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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생태계 상생전략과 기업건강성효과: 삼성전자와 협력업체의 상생경영사례를 중심으로 (Cooperation Strategy in the Business Ecosystem and Its Healthiness: Case of Win - Win Growth of Samsung Electronics and Partnering Companies)

  • 성창용;김기찬;인성용
    • 기업가정신과 벤처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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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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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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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제품의 복잡성이 증대될수록 기업의 전략은 나홀로(stand-alone)전략과 경쟁중심 전략에서 기업생태계 전략과 협력전략으로 이행할 필요성이 높아진다. 기업의 상생경영 및 동반성장이란 기업생태계 협력전략을 통해 대기업과 협력기업간의 기업건강성을 추구하여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을 하기 위한 노력이다. 본 연구는 기업 간 상생경영 및 동반성장 전략을 통해 기업생태계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이론적 명제를 삼성전자 협력업체의 사례분석과 종단적 자료에 기반한 추세분석을 통해 검증해보고자 한 것이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중소기업생태계의 취약점의 하나인 글로벌화와 해외시장개척의 정도를 주요한 성과척도로 활용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중소기업들이 연구개발과 창조성노력이 해외시장개척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연구개발 패러독스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외시장 개척없이는 기업생태계의 건강성 유지가 어려우며, 협력기업들은 글로벌 시장개척여부가 강소기업으로 가는 진화경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기업생태계 건강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COPP 모델의 4대요소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COPP 모델이란 창조성(Creativity), 시장성(Opportunity), 생산성(Productivity), 그리고 선제적 대응성(Proactivity)이 선순환 해야 기업생태계의 지속가능성장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선제적 대응성(Proactivity) 이란 현재 만들어진 이익을 미래환경변화에 미래 선제적으로 투자하려는 기업가정신의 발로이며, 이러한 미래투자 없이는 현재의 저주(Curse of Incumbency)를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모델을 중심으로 삼성전자 동반성장의 주요 성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장성이 창조성, 생산성, 그리고 수익창출의 매개변수가 되고 있음을 발견 하였다. 즉, 수출(시장성)하는 협력기업일수록 연구개발투자(창조성)가 기업의 생산성, 수익성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반면 수출을 하지 않는 협력업체일수록 연구개발투자가 수익 성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둘째, 창조성, 시장성, 생산성, 미래 선제적 대응성의 순환 구조에 있어서, 선제적 대응성의 결과인 미래를 위한 연구개발비 투자를 많이 할수록(선제적 대응성) 특허를 많이 등록(창조성)하고, 특허를 많이 등록한 기업은 수출을 많이 하고(시장성),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은 영업이익(생산성, 수익성)이 높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중소기업은 글로벌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경쟁력 보완 없이 지속적인 성장은 어렵다. 본 연구의 결과, 미래를 위한 투자인 선제적 대응성이 높은 기업일수록 창조성-시장성-생산성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글로벌강소기업으로 진화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전략적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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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의 기원과 옹중석 (The Origin of Changseung and Ongjung Stone)

