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in the late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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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과 인공지능 (The Zhouyi and Artificial Intelligence)

  • 방인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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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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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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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의 목적은 "주역"과 인공지능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과 차이점을 밝히려는데 있다. "주역"의 점술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지식체계 가운데 하나이며, 인공지능은 인류가 만들어낸 과학의 발명 가운데서도 최전선에 서 있는 지식체계이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빅 히스토리(Big History)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역"과 인공지능은 기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 인공지능과 "주역"은 인공언어를 사용하는 기호 체계에 의지한다. 둘째, 점술과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는 모방과 재현에 있다. 셋째, 인공지능과 "주역"은 모두 추리 과정을 수행하기 위하여 알고리즘(algorithm)에 의지하며, 그 알고리즘은 이진법(二進法)을 기본적 수단으로 삼는다. 넷째, "주역"과 인공지능은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비(類比)의 방법에 의존한다. 물론 이러한 몇 가지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주역"이 과학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리가 먼 것 같은 두 지식체계 사이에 이러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문명의 본질에 관해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주역"과 인공지능은 미지(未知)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지능을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역"의 점술의 과정에 개입하는 지능이 어떤 종류의 지능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의 성격에 대해서도 아직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미지의 주체에 의해 운용되는 지능은 우리에게 신비롭고도 두려운 존재이다. "주역"의 점술이 우리에게 점단(占斷)을 행하는 초월적 주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경외하는 마음을 품게 하였듯이, 기계속에 보이지 않는 인공지능의 주체도 우리를 두렵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의 등장은 의식있는 존재만이 지능을 가질 수 있다고 간주했던 전통철학의 관점에 도전을 던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기호를 매개로 진행되어 온 문명의 발전 과정이 이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시점을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이 용어를 구문명(舊文明)과 신문명(新文明)의 경계를 가리키는 임계점(臨界點)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소옹(邵雍)의 용어를 빌려서 표현한다면 구문명은 선천(先天)이고, 신문명은 후천(後天)이다. 임계점을 지나면 질적 변화가 일어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며 더 이상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다. 현대 문명은 특이점을 통과했다는 징후를 여러 측면에서 보이고 있다. 후천개벽은 조선 후기의 종교 사상가들에게는 예언이었지만 어느덧 소리 없이 현실로 다가와 이미 우리 곁에 있다.

근현대기 창덕궁 내 주요 점경물의 실상과 변형 (The Actual State and Transformation of Major Garden Ornaments in Changdeokgung Palace dur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

  • 오준영;이재용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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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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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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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연구는 낙선재, 주합루, 존덕정, 대보단지를 중심으로 근현대기 창덕궁 내 주요 점경물의 실상과 변형 양상을 고찰하였다. 전각, 식생, 구조물과 달리 상대적으로 관심이 저조했던 점경물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변화상을 조명하기 위한 의도이다. 본 연구의 성과는 향후 창덕궁 내 점경물의 복원정비계획 수립에 요긴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901년 체코인 브라즈가 촬영한 사진에 따르면 당시 낙선재 후원에는 석지(石池)와 괴석을 비롯해 총 6기의 점경물이 소재했다. 후원의 지면에는 금사연지(琴史硯池)로 불리는 석지와 괴석 2기, 화계 1단에는 괴석 3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부터 괴석의 임의적인 재배치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그 과정에서 본래 화계 1단에 위치했던 괴석 2기는 경훈각(景薰閣) 후원으로 이설된 상태이다. 둘째, 「동궐도」가 제작된 조선후기와 달리 1900년대 초반 주합루 후원에는 괴석 2기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외형, 규격, 의장이 유사한 전통적 양식의 점경물이었다. 하지만 주합루 후원의 괴석은 모두 1970~1980년대에 타지로 이설되어 현재는 고유위치를 벗어난 상태이다. 1기는 빙천(氷泉) 입구와 금천교 인근을 거쳐 애련정 후면에, 또 다른 1기는 연경당 장락문(長樂門) 앞에 남아 있다. 셋째, 과거 존덕정 일곽에 소재했던 점경물 중 괴석 1기는 현재 구성 부재가 분리된 상태로 정자 주변 석교와 영화당 인근에 분산 배치되어 있다. 영화당 인근의 대석은 1990년 무렵 앙부일구 모조품을 설치하기 위한 용도로 이설되었다. 또 다른 괴석 1기는 후원 정문으로 이설된 이후 현재는 소재 파악이 어려우며, 본래 위치에는 완전히 상이한 형태의 점경물이 새롭게 배치되어 있다. 넷째, 대보단지에 현존하고 있는 대석 2기는 일제강점기 당시 이왕직청사(李王職廳舍) 현관 기둥의 초석으로 사용되던 건축 부재였다. 해방 이후 이왕직청사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개편되고, 1960년 무렵 사무총국 건물이 전소되자 기단 위에 배치되어 있던 석상(石像)과 대석이 대보단지로 이설되었다. 대보단지의 대석은 건축부재가 점경물로 오인되고 있는 대표적 사례이다.

