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cultural ex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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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전통가구의 유형에 따른 특성 비교연구 (A Comparative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by Type of Korean, Chinese and Japanese Traditional Furniture)

  • 김진옥
    • 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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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9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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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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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현대는 어느 시대보다도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 자국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타문화와 우리의 문화를 비교하는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 지역의 문화는 독립적으로 자연발생된 것이 아니라 인접 국가나 문화와 관련을 가지면서 변화, 발전하는 것이므로, 문화적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국의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더불어, 타문화와의 상호비교연구를 통해서 각각의 문화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은 예로부터 사회문화적으로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아시아권 중에서 한국 문화의 차별화된 정체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14{\sim}19C$ 한국 중국 일본의 전통가구의 유형을 분류하고, 가구의 유형별 특성과 조형적 특성을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보다 객관적으로 우리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동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에 대한 혼돈으로부터 보다 명확한 우리문화의 재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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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유구의 보존방법과 적용 (A Study on the Conservation of Excavated Features)

  • 안진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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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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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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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발굴유구에서 보존은 보존에 복원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여기서 복원은 유구 원래의 원형으로 복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발굴유구 보존은 수리복원의 개념이 함께 포함된 것이다. 발굴유구는 보존하는 위치에 따라 크게 현장보존과 이전보존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장보존은 발굴유구를 현장에 그대로 보존하는 것으로 유구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복토하는 복토 현장보존법과 유구를 노출된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노출 현장보존법이 있다. 유구가 발굴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전하는 것을 전제로 한 보존방법을 이전보존이라 하며, 세부방법으로 원형이전, 전사이전, 복제이전, 해체이전으로 나눌 수 있다. 원형이전은 유구의 원형을 그대로 다른 곳에 이전하는 방법이고, 전사이전은 유구 표면의 일정부분을 떼어내어 이전하는 것이다. 복제이전은 발굴된 유구의 형태를 본떠 이전할 곳에서 다시 복원하는 방법이며, 해체이전은 유구를 구성하고 있는 부재를 해체 이전하여 해체의 역순으로 복원하는 방법이다. 발굴유구의 보존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발굴유구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발굴유구를 둘러싼 여러 가지 환경 즉 사회 경제 문화 지역 상황에 따라 보존방법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 더 효과적인 발굴유구 보존을 위해 보존방법별로 좀 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방안을 도출하고, 인접학문과의 교류 및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접목시켜 발굴유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중국 중원 지역과의 비교를 통하여 본 소흑석구 8501호 석곽묘의 청동예기 (The Bronze Ceremonial Vessels of Xiaoheishigou Stone Cist Tomb 8501 seen through Comparison with the Chinese Zhongyuan Region)

  • 오강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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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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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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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영성현(寧城縣) 소흑석구(小黑石溝) 8501호 대형 석곽묘는 중국의 시기 구분으로 서주 후기에 조성된 무덤이다. 그런데 이 무덤에는 중국 중원식 청동예기는 물론 토착식 청동예악기와 토착식과 중원식이 혼합되어 있는 혼합식 청동예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소흑석구의 청동예기 조합은 같은 시기 중국 중원 지역의 예제와 정궤제(鼎?制)에 대비하여 볼 때 가장 낮은 신분인 사급(士級) 특일정(特一鼎)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중원 지역의 사급 고분들과는 달리 정(鼎)과 궤(?)를 제외한 다른 식기와 주기의 조합에서는 천자와 제후국(공국, 후국) 국군의 수준에 필적한다. 이러한 점은 악기가 부장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소흑석구 8501호 대형 석곽묘의 청동예기 가운데 토착식과 혼합식은 현지의 금속기 제작 기술을 고려할 때 자체 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서주식 청동예기는 형태와 문양은 물론 규격까지 중국 중원 지역과 동일하여 서주에서 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중국 중원 지역의 여러 제후국에서 제작하여 사용되던 해당 제후국의 보기(寶器)가 소흑석구에 부장된 배경은 하가점상층문화와 서주 사이에 양측과 빈번하게 교류하던 별개의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소흑석구 집단에 의한 약탈이라기 보다는 소흑석구 집단과 이들 집단 간의 경제적인 교역과 정치문화적인 상호 관계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 고대 당대(唐代) 민간 조경[사가원림(私家圓林)] 연구 - 출토된 명기(明器)와 낙양명원기를 중심으로 - (Research of private landscape architecture of the Tang Era in ancient China -based on excavated excellent articles and a book <洛陽名園記> called Nakyangmyungwonki-)