  • 정승모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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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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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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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는 조형물들은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기능이 서로 달라 엄밀한 구별이 필요하다. 이 글은 장승의 기원과 함께 역사적인 변화과정을 더듬어 이 구조물이 갖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구분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위 '석장승'의 다양한 기원과 기능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시기에 사찰에서는 장생, 또는 관련 석물을 세웠는데, 이 중 '통도사국장생석표'는 석표(石標)라기보다는 석비(石碑)의 기능을 갖는다. 석비에 음각된 명문을 보면 이전의 판아(判兒)처럼 다시 세우라고 하였는데, 판아란 역귀(疫鬼)를 쫓는다는 종규(鍾郡)를 말한다. 명문 내용은 통도사의 영역을 장생으로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허목의 "월악기(月嶽記)"에 실려 있는 한준겸(韓浚謙)의 기사를 보면 도갑사 국장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며 '국장생'이나 '황장생'이라고 새긴 입석은 장생이 아니라 표석, 즉 장생표(長生標)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정(里程) 기능을 하는 후를 장생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사찰 장생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 사찰 장생의 생(生) 자에 나무 목(木) 변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요즈음과는 달리 조선시기에는 비보 성격을 갖는 사찰 석상이나 읍성풍수물을 장승이라고 부른 경우는 찾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제주도 '돌하르방'을 두고 장승이라고도 불렀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의하면 제주목사 김몽규(金夢奎)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고 했는데, 옹중석은 대개 고대 제왕(帝王)이나 대신(大臣)의 능묘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을 지칭하는 말이다. 옹중석은 엽승[壓勝]을 위한 풍수물로도 나온다. "광주읍지(光州邑誌)"(1899년간)에는 수구(水口)를 만들고 석옹중 2기를 마주 세워 그 기를 진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읍치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2기씩 세워진 석물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과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읍성풍수물인 이것 역시 석장생이나 장승, 또는 당산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도교적인 개념인 상원(上元)과 하원(下元)이 붙은 주장군이나 당장군은 이후 사찰 석상의 명문으로 자주 등장하고, 이후에는 이표 장승에도 붙는다. 사모를 쓴 북한산성 옹중석을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많던 옹중석들은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제주의 옹중석과 부안 읍성의 석상은 위치 이동이 적어 옹중석의 기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석상들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장생(長生)과 기능상 가장 관련이 깊은 듯하다. 즉, 과거의 장생처럼 18세기 초중반의 석상들은 읍성, 또는 사찰의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찰 석상의 설립시기는 양전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때이기도 하지만 속세에서는 산송(山訟)이 활발해지는 때라 사찰에서는 비보와 함께 영역 표시를 위해 석상들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승으로 통칭되는 목인과 석상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세워진 것들이다. 그 출발은 고려시기 사찰의 장생(長生)으로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석물, 또는 석상이었다.

시조의 변이 양상 (The Aspects of Change of Sijo)

  • 강명혜
    • 한국시조학회지:시조학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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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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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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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시조는 발생초기부터 당대의 역사 시대적 배경에 따라 그 틀과 내용이 조금씩 변하면서 융통성 있고 유연하게 적응해 왔다. 