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소인[정창원(正倉院)]은 일본 나라시내(내량시내(奈良市內)) 토다이지[동대사(東大寺)]의 후원 쪽에 위치하는 목조(木造)로 지어진 단독의 창고 건물을 가리킨다. 이곳에는 나라시대로부터 소장되기 시작한 약 9,000여점에 이르는 다종다양한 미술품과 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창원 유물이 주목받는 까닭은 8세기 일본의 공예, 조각, 회화는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 인도와 같이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물품과 당시 통일신라와 중국 당대에서 유입된 유물을 동시에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백여점에 달하는 생생한 문서가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 제반 상황은 물론이고 문화 외교의 교류사 및 불교 교리의 변천까지 아우르는 역사적 고증 자료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정창원 소장 유물이 과연 어느 시기에 어느 곳에서 제작된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서 이들 중에는 중국에서 만들어져 수입되거나 선물로 받은 것도 있겠지만 백제나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져 정창원에 소장된 유물이 다수 전해지고 있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중요성을 지닌 정창원 관련 연구가 그동안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정리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국내 외 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창원 금속공예의 연구 현황을 살펴보고 최근 한반도에서 출토되고 있는 금속공예품을 통해 이들이 지닌 정창원 유물과의 연관성을 검토해 보았다. 나아가 정창원 조사와 연구에 대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한지 정창원 조사와 연구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내용이다. 1, 정창원 소장 유물 조사를 위한 국가 차원의 지원 및 창구의 일원화 2. 정창원 소장 유물의 체계적인 목록화 작업 및 데이터베이스화 3. 일본과 공동 조사 연구의의 적극적인 시행 및 정창원 관련 연구자의 초청 4. 정창원 유물과 국내 보물급 유물의 교류 전시 추진 5. 정창원 관련 서적의 출판과 지원을 통한 연구 저변의 확대.
만수성절은 본래 중국 황제의 생일을 일컫는 용어이다. 조선의 경우 만수성절의 칭호를 쓸 수 없었지만, 개항 이후 자주적인 대외관계를 펼치기 위해 미국공사관을 설치한 해인 1888년부터 고종의 생일을 만수성절이라 칭했던 용례가 나타난다. 이어 1895년 무렵에는 만수성절이란 호칭이 더욱 널리 사용되었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이를 기념한 경축 행사가 활성화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만수성절 축하 행사는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국내 관원, 외국인, 학생, 종교인, 언론인, 상인, 민간단체, 전국의 개항장 등 다양한 지역과 계층에서 고종황제 탄신을 기념하여, 축하 계층이 두텁고 넓었다. 즉 계층 지역 인종에서 보편성 전국성 국제성을 띠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되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축하 문화 역시 다양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들에게 황실후원금도 지급되었다. 당시 만수성절 경축은 황제에 대한 존경심과 애국심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황제권 강화와 내국인의 민심 결속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런 모습이 국내에 상주하는 각국 외교관과 취재기자를 통해 세계에 보도되어, 국권 신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가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장악하고 황권을 위축시키면서 만수성절 행사도 축소된다. 통감부 시기에는 황실지원금의 단절, 일제의 단속, 고종황제 강제 퇴위로 인해 만수성절 기념 행사가 거의 사라졌고, 궁중에서만 친일관료와 일본인을 중심으로 형식적인 경축연만 설행되었다. 고종황제의 권력 실축과 대한제국의 멸망은 한 몸이었고, 만수성절 경축도 동반 추락하였다. 그런 가운데 궁중 전통 연향 문화는 해체되고, 일제에 의한 공연 환경의 변화로 인해 대한제국 최고의 공연자들은 일개 유희물로 전락해 버렸다. 비록 황제를 향한 존경심과 애국심의 표출 창구였던 만수성절은 굴절되었지만 황실 자본력에 힘입어 구축된 행사 과정에서 창출된 문화적 성취들은 한국근현대문화사가 전개되는 내적 동력으로 작동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본 논문에서는 감산사(甘山寺)의 아미타불상(阿彌陁佛像)과 미륵보살상(彌勒菩薩像)의 광배(光背)에 각각 새겨진 조상기(造像記)를 재검토함으로써, 통일신라기 불상을 대표하는 걸작이자 기준작인 두 상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I장에서는 '근대적 발견' 이래 지난 100년간의 연구 성과를 네 시기로 나누어 검토한 다음, 필자의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II장에서는 기왕의 미륵보살상>아미타불상의 위차(位次)를 비판하고 조상기를 재검토한 후 두 상의 배치와 외관에 근거하여 아미타불상>미륵보살상의 위차가 옳음을 논증하였다. III장에서는 마지막까지 판독 불능으로 남았던 두 글자를 처음으로 판독하고, 이를 포함하여 기존에 의미가 불분명하였던 몇몇 구절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아울러 아미타불상조상기와 미륵보살상조상기의 문장 구조를 비교하고 조상기의 찬자와 서자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으며, 서체(書體)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었다. 