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mid-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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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1800년 서울지역의 기상기후 환경 -'승정원일기'를 토대로- (Weather and Climatic Environment of Seoul Area in South Korea during 1623~1800, Reconstructed from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承政院日記)')

  • 이준호
    • 한국지역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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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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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56-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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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에서는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매일의 날씨와 기상현상을 토대로 기상기후 정보를 자료화하고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기상 및 천변재이에 관한 정보를 추가 조사하여, 지금까지 연구되지 않은 1623~1800년 기간 서울지역의 기상과 기후 환경을 파악하였다. 1500~1760년은 소빙기에 해당하여 조사기간 서울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여름이 서늘하였으며 대체로 기상현상의 변화가 심하고 한랭 건조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날씨와 기상현상 및 기후변화가 1650년, 1710년, 1770년을 전후로 현저하게 나타났다. 비와 눈의 일수는 1640년대에 큰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해 1650년대~1710년대에 크게 감소하였고, 1710년대 이후 급격히 증가하였다. 계절적으로 여름의 비 일수는 1710년대 말 이후에 급격히 증가하였고, 눈의 일수는 1770년대 중반 이후 크게 감소하였다. 우박 일수는 1720년대 말에 크게 증가해 17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흐린 날의 일수는 1710년대를 전후로 여름에는 크게 감소하나 겨울에는 다소 증가하였다. 안개일수는 1770년경 이후에 현대의 평년값보다 적은 일수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들 시기는 상대적으로 강화된 한랭화와 건조화의 경향을 따르며, 역사기후학적 비교자료 및 지구과학 생물학적 자료의 연구 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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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 어보 보수(寶綬)의 재료학적 분석 (Material Analysis of Bosu of the Royal Seals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

  • 이혜연;김주영;조문경;김민지;박대우;이정민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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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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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4-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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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조선의 어보는 국가 왕실을 상징하는 인장이다. 보수(寶綬)는 어보에 달린 붉은 끈으로, 어보의 품격을 높여주는 장식의 목적과 취급의 편리를 위해 제작되었다. 보수는 끈목과 방울술로 이루어졌다. 본 연구는 1441년부터 1928년까지 제작된 조선 왕실 및 대한제국 황실 어보의 보수 총 318점을 대상으로 형태 조사, 색상, 재질, 성분 분석 등을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끈목은 시기가 후반으로 갈수록 길어지고 얇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방울술은 1800년대 중후반부터 방울목이 대부분 사라지고 술 끝에 고리가 나타난다. 보수의 색상은 대부분 다홍색이지만 주황색과 자주색도 확인된다. 보수의 재질은 대부분 실크로 확인되지만 1900년대 제작된 어보의 보수 5점과 1740년대에 제작된 어보의 보수 1점은 레이온으로 추정된다. 1740년대에 제작된 어보의 보수는 1900년대에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방울술을 장식하는 금지의 주요 성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1800년대 중반까지는 술과 방울에 금(Au)이 주요 성분인 금지를 사용하지만 18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술에는 금(Au), 방울에는 황동(Cu-Zn)이 주요 성분인 금지를 사용하다가, 후반 이후 술과 방울에 황동이 주요 성분인 금지를 사용하였다. 보수는 어보의 한 부속품이지만 본 연구를 통하여 시대에 따른 제작 기법과 재질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양양(襄陽) 하조대(河趙臺)의 유래와 경관에 따른 명승의 향유 방식 (The Origin of Hajodae(河趙臺) in Yangyang(襄陽) and the Way of Enjoying Scenic Sites(名勝) According to the Landscape in Joseon Dynasty)