이런 점이 당대의 시대적 배경이나 사상, 실태 등을 반영해서 당시의 독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시조를 시조답게 하는 시조성만은 그대로 고수해 왔기에 '시조'라는 장르가 현재까지도 생존할 수 있었다. 어느 시대나 어떤 배경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3장이라는 정형성은 지켜졌으며, 3, 3조나 3, 4조를 유지했고, 또 종장의 첫 구 3자도 고수했다. 이러한 시조성은 시대적인 간극에도 불구하고 '시조'라는 공분모 안에 모두 수렴시킬 수 있는 동인을 마련했다. 한국시가에 있어서 시조는, 공적 기능에서 사적 기능으로 변모가 이루어진 최초의 양식으로서. 그 변이과정을 살펴본 결과. 고려말${\sim}$조선조의 평시조는 그 당시 조류에 부합해서 시조 텍스트를 재도지기(載道之器)로 보아 이중적인 의미의 채색, 상징성 부여, 다채로운 문장 수식 등은 나타나지 않지만, 명천도(明天道) 정인륜(正人倫) 지향하는 성현의 가르침을 온유돈후(溫柔敦厚)하게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주제는 주로 그 당시 상황과 부합되는, 송축, 절의, 정쟁, 훈민, 한정, 강호도가, 안빈낙도, 애정 등이었다. 조선조 후기에 오면서는 사설시조(辭說時調)가 활성화하기 시작한다. 사림파의 득세와 양란(兩亂), 실학의 도입 등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인식의 변화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가 시가 양식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사설시조는 당대의 봉건주의 파괴, 유교적 모랄에 대한 반발, 근대적 특성 보유 남녀평등등 사상, 지배층에 대한 고발 및 저항정신 둥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저항적 리얼리즘적 현실지향적인 성향을 띠며 특히 고발문학 저항문학의 지반을 형성하는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잡다한 일상사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현실 생활에 대한 깊은 관심, 그에 대한 사실적, 구체적 표현은 사실주의 정신의 매개항이 된다는 점에서 근대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1905년 이후 신문에, 형식이나 내용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존의 평시조나 사설시조에서 변이된 형태를 취하는 일군의 시조가 등장했다. 변이된 형태는 시조 텍스트의 형식과 내용뿐만이 아니라, 수용적 측면에서도 일어났다. 이때부터 시조는 '읊고 부르는 형태'에서 주로 '읽는 기록물'로 인식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변이 된 시조 형태란, 당대의 시대를 풍자하는 '흥, 내지 흐응'이 삽입된 것, 종장의 어미가 생략된 것 등을 말한다 이러한 형식은 긴박한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특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고시조의 틀, 즉 율격이나 자수에서 많이 이탈되어서인지, 그 생명은 길지 못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해서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조 창작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는데,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작(詩作) 초기에는 서구지향의 시와 시조들 병행해서 쓰던 육당 최남선이, '조선국민문학(朝鮮國民文學)으로서의시조(時調)'라는 글을 통해 시조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언급하면서 시조부흥 운동을 선도한다. 그는 시조집, '백팔번뇌'도 출간하는데. 그의 전 시조집을 관통하는 것은 '조국 사랑'이라는 일 주제였다. 결국 육당은 고시조를 민족정신의 일환으로 보고, 시조양식을 채택하여 그 당시의 역사 사회적인 상황에 부합되는 주제를 표출한다. 결국 육당도 시조 텍스트를 재도지기(載道之器)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현대의 시조는 현대성(現代性)과 시조성(時調性)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는 어려움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전자에만 치중한다면 자유시와의 변별성이 문제가 되며, 후자를 고수하려니 고루하고. 시적 묘미가 없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많은 작가들에 의해 평시조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시조가 지니는 원형성에 대한 매력을 감지해서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 중 특히 선정주의 작품에 주목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특히 근대의식, 사회비판정신, 고발의식, 사실주의 정신 구현, 서민의식, 산문체 ·일상어 지향 등, 사설시조의 특징 및 성향을 잘 구현, 반영하면서 그 맥을 잇고 있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렇듯이 현대의 시조 작가들은 우리의 고시가 형식을 다양하게 선택해서 다양한 주제를 표출하고 있었다. 여기서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시조의 유연성은 앞으로 시조의 생명을 항구적으로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역사 시대적 변화와 상황 하에서 다시 새로운 양상을 취할 가능성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이 '시조'는 한국인의 '영원한 정형시 장르'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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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에서 다중 몰입도 측정을 위한 시스템 개발 (System Development for Measuring Group Engagement in the Art Center)

