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p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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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말명초(元末明初) 문학 동향 및 송렴(宋濂) 문학관의 변화 (The change of Song lian's viewpoint of Literature and The Literary trend in the Late Yuan and the Early Ming dynasty)

  • 박경남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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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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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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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고는 원말명초(元末明初) 문학의 전개과정을 검토하면서 명대(明代) 초기 관각문학의 기틀을 다졌던 송렴(宋濂) 문학의 위치를 점검해 보았다. 그는 명대 문학사에서 도학자적 문학관을 견지했던 것으로 단순 요약되고 있지만, 그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본고는 문학론과 관련된 송렴의 글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함을 통해 그가 청 장년기까지도 진한고문(秦漢古文) 등의 고문사(古文辭)에 빠져 오랫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송렴은 삼십 세에 스승 황진(黃?)과의 만남을 계기로 육경에 침잠하며 도학적 문예관을 가지게 되었지만 고문사의 유혹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오십 이후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명 건국의 주역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경세적 문학관을 실천적으로 확립하였고, 이후 자신의 도학적-경세적 문학관을 이론적으로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또한 청 장년기 그 자신의 문학 수련의 주요한 대상이자 명초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전범이기도 하였던, "사기" 등의 진한고문을 부정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요약하면, 원말명초의 격동의 시기에 송렴은 개인적, 시대적으로 문학관의 변화를 겪으며, 그 생애 말년에 육경 및 송대의 도학자와 한유(韓愈) 구양수(歐陽脩) 등의 당송고문을 성인(聖人)의 문(文)으로 통하는 치세의 문학으로 재정립함으로써 명대 문학의 이념적 좌표와 새로운 문학적 전범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기 밀턴의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 이상주의 -그의 영웅적 소네트와 산문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Religious, Ethical, and Political Idealism in Middle Milton: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His Heroic Sonnets and Prose Works)

  • 최재헌
    • 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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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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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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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In the 1640's and 1650's, Milton wrote many prose works on a variety of topics such as education, church polity, divorce, censorship, regicide, tithing, civil liberty, and blindness. Much of his prose shows us turbulent decades of English history. In this period, he also published his first collection of poems and wrote sonnets. He wrote 23 sonnets in his life, and many sonnets Milton wrote after he had become Latin secretary are occasional poems in historical time. Milton's sonnets, as Annabel Patterson says, are a marker in his personal development, in his life, in his career as a writer, and in the history of his time. Four sonnets (15, 16, 17, 23), written between 1648 and 1655, were not published in the collected edition of Milton's poem in 1673. These sonnets, addressed to leaders of the Parliamentary party during the English revolution, Thomas Fairfax, Oliver Cromwell, and Henry Vane, and to his friend Cyriack Skinner, have been known as "commonwealth" sonnets. They are also called as "heroic sonnets" because they have the common style and theme with his later heroic epic poems. These sonnets were finally published in 1694 by Milton's nephew John Phillips. Milton was interested in religious, domestic, and political liberty for his lifetime, and his heroic sonnets also deal with these ideas of liberty. Milton asks civil liberty from Fairfax, freedom in religion from Cromwell, and from Vane for the reconciliation of both.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examine how the rhetorical strategies of his "left-handed" prose interact with those of his "right-handed" poetry. This paper explores the relationship between Milton's heroic sonnets and his prose works, such as The Second Defense of the People of England, A Treatise of Civil Power, and The Likeliest Means to Remove Hirelings. Milton deals with the critical issues of religious tolerance,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liberty of conscience and defense of his blindness, and attempts to define the statesman's role in peacetime England in these heroic sonnets and prose works.

