 하나의 커다란 탱화에 모든 장면을 함께 그려 놓았다. 감로탱의 구성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바로 하단에 그려진 육도 윤회상이다. 육도윤회의 업을 반복해야 하는 미혹한 세계의 실상을 묘사하고 있는 하단은 아귀나 지옥고(地獄苦)뿐만 아니라 천상 인간 아수라 축생의 고통상을 인간 세상의 다양한 현실생활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하단에 묘사된 인물들은 죽은 영혼들의 생전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이들이 바로 수륙재를 통해 천도되어야 할 대상이다. 감로탱의 하단부는 사회생활, 현실생활을 묘사한 내용으로서 그 주제가 인생의 고통, 재난, 인생무상을 표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하고 해탈하도록 의도하고 있지만, 오히려 당시의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감로탱의 하단부에 묘사된 다양한 유랑예인집단과 그들의 연희도 현실생활의 일부를 사실적으로 반영한 결과이다. 감로탱의 하단부에는 외줄타기, 쌍줄타기, 솟대타기, 쌍줄백이(솟대타기의 일종), 땅재주, 방울 쳐올리기, 탈춤, 접시돌리기, 인형극, 사당춤, 검무 등 전통연희의 공연장면이 많이 그려져 있다. 이 중에는 솟대타기, 쌍줄백이, 쌍줄타기, 방울 쳐올리기, 검무(풍각쟁이패 연희)처럼 이제는 사라져버린 연희종목들도 있다. 감로탱에 묘사된 연희집단은 사당패, 남사당패, 솟대쟁이패, 초라니패, 풍각쟁이패, 굿중패, 서커스단 등 모두 유랑예인집단이다. 이 유랑광대들은 각지를 떠돌다가 죽은 후에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된다. 감로탱에 묘사된 각종 연희 장면의 연희자들은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을 재현한 내용 가운데 일부로서 수륙재의 천도대상이다. 이 중 솟대쟁이패 사당패 초라니패 풍각쟁이패 굿중패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로탱을 통해서 현재는 전승되지 않는 여러 연희종목들의 내용, 그리고 이미 사라져버린 유랑예인집단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왕실(朝鮮王室) 태실석함(胎室石函)의 현황(現況)과 양식변천(樣式變遷) (Taesil Seokham Styles of the Joseon Royal Family)

  • 심현용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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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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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8-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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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고는 조선시대 왕실의 태실에 유존하는 태실 석함(이하 태함)의 현황을 살펴보고, 제작연대를 바탕으로 형식을 분류하여 고고학적인 태함의 양식을 설정하고 그 편년을 시도한 것이다. 태함은 태실을 처음 조성할 때 매납하는 유물이지만 명문이 각자되지 않으므로 태함 자체만으로 연구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 하지만 태실 조성 시 함께 제작하는 태지석과 아기비의 명문을 찾아 살펴보고 문헌기록을 대조하여 그 제작시기를 밝힘으로 인해 태함의 제작시기도 밝혀 낼 수 있다. 먼저, 편년의 결정적 요소는 태함을 구성하는 함개와 함신 모두임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태함의 변화와 양식은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었다. 조선 왕실의 태함의 변화는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아 상자형으로 만들었으나, 15세기 중 후엽에 과도기를 거쳐 15세기 후엽에 반원형 함개 원통형 함신이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16세기 후엽에는 앞 시기의 양식에서 발전하여 태함에 돌기가 부착되는 등 장식성이 가미되나, 이는 예술성보다는 기능성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반원형 함개 원통형 함신이 다시 17세기 초에 재현되며, 17세기 중엽 후부터는 함개에만 돌기가 있거나 무보주의 원추형 함개 또는 절구형의 함신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 과도기의 현상이 발생한다. 그러나 다시 보주가 부착된 원추형 함개라는 새로운 양식이 18세기 전엽~18세기 중엽 초에 출현하며, 이것이 다음 시기인 18세기 중엽까지 지속되나, 함신의 감실이 일단벽호형의 방형으로 바뀐다. 계속해서 18세기 중엽에는 함개는 앞 시기의 양식을 유지하나 함신은 감실이 다시 한 면이 ㄷ모양의 열쇠구멍형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와서 다시 가장 전형적인 양식인 반원형 함개 원통형 함신의 태함이 재출현하여 태함의 양식이 이 형태가 가장 정형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중엽에는 함개가 반원형에서 상부가 편평한 장방형의 새로운 양식이 출현하여 쇠퇴기를 맞는다. 그리고 이를 다시 양식상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조선 초에는 태함이 아직 정형화되지 않아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았으나(I단계; 1401~15C 중엽), 15세기 후엽부터는 자체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정형화되고(II단계; 1477~1641), 시기가 지나면서 다시 일부 돌기나 보주가 부착되는 등 장식성이 가미되나(III단계; 1660~1754), 결국 18세기 말에는 정형화된 양식이 재출현하다가 조선 말기인 19세기 중엽에는 간략화되어 쇠퇴과정을 겪게 되는 것(IV단계; 1790~1874)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태함의 양식과 편년 결과는 문헌기록이 부족한 상태에서 앞으로 태실지에서 태함만 확인되더라도 그 조성시기와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유가(儒家) 자연법사상의 헌법상 전승 (A Study on the Confucian Natural Legal Ideology Embodied in the Korean Constitution)