  • 류준모;최일영;최이권;김재경
    • 지능정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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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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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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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몰입은 관람객이 콘텐츠를 관람할 때 관람객들이 콘텐츠에 몰두하고 있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관람객의 몰입경험은 콘텐츠의 만족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공연 같은 콘텐츠를 제공하는 기업들은 콘텐츠의 흥행을 위해 관람객의 몰입도를 측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설문 등의 표본조사 방법을 통해 관람객의 몰입도를 측정 연구는 방송분야 등 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몰입도 측정방법은 콘텐츠 관람 이후 설문을 실시하기 때문에 몰입도를 실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몰입도 측정의 정확성이 저하되는 문제 등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리적 반응이나 얼굴 표정 분석, 그리고 움직임 관찰 방법 등을 이용하여 몰입도를 측정하는 연구가 수행되고 있다. 생체 신호를 이용하여 몰입도를 측정하는 연구의 경우, 1인을 대상으로 생체신호를 측정할 뿐만 아니라, 많은 데이터 처리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는 단점이 있어 많은 관람객이 관람하는 공연장에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얼굴 표정인식 통해 몰입도를 측정하는 경우도 1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밝은 조명의 실험실 환경에서만 가능하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또한 관람객들의 움직인 동기화를 이용하여 몰입도를 특정한 연구는 다중관객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이는 실험실 환경에 한정하여 적용된 사례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공연장, 시사회관 등 많은 관람객들이 콘텐츠를 관람하는 실제 환경에서 다중관람객이 다중몰입도의 정량적 평가를 위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개발하였다. 제안된 시스템은 외부장치, 서버, 내부장치 등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DMC 홍보관에 상설 전시장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데이터를 획득하고 있다. 제안하고 있는 시스템을 활용하면 콘텐츠의 어느 구간에서 관객들이 몰입을 하고 있는지, 어느 구간에서 몰입을 하고 있지 못한지 분석가능하기 때문에, 향후 콘텐츠 제작 및 마케팅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생체골의 열전도성 및 열처리된 골의 염전력 변화에 대한 실험적 연구 (Experimental Studies on Heat Conductivity of Human Bone and Torsional Strength of Pasteurized Porcine Tibia)

  • 박일형;김신근;신동규;인주철
    • 대한골관절종양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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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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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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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5
