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late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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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회화작품에 나타난 취병(翠屛)의 특성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Chuibyong(翠屛: a Sort of Trellis) in Paintings of Late Joseon Dynasty)

  • 정우진;심우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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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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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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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는 회화자료의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취병의 특성과 제요소를 고찰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조선시대 회화자료 25종에 대한 분석 결과, 취병은 주로 사생활 보호를 위한 차폐시설과 부지의 공간을 분할하는 구획시설로 기능하였으나, 내적으로는 정원에 품격과 아취를 부여하는 소품으로 설치되었다. 특히 취병 주변으로 학, 사슴등의 동물상 및 소나무, 파초, 대나무, 오동나무 등의 식물상과 괴석, 연못, 정자 등의 다양한 정원요소들이 나타났는데, 이것들은 이상적인 문인정원에 구비되어야 하는 일련의 조합으로 파악되었다. 둘째, 취병은 중국 고사(古事) 속 문인문화를 표상하는 관념적인 물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이미지는 고스란히 정원문화 속에 투영되었는데, '인물고사도 속 원림'을 모방 재현하는데 있어 취병은 중요한 경물로 사용되어 왔다. 셋째, 형태 기능 측면에서, 조선시대 회화 속에 나타난 취병들은 기본적으로 차폐 및 구획의 기능이 주요하였다. 사람 키를 웃도는 담장이나, 심지어 중국 대문 앞뒤에 설치되는 영벽의 높이까지 솟아 있기도 하여 공간적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취병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취병은 특정한 기능이나 입지상황 때문에 설치된 것보다는 당시 국내에 유행한 명대 문인문화의 유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중국에서 전해진 서원아집도 등에 나타난 취병의 도상은 한양을 중심으로 부유층의 저택에서 재현되었는데, 취병을 통해 부귀와 문인의 기상을 표현하려 했던 초기양식이 궁궐 및 상류층의 주택에서나 조성될 수 있는 고급 정원요소로 전화되었다. 또한 19세기 중엽 이후 취병의 활용은 평민의 주거양식으로 확산되는 이른바 저변화의 양상을 보였으며, 이는 취병이 토착화된 전개로 간주된다.

서울 송현동 일대의 문화 헤게모니와 장소성 변화 분석 (An Analysis of Cultural Hegemony and Placeness Changes in the Area of Songhyeon-dong, Seoul)

  • 최지영;조경진
    • 한국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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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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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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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서울 송현동에 역사문화공원과 이건희 기증관이 조성될 예정이다. 송현동의 역사성은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받은 시련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장소성 분석은 역사적 맥락보다는 토지소유자와 용도 변화에 국한해서 다루어졌다. 그래서 본 연구는 현대문화지리학과 비교역사학 관점을 활용하여 송현동의 장소성이 문화 헤게모니에 따라 변화한 맥락을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역사적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중화주의, 대항해, 시민혁명, 제국주의, 민족자결주의, 민족주의, 대중예술, 신자유주의 같은 범세계 차원의 문화 헤게모니는 송현동을 비롯한 북촌 일대에 새로운 지식인층을 만들어냈고, 사회제도와 공간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송현동의 장소성은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첫째, 송현의 소나무숲은 이상적인 유교 국가를 목표로 했던 조선 건국세력이 왕조의 영속을 기원하며 만든 비보숲이었고, 내사산의 지맥을 보호하는 사산금표제로 관리되었다. 세계적으로 대항해시대를 맞이한 조선 후기에는 연행이 늘며 청나라 문화를 향유하는 경화세족의 정원이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주택단지개발로 소나무 숲과 정원은 사라졌지만, 인공적인 정원과 외부의 자연을 조화롭게 연결했던 차경의 경관적 미학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가치가 있다. 둘째, 세계의 근대화 물결은 북촌 일대에 신식학교를, 친일파 소유의 송현동에는 하숙집을 만들었다. 송현동 옆의 안국동천길은 시민혁명과 민족자결주의를 접한 사상가들이 교류했던 장소였고, 최대규모의 하숙집이었던 송현동은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며 학생운동문화가 발아한 계기가 되었다. 안국동천길은 옛길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어 광화문-북촌-인사동-돈화문로를 연결하는 역사 도심 보행 재생의 한 부분으로 의의를 지닌다. 셋째, 조선총독부의 문화 통치기부터 군사 정권기까지 송현동은 조선식산은행의 서구식 문화주택과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가 들어서며 서구문화의 통로였다. 주변 지역은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공존하며 근현대 미술시장이 형성되었다. 이건희 기증관은 북촌한옥마을, 공예박물관, 현대미술관, 갤러리와 문화벨트를 이루며 시민의 공간으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같이 장소를 이루었던 숲과 정원, 시민탄생의 거리, 근·현대 미술의 진원지로서 의미가 새롭게 조성될 역사문화공원과 미술관 그리고 주변 보행 네트워크와 조화롭게 재창조될 수 있도록 담론과 도전이 필요하다.