조오현 문학에 나타난 불교적 세계관과 세속적 해학미 - 『적멸을 위하여: 조오현문학전집』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Buddhist Worldview and Aesthetics of Secular Humor in Jo Oh-Hyeon's Literature: With a Focus on For Vupasama(Extinction))

  • 이찬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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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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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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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The present study aims at exploring in detail the Buddhist worldview and aesthetics of humor in Jo O-hyeon's literary works. This includes the same context as an elucidation of the ways in which his poems closely correspond in expressive forms and thematic contents. It is because, in Jo's literary world, where short poems and prose poems form a contrast, the expressive forms and thematic contents sharply differ depending on the ways in which prajnapti (provisional designation) is either foregrounded or backgrounded. In his literary world, when such a view of language and a worldview based on prajnapti are foregrounded, works that either inherit or play a variation on the fixed structure of the sijo emerge; and when they recede to the rear and are backgrounded, verses in the form of the prose poem are formulated. In addition, in Jo's literary works, where such a worldview of prajnapti and an aesthetics of secular humor intersect together, the thoughts on bheda-abheda(difference-non-difference) and the madhyama-pratipad (middle way) are formed. Such thoughts have considerable significance because they not only harbor a possibility of deconstructing and overcoming the opposition of the sacred/profane but also present a vision of a new unity.

동해 무릉계(武陵溪) 명승 탄생의 문화사적(文化史的) 배경 (The Cultural History of Mureung Valley, the Scenic Site designated as National Cultural Property)

  • 이상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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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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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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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강원도 동해시에 소재한 무릉계는 역사 경관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곳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 불릴 만한 수려한 비경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과거 많은 선현들의 유람이 있었고, 이들이 남긴 시문과 각자 등의 역사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무릉계는 두타산(頭陀山) 무명의 한 골짜기였으나 1577년 삼척부사 김효원(金孝元, 1542~1590)의 유람을 통해 '무릉계'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당대 명사들이 유람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된다. 지역민뿐만 아니라 외부 인사들도 애호하는 유람 명소였다. 무릉계는 사람들의 유람을 통해 선계 강학처의 의미가 부여된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다. 그 명성은 수그러들지 않아 현재까지도 유람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무릉계를 유람한 사람들은 그 과정이나 감흥을 시문으로 남겼다. 이러한 시문에는 무릉계가 품고 있는 심미적 이미지가 표현되었으므로, 시문을 통해 대중들에게 무릉계의 이미지가 형성되어가고 그 명성이 알려진다. 무릉계를 제재로 한 시문은 무릉계의 장소적 의미와 명성을 알릴 수 있는 전거가 되었다. 무릉계에 새겨진 수많은 각자는 무릉계의 명성을 현장에서 직접 보여주며, 사람들로 인해 그 공간이 어떻게 변모해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시문이나 각자 등은 오늘날 무릉계의 역사 유적으로 남아 무릉계의 문화사적 의미와 그 명성을 더욱 각인시켜준다. 특히 각자를 통해 조선 후기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무릉계를 유람한 것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무릉계는 일찍이 척주팔경의 하나로 지목되었고 무릉계만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무계팔경도 만들어진다.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정수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릉구곡이 설정됨으로써 경관의 장소적 의미를 넘어 성리가 구현되는 도학의 장소로도 의미가 부여된다.

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 문학론과 산문 일고 (A Study on Suk Dang Kim Sangjeong's Prose Works)

  • 하지영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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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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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9-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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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석당 김상정(1722~1788)은 18세기 중반 노론계 3대 문장가로 꼽혔으며 "고문론(古文論)"을 추구해야 하는 당위를 어느 누구보다 뚜렷하고도 과격하게 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이다. 그가 안도제(安道濟), 신대전(申大傳) 등과 주고받은 서신에서 펼친 고문(古文)-금문(今文) 문학논쟁은 조선 내에서 진한 고문론의 지속적인 전개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그의 고문론(古文論)은 김창협(金昌協) 이후로 노론계 문단에서 정통으로 계승되어왔던 당송고문론에 대한 자체적 반성과 함께 문학적, 시대적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표절과 모방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명대 전후칠자(前後七子)가 피력한 진한고문론과도 변별점을 두고 있다. 실제로 그의 문장에서는 전범을 표절하고 과도하게 인용하거나, 난해하게 문장을 조탁하는 등의 방식은 잘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고 장면과 대화 중심으로 담백하게 재현해 나가며, 우언적 글쓰기를 통해 당위적 교훈을 전달하였다. 이는 그가 추구하였던 진한고문, 특히 사체 산문의 미감과 접점을 가진 부분으로 논할 수 있다. 김상정의 글쓰기는 이전 시대 진한고문을 추구하며 난삽한 글쓰기를 하였던 작가들과도 구분되면서도, 의론을 중시하는 당송고문과도 변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김상정의 상고적 문예 지향은 대명의리를 추구하고 고동(古董)과 고문(古文)을 선호했던 이윤영(李胤永), 김상숙(金相肅), 이인상(李麟祥), 홍악순(洪樂純) 등 노론 청류(淸流)계 문단의 예술 담론과도 상통한다. 이들의 문예 취향은 자신들의 보수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면서도 문예에 전념하는 자신들의 삶을 옹호하는 근거로 활용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읽기/쓰기 문화의 변천에 따른 디지털 콘텐츠의 부상(浮上) : 바흐친의 '일상생활의 산문'을 중심으로 (The Transition of Reading/Writing Culture and Emerging Digital Contents-Focusing on Bakhtin's "The prose of everyday life")