  • 박경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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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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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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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당대(唐代)의 출토유물인 명기와 낙양명원기를 중심으로 당대의 귀족 정원을 고찰한 결과, 산수경관인 가산과 연못이 정원의 중심이 되고, 여기에 누정을 짓고 화목을 심었다. 가산은 치석첩산(置石疊山)하고, 동굴을 만들었고, 명기의 석가산은 산지산세(山地山勢)는 험준, 층만첩장(層巒疊嶂), 녹색이 깔린 자리와 같고, 새들이 혹 산간에서 노래하고, 연못 호반에서 물을 마신다 라고 표현되었다. 연못은 착지인수(鑿池引水)하고 수계가 발달하였으며, 누정 건물로는 청(廳), 당(堂), 관(館), 정(亭), 대(臺), 누(樓), 각(閣), 사(榭) 등이 있다. 조경식물로는 대나무, 연꽃, 모란을 가장 많이 볼 수 있고, 향나무, 소나무, 회, 잣나무, 전나무, 오동, 가래, 복숭아, 오얏, 매화, 살구, 국화, 칡덩쿨 등을 식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이 중국 당대의 원림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뛰어난 원림 양식으로 원림발달의 전성기를 구가하였고, 문화교섭에 의해 동시대의 통일신라의 민간 특히 귀족의 주택 정원도 사절유택(四節遊宅) 등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 조경 발달사에서 전성기에 해당될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한일 고분출토 목관의 비교 (A Comparison of Wooden Coffins from Burial Mounds of Korea and Japan)

  • 강동석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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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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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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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우리나라 고분에서 목관이 출토된 예는 창원 다호리유적과 무녕왕릉, 창녕 송현동고분군 7호분뿐이지만, 일본의 고분시대에는 목관의 외형과 구조 등을 추정 복원할 수 있는 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일본 고분시대의 목관은 제작방법에 따라 통나무 내부를 파내어 만든 고발식(刳拔式)과 판재를 결합한 조합식(組合式)으로 분류되며, 형태적으로는 주형, 할죽형(割竹形), 상형(箱形)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상형목관은 관재의 결합방식에 의해 조립식(組立式)과 정부식(釘付式)으로 구분된다. 목관의 수종은 금송재가 전 시기에 걸쳐 차별적인 선택이 이루어졌지만, 고분시대 후기에는 삼나무나 편백나무 등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가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창원 다호리유적와 창녕 송현동고분군 7호분 출토 목관은 제작방법 및 형태에 있어 일본의 고발식목관과 유사하며, 무녕왕릉의 왕 왕비의 관은 일본의 정부식목관 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창녕 송현동고분군 7호분 목관은 통나무배를 전용한 것으로 일본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장(舟葬)과 같이 황천국(黃泉國)으로 가기 위한 수단으로 배를 목관으로 시용하였다는 사후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녹나무가 가진 방충, 부식억제 효과를 최대한 이용한 실용적인 이유로 판단된다. 창녕지역은 녹나무의 식생지역이 아닌 내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관재로서 녹나무를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이러한 이유로 부득이하게 기존에 사용하였던 배를 전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7호분 축조 딩시 시대적 상황을 볼 때, 녹나무는 당시 가야와 활발한 대외교섭이 있었던 왜에서 수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과천시 도서관의 효과적인 운영 방안 수립을 위한 이용자 인식조사 연구 (A Study on User Perception Survey for Establishing Effective Operational Strategies of the Gwacheon City Library)

  • 노영희;장인호;곽우정
    • 한국비블리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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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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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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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본 연구는 과천시 지식정보타운에 건립될 도서관의 운영을 위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계획을 수립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과천시 공공도서관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도서관 운영 요구도 조사를 실시하고, 설문 결과를 바탕으로 도서관 장서 구축 계획, 이용자 서비스 및 이용활성화 방안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연구 결과, 첫째, 도서관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자 이용자의 휴식공간 등으로 활용되도록 공간을 구성해야 하며, 일정 수준 이상의 소음을 허용하여 자유로운 정보 소통 및 커뮤니케이션 공간 등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둘째, 선호하는 장서의 형태와 종류(유형) 등에 대해 분석한 결과, 1순위 인쇄자료, 2순위 웹자료, 3순위 전자책/전자저널 등의 순으로 나타났으며, 도서 주제는 문학, 역사 등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문화예술프로그램에 대한 선호도가 높게 나타나, 향후 과천지식정보타운 도서관이 문화예술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강화하여 운영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동북아세아(東北亞細亞) 고(袴)의 발생(發生) 및 전파(傳播)에 관(關)한 연구(硏究) - $4{\sim}7$세기(世紀)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origination and transmission of Koh(袴) in Northeast Asia-from the 4th century to 7th century)

