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Spino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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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와 퇴계의 '능동성'-논고 (A Study on the 'Activity' in Spinoza and Toegye)

  • 성회경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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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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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2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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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필자는 스피노자와 퇴계의 사유체계의 유사성을 넘어 리와 이성의 능동성에 방점을 두어 독창적인 탈주자학적, 그리고 탈근대적 행보를 걸어 온 퇴계와 스피노자의 철학을 논의하고자 한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꾀한다는 공통성에서 스피노자와 퇴계를 형식적으로 평형대 위에 양자를 올려 놓는 데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여지가 없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스피노자와 퇴계를 능동과 수동의 테제 위에 올려놓고 그 공통성을 추론하고자 한다.

초기 들뢰즈 철학에 관한 연구 (An inquiry concerning early philosophy of G. Deleuze)

  • 진기행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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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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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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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철학연구를 시작하던 초기에 질 들뢰즈 G. Deleuze가 수많은 앞선 철학자들, 즉 흄 D. Hume, 루크레티우스 Lucretius, 칸트 I. Kant, 스피노자 B. Spinoza, 니체 F. W. Nietzsche, 베르그송 H. Bergson등에 대한 전기적(傳記的)인 연구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은 들뢰즈 사상의 전체를 지탱하는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초기에 그가 행한 전기적인 저작들 전체가 스피노자와 니체라고 하는 두 명의 철학자의 <동일성 identity>으로 수렴되는 테마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그것은 적어도 당시의 그에게는 이들 두 명의 철학자가 그토록 커다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차이 difference의 철학자로 간주되는 들뢰즈가 어째서 동일성을 말하는가 하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과연 이들 두 명의 철학자 간에 어떤 동일성이 있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오히려 상식적으로는 신을 그 체계의 중심에 놓고 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서 '신은 죽었다'라고 하는 니체의 철학이 정면으로 대비되는 것은 아닌가. 니체도 처음에는 스피노자에게 대단한 공감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스피노자에 대하여 심각한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이 비판의 중심에는 신의 존재와 부재를 둘러싼 대립이 놓여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이 무신론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도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들뢰즈도 또한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스피노자가 '힘'power 개념에 착안한 점에 근거하여, 스피노자를 니체와 비교하여 해석하고 있다. 반면에 들뢰즈는 니체를 스피노자와 비교하여 다시 해석하기도 한다. 그때에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를, 스피노자의 '힘' 개념과의 공통성에 근거하여, 완전히 들뢰즈 자신만의 독자적인 착상으로 변형시켜 해석한다. 이처럼 '힘' 개념을 매개로 스피노자와 니체 사이에서 진행된 쌍방향적인 사고의 운동이 들뢰즈에게 두 명의 철학자의 동일성을 말하기 위한 기반을 제공한다. 본 논문에서는 초기 들뢰즈에 있어서 이 쌍방향적인 사고의 운동을 고찰함으로써, 그가 말하는 두 철학자의 동일성의 기반을 밝힘과 동시에 이러한 운동의 결과로서 차이의 철학자 들뢰즈에 의해 언급되는 이 동일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규명해 보려고 한다. 또한 이 동일성의 성립 과정에서 두 철학자 사이에 놓인 신의 존재와 부재의 대립이 들뢰즈에 의하여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조명되는 점도 살펴보려고 한다.

스피노자: 언어의 힘과 공동체 (Community and Power of language for Spinoza)

  • 이지영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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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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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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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스피노자는 인간의 생각과 태도, 행위를 규정하고 이끌어내는 힘을 언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힘이 언어에 있는 한, 인간 공동체에서 언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게 이 언어의 의미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 드러난다. 스피노자에게 언어를 이루는 기호와 그 의미는 서로 다른 것이다. 한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기호로서의 언어는 숙고되지 못한 신체적 이미지들에 기반하여 성립하기 쉬운 까닭에 자주 부적합한 관념으로서의 상상지를 수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어가 참된 관념을 표현하지 못하는 도구인 것은 아니다. 의미의 질서는 이미지들의 연쇄, 관념의 연쇄를 통해서만 결정된다. 의미는 항존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관념의 질서를 바꿈으로써 바뀐다. 단어가 함축하는 이미지들과 관념들의 질서를 재배치하는 과정을 통해 언어는 참되고 적합한 관념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참된 관념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관념과 행위를 결정하는 언어의 힘은 그것이 참된 것을 표현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의 질서가 보다 큰 헤게모니를 가지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계는 서로 다른 의미의 질서들이 충돌하고 힘겨루기를 하는 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성의 질서를 표현하는 언어의 의미를 수용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언어를 통해 매개되어 연대한 이들의 힘이 이 세계를 보다 더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꾸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변화는 바로 언어의 질서를 바꾸는 일, 다시 말해 기존의 관념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널리 알리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신학 정치론"에서 "성서"의 허구적 측면을 언어 분석을 통해 폭로하고, 사상의 자유를 역설한 까닭이다.