1795년 봉수당 진찬(奉壽堂進饌)으로 보는 조선 후기 채화(綵花) 고찰 (A study on artificial flowers in the late Joseon Dynasty, focusing on a birthday banquet inBongsudang Hall in 1795)

  • 이경희;김영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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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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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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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1795년 화성 행차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 도식과 기록을 통해 왕실 채화의 용도와 사용방법이 비로소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봉수당 진찬에 사용된 채화의 용도를 구분하고 형태, 사용자, 사용방법을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채화 기록을 고찰한 결과 전기에는 금·은·견사 등의 고급 재료로 만들었으나, 후기에는 재료에서 종이의 비중이 높았다. 채화의 척도는 예기척 28.4cm를 적용하였다. 채화의 용도는 관모를 장식하는 수공화(首拱花), 공간을 장식하는 준화(樽花), 잔칫상을 장식하는 상화(床花)로 구분되었다. 사권화(絲圈花)는 왕실 구성원의 수공화인데, 상품(上品)의 것을 어잠사권화(御簪絲圈花)라 하였다. 봉수당 진찬에서 정조와 혜경궁이 어잠사권화를 사용했고, 관모의 오른쪽에 꽂았다. 백관 이하의 수공화는 홍도이지화(紅桃二枝花)가 사용되었고, 관모의 왼쪽에 꽂았다. 홍도이지화는 수공화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관직의 유무나 높고 낮음에 따른 차등이 없었다. 악공과 여령의 수공화는 백관 이하의 수공화보다 비싸고 화려했다. 정재에 따라 관모에 수공화를 여러 개 꽂기도 하였다. 준화는 2개의 용준(龍樽)에 홍도화와 벽도화를 꽂아서 2개의 주칠한 아가상(阿架床)에 각각 올렸다. 아가상과 용준을 홍색 무명 얼기로 서로 묶어서 준화가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하였다. 정조·혜경궁·군주들만 사용한 상화는 대수파련, 중수파련, 목단화, 월계화, 사계화, '별(別)'자가 붙은 홍도화 등이었다. 내빈과 신하들이 사용한 상화는 소수파련과 홍도화였다. 봉수당 진찬에서 수공화·준화·상화에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복숭화꽃[도화(桃花)]으로, 복숭아는 장수와 벽사의 의미가 있었다. 그 외에 사용된 여러 종류의 꽃과 문양은 길상적인 의미였다. 이상의 연구 결과가 정조대 채화의 용도별 특징과 사용방법에 관해서 이해하고, 궁중잔치 재현행사와 전통문화콘텐츠 및 궁중채화 제작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동궐(東闕) 추경원(秋景苑)의 조영과 변천에 관한 고찰 (A Study of the Construction and Change of Chugyeongwon in Donggweol)

  • 오준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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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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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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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본 연구는 동궐(東闕)에 실존했던 추경원(秋景苑)의 조영과 변천 양상을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세부적으로는 추경원의 조영 위치와 범위, 조영 배경과 의도, 소속 체제와 공간적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추경원은 창경궁 함인정(涵仁亭) 주변 또는 시민당(時敏堂)과 진수당(進修堂) 사이의 공간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관련 사료에 따르면 추경원은 도총부(都摠府) 서쪽, 협상문(協祥門) 안쪽, 숭문당(崇文堂) 인근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동궐도형(東闕圖形)"을 통해서도 각각의 조건에 부합하는 추경원의 조영공간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적 실측도 형식의 "창경궁배치도(昌慶宮配置圖)"에 따르면 오늘날 추경원은 창경궁 문정전(文政殿)과 숭문당 남쪽의 녹지공간에 해당한다. 둘째, "동궐도(東闕圖)"에서 추경원은 담장으로 한정된 대지에 수목들이 생육하던 녹지공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부에 일체의 인공적 시설은 도입되지 않았다. 또한 추경원은 주변 대지보다 표고(標高)가 높은 지형에 입지했다. 특히 추경원의 구성 형식과 입지 특성은 한양에 소재했던 궁궐 외원(外苑)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궁궐 외원의 운영 양상을 고려하면 추경원 역시 지세(地勢)의 보존과 배양(培養)을 위해 조영되었다고 판단된다. 셋째, 조선 후기에 걸쳐 추경원은 동궁(東宮)과 함께 창덕궁 또는 창경궁 소속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추경원은 동궁 영역에 포함된 왕실정원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래 담장과 협문(夾門)으로 구성되었던 추경원의 서쪽 경계부는 이후 담장과 행각(行閣)이 결합된 형식으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추경원은 각종 개발행위로 인해 점차 변질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소실(消失)되어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동궐도(東闕圖)>의 러버쉬팅변환을 통한 창덕궁 돈화문 지역의 입체적 식생 경관 추정 (Estimation of the Three-dimensional Vegetation Landscape of the Donhwamun Gate Area in Changdeokgung Palace through the Rubber Sheeting Transformation of )