  • 인체골 4 시편(specimen)과 돼지 경골 25쌍을 이용하여, 생체골의 열전도성 측정과 열처리후 열처리온도와 시간에 따른 골의 염전력을 실험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체골에 있어서 골수강을 제거하지 않고 $60^{\circ}C$의 항온식염수에서 열처리하면, 골심부의 온도가 $20^{\circ}C$에서 $58^{\circ}C$에 도달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경골근위부가 32분 50초, 대퇴골 원위부가 30.분, $80^{\circ}C$ 항온조에서는 경골근위부가 12분 50초, 대퇴골 원위부가 11분 10초 소요되었다. 돼지 경골간부의 피질골내부(endosteum)에 열전대를 부착하고 뼈 양끝을 밀봉하여 같은 실험을 행한 결과 $50^{\circ}C$까지는 시간에 비례해서 일정한 비율로 온도상승이 이루어 졌으며, $20^{\circ}C$에서 $58^{\circ}C$에 이르는 시간이 $60^{\circ}C$ 항온조에서는 7분, $70^{\circ}C$에서는 3분 30초, $80^{\circ}C$에서는 2분이었다. 따라서 임상에서 골수강을 제거 후 장골의 간부(shaft) 만을 항온조에 달굴때는 골구강내에도 데워진 심염수로 가득차게 되므로 상기 시간의 절반이 못되는 짧은 시간내에 피질골의 내부가 $58^{\circ}C$에 이르리라고 판단되었다. 골수강을 소파하지 않은 돼지 경골을 각각 4쌍씩 우측만을 $60^{\circ}C$ 35분, $80^{\circ}C$ 15분 열처리한 후 실험군의 최대염전력은 대조군과 비교할 때 +7.0%, -5.1%, -3.2%, -4.2%의 변화가 있었고, $80^{\circ}C$ 15분 열처리후는 -4.3%, -3.8%, -1.4%(1예는 실험 오류로 제외됨)의 변화가 있었다. 골수강을 완전 제거한 되재 경골을 각각 4쌍씩 우측만을 $60^{\circ}C$, $70^{\circ}C$, $80^{\circ}C$에서 15분 열처리 후 실험군의 최대염전력은 대조군과 비교할 때 -3.4%, -4.2%, -0.7%, +2.7%의 변화가 있었고, $70^{\circ}C$ 15분 열처리후는 -2.8%, -3.9%, -2.1%(1예는 실험 오류로 제외됨)의 변화가 있었으며, $80^{\circ}C$ 15분 열처리후는 +5.2%, -4.4%, -2.9%, -0.3%의 염전력 변화가 있었다. 그러므로 골수강을 제거하지 않고 $80^{\circ}C$ 35분, $60^{\circ}C$ 15분 열처리 하거나, 골수강을 완전소파 후 $60^{\circ}C$ 15분, $70^{\circ}C$ 15분, $80^{\circ}C$ 15분 열처리해서는 각군사이에 염전력의 유의한 차이는없었다. 이상의 결과로 돼지 경골의 경우 $60^{\circ}C$ 항온에서는 35분까지, $80^{\circ}C$이하의 항온에서는 15분까지 열처리하여도 골강도에는 거의 영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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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무이구곡 바위글씨(石刻)의 분포와 내용 및 유형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Distribution, Contents and Types of Stone Inscription of Wuyi-Gugok in China)

  • 노재현;정조하;김홍균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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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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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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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문헌연구와 현장조사를 통해 중국 무이구곡에서 시지각되는 바위글씨의 분포와 형태 그리고 내용에 따른 바위글씨의 유형화를 시도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이산 무이구곡에는 1곡부터 9곡까지 모든 곡에 바위글씨가 현존하며 그 수는 총 350방으로 확인되었다. 둘째, 바위글씨의 분포 분석 결과, 제5곡에 74방(21.2%), 제6곡 67방(19.2%), 제1곡 65방(18.6%), 제2곡 60방(17.2%) 그리고 제4곡에 53방(15.2%)이 확인되어 이들 5곡에 전체 319방(91.1%)의 바위글씨가 집중됨으로써 이들 곡의 문화경관성이 풍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셋째, 바위글씨 개체수는 1곡 수광석에 41방(22.6%), 6곡 천유봉 호마간에 29방(8.3%), 4곡 제시암에 23방(6.6%), 2곡 영암에 22방(6.3%), 6곡 향성암에 21방(6%), 5곡 운와에 19방(5.4%)·복호암에 18방(5.1%)·은병봉에 17방(4.9%), 4곡 대장봉에 14방(4%), 1곡 대왕봉, 4곡 금곡암에 각각 12방(3.4%)의 바위글씨가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11개소의 개체 바위에 총 228방(65.1%)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 이들 바위의 지명도와 문화적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넷째, 무이구곡 바위글씨는 무이산의 지모 및 지형지질에 대한 찬미, 무이군과 지명과 관련된 설화, 공맹(孔孟)의 사상을 담는 유가적 교훈, 주자의 무이도가와 관련된 경명과 주자의 행적 등 성리문화의 상찬 그리고 동천복지의 세계관과 도화원기의 선경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삼교와 관련된 유·불·선 명인들의 고사를 포함한 중국 전통문화와 관련한 선인고사(先人古事) 등의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운 역사와 신화, 전설을 담는 역사문화 풍경을 내포하고 있다. 다섯째, 무이구곡 바위글씨의 내용을 바탕으로 분류한 결과, 경명·찬경·기유·기사·철리·서회·종교·길어·표어·서지제각 그리고 관문고시 등 11개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이 중 찬경제각(贊景題刻)이 102방(29.1%), 경명제각(景名題刻)이 93방(26.6%) 그리고 기유제각(紀遊題刻)이 61방(17.4%)의 순으로 나타나 무이구곡의 바위글씨는 경물명의 제시와 경관 찬미 그리고 유람을 기념하는 성격이 특히 강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섯째, 연구대상 6개 구곡도와 무이구곡 바위글씨 간의 상호텍스트성 분석 결과, 매체간의 전파방법은 대부분 '인용'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밖에 확장, 반복, 연장 그리고 압축을 통해 상호매체성을 유지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단기간 영양교육 캠프가 비만아동의 식품과 영양소 섭취에 미치는 영향 (Effect of Short-term Nutrition Education Camp on Food and Nutrient Intakes of Obese Children)