  • 문효남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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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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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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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유가(儒家)의 자연법사상(自然法思想)이 대한민국의 최고 기본법이자 최고 규범인 헌법(憲法)에 어떠한 내용과 의미로 전승되어 오고있으며, 이러한 유가사상이 오늘날에 있어 어떠한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기 위한 글이다. 유가사상 특히 민본(民本), 예치(禮治), 덕치(德治) 및 친친주의(親親主義)로 대표되는 선진유가의 자연법사상이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하였으나, 여전히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하나의 윤리규범 내지 미풍양속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현행 법령에 있어서도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어, 실제 규범으로서의 법집행력도 일정 부분 가지고 있다. 즉 대한민국의 최고 기본법인 헌법을 위시하여 민법을 비롯한 민사법령 그리고 형법을 비롯한 형사법령에 유가 법사상을 반영한 입법 규정들이 산재해 있으며, 법원 및 헌법재판소의 판례나 결정 등을 통해 유가사상이 재해석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유가의 법사상은 헌법 명문규정으로는 헌법 전문(前文)과 본문(本文) 제9조 등에 규정된 '전통(傳統)', '전통문화(傳統文化)'의 내포개념으로 전승되어 오는 한편,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제청사건 및 위헌소원사건 등에 대한 결정을 통하여 재해석되어 전승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재해석을 통한 전승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유가의 사상 내지 윤리와 관련된 결정이며, 다른 하나는 전통문화와 관련된 결정이다. 지난 20여 년 간 헌법재판소의 판례 및 결정문을 면밀히 분석하여 검토하는 작업을 통해, 헌법재판소는 우리 사회가 유교적 전통을 받아들이고 체화(體化)시켜 일정 부분 우리의 고유한 의식으로 남아 있음을 인정하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가정의 영역에서는 법률보다 전통적 윤리의 역할을 더 강조하는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유가사상 내지 도덕관념에 터 잡은 전통문화가 어떠한 기준 하에서 우리의 고유한 전통의식 내지 도덕규범으로서 헌법적 정당성(正當性)을 갖는지 여부에 대한 중요한 기준 내지 척도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상 전통문화 내지 윤리로서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전통문화라는 역사적 사실과 이를 계승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 시대의 사회 경제적 기반에 맞아야 한다는 '시대적합성(時代適合性)'과 오늘날에 있어서도 보편타당한 전통윤리 내지는 도덕관념이어야 한다는 '현재적 보편타당성(現在的 普遍妥當性)'을 양대 기준으로 천명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시대적합성'과 '현재적 보편타당성'은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되어 포착된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척도로서 '헌법이념(憲法理念)과 헌법의 가치질서(價値秩序)' 및 '인류(人類)의 보편가치(普遍價値), 정의(正義)와 인도정신(人道精神)'을 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헌법상 정당성을 가지는 전통문화의 주요한 축으로서의 유가사상 내지 유가 자연법사상의 '시대적합성'과 '현재적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고 '헌법이념과 헌법의 가치질서' 및 '인류의 보편가치, 정의와 인도정신'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유가 사상을 '오늘날의 의미로 재해석하여 포착'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와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이는 현재 세계적으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새로운 보편윤리(the Universal Ethics)의 모색" 이라는 지성사적 작업과도 연결하여 논의를 진행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다. 또한 현재 정치권 등에서 활발히 거론되고 있는 헌법 개정 문제와 관련하여 유가 자연법사상 중 보편적 윤리 내지 가치를 발굴하여 이를 헌법개정안에 반영시켜 나갈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도 진지하고도 폭넓은 관심과 연구가 시급히 전개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