  • 이재용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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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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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8-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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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연구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의 분석을 통해 창덕궁 돈화문 지역의 식생 경관을 입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하였으며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궐도>에 묘사된 수목은 17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수목 표현 입문서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을 토대로 유형의 구분이 가능하였다. 분류 결과에 따라 <동궐도>의 돈화문 지역에 표현된 수목은 10종 50주로 확인되었다. 둘째, <동궐도>의 입면 제작 축척을 이용하여 그림에 묘사된 수목의 실제 크기를 산정할 수 있었다. 산출된 수목의 수고는 최소 4.37m에서 최대 22.37m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동궐도> 제작 이전부터 창덕궁에 생육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노거수와의 비교를 통해 그림에 묘사된 수목들이 과도하지 않게 현실감 있는 크기로 제작된 것이 확인되었다. 셋째, <동궐도>의 러버쉬팅변환(Rubber Sheeting Transformation)을 통해 현재 수치지형도에 <동궐도>의 식재 평면도 제작이 가능하였다. 특히, 변환 지역의 세분화와 통제점 추가를 통해 제작된 평면도의 정밀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 작성된 <동궐도>의 식재 평면도를 통해서 수목의 위치와 밀도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동궐도>에서 취득된 수목의 형상 정보와 식재 평면도를 이용하여 3차원 식생 모델의 제작이 가능하였다. 3차원 모델은 실제 사람의 눈높이에서 조망축, 스카이라인, 주변으로의 개방과 차폐 정도 등 현황과의 입체적 경관 비교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당시의 조망 특성을 검토하는데 유용하였다. 본 연구는 기존에 논의되어 온 <동궐도>의 사실적 표현을 입증하고 이에 근거하여 기록화에 묘사된 동궐의 식생 경관의 원형을 규명하기 위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동궐도(東闕圖) 판장(板墻)의 공간통제 효과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Spatial Control Effect of Panjang in Donggwoldo)

  • 하유정;김충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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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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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6-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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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공간구문론(Space syntax)을 이용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의 판장의 설치에 따른 주요 권역별 공간변화를 비교하여 판장의 공간분할 기능과 역할을 재해석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동궐도>의 공간을 단위 공간으로 분해하기 위한 설정 기준을 마련하였고, 판장의 설치 전·후에 따라 2개의 볼록공간도를 작성해 공간구문변수인 연결도, 통제도, 통합도 값을 산출하여 비교분석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궐도> 내 가림시설은 전각공간에 대한 변수의 평균값을 비교하였을 때, 동궐의 전체적인 배치에서 통제와 연결은 영향이 크지 않았다. 다만 특정 권역 내 공간의 접근성 측면에서 영향을 주었다. 가림시설이 집중적으로 설치된 내전과 동궁 그리고 후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동과 접근에 제한을 주었다. 둘째, 판장은 내전과 동궁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공간의 활용방식에 적극적으로 이용된 시설로 판장의 설치에 따른 공간의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기능에서도 차이가 확인되었다. 내전의 수정전 권역과 희정당 권역 그리고 동궁의 성정각 권역에 판장을 설치함으로써 개방적이고 통제성이 높았던 공간이 통제성이 낮은 폐쇄적인 공간으로 변모하였고 사적인 공간이 조성되었다. 동궁의 완영당 권역은 판장을 여러 방향으로 설치함으로써 공간의 깊이를 증가시켰다. 이는 거쳐서 오는 공간의 수가 증가됨으로써 자유롭고 은신이 가능한 공간이 조성되었다. 셋째, 판장은 기존 선행연구에서 밝혔던 '시선차단·공간분리·동선조절'의 기능 이외에 '접근통제가 용이한 공간'을 조성하였다. 일정한 공간으로 유도함과 동시에 동선이 집중됨에 따라 접근 통제가 가능한 공간이 되었으며, 판장의 개수와 배치에 따라 집중형 통제공간과 분산형 통제공간을 조성하였다. 본 연구는 그 간 가림시설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연구 외에 판장에 대한 기능을 수학적 모델로 분석하여 특정 공간속에서 판장이 어떠한 양상으로 공간을 통제하였는지 수치적으로 확인하였고, 공간의 통제와 연결, 은신과 개방성 등의 해석으로 연구의 방법을 확장한 것에 의의가 있다. 또한 연구의 방법론이었던 공간구문론을 <동궐도>에 적용하기 위해 궁궐의 건축 및 조경요소의 단위공간 분할 및 연결 유형에 따른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궁궐과 유사한 전통주거단지에서도 적용이 가능한 분석툴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공간구문론의 분석을 통해 결과적으로 제공되는 것은 공간조직이 가지는 구성적 특질을 표현하는 숫자들로 제한된 체계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한계가 있다.