  • 신은경;이진화;이연경;이혜성
    • 한국식품영양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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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4권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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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87-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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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본 연구는 단기간의 영양교육캠프가 비만아동의 식품과 영양소 섭취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자 하였다. 연구대상은 경상북도 구미시에 거주하는 비만도 $130\%$이상 비만아동 30명이었으며, 이들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2회의 영양교육 캠프를 실시하였다. 식품 및 영양소 섭취상태는 영양교육 캠프 전$\cdot$$\cdot$후의 3회에 걸쳐 3일간 식품기록법을 이 용하여 조사되었다. 평균연령은 남녀 각각 10.2, 10.0세였다. 평 균 체중은 남녀 각각 $51.0\pm9.1kg,\;52.7\pm10.4kg$이었고, 평균 신장은 남녀 각각 $144.7\pm6.8cm,\;142.2\;8.7cm$였으며, BMI는 남아가 $24.3\pm4.5$, 여아가 $26.2\pm5.4$였다. 일일 평균 식품 총섭취량은 캠프 전 $1646.64\pm1403.6g$, 캠프 중 $1438.6\pm 1130.6g$, 캠프 후$1412.66\pm881.43g$으로 차츰 감소하였다. 이중에서 식물성 식품군으로부터 $74.6\~66.7\%$를 섭취하였고, 동물성 식품군으로부터 $25.4\~33.3\%$를 섭취하였다. 섭취량이 가장 높았던 식품군은 곡류였으며, 그 다음이 과실류, 우유류, 채소류, 음료류, 육류, 난류, 두류 순이었다. 곡류, 두류의 섭취량은 영양교육 캠프전에 비해 캠프 중과 후에 유의하게 낮았고, 난류의 섭취는 캠프중에 감소하였다가 캠프후에 다시 증가하였으며 어패류의 섭취량은 캠프 중과 후에 유의하게 높아졌다. 영양교육 캠프 후 섭취량이 유의하게 변화한 것은 에너지와 당질 및 비타민 C였다. 에너지 섭취량은 캠프 전에 RDA의 $105.9\%$에서 캠프 후에 RDA의 $91.6\%$로서 유의하게 낮아졌으며 당질의 섭취량도 캠프 전$(323.02\pm235.83\;g/d)$에 비해 캠프 후 $(282.57\pm143.41\;g/d)$에 유의하게 감소하였다. 비타민 C의 섭취는 캠프 전$(108\%\;RDA)$에 비해 캠프 후$(166\%\;RDA)$에 유의하게 증가하였다. 비만아동들이 RDA에 비해 낮게 섭취한 영양소는 칼슘과 비타민 $B_2$로 나타났다. 3대 열량 영양소로부터의 에너지 섭취비율에서 지방 에너지 섭취율은 경우 기간에 따라 유의한 차이가 없었으나, 단백질 에너지 섭취율은 영양교육 캠프 후 유의하게 높아졌고, 당질 에너지 비율은 유의하게 낮아졌다. 동물성과 식물성 급원별 일일 주요영양소(단백질, 지방, 칼슘, 철) 섭취량은 영양교육 캠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칼슘은 동물성$\cdot$식물성 급원의 섭취 비율이 60:40, 철분은 20:80으로 나타났다. 곡류와 우유류의 에너지 섭취율은 캠프 전에 비해 캠프 중과 후에 유의하게 감소하였고, 난류의 에너지 섭취율은 캠프 중에 유의하게 낮았다. 단백질의 경우 곡류와 감자류, 채소류, 어패류로부터의 섭취율이 캠프 후에 유의하게 증가하였고, 지방은 곡류, 우유류로부터의 섭취율이 캠프 후 유의하게 감소하였다 칼슘의 경우 감자류와 우유류로부터의 섭취율이 캠프 중과 후에 유의하게 증가하였고, 난류로부터 유의하게 감소하였다. 철의 경우 감자류와 어패류로부터 섭취율이 캠프 중과 후에 유의하게 증가하였고, 곡류로부터의 섭취율이 캠프 중에 유의하게 낮았다. 비타민 A의 경우 해조류와 난류로부터의 섭취율이 캠프 후에 유의하게 증가하였고, 채소류로부터의 섭취율이 캠프 중에 유의하게 높았고 비타민 $B_1$은 채소류와 어패류로부터의 섭취율이 캠프 중에 유의하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조섬유의 경우 곡류로부터 얻은 양이 캠프 중과 후에 유의하게 감소하였으며, 콜레스테롤의 경우 난류로부터 얻은 양이 캠프 중에 유의하게 낮았다. 이상의 결과로부터 2주일간의 하계 영양교육캠프와 3일간의 동계 영양교육캠프 후 비만아동들은 식품 총섭취량과 곡류식품의 유의한 감소와 어패류 섭취량의 유의한 증가를 보였다. 영앙소 섭취면 에서는 열량과 탄수화물 섭취량의 유의한 감소와 단백질과 비타민 C 섭취량의 유의한 증가와 칼슘과 철분의 섭취 증가 양상을 보였다. 열량섭취에서는 당질 에너지 섭취율의 감소와 단백질 에너지섭취율의 증가를 보였다. 따라서 영양교육캠프의 실시가 비만아동들의 전반적인 식품과 영양소 섭취상태의 변화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강릉 연곡면 유등리 '유상대(流觴臺)' 곡수로(曲水路)의 조명(照明) (A Study on the Yousang-Dae Goksuro(Curve-Waterway) in Gangneung, Yungok-Myun, Yoodung Ri)