야코비와 스피노자 논쟁 (F. H. Jacobi und Spinoza-Streit)

  • 최신한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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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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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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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야코비의 "스피노자 학설"과 이 책이 불러일으킨 '스피노자 논쟁'을 탐구한다. 이로써 야코비가 새롭게 파악한 '초월'과 '내재'의 연관을 드러내고 그 근대적 영향사를 추적한다. 야코비와 레싱의 논쟁을 재구성하고 이 논쟁의 영향을 받은 헤겔과 슐라이어마허를 각각 내재철학과 내재 속의 초월철학으로 해석한다. 레싱은 전통적인 신관(神觀)을 부정하는 대신 전일성(ἑν ${\kappa}{\alpha}{\iota}$ ${\pi}{\alpha}{\nu}$)을 내세운다. 야코비는 이러한 레싱을 범신론자와 무신론자로 규정하고 그를 넘어서기 위해 도약(Salto mortale)을 주장한다. 이것은 레싱의 자연주의를 넘어서는 초자연성과 믿음을 향한 도약이다. 야코비와 레싱의 논쟁은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의 대립이며 무신론과 유신론 간의 논쟁이다.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의 대립은 야코비와 스피노자의 직접적 대결이기도 하다. 야코비는 스피노자가 근거와 원인을 혼동했다고 보고 진정한 신 개념은 근거와 원인의 통합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제약자의 총괄개념이라면, 신은 자연적 연관 바깥에 있는 자연의 절대적 시원이다. 스피노자가 자연적 연관에서 신을 파악했다면 야코비는 초자연적 연관에서 신을 파악한다.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은 야코비에게 '인간 안에 있는 신'으로 바뀐다. 인간 가운데 자연적인 것을 넘어서는 능력이 주어져 있는데, 이것은 생명의 원리이며 모든 이성의 원리이다. 이를 수용하는 헤겔은 신을 생명의 주체인 정신으로 파악하고, 정신의 본질을 자기매개적 운동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스피노자를 능가하는 새로운 내재철학이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헤겔에서 주체의 내재적 운동으로 변경된다. 반면에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적 직관과 감정에서 유무한의 통합을 주장한다. 인간과 신의 결합은 유한자 가운데 내재하는 신적 속성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 된다. 이것은 내재 속의 초월이다.

스피노자 『윤리학』으로 본 도덕과수업 (A study on the moral instruction by Spinoza's Ethics)

  • 송영민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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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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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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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고에서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통해 도덕과수업을 이해하고, 그 이해가 함의하는 바를 수업안으로 구체화한다. 스피노자는 그의 대표적 저서 "윤리학"을 통해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궁극적 실체를 사색하고 이를 윤리학으로 수렴한다. 여기서 궁극적 실체는 자기원인으로서 수많은 속성을 본질로 하는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다. 자연 속의 만물들은 이 실체를 펼치면서 동시에 개체들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영향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유익함에 따라 좋음과 나쁨을 지각하고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술어를 부여한다. 하지만 실체의 양태인 사람이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표상적이며 상대적이며 목적적인 도덕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이러한 도덕적 표상을 거쳐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표상을 넘어서야 한다. 도덕과수업은 양태로서 실재하는 학생의 도덕적 표상을 전제하지만, 도덕적 표상이라는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부이다. 실재하는 사람이 지닌 한계에서 선악이 발생하지만 실체의 필연성을 보존하는 것이 삶이라면, 도덕과수업은 인간 본성의 실현을 저해하는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스피노자의 인식론적 논의에 터하여, 도덕적 대상에 대한 보다 타당한 도덕적 관념을 점진적으로 그리고 누적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단계로 도덕과 교수텍스트를 구성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도덕과수업은 현재의 도덕적 표상보다 상대적으로 완전한 도덕적 인식을 기대한다. 나아가 이러한 교수학습을 지속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감각적 지각에서 비롯된 한계를 극복하여 인간의 본성 실현에 접근하기를 기대한다.