진해현감 이제마와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에 관한 연구 - 관측(官側) 사료 『각사등록(各司謄錄)』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과 『외안(外案)』 및 『진해군읍지(鎭海郡邑誌)』 「관적읍선생안(官蹟邑先生案)」을 중심으로 - (A study of Lee Jema as the governor of Jinhae with a focus on his official evaluations and on the Joseon Dynasty official documents of Separate Office Formal Records (各司謄錄), Ruling Management and Instruction Records (統制營啓錄), Employees Documents (外案), the Town Chronicle of Jinhae (鎭海郡邑誌), and A Roster of Local Government Officials (官蹟邑先生案))

  • 최성운;황지혜;하동림
    • 한국의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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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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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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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We discovered various sides of Lee Jema's tenure as the governor of Jinhae by looking at recently found historical materials of the central government of Joseon. Lee Jema went to his appointed post in Jinhae in February of 1887 and was replaced before the termination of his office in June of 1888. Since his replacement did not immediately arrive at Jinhae, Lee Jema continued to perform his duties until the first half of 1889. The difference between the date of his resignation and the arrival of his replacement reveals why various historical materials disagree about when he left office. After Lee Jema's official resignation in June of 1888, he was appointed to the honorary posts of Naegeumjang and Cheomji, which indicates the termination of his career as an official. Two superior officials conducted job assessments on Lee Jema three times during his service (once every six months) and these are the rare evaluations which were performed during his lifetime. Lee Jema was highly regarded in terms of job competency by two superiors in succession, which was unique for a local government official in the late Joseon dynasty. One of the job assessments referred to the potential of his performance as an official which usually implied that he was a suitable candidate for higher rank. This might have derived from Lee Jema's study of statecraft. Lee Jema's love for the people as an official was also mentioned in one of the job assessment reports. This is borne out by his quelling the revolt of Hamheung Province in 1896.

서울 서촌지역 조선조 원림의 위치추적을 통한 경관 해석 (The Landscape Interpretation of Joseon Era Gardens in Old West Village, Seoul through the Locational Investigation)

  • 김한배;이승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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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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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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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조선시대 서촌에서는 많은 성시원림들이 만들어졌고 그들 중 다수가 진경산수화로 그려졌었다. 본 연구는 먼저, 서촌의 대표적 원림들의 위치를 보다 실증적 기법에 의하여 규명하려 하였다. 조선조 진경산수화에 나타난 원림경관을 ArcGIS 3차원 지형 모델링과 비교함으로써 사실에 근접한 위치를 밝혀내고 이에 근거하여 지형과 경관의 특징을 해석하려 하였다. 원림추정지 주변의 지형을 3차원 지형모델로 작성한 후, 조망점을 이동시켜 진경산수도와 근접한 3D 모델의 구도에서 대상지의 위치를 찾아내었다. 이후 모형에 지적도를 중첩시켜 원림 터의 지번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서촌의 초기 원림인 '청풍계 원림'은 인왕산 계곡의 종단부에 위치하여 외부로부터 감추어진 '위요형 경관'을 보인다. 중기원림인 '청휘각 원림'은 옥류동 계곡과 능선 사이에 위치하여 외부로 보다 개방된 '반(半)개방형 경관'을 보인다. 후기원림인 '서원 원림'은 대상지 중 가장 높은 능선 상단에 위치하여 '조망형 경관'을 보인다. 말기원림인 '송석원 원림'은 능선과 시가지의 접점 언덕에 위치하여 '개방형 경관'을 보인다. 즉, 서촌원림의 경관과 사회적 기능은 함께 점진적으로 개방되어 온 것으로 나타난다.