  • 노재현;신상섭;이정한;허준;박주성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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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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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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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 대상인 강원도 강릉시 연곡동 유등리 뱀골 하류의 너럭바위에 새겨진 '유상대(流觴臺)' 각자와 암각바둑판은 이곳이 유상곡수 놀이와 신선 풍류 행위가 이루어졌던 풍류처임을 확인시켜 준다. 3차에 걸친 정밀답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통일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운(道雲)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폐허가 되었고, 1954년에 재건된, 백운사 경내에 새겨진 '만월산 백운동천(萬月山白雲洞天)'이란 암각서는 뱀골 계곡에 선도적(仙道的)풍류와 선비문화의 전통이 면면히 스며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단서이다. 최백순이 1934년 편찬한 강릉의 읍지인 동호승람 제2권에 인종원년(1545)을 전후하여 '남전현(籃田縣)의 백운사는 율곡 이이, 성제 최옥 등 명유(名儒)의 강례처(講禮處)'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공간이 유서 깊은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호승람과 완역 증보임영지에 기술된 무오년, 즉 철종9년(1858) 김윤경(金潤卿)이 창건한 백운정(白雲亭)의 존재를 통해 누정 및 동천 경영의 흔적을 추론할 수 있다. 아울러 유상대 각자 바위 계류 건너 입석에 새겨진 '백운정동천(白雲亭洞天)' 암각서는 백운정 건립 3년 뒤인 철종12년(1861)에 조성되었으며, 유상대와 매우 깊은 연관성이 있는 상징적 표식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정황과 입지성을 전제로 유상대 곡수유구 흔적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유상대 주변 계류 및 암반에는 수량과 유속을 조절하기 위한 세분석(細分石)과, 유로와 잔을 가두기 위한 홈인 금배석(擒盃石)과 유배공(留盃孔)의 조탁 흔적 등을 발견하였다. 더불어 하단 암벽에서 '오성(午星)'이란 명기 아래 23인명의 각자를 발견하게 됨에 따라 이곳이 20C중반까지 유상곡수연의 성격을 갖는 풍류 문화경관의 거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공간에서는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 유상대를 중심으로 한 선비 풍류의 문화가 전승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유 불 선(儒 彿 仙)이 습합된 독특한 역사문화공간'이란 측면에서도 심도 있게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 23인명의 정체와 유상대 각자 주체 파악 등 유상곡수 등 풍류행위를 기록한 자료 발굴 등을 통해 본 공간의 성격을 보다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기록에 전해지는 암각장기판 또한 발굴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 바, 현재 콘크리트포장 도로의 파쇄를 통한 추가 유적의 발굴 및 노선 변경 등 원형경관 회복방안 또한 시급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서울시 가로수 역사와 수목 고찰 (A Study on the History and Species of Street Trees in Seoul)

  • 송석호;김민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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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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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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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서울시 가로수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수종 선정을 위한 기초연구로써 고문헌에 기록된 가로수 역사와 수종을 고찰하였다. 또한 다양한 수종 대안을 위해 전통조경수목을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가로수 역사는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2년(546), 고려 명종 27년(1197) 등에 가로수로 추정되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사료적 명료성은 부족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조선 초 세종 23년(1441)에는 국가의 역로(驛路)에 표목(標木)으로 가로수를 심은 것이 확인되며, 표목으로 식재된 가로수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가 확인된다. 