고려시대 왕실호위제도의 사적 고찰 (Historical Review on the Security Service for the Royal Household in the "Goryeo" Era)

  • 이성진;김의영;이종환
    • 시큐리티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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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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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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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고려시대의 왕실 호위라 함은 오늘날로 보면 국가원수에 대한 경호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의 독특한 정치제도가 완성되기까지는 신라시대나 태봉국의 제도를 답습하여 왕의 신변을 중심으로 경호가 실행되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과 6위라는 8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2군은 6위보다 위였으며 이는 응양군(鷹揚軍)과 용호군(龍虎軍)으로서 이를 근장(近仗)이라고 불렀다. 이를 오늘날의 공경호와 관련을 지어보면 근접경호에 해당된다. 고려 귀족 사회의 안정기에 귀족문화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그 뒤로 귀족분열과 상극대립으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는 가운데 무신란이 일어나고 무신들이 집권함으로서 왕의 신변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최씨 무인집권시대에 이르러 무인집권의 안전을 위하여 도방을 설치했고 최우 시대에는 그의 문객들을 모아 사병들뿐만 아니라 정방, 서방, 등의 문신을 거느려 인사행정을 담당케 했다. 몽고에 항쟁하던 시대에는 무신통치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를 중심으로 항쟁했다. 최씨 정권시대의 그들 나름의 국가관과 국가 호위의 정신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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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서풍(書風)에 나타난 복고적 성향 고찰 (A Study on the Reactionism Tendency in the Calligraphy Style of Changam(蒼巖) Lee Sam-man(李三晩))

  • 박재복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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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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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57-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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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사유(思惟)와 지향(志向)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동안 창암(蒼巖)에 대한 연구는 서론과 작품의 형태미를 중점적으로 논의하였을 뿐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사유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창암의 작품은 이광사(李匡師)의 서풍을 계승하면서 복고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해서 같은 시기 활동하던 북학파의 영향이 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창암의 이러한 서풍을 '복고적 성향'이라고 명명하고, 그의 이러한 복고적 사유가 학서(學書) 과정과 작품에 나타난 구체적 양상을 살펴보았다. 창암은 진적(眞跡) 친필(親筆)자료들을 중시하면서 행초서(行草書)를 즐겨 썼다. 그러나 학서 과정에서 항상 필력을 강조하여 한위(漢魏)의 글씨에 근본을 두었고, 행초서를 쓰더라도 반드시 해서(楷書)를 먼저 익혀 그 필력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창암은 평생 동안 왕희지(王羲之) 서풍의 소해(小楷)로 된 작품들을 많이 남겼는데, 이는 조선후기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가들이 왕희지의 해서, 특히 소해를 전범으로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경향은 마음의 스승인 이광사의 영향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암은 또한 왕희지의 법첩(法帖) 글씨에 부족한 필세를 보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흔적들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다른 서가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는 먼저 서예이론에 있어서는 한위(漢魏)의 고법(古法)을 중시하여 채옹(蔡邕)과 종요(鍾繇)를 근본으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대해(大楷)에 있어서는 <구루비(??碑)>의 필세가 가미된 <예학명(?鶴銘)>과 위(魏) 무제(武帝)의 글씨, 안진경(顔眞卿)의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과 김생(金生) 글씨 등을 끊임없이 연마하였다. 특히, <구루비>와 <예학명>의 필의(筆意)를 이용한 그의 말년 작품은 기본적으로 해서인 <예학명>의 자형(字形)에 <구루비>의 구불구불한 형세(形勢)를 취해 자신의 독특한 서풍을 보여주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석인상의 조영시기와 훼손도 진단 및 보존관리 (The Damage Assessment, Construction Point of Time and Deterioration Diagnosis and Conservation Maintenance of Stone Statues Around the Stone Pagoda in Mireuksaji Temple in Iksan)