  • 구모니카
    • 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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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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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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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인류가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읽기/쓰기 행위는 인류의 의사소통 체계이자 지식정보 전달 체계로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특히 디지털적 읽기/쓰기로 개개인의 일상사에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는 시대,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일상적 담론과 대화들이 증폭된 지금 본 연구자는 이 시대의 '디지털적' 읽기/쓰기 방식과 이에 따른 의사소통 수단을 바흐친의 '일상생활의 산문'을 중심으로 점검하고, 그러한 현상이 새로운 유형의 콘텐츠로 재창조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과거 읽기/쓰기는 '기록'의 과정을 통해 '서사의 창조'라는 지점에서 신성성을 부여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현대로 오면서 데이터 간의 '하이퍼텍스트 링크'를 통해 변모하고 있다. 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를 통한 읽기와 쓰기는 선형적 서사성의 결여로 비난 받아야 할 현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변화의 한 과정이며 결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읽기와 쓰기 방식의 변화는 콘텐츠의 층위, 지위, 의미, 가치의 변화를 수반할 수 밖에 없으며, 이에 '디지텔링'이라는 개념을 제안하여, 디지털 콘텐츠에서의 읽기/쓰기 방식을 새로운 대중문화 현상으로 접근해야 함을 주장하는 바이다.

싼마오 산문의 한국어 번역 전략 연구 (A Study on the Korean Translation Strategy of San Mao's Prose)

  • 문대일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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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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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5-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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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싼마오는 대만의 저명한 여성 문학가이다. 그녀는 일찍이 해외 유학 경험을 통해 경험하고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독특한 문체의 작품을 많이 창작하였다. 그 중에서 『허수아비 일기』는 해외 생활의 에피소드를 기록한 산문이다. 이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은 2종이 있다. 번역자에 따라 각기 다른 번역전략을 활용하였다. TT1은 의미 중심 번역을 많이 활용하여 이국적인 느낌을 많이 강조하여 번역하였다. 반면에 TT2는 소통 중심의 번역 전략을 활용하여 자연스러운 번역을 추구하였다. 또한 특이한 점은 두 번역 모두 '창조적인 번역'을 시도하여 의도적으로 '변형'하여 번역하였다. 이러한 창조적 번역은 독자가 작품에 몰입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본 연구를 계기로 싼마오 번역 작품에 대한 다양한 후속연구가 진행되길 기대한다.

식민시기 버마어 산문의 대중화와 버마 민족 형성의 상관성 (The Relation between the Use of Modern Burmese Prose as the Standard Language and Nation-Building in British Burma)

