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조선전기 군사훈련인 습진(習陣)이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습진(習陣)'은 진법훈련 또는 진법교련의 뜻으로 정의할 수 있다. 둘째, 오위체제와 "오위진법(五衛陣法)"의 간행은 군제조직의 개편과 진법교범서들의 지속적인 편찬 속에서 하나의 종합적인 결과물로 완성된 것이다. 셋째, 조선전기 태조부터 선조대까지의 진법 내용의 총 기사 수는 268개이며, 이를 왕별로 세분하면, 태조 2개, 태종 2개, 세종 23개, 문종 20개, 단종 11개, 세조 70개, 예종 7개, 성종 25개, 연산군 4개, 중종 50개, 선조 54개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역대강무제도, 진법훈련, 친열, 오진법 편찬 시행, 진법 사목 논의, 진법훈련 절차개선, 진법서적편찬, 신진법 완성 및 반포, 진법훈련조목 개선, 진법강론, 진법능부, 진법열병, 진법훈련정지, 척계광의 절강진법, 기타 등 15개 항목으로 추출할 수 있다. 넷째, 태조, 태종, 문종, 세조, 예종, 중종은 신하들에게 직접 진법훈련을 지시하고 주도한 국왕이었다. 이 중에서 문종과 세조는 신진법인 "오위진법(五衛陣法)"을 편찬, 개정하고 군사조직의 일원화를 꾀한 점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외에 중종은 역대 국왕들이 편찬한 진법교범서를 강론하고 훈련시킨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선조는 중국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받아들여 남방의 왜구를 방비하는 진법으로 전환시켰다. 다섯째, 진법훈련을 통해 알 수 있는 변화는 세조대부터 성종, 예종, 중종까지 형명과 진퇴좌작을 강조하였다. 이는 조선 건국 후 북방의 기마병에 대한 방비책으로써 진법훈련이 시행되었다. 반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선조부터는 남방의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비하는 척계광의 절강진법이 수용되면서 새로운 진법체제로의 전환이 모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조선의 침략방어대상이 북방에서 남방 왜구로 변화되었다는 점과 기존의 북방기마병을 막는 전술인 오위진법체제로는 수군과 보병위주인 왜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