경기도 지역 석탑의 전개과정과 조영 특징 (The Development Process and Construction Characteristic of the Stone Stupa in Gyeonggi-Do)

  • 이서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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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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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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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논문은 경기도 지역 석탑의 건립 현황과 양식 분석을 통해 경기도 지역 석탑이 갖는 특징과 의의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경기도 지역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불상, 석탑, 승탑, 마애불 등 다수의 불교 조형물이 조성되었으며, 이 가운데 불상과 더불어 신앙적인 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불탑이다.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지역에도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으며 그에 따른 석탑 건립도 성행하였다. 본 논문은 경기도 지역 내 지정된 석탑을 기본으로 48기의 석탑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분포 현황을 보면 한강을 기준으로 경기 북부보다는 남부에 집중 건립되었는데, 중심이 되는 지역은 안성, 이천, 용인, 여주 등이다. 이는 지역적 특수성도 기인하지만, 북부에는 석탑을 건립하는 대형 불사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별 특징을 보면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석탑이 남아 있어 석탑이 꾸준히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고려시대 석탑이 집중 건립되었는데, 고려 전기에 남부 지역에서 활발히 건립되었으며, 고려 후기에는 경기도 전역에 걸쳐 석탑이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가까운 지역 및 왕실과 관련이 깊은 사찰들에 석탑이 건립되어 당시 시대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석탑은 지역적 특수성, 즉 교통의 요지인 곳에 주로 건립되었는데 안성, 이천, 용인, 여주 등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목되는 지역에 불사가 성행하였고 그로 인해 석탑 건립이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술사적 의의를 살펴본 결과, 성주사지 석탑의 영향을 받아 어비리 삼층석탑에서 별석 초층탑신받침이 확인되는 점, 고려시대 석탑 중 백제계 석탑은 확인되지 않고 주로 신라계 석탑과 고려 양식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점, 탑신 결구 방식과 탑신 제작 방식에서 전국적으로도 사례가 많지 않은 특징이 나타난다는 점, 마지막으로 석탑 장엄조식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황해도 사찰 간행불서의 서지적 연구 (A Bibliographical Study on the Buddhist Scriptures Published in Temples Located in Hwanghae-do Province)

  • 송일기;박지숙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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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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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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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 연구는 조선시대 황해도 지방의 사찰에서 개판(開板)된 불서를 대상으로 시기별 간행 현상과 불서의 성격 등에 대해서 서지학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황해도에서 간행된 불서는 모두 85종으로 파악되었으며, 그 중 "용감수감(龍龕手鑑)" 등 5종은 황해도 사찰에서만 유일하게 개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불서는 조선전기에 64종이 간행되어 전체 75%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이 중에서도 명종 대에 문정왕후 등 왕실의 후원으로 집중적으로 개판되었던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 조선후기에는 급격하게 쇠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바, 이는 임진과 병자의 양난을 거치면서 황해도 지방의 민생이 파탄에 이른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이들 불서를 대상으로 주제별로 분류하여 성격을 분석해 본 결과 대체로 경전류와 종의류 불서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적으로 사찰에서 개판불사에는 각수의 소임이 매우 중요한데, 대부분의 각수(刻手)는 황해도 지방의 사찰에서 활동하면서 2-3종의 불서를 판각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지만 각수 중에 도성(道成)과 수연(守衍)은 황해도는 물론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불서를 판각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주목되는 각승(刻僧)으로 보인다. 이 연구는 향후 북한지역 내 다른 지방의 개판 불서 연구에 비교 대상 논문으로써 의미를 지닐 것으로 기대한다.

보물 제 308호 전주 풍남문 주요 부재의 수종 연구 (Study on Species Identification for Pungnammun Gate (Treasure 308) in Jeonju, Korea)

  • 박정혜;오정은;황인선;장한울;최재완;김수철
    • Journal of the Korean Wood Science and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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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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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7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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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에서는 전라북도 전주시에 소재한 보물 제 308호 풍남문 건축부재의 수종을 분석하였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풍남문은 전주를 둘러싸고 있는 옛 전주읍성의 남문이다. 1388년 전주부성을 세우면서 동서남북 4개의 문도같이 설치되었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34년 재건하였고, 1768년 3층루였던 것을 2층루로 수축하면서 이때 읍성의 남문을 '풍남문'이라 지은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의 양식과 다른 문루 건축에서 볼 수 없었던 건축양식들이 잘 남아 있어 1963년 보물 제 308호로 지정되었다. 수종분석은 건축 부재 중 기둥, 보, 창방, 도리, 장여, 주두, 동자주, 추녀, 귀틀, 종대(종보)를 대상으로 실시하였으며 분석 결과 모두 소나무(Pinus spp.)로 식별되었다. 이는 조선후기 건축물에 나타나는 주요 수종으로 소나무를 사용한 것과 일치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문루 건축문화재의 수종 자료 구축 및 훗날 문화재 수리 과정에서 참고 자료로도 활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정조의 성장과정을 통해 본 조선후기 왕위계승교육 (On the curriculum for the succession to the Korean throne - focusing on the growth process of King Jeong-jo in the late Joseon)