  • 박경자;이진경
    •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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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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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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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
  • Koh(袴) was a type of dress worn on the lower part of the body which was commonly used in the Northeast Asia. It was originally used by the Northern race for the need of nomadism or hunting. The origin of the Koh which appeared in the area would be found from the trousers of the Huns who influenced in the Northeast Asia, and became in the part of the Scythian culture. The Scythians are the nomadizing race inhabited in the Northern Caucasas on the wast of the Black Sea and influenced on the inland Eurasian steppe as the first typical horse-riding race. The objectives of Koh which had been worn in the Scythian, Mongolia, Korea as well as Japan as a part of Dongho dress and ornaments and to contemplate the transmission process by cultural exchange among different races for the period from 4th century to 7th century. 1. The Origination of the Koh The Koh was originated by the environmental factor to protect the cold in the North but also from the heat in the South, and was changed and developed as gradually satisfying to the needs of the times. In the Northeast Asia the Koh was in the class of the Northern Chinese garment, and was used widely by the horse riding Scythians who moved widely from the Eurasian inland to Japan. The oldest original which could reflect the type of the Northern clothes was a pair of trousers discovered in the Huns remains of Noin Ula. This showed the exact form of hunting clothes and had a similar form with the Korean female tro-users. Since the same form of trousers drawn on the wall painting of which was excavated 4-5th century ancient Koguryo(高句麗) tomb was the same form the trousers of Noin Ula seemed to be the original form of Koh in the Northeast Asia. 2. The Chinese Trousers It was the time of the King Mooryung(武靈王) in the Cho(趙) Dynasty B.C. 3th century that the trousers used regularly in China. However, the Koh had been used as undergarment which functioned for the protection of the cold not the horseriding garment. The trousers seemed to be not very obviously shown off since the Poh (袍) was long, but mainly used by the people from lower class. As people learned the adapted the trousers. It was essential for the times of war and quarrel. The king himself started wearing the Koh. The Chinese trousers were influenced by the Huns, the Northern clothes of the Scythian culture, and similar to the Korean clothes. 3. The Korean Trousers Korean was a race bared from the Eastern foreign group. It was obvious that the clothes was Baji-Jeogori(바지 저고리), the garment of the Northern people. This had the same form of the Scythian dress and ornaments which was excavated from the Mongolian Noin Ula. The Scythian dress and ornaments were influenced from the Ancient West Asia Empire and transmitted to the Northeast Koguryu by the horseriding Scythian. The trousers were kept in the traditional style by the common people in Korea were transmitted to Japan which were for behind in cultural aspect, as well as got used to the Chinese as the efficient clothes though active cultural exchange. 4. The Japanese Trousers The ancient Japanese clothes were influenced by the Southern factor but not the form of the Koh. As the Korean people group was moving towards Japan and conquer the Japanese in the 4-5th century, however, North Altaic culture was formed and at the same time the clothes were also developed. The most influenced clothes at this time were those of Baekge(百濟) and the trousers form called Euigon became the main form. Because of the climatic regional factor, it was tied not at the ankle but under the knee. From the view the ancient Japanese clothes disappeard about that time, it could be due to the conquest of the culturally superior race but not the transmission of the culture. In the latest 7th century both the Chinese and Japanese dress forms were present, but the Dongho(東胡) dress and its ornament from Korea was still the basic of the Japanese dress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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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원(正倉院) [쇼소인] 금속공예의 연구 현황과 과제 (The Research Status and Task of the Metalcrafts of Shoso-in Collection)

  • 최응천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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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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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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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쇼소인[정창원(正倉院)]은 일본 나라시내(내량시내(奈良市內)) 토다이지[동대사(東大寺)]의 후원 쪽에 위치하는 목조(木造)로 지어진 단독의 창고 건물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나라시대로부터 소장되기 시작한 약 9,000여점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미술품과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창원 유물이 주목받는 까닭은 8세기 일본의 공예, 조각, 회화는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 인도와 같이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물품과 당시 통일신라와 중국 당대에서 유입된 유물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백여점에 달하는 생생한 문서가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 제반 상황은 물론이고 문화 외교의 교류사 및 불교 교리의 변천까지 아우르는 역사적 고증 자료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정창원 소장 유물이 과연 어느 시기에 어느 곳에서 제작된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서 이들 중에는 중국에서 만들어져 수입되거나 선물로 받은 것도 있겠지만 백제나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져 정창원에 소장된 유물이 다수 전해지고 있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중요성을 지닌 정창원 관련 연구가 그동안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정리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국내 외 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창원 금속공예의 연구 현황을 살펴보고 최근 한반도에서 출토되고 있는 금속공예품을 통해 이들이 지닌 정창원 유물과의 연관성을 검토해 보았다. 나아가 정창원 조사와 연구에 대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정창원 조사와 연구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내용이다. 1, 정창원 소장 유물 조사를 위한 국가 차원의 지원 및 창구의 일원화 2. 정창원 소장 유물의 체계적인 목록화 작업 및 데이터베이스화 3. 일본과 공동 조사 연구의의 적극적인 시행 및 정창원 관련 연구자의 초청 4. 정창원 유물과 국내 보물급 유물의 교류 전시 추진 5. 정창원 관련 서적의 출판과 지원을 통한 연구 저변의 확대.