조선 초 가로수제도의 시행은 단종 1년(1453) 기록으로 알 수 있으며 큰길 좌우로 소나무, 잣나무, 배나무, 밤나무, 회화나무, 버드나무 등이 식재되었고, 세조 5년(1459)에는 길가에 뽕나무를 심었다. 영조 연간에 그려진 정선의 『압구정』이나 『진헌마정색도』에는 가로수가 열식되어 있으며 이는 왕들의 행차, 한양 출입의 주요 도로, 마장(馬場)의 장소성, 수해에 따른 도로 보호와 표식 등의 복합적인 요인이 고찰되었다. 정조 연간에는 왕의 능 행차에 연관되어 소나무, 전나무, 버드나무 등의 가로수를 열식한 사례가 두드러지며, 이는 왕이 지나는 연도(輦道)와 해당 능역을 성역화하려는 가로수 식재기법으로 보았다. 개항 이후 고종 32년(1895)에는 국가에서 도로 좌우에 가로수를 심을 것을 장려하였고, 근대적 가로수 식재개념이 도입되었다. 당시 한양의 가로수는 사시나무가 속성수로써 주요하게 식재되었다. 서울시 가로수로 활용 가능한 고문헌 출현 교목은 삼국시대 17분류군, 고려시대 31분류군, 조선시대 55분류군이 추출되었으며, 16분류군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모두에서 중복적으로 3회 출현한 수목으로 역사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우수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외래수종이 유입되고 법제가 변화하면서 가로수제도의 현대적 수용이 이루어졌다. 1936년 경성부 권역의 확대에 따른 가로수 6개년 식수계획(1934-1940)이 시행될 당시 경성의 10대 가로수 수종은 '모니리페라'로 불린 현재 미루나무의 아종, 이태리포플러, 사시나무, 은백양 등의 포플러류가 1~4순위로 가장 많이 식재되었으며 수양버들, 아까시나무, 버즘나무, 양버즘나무, 은행나무, 네군도단풍이 5~10순위로 나타났다. 1930년대 중후반부터 버즘나무와 양버즘나무가 새로운 가로수로 소개되며 대규모 식재되기 시작하였고, 1942년부터는 피마잠의 장점이 있는 가죽나무를 가로수로 권장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57년 가로수 수종은 양버즘나무, 은행나무, 이태리포플러, 가죽나무, 미루나무, 수양버들 순으로 나타나 일제강점기 수종들의 순위변화를 보였으며, 양버즘나무와 은행나무의 비중이 높은 점에서 당시의 식재 경향이 현재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첨성대 이름의 의미 해석 (Semantic Interpretation of the Name "Cheomseongdae")

  • 장활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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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3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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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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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첨성대의 본질에 관한 현재의 가장 보편적인 가설은 천문관측대설이다. 천문관측대설의 근거는 주장하는 학자들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근거는 '첨성대'라는 이름이며, 이에 대한 타당한 비판은 지금까지 제기된 바가 없다. 본 연구는 '첨성대'에 내포된 의미를 밝히고, '첨성대'가 천문관측대설의 타당한 근거인지를 살펴보았다. 천문관련설은 '첨성대'를 주로 '첨+성+대'로 해석했다. '볼 첨(瞻)'자와 '별 성(星)'자와 '대 대(臺)'자의 조합인 '첨성대'는 '천문을 관측한 대'를 뜻한다고 주장해 왔다. 한편 종교관련설의 경우, '별 성'은 '하늘 천(天)'을 의미하며, 첨성대에서 바라 본 '하늘'은 불교의 천상세계인 도리천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본 연구는 『삼국유사』(1289±) 이전의 중국 기록에서 '첨성'의 용례들을 살펴보았다. '첨성'에 내포된 의미는 매우 다양하게 드러났다. '첨성+대'는 서술의 맥락에 따라서 '천문을 관측한 대'를 뜻할 수도 있고, '도리천을 우러러 본 대'를 뜻할 수도 있었다. 또한 '첨성'이 힌두교, 유교, 불교, 천주교, 도교와 같은 다양한 종교적 배경으로 실행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고, 불교의 '첨성'의 경우는 적어도 외도(外道)의 '첨성', 법도(法道)의 '첨성', 세속(世俗)의 '첨성'으로 나눠질 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술의 맥락에 따라서 '첨성+대'에 내포된 의미는 상당히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서술된 첨성대의 본질은 선덕여왕의 도리천 장례를 위한 묘탑(廟塔)으로 드러났다. 선덕여왕의 도리천 장례와 문무왕대의 사천왕사 건립은 신종원(1996)의 견해대로 밀교 승려 안함(안홍)에 의해 예언되었고, 『삼국유사』가 인용한 『별기』는 안함(안홍)의 참서(예언서)로 드러났다. 선덕여왕릉과 첨성대의 배치가 동지일출선에 정확하게 맞춰져 있음은 첨성대가 선덕여왕 유혼의 도리천 상생 통로였기 때문으로 판단되었다. 첨성대는 도리천으로 통하는 삼도보계(三道寶階)와 같은 '천국의 계단'를 가진 불탑이었고, '첨성대'는 『삼국유사』 왕력편의 '점성대'와 마찬가지로 '도리천을 우러러 본 대'라는 의미로 파악되었다. '첨성대'라는 이름은 천문관측대설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천문관련설을 총체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로 새롭게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