  • 육수화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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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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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09-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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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정조는 1752년(영조 28) 9월 22일에 탄강하여, 8세에 왕세손 책봉례, 10세에 입학례와 관례를 치르고, 11세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훙서(薨逝)하자 왕세손이면서 동궁(東宮)으로 진봉(進封) 되었고, 24세에 왕위계승자의 실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대리청정 수행을 거쳐 25세에 등극하였다. 조선왕실의 왕위계승교육은 성장과정에 따라 기관의 명칭과 위상을 달리하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곧 보양청(보육기관)${\rightarrow}$강학청(조기교육기관)${\rightarrow}$세손강서원(왕세손교육기관)${\rightarrow}$세자시강원(왕세자교육기관)의 교육과정을 거쳐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러한 교육과정 외에도 책례 입학례 관례 등과 같은 의례를 거행하게 되는데, 이는 왕위계승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로서의 소명의식을 내면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책례는 왕위계승자를 미리 결정함으로써 정국의 혼란을 막으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일찍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예비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덕목을 쌓아 군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려는 교육적 의미가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등극 전에 이루어지는 대리청정은 왕위계승을 위한 실무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전기에 비해 왕위계승에 있어서 종법적 정통성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였으므로, 군왕으로서의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료들을 제압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요구되었다. 때문에 특히 영 정조대에는 왕실교육을 확대 강화함으로써 왕실의 위상제고와 왕권강화에 주력하였으며, 의례정비를 통해 국가기강과 통치질서를 확고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광릉 전나무 식재기록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Planting Records of Needle Fir in Gwangneung)

  • 김은경;이해주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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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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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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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고문헌을 통하여 광릉 전나무 식재의 사적 근거를 밝히고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등의 식재기록을 분석하였다. 선행 연구와 산림생태조사 및 도복된 전나무 연륜을 통하여 현재 광릉 전나무의 수령을 추정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능제는 가장 보수적인 체제로 광릉 조성 과정 중 식재는 전례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건원릉을 시작으로 능침수목 식재기록을 통하여 소나무, 잣나무, 버드나무가 식재되었던 것을 확인하였다. 둘째, 조선후기 능침 작벌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조 22년 무오년 수교가 반포되었으며, 이후 봄 가을로 정기 식재가 이루어졌다. 정조 23년 기록을 통하여 조성 및 관리 연한이 오래된 9개 능을 대상으로 식재 주수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광릉에는 잣나무와 잡목이 식재되었다. 셋째, 무오년 수교가 고종 치세 31년간 지켜지고 있으며, 예조별단을 통해 구체적인 식재 수종, 식재 장소, 식재 주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종 22년부터 25년까지 4년간 광릉에는 지속적으로 전나무가 식재되었으며 잣나무를 식재한 곳은 광릉이 유일하였다. 넷째, 도복된 전나무 연륜을 통하여 수령 파악이 가능했으며, 현존 광릉 전나무 식재 시기는 철종 10년 이후부터 고종 연간으로 판단하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상의 형성과 그 시대적 맥락 - 생애자료에 대한 비교변증을 통해 - (The Meaning of Evaluating Ha-Seo in the Historical Context - Through demonstration based on comparison of materials related to lifetime)

  • 김남이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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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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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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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이 논문은 하서 김인후가 사후에 조선 성리학의 정통 학맥을 계승하는 존재로 위상이 부여되고 추숭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형상화의 과정을 근거로 과거 인물의 생애를 다룬 다양한 자료가 상호간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거나 배제하면서 인물형상화의 과정을 거치는지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하서의 어린 시절 생애는 김인후와 군주 인종의 굳건한 관계를 부각하기 위해 새로이 배치되었다. 김인후는 당시 사림들에게는 깊은 상처이자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로 인식되고 있던 기묘사림의 복권이라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하고도 첨예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고, 인종은 기묘사림의 복권을 실현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절개와 충심을 가진 선비로서의 하서의 상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조선후기에서는 중앙 조정의 서인과 군주 정조의 주도 하에 하서에 대한 추숭이 이루어졌다. 우선 17세기는 서인들이 김인후의 생애를 다룬 자료들을 다방면으로 수정하고, 김인후의 문집을 교정하여 간행했다. 이것은 당시 서인들이 추진하고 있던 서인계열의 학통 수립, 학문의 정통성 확보라는 목표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에 따라 율곡 이이를 비롯한 서인계 학자들에 대한 추숭과 병행되었다. 마지막으로 18세기에 이르러 하서는 문묘에 종향되면서, 조선에서 가장 앞선 성리학자이자 해동정학(海東正學)으로서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조가 군왕으로서 정치적으로 한 국가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정통의 학문에 대한 책임을 자부하는 사표(師表)로서 자기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는 욕망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