가야권역에서 출토된 스에키계토기의 역사적인 배경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Sueki Excavated from the Gaya Region)

  • 스즈키코키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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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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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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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고분(古墳)시대 중기에 한반도 남부지역의 기술이 일본열도로 전해져, 스에키라고 하는 일본열도식 도질토기가 탄생하였다. 제작기술이 전파된 초기 무렵은 한반도 각지의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고, 또한 일본열도 내에서의 생산도 매우 제한된 장소에서만 행해졌으며, 그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본열도 각지에서의 생산도 개시하게 된다. 스에키는 한반도의 기술을 가지고 일본열도로 전해졌지만, 한반도 내에서도 많은 출토 사례가 보고되고 있으며(한반도에서 출토되는 것은 스에키계 토기라고 불린다.), 그 중에서도 영남지역이나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에서 많이 출토되는 경향을 보인다. 기왕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전라도 주변에서 출토되는 것은 모방품이 많이 포함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영남지역 분묘에서는 일본열도에서 제작된 스에키가 출토된다. 출토시기가 5세기 후엽~6세기 전엽(특히 TK23~MT15형식이 제작되는 시기)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여, 전라도 지역과는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스에키계토기가 출토되는 분묘를 살펴보면, 대부분 지역 유력자층 분묘에서 확인되며, 왕릉급 분묘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또한 일본열도식 장송의례나 스에키계토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흔적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은 도질토기와 같은 의미로 다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유력자층(집단, 일족, 세력 등)도 분묘 전체로 보면, 일정 가야권역만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아닌, 복잡하고 광역적인 관계구조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영남지역(가야권역)에서 출토된 스에키계토기를 보면, 각 가야권역 세력의 변천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고, 각 가야권역의 중앙정권 아래에서 교섭과 교류의 역할을 수행한 지역 유력자층의 실체를 나타내며, 가야권역 내에서 복수의 지역이 상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성립된 지역(집단, 일족, 세력)의 존재를 가야권역에서 출토된 스에키계토기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 서브컬처 콘텐츠에서 한국 신화에 대한 연구 (Research on Korea Mythology in Korea Subculture Contents)

  • 윤영석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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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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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5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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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
  • 20세기 한국사회는 일제의 침략에 따라 강제로 병합되었으며, 일제의 식민정책에 따라 한국의 전통문화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광복 이후 한국사회는 한국전쟁으로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맞이하였고, 근대화와 민주화를 통해 산업경제와 민주주의제도가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산업경제와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한국의 전통문화가 더 심하게 해체되었다. 20세기 중후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도래하면서 기존 서구사회 중심에 대한 비판과 비서구권 및 제3세계의 문화적 정체성이 강조되면서 국제사회에서는 획일적인 문화적 가치보다는 다양한 국가와 민족의 문화가 서로 교류하기를 추구했다. 그동안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이 해체되고 있었다면, 이제는 반대로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한국의 역사, 언어, 예술, 건축,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으나, 한국의 신화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는 않았다. 근대화 이후 한국의 신화는 미신으로 여기거나 미개한 것으로 취급당했기 때문이다. 신화는 어느 특정한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무의식적인 집단 심리를 보여준다. 한국 신화를 연구하는 것은 한국인 문화적 정체성을 새롭게 찾을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한국의 신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신화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매체로 전달해야 할 것이다. 기존 한국 신화를 소재로 제작된 것으로 영화, 연극, 드라마, 소설 등이 대중문화로 소개되었으나, 최근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게임, 라이트노벨 등과 같은 서브컬처 콘텐츠에서 등장하고 있다. PC, 인터넷, 스마트폰의 보급에 따른 게임 및 웹툰 이용자들이 증가했으며, 서브컬처 콘텐츠 시장규모 증가는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이용자들을 증가시켰다. 서브컬처 콘텐츠가 한국 신화를 소재로 제작되면서 서브컬처 콘텐츠 이용자들은 한국 신화에 대하여 관심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한국 신화를 소재로 만든 서브컬처 콘텐츠에 등장하는 한국 신화와 그 의미에 대하여 연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