  • 김세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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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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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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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이 글은 양양 하조대의 문헌자료를 바탕으로 그 유래와 경관의 내용을 분석하여 조선시대 문인들이 향유한 하조대의 문화사를 조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에 따른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조대는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유람한 고사가 전하는 공간이다. 다만 이러한 전설이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았기에 역사에서 는 다양한 이견이 공존했다. 조위한(趙緯韓)은 양양 부로들의 의견을 인용해 조준이 아닌 조인벽(趙仁壁)일 수 있다고 하였고, 조덕린(趙德鄰)은 '멀리 보는 대'라는 의미의 '遐眺臺'로 기록했다. 문헌적 근거를 밝혀 하조대의 유래를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둘째, 하조대는 조선 중기 관동 최고의 명승으로 회자되었다. 당대 문인들은 하조대를 관동 최고의 명승 가운데 하나로 거론했고 이는 곧 양양의 상징이 되었다. 이러한 하조대의 기록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관동팔경이 정립되고 낙산사(洛山寺)가 명성을 얻으면서 하조대의 위상이 다소 줄어든 데 기인한 결과로 판단된다. 셋째, 조선의 문인들은 하조대의 다양한 경관을 통해 명승을 향유했다. 삼면이 탁 트인 지세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고 호연지기를 기르거나 스스로를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한편, 근경에 해당하는 기암절벽은 유람객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하조대 일대에 핀 해당화는 기이한 매력을 보이기에 충분했다. 이는 하조대가 지닌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고 이와 같은 경관에 대한 관리가 필요함을 암시한다. 넷째, 하조대를 읊은 한시는 하조대가 지닌 그 공간적 의미를 보여준다. 하조대를 주제로 한 한시의 면면을 살펴보면, 경관을 바탕으로 회포를 풀어낸 경우, 자연경관에 자신의 존재를 견주거나 의식을 투영한 면모, 조선 전기 명신 하륜과 조준을 회고한 사례 등이 확인된다. 경관을 통해 자신의 소회를 표출하고 역사를 회고하는 양상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상의 형성과 그 시대적 맥락 - 생애자료에 대한 비교변증을 통해 - (The Meaning of Evaluating Ha-Seo in the Historical Context - Through demonstration based on comparison of materials related to lifetime)

  • 김남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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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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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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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논문은 하서 김인후가 사후에 조선 성리학의 정통 학맥을 계승하는 존재로 위상이 부여되고 추숭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상화의 과정을 근거로 과거 인물의 생애를 다룬 다양한 자료가 상호간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거나 배제하면서 인물형상화의 과정을 거치는지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하서의 어린 시절 생애는 김인후와 군주 인종의 굳건한 관계를 부각하기 위해 새로이 배치되었다. 김인후는 당시 사림들에게는 깊은 상처이자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고 있던 기묘사림의 복권이라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하고도 첨예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고, 인종은 기묘사림의 복권을 실현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절개와 충심을 가진 선비로서의 하서의 상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조선후기에서는 중앙 조정의 서인과 군주 정조의 주도 하에 하서에 대한 추숭이 이루어졌다. 우선 17세기는 서인들이 김인후의 생애를 다룬 자료들을 다방면으로 수정하고, 김인후의 문집을 교정하여 간행했다. 이것은 당시 서인들이 추진하고 있던 서인계열의 학통 수립, 학문의 정통성 확보라는 목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에 따라 율곡 이이를 비롯한 서인계 학자들에 대한 추숭과 병행되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에 이르러 하서는 문묘에 종향되면서, 조선에서 가장 앞선 성리학자이자 해동정학(海東正學)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조가 군왕으로서 정치적으로 한 국가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정통의 학문에 대한 책임을 자부하는 사표(師表)로서 자기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는 욕망을 읽을 수 있다.

고려조 기법의 조선시대 광다회 복원 고찰 (A Review of the Restoration of Braid Belt, Gwangdahoe by Goryeojo Weaving Method in Joseon Dynasty)

  • 임금희;조우현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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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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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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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This study tries to find out the special twine technique of flat string and refers to historical documents, records, artifacts of excavated articles, and real materials. In Japan weaved cloth is called Jomul or Jonue and these methods were brought to Japan from Korea during Aska Period(645${\sim}$710) and Nara Period(710${\sim}$794). Among those knot methods, the 1/1 knot was written as a Shillajo on a documentary record at Heian Period, Engisik, and Samdaesillok which is a historic document from King Saiya to King Gowooko(858${\sim}$887). Also 2/2 knot weaving was recorded as Goryeojo that the technique originated for a long time in Japan. During the Joseon Dynasty, Gunmok was written as Dahoi, and Gwangdahoe, which means wide and flat Gunmok, was the name of Dae(Belt). The frame for the twine Gwangdahoe is no longer in Korea, but only can be found in Japan as a Goraiwoochi loom for Shillajo and Goryeojo from Korea. There are currently artifacts by the techniques of Shillajo and Goryeojo that were excavated in 15${\sim}$17C in Korea. Therefore this study was looked into the artifacts from 6${\sim}$8C in $Sh{\"{O}}so$-in, and the features of Dae (Belt) weaved by Shillajo and Goryeojo case method. Gwangdahoe excavated artifacts in the mid Jeosun Dynasty was restored by the process of Goryeojo weaving method.