  • 이동식;이연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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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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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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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익산 미륵사지 석탑 석인상은 639년경 석탑이 조영된 이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탑 주변에 조성되었다. 이 석인상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며, 탑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석인상의 표면은 삭박되어 뚜렷한 도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져 있다. 그러나 남서 석인상은 세 방위(서북 북동 동남)에 놓인 석인상에 비해 물성은 약하지만 도상이 뚜렷하게 잘 남아 있다. 이러한 석인상의 표면 상태는 석인상이 위치한 노출환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세 방위에 놓인 석인상은 그동안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남서쪽에 놓인 석인상은 17세기경 석탑 주변에 석축을 축조하면서 석축 안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외부 저해환경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약 400여 년간 다른 환경에 놓여 있었던 석인상은 차별적인 풍화현상을 보인다. 즉 세 방위(서북 북동 동남; $176{\cdot}109{\cdot}273kgf/cm^2$)에 놓인 석인상은 원래 물성이 좋았지만 삭박에 의해 도상이 불분명하고 생물의 침해가 심한 반면, 남서쪽에 놓인 석인상은 원래 물성($133kgf/cm^2$)은 좋지 않았지만 흑색오염물과 입상 분해 현상이 관찰될 뿐 도상형태가 잘 남아 있다. 석인상을 외부에 그대로 노출시켜 보존하는 것은 석인상의 형태적 보존을 위해서 권장할 만한 보존 관리방안이라 할 수 없다. 미륵사지 주변에 대한 미기후 환경 데이터를 적용해볼 때 미륵사지는 해를 거듭할수록 강산성비가 내리는 강한 풍화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인상의 형태적 보존을 위해서는 석인상이 있었던 원래의 위치를 고려한 보존 관리방안보다는 현재의 도상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는 보존 관리방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해원상생사상의 평화적 가치와 현대적 의의 (The Value of Peace and the Modern Significance of Haewon Sangsaeng)

  • 배규한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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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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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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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의 목적은 강증산(姜甑山, 1871~1909) 성사(聖師)의 해원상생(解冤相生)사상에 관한 평화적 가치를 모색하고, 그 현대적 의의를 조명하는 것이다. 증산은 구한말인 1871년 탄강하여 1909년 화천할 때까지 광구천하의 인류대망을 실현하기 위해 천지인 삼계를 근원적으로 혁신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 1901~1909)를 실행한 역사적 대종교가로 관련 종교계와 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증산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하나는 낡은 질서의 청산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예시하는 '후천개벽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 구제와 세계평화의 근본원리인 '해원상생사상'이다. 여기에서 '개벽'은 "적극적 평화에 대한 종교적인 표현"과 다름 아니고, '해원상생'은 "전세계의 평화이며 전인류의 화평" 원리이다. 특히, 해원상생은 대순진리회의 종지로서 대순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사상이며, 증산의 천지공사를 관류하는 요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해원상생은 공존과 상생, 평화를 말하는 담론뿐만 아니라 학술의 장에서도 다양하게 논의되거나 인용되고 있다. 해원상생은 구체적으로 세계갈등, 지역갈등, 문화갈등, 이념갈등, 빈부갈등, 세대갈등, 인종갈등, 종교갈등 등과 같은 세계사적 갈등구조에서부터 현대사회에 노정된 다양한 상극적 구조와 부조화 영역에서 학술적으로 심도있게 논의되고 있다. 이와 관련한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주로 인간, 신명, 후천선경, 이상사회, 세계평화 등의 주요한 가치에 천착하고 있으며, 실천윤리, 실천철학, 실천원리, 관계의 조화, 윤리적 이상, 새로운 질서원리, 항구적 평화 등으로 조명되고 있다. 특히 해원상생의 윤리·철학·질서·원리로서의 의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랑·공존·조화·평화 등의 의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인간·신명·후천선경·이상사회·세계평화 등에서 그 가치가 발현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그간의 연구를 토대로 증산의 해원상생사상의 계승과 정립에 관한 사상적 연맥을 살펴보고 그 평화적 가치를 검토해봄으로써, 오늘날 해원상생의 원리와 사상이 세계와 인류에 던지는 그 현대적 의의를 모색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