현대건축에 나타난 바이오미미크리의 생태적 공간 특성 연구 (Study on Features of Ecological Space of Biomimicry)

  • 최지혜;김개천
    • 한국실내디자인학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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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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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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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How to see nature and how to define the relation between nature and the human certainly influence fundamental attitude toward nature and any results derived from the attitude. Therefore, in order to figure out a way for how the humans and nature should coexist, the thesis has began a philosophical analysis on the origin of the biomimetics. Based on findings from the analysis, the thesis would work on the features of biomimicry space, presenting related possibilities. For the philosophical characteristic of the thesis which was an ecological world view, introduced at the end of mechanical world view era, the ideas of Spinoza, Nietzsche, Bergson and Deleuze about nature were quoted. Based on what the philosophers have said, the thesis looks into successful ideas, designs and ways of living that nature has shown by itself. After all, the purpose of the thesis is to investigate the constantly changing space of the biomimetics by organic forms, autonomous systems and dividing programs. Based on this, nine cases were analyzed to derive the characteristics. As a result, organic forms, autonomous systems and dividing programs characteristics of ecological appear simultaneously in harmony. Biomimicry space can coexist with nature and the human is an effective way.

들뢰즈 영화철학 연구 - 칸트적 계기를 중심으로 (Deleuze's Cinema Philosophy and Kant)

  • 진기행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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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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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0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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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본 논문의 목적은 들뢰즈 영화철학의 구축에 있어서 칸트 철학이 행한 역할을 효과적 내지 긍정적인 측면에서 고찰하고, 그것을 통하여 들뢰즈 영화철학의 구성요소 중에서도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칸트적 계기를 재조명해 보려는데 있다. 논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들뢰즈 영화철학에 대한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라는 소위 '들뢰즈 3인방'을 배려하면서 그 조감도를 작성해 보려고 한다. 특히 들뢰즈의 말년의 주저인 "Cinema 1, 2권"을 중심으로 그 책의 구성을 분석하면서 들뢰즈의 영화철학의 구조를 파악하려고 한다. 2. 칸트 철학이 그 배열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검증해 보려고 한다. 3. 거기로부터 들뢰즈 영화철학에 있어서 칸트적 계기의 의의 및 효과를 드러내 보려고 한다. 본고의 귀결이 칸트를 들뢰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서의 '사고의 이미지'론과 여러 가지 차원에서 결부지울 수 있다면 우리의 시도는 달성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상향 개화형 백색 오리엔탈나리 'Pacific Wave' 육성 (Breeding of Oriental Lily 'Pacific Wave' with Upward-facing and White Petals)

  • 이혜경;조해룡;임진희;김미선;박상근;신학기;정향영;예병우
    • 화훼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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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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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99-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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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Pacific Wave'는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 2007년에 육성된 절화용 오리엔탈나리 품종이다. 수출용 상향개화성 오리엔탈나리 품종을 육성하기 위하여 1999년 백색의 'Simplon'과 분홍색의 'Spinoza'를 주두수분에 의해 교잡을 하여 획득한 교배실생 중에서 화색이 백색이고 상향개화성이며 향기가 강하고 화형이 안정된 'O-03-16' 계통을 2003년에 선발하였다. 이 계통의 특성검정은 조직배양에 의한 대량증식, 순화 및 양구를 거쳐 특정검정을 수행하였다. 2007년 '원교C1-92호'로 수원에서 3차 특성검정 및 계통 평가회의 기호성 조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절화용 오리엔탈나리로 선발하여 'Pacific Wave'라 명명하였다. 'Pacific Wave'품종의 개화기는 2월부터 가온했을 때 6월 중순이었고, 꽃의 향기가 강하다. 화색은 백색에 황색(RHS, W155C + Y9A)심이 있고, 포장수송상 유리한 상향개화성이다. 식물의 초장은 115cm이고, 꽃의 크기는 20.1 cm이다. 꽃의 화피장은 12.2 cm, 화피폭은 4.2 cm이다. 엽장은 12.3 cm이고, 엽폭은 2.9cm 이다. 꽃에는 돌기반점이 있으며, 주두는 진한 회색이고 화분은 붉은 갈색이다. 구근의 크기는 19.6cm, 중량은 82.5 g이다. 구근 수확 후 -1 또는 $-2^{\circ}C$의 조건에서 동결저장을 하여 정식시기를 달리하면 주년개화가 가능하다. 엽소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칼슘시비 및 대구의 외인편을 제거해 주는 것이 필요하고, 여름 장마시기에는 잎마름병 방제가 필요하다.