쌍화탕과 쌍화차의 시대적 변화 과정 고찰 - 쌍화탕은 어떻게 '차'가 되었을까? - (Study on the Historical Aspects of SSangwha-'tang' (Decoction) and SSangwha-'cha' - How did Ssangwha-tang become Tea? -)

  • 박인효;이상재
    • 대한예방한의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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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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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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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Objective : This study examines the historical changes of Ssangwha-'tang', traditional restorative medicine, to a type of tea in tea rooms(Da-bang) named Ssangwha-'cha' in the modern era in South Korea. The goal is to understand how traditional Korean medical culture has been related to the food culture of everyday life. Method : We analyzed traditional medical texts, newspaper articles and advertisements, literary works, and folk song lyrics in which Ssangwha-tang and Ssangwha-cha are mentioned. Results : Ssangwha-tang used to be mentioned as a medicine to tonify 'Yang' energy(Bo-yang) in traditional medical texts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to the mid-Joseon dynasty. Since the late Joseon dynasty, it has also been prescribed for cold, as the tonifying method(Bo-beop) gradually prevailed from the royal family to the public. Since then, Ssangwha-tang has been more popular with the public, with the emergence of the patent medicine(Mae-yak) market since the Opening port period and the Colonial period. As the number of Da-bang sharply increased nationwide amid the period of the country's liberation, Ssangwha-tang has been included in the Da-bang menu served as Ssangwha-cha, corresponding to the increasing demands of the public and government policy that tends to favor traditional beverages over coffee. Conclusion : The historical process in which Sssangwha-tang, a type of herbal medicine, became also considered as tea, Ssangwha-cha, provides an example of how Korean traditional medical culture emphasizing the tonification of the body is interconnected with the daily lives of the public and food culture.

한국유학사에서의 김굉필(金宏弼)의 위상 (Status of Kim Goeng-pil in History of Korean Confucianism)

  • 최영성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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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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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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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은 고려 말엽 정몽주가 단서를 열어놓은 도학을 하나의 학문 경향으로 승화시켰다. 김굉필은 '조선도학의 시조'로 일컬어졌으며, 이후 4백여 년 동안 도학자의 전형으로 받들어졌다. 김굉필이 씨를 뿌린 도학은 학문과 정치의 기준이 되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김굉필을 본받아 "소학"을 통해 근기(根基)를 배양하였고, 그 기운은 선비의 원기(元氣), 나아가 국가의 원기로 승화하여 국맥(國脈)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굉필은 "소학"으로 학문 하는 방법을 제시하였고, "소학"에서 요구하는 강한 실천성을 바탕으로 도덕적 인간, 도덕적 이상사회를 추구하였다. 개인의 수양과 사회 개혁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다. 김굉필이 몸으로 보인 '자기 수양(律己)'의 정신은 조광조(趙光祖)의 단계에 이르러 도학적 이상국가의 추구로 발전하였다. 김굉필은 '경(敬)'을 통해 "소학"의 가르침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경'이라는 수양 방법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조선 성리학의 요체다. 김굉필은 조선의 유학을 '심학(心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김굉필 이전에는 심학의 모습을 제대로 선보인 학자가 없었다. 명종 선조 시기 이후로 조선의 유학은 심학으로 정초되어 갔다.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경'을 중심으로 한 심학 체계가 공고하게 구축되었다. 김굉필의 문인과 그들이 양성한 학인들은 16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학계 정계를 이끌었다. 이들은 선조 즉위 이후 사림파(士林派) 집권의 주인공들이었다. 조선을 도덕적 이상국가로 승화시키고 '사림의 나라'로 만든 그 기초는 사실상 김굉필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회화작품에 나타난 취병(翠屛)의 특성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Chuibyong(翠屛: a Sort of Trellis) in Paintings of Late Joseon Dynasty)

  • 정우진;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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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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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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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회화자료의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취병의 특성과 제요소를 고찰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조선시대 회화자료 25종에 대한 분석 결과, 취병은 주로 사생활 보호를 위한 차폐시설과 부지의 공간을 분할하는 구획시설로 기능하였으나, 내적으로는 정원에 품격과 아취를 부여하는 소품으로 설치되었다. 특히 취병 주변으로 학, 사슴등의 동물상 및 소나무, 파초, 대나무, 오동나무 등의 식물상과 괴석, 연못, 정자 등의 다양한 정원요소들이 나타났는데, 이것들은 이상적인 문인정원에 구비되어야 하는 일련의 조합으로 파악되었다. 둘째, 취병은 중국 고사(古事) 속 문인문화를 표상하는 관념적인 물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이미지는 고스란히 정원문화 속에 투영되었는데, '인물고사도 속 원림'을 모방 재현하는데 있어 취병은 중요한 경물로 사용되어 왔다. 셋째, 형태 기능 측면에서, 조선시대 회화 속에 나타난 취병들은 기본적으로 차폐 및 구획의 기능이 주요하였다. 사람 키를 웃도는 담장이나, 심지어 중국 대문 앞뒤에 설치되는 영벽의 높이까지 솟아 있기도 하여 공간적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취병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취병은 특정한 기능이나 입지상황 때문에 설치된 것보다는 당시 국내에 유행한 명대 문인문화의 유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중국에서 전해진 서원아집도 등에 나타난 취병의 도상은 한양을 중심으로 부유층의 저택에서 재현되었는데, 취병을 통해 부귀와 문인의 기상을 표현하려 했던 초기양식이 궁궐 및 상류층의 주택에서나 조성될 수 있는 고급 정원요소로 전화되었다. 또한 19세기 중엽 이후 취병의 활용은 평민의 주거양식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저변화의 양상을 보였으며, 이는 취병이 토착화된 전개로 간주된다.