  • 묘우
    • 동남아시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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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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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9-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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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이 논문은 근대 민족국가 형성과 민족 공용어의 창출의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식민지기 버마에서 버마어가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환경 하에서 어떻게 공용어의 지위를 획득해나갔는지에 대해 주로 버마어 산문의 대중화라는 각도에서 분석한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연구가 시사하는 것처럼 근대적 인쇄매체의 출현과 더불어 근대 버마어의 등장 및 대중화는 버마의 근대적 민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영국-버마 전쟁 종결 후,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 변화와 함께 인쇄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버마어는 대중매체에서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획득해갔다. 식민시기에 버마 내 여러 지역에 어학원이 설립되었고 버마인이 어학교육 담당자로 고용되었다. 1930년대 초반에 근대 버마어 산문이 많은 저자들에 의해 집필되었으며,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독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는 호황을 누렸다. 일본군 점령 후에는 일본군 당국의 허가 하에 버마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공식적 언어로서 인정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근대 버마어는 1947년 헌법에 버마의 공식 언어로 명기되었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 논문에서는 버마어가 식민지기에 표준어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고 그 버마어로 작성된 근대 버마어 산문의 사용이 버마의 민족 형성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여헌(旅軒)의 인문(人文) 정신(精神)과 산문(散文)의 계보(系譜) (Yeoheon's Spirit of Humanities and the Genealogy of his Prose)

  • 안세현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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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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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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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고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계보 속에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문학론과 산문이 지닌 특징을 구명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는 그간 성리학자의 문학에 대한 연구가 16세기에 집중되었던 것을 반성하고, 17세기 이후 성리학자 문학의 향방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여헌의 삶과 학문, 그리고 문학 전체를 관류하는 지향점은 '우주적 차원의 인문 정신'이었다. 여헌은 붕당의 분화 대립이라는 정치 구조의 변화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겪으면서, 우주적 차원에서 인문 정신을 실현해야 할 책임자로서 인간의 주체성을 재정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여헌은 문(文)을 통해야만 도(道)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16세기 성리학자들에 비해 문의 존재 가치를 보다 강조한 것이다. 여헌은 박영(朴英)(1471-1540), 조식(曺植)(1501-1572), 성운(成運)(1497-1579) 등 노장에 포용적이었던 전대 성리학자들의 산문을 수용하면서도, 주제적으로 노장적 사유를 소거시키고 형식적으로 우언(寓言)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는 이황(李滉)(1501-1570)의 견해를 수용한 것이었는데, 이황이 산문의 장르에 상관없이 성리학적 개념을 사변적으로 논설하는 데에 주력했다면, 여헌은 구체적 자기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우주적 차원에서 인문의 실현자로서 유자(儒者)가 지녀야 할 주체성을 환기시킨 점에 그 특징이 있었다. 이상을 통해 17세기 성리학들의 문학이 결코 16세기의 아류나 경화(硬化)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으며, 변화된 현실 속에서 전대의 문학적 성취를 반성하고 갱신한 측면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시의화(詩意畵) 읽기 - 텍스트의 해석을 중심으로 - (Reading Korean and Chinese Paintings Expressing the Ideas of Classical Literary Works - Focused on Interpretation of The Text)

  • 강경희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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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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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1-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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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고는 중국 고전문학 작품을 원텍스트로 한 중국과 한국의 시의도(詩意圖)를 통해 문학작품이 그림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지, 또 그 그림들이 원텍스트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으로 문학을 통해 그림을, 그림을 통해 다시 문학작품을 읽는 하나의 실험이다.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도화원기병시(桃花源記幷詩)",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 구양수(歐陽脩)의 "추성부(秋聲賦)"와 이들을 화제(畵題)로 삼은 중국 및 한국의 시의도(詩意圖)를 대상으로 하여 중국과 조선에서 공유했던 중국 문학 작품이 각기 어떤 식으로 수용되고 향유되었는지 그 양상을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시의도(詩意圖)의 특징을 귀납하였다. 그 결과 아래와 같은 사실을 도출하였다. 첫째,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각 시의도(詩意圖)의 전형적인 양식들이 조선의 회화에도 모두 보이는 점을 통해 조선시대 화가들은 중국의 회화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잃지 않았다. 둘째, 중국 시의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시각화된 이미지와 전달하려는 중심주제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러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중국의 전통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미감이 전해지기도 하고 새로운 양식이 창조되기도 하였다. 셋째, 위와 같은 결과를 통해 같은 문학작품에 대한 중국과 한국의 수용과 해석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