태도가 전시가 될 때: '감화'로서의 전시공간 (When Attitudes Become Exhibition: Exhibitional Space as "Affects")

  • 유진상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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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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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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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
  • What is an exhibition? Is it of the system which is designed to serve Art Works in their representation, or is it a place where the artistic presentation could be considered as art work itself? After modernist era, the role of exhibitional space might have been shifted from those two principle raison d'$\^{e}$tre of exhibitional space into another, a new one. What Deleuze would call it as he borrowed the term from Spinozian philosophy : the Affectional Space. This new type of exhibitional space has been announced since 1969 when a Harald Szeeman, young independent curator and art critic from Swiss, has organized his brilliant exhibition "When Attitudes become Form" in Bern. For sure, these intensities in curatorial practices have been existing before like some early 20th century exhibitional efforts by Marcel Duchamp, El Lissitzky, Yve Klein, etc. It has influenced much on many of, otherwise most of contemporary art exhibiting practices. And now it seems to be necessary to give it a conceptual idea which could enlighten better the new paradigm of exhibitional practices that we try to clarify. I would propose the idea of that new exhibitional space as "space of non-organic becoming". This idea is inspired by Deleuze's ever famous philosophical work Thousand Plateaus, which, with Folds by the same author, has contributed to many contemporary and aesthetical debating issues. What is "affect"? Explaining about Spinoza's principle concepts, Deleuze defines it as a kind of durations or variations which are constituted by different levels of perfection. One perfection is precedented or followed by certain perfection bigger or lesser through lived transitions or passages. So each time it actualizes and reflects the state of All as a cut of Reality while each state of affections, images or ideas can not be separated from the duration which binds it to the precedent state and extends it to following one. Affect is also a term of changes. One affects at the same time it is affected. Exhibitional space as affect (or affectional space) is distinguished from representational and presentational space in the way it attributes movement, produces arrangements and generates new factors of artistic creation including those which are outside of ever accepted artistic elements. The concepts of affectional space are used especially to enlighten contemporary situation of artistic and curatorial processes. Art is no more limited to be seen as mere objects of aesthetical admiration, nor as art vis-$\`{a}$-vis art relationship apart from the whole. It includes possibilities and virtuality that appear in the imperceptible and undescribable manners if delimited in given language. As once noticed by Kuhn, we might be living in a paradigmatically shifting world, not only in Art but also in Life. And we need to express it more with Art as moving and affectional nods than as just a clean window or a distinct manual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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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부터의 자유와 필연으로부터의 자유: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의지자유개념 비교연구 (Freiheit vom Zwang und Freiheit von der Notwendigkeit: Eine Untersuchung des Begriffs der Freiheit des Willens bei Kant im Vergleich mit Leibniz)

  • 윤선구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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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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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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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칸트의 의지자유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모호하다. 그 이유는 "실천 이성비판"의 목적이 순수실천이성의 존재를 밝히려 하는데 있듯이 칸트의 자유 개념이 강제로부터의 자유에 중점이 놓여있고, 필연으로부터의 자유에 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 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해 라이프니츠의 자유개념은 인간의 의지는 정념의 강제로부터 뿐만 아니라 필연으로부터도 자유이다라고 말하듯이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다.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자유이론의 구조는 많이 다르지만 자유와 필연의 조화가능성을 논하는 성격론은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자유개념은 매우 명료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자유개념을 비교함으로써 칸트에게서도 강제로 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도 가능함을 밝히고자 한다. 라이프니츠는 처음부터 합리주의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정념의 강제로부터의 자유와 스피노자가 부정하는 필연으로부터의 자유 등 두 서로 다른 개념을 전제하고 출발한다. 그러나 칸트는 자유를 자연법칙으로부터의 독립성으로 규정함으로서 이 개념은 처음부터 모호한 개념이 된다. 칸트는 처음에는 이 개념의 이의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혼용하여 사용하다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의 재판에 서 의지자유의 두 가지 개념이 서로 다름을 인식하게 되고 "도덕형이상학" 법론에서는 선택의 자유를 부정한다. 그러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와 필연의 조화가능성을 논하는 부분을 보면 칸트도 라이프니츠와 함께 인간의 예지적 성격이 자유로운 선택을 반복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가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는 이유는 자유의 개념이 하나의 통일적인 개념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개념은 하나로 규정되어야 할 필요가 없고, 강제로부터의 자유와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므로 이들은 동일한 의지에 동시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만이 자율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