여말선초 약초원의 형성 과정과 조경사적 의미 고찰 (The Development and Significance of Physic Gardens in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Dynasties)

  • 김정화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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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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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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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본 연구는 우리나라 약초원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고 조경사적 의미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이를 위해 본초학 연구가 이루어진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의료체계 속에서 약초원과 관련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약초원은 여말선초인 13~15세기에 발달하였다. 지역성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자연관의 영향으로 토산 약초를 뜻하는 향약(鄕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고려 말 문인들이 약포(藥圃)를 가꾼 경향이 발견되며, 향약 조사 발견 재배 탐구 등 관련 정책이 시행된 조선 초 종약전(種藥田)이라는 이름의 약초원이 조성된 사실이 확인된다. 내의원과 혜민서와 같은 중앙의료 기구 부속 시설이었던 종약전은 15세기 중반에 실재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조선 건국과 함께 설립되어 조선 후기에 쇠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종약전은 약현, 율도, 여우도, 사아리 등 한양 도성 밖 여러 곳에 있었고, 그 규모는 18세기 초 당시 약 16만 제곱미터였다. 형개, 지황, 감초 등을 포함한 수십 종이 종약전에서 재배되었고, 내의원에서 파견된 의관과 관노비 수십 명에 의해 종약전이 운영되었다. 종약전은 새로운 약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라는 사회적 배경 측면에서 르네상스시대 의과대학의 약초원과 공통점을, 약초의 종류 위치 기능 등의 측면에서 중세 유럽의 성곽과 수도원 내 약초원과 유사점을 지닌다. 본 연구는 약포와 종약전의 구체적 공간 형태를 밝히지 못한 점에서 한계를 가지나, 우리나라에서 약초원이라는 정원 유형이 여말선초 향약을 중심으로 한 의학의 발달과 함께 나타났으며 공동체의 치료제 재배를 위한 실용정원으로 기능했음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조선시대 목판재료 자작목(自作木)의 실체와 명칭 변화 (The True Identity and Name Change of Jajak-mok, the Wood Species for Woodblock Printing in the Joseon Dynasty)

  • 이운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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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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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6-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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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조선시대 왕실 출판 과정에서 책판의 주요 수종으로 사용된 나무는 '자작목(自作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칭을 보면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가 연상되지만, 문헌에 기록된 산지(産地)와 쓰임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의 '자작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작나무와는 다른 나무로 추정된다. 본고는 조선시대 왕실 출판에 사용된 '자작목'이 실은 거제수나무이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는 우리말 봇나무 즉 '화목(樺木)'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더불어 조선시대 거제수나무를 지칭하던 '자작목'이 어떠한 연유로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를 지칭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당시 일본에서는 '화(樺)'라는 글자를 산벚나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18세기 중반에 일본의 백과전서류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지금의 자작나무를 의미하는 '화목'과 혼용되게 되었다. 더욱이 '화목'의 우리말인 '봇나무'와 산벚나무의 우리말인 '벗나무'는 발음마저 비슷하여, 이후 두 나무는 '벗나무'로 표기가 통일되었다. 그러던 것이 20세기에 들어 세 나무의 공식적인 명칭이 정리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농상공부고시와 1912년 조선총독부고시에 의하여 '화목'은 '자작나무'가 되었고, 이후 산벚나무를 뜻하는 '벗나무'는 '벚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본래의 '자작목'에는 '거제수'라는 이름만이 남게 되었다. 오늘날 한자 사전에서는 '화(樺)'의 뜻을 '1. 벚나무 2. 자작나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세 나무의 명칭이 혼용되었던 역사적 배경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