끝으로 IV장에서는 조상기의 내용을 조상주(造像主)와 조상(造像) 및 발원(發願)으로 나누어 재검토하였다. 특히 필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라는 조상기의 구절이 상투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의미가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부모를 모두 화장해서 동해 바닷가에 산골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부모를 추모하려 해도 그 마음을 의지할 물질적 표지(標識)가 없었다. 그래서 만년의 김지성은 감산전장(甘山田莊)을 희사하여 절로 삼고, 여기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돌로 각각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을 조성하되, 부모님의 실제 모습을 투영하여 상(像)의 존용(尊容)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고 그 정혈(頂穴)에 부모의 상징물을 안치하였다고 해석하였다. 두 상 가운데 특히 미륵보살상은 관(冠)에 화불(化佛)이 있는 입상(立像)인데, 미술사학자들이 지적하였듯이, 이러한 도상(圖像)의 미륵보살상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워서, 도상적 특징만 본다면 십중팔구 관음보살상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반대로 조상기만 읽는 사람들에게는 의심할 여지없이 미륵보살상이다. 김지성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내세(來世)에는 도솔천에 상생(上生)하기를 기원하였기에 도솔천을 주재하는 미륵보살상을 만들기로 하되, 그 상에 자모(慈母)의 이미지를 투영하기 위하여 자비(慈悲)의 화신인 관음보살상의 도상을 취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미타불상도 마찬가지여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희구하여 아미타불상을 조성하되 모든 불교도의 자부(慈父)인 석가여래상의 도상을 차용하였다고 유추된다. 후대의 추모자들이 정면에서 상[Image]을 친견하고 뒤로 돌아가서 조상기[Text]를 읽었다면, 그들은 김지성의 부모님을 향한 추모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였을 것이다.
1467년에 완성된 원각사13층석탑은 한국 역사상 최후의 호불군주에 의한 최후의 도성불탑이다. 필자는 세조가 즉위 10년을 맞이하여 도성(都城) 중심부에 13층석탑을 세우고 탑에 석가사리(釋迦舍利)와 함께 '신역원각경(新譯圓覺經)'을 봉안한 뜻을 세조의 관점에 입각하여 살펴보았다. 머리말에 이어 제II장에서는 13층탑의 경전적 배경을 다각도로 고찰하였다. 특히 필자는 13층탑 건립의 직접적인 소의경전으로서 『대반열반경후분(大般涅槃經後分)』을 최초로 발굴하고, 이 경전이 7세기 후반 중부 자바에서 번역되고 동아시아에 유통된 사실을 추적하였다. 아울러 13층탑의 기원으로서 이른바 카니시카양식의 탑을 주목하고 동아시아와 한국에서의 13층탑 조성 사례를 개관하였다. 그리고 불교문헌을 탐색하여 '13층'이 깨달음[Buddha]으로 나아가는 수행 단계를 상징함을 입증하였다. 확실히 '13'은 불교도에게는 매우 특별하면서도 신성한 숫자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제III장에서는 세조의 원각사13층탑 건립의 불교적 정치적 함의를 탐색하였다. 불교적 함의와 관련해서는, 세조가 중국에서 직접 구입하여 조선에 최초로 유통시킨 『번역명의집(翻譯名義集)』과, 그가 최초의 한글 번역에 직접 개입한 『원각경(圓覺經)』에 주목하였다. 『번역명의집』은 14세기에 출현한 일종의 불교용어집인데, 세조는 원각사탑을 창건할 무렵 이 문헌을 통하여 13층탑의 소의경전인 『대반열반경후분』을 알았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한편 세조는 대장경 전체를 상징하는 단일경전으로 '신역 원각경'을 원각사탑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최초의 한글 번역에 깊이 관여한 『원각경언해』였다. 아울러 『원각경언해』의 저본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종밀(宗密)의 『원각경략소(圓覺經略疏)』임을 밝혔다. 원각사탑 건립의 정치적 함의와 관련해서는, 조선 초 왕실의 능사(陵寺)(또는 진전사원(眞殿寺院))에 세워진 석탑-경천사13층석탑(敬天寺13層石塔), 개경사석탑(開慶寺石塔), 연경사석탑(衍慶寺石塔), 신륵사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들을 비교 검토하였다. 그 결과 세조가 자신의 왕위계승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정치적 상징으로서 원각사13층석탑을 건립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본고에서 필자는 13층탑으로서의 원각사탑의 의미체계를 온전히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여말선초 정점에 달한 불탑 문화를 이해할 뿐 아니라, 카니시카대탑에서 기원하고 『대반열반경후분』에 근거하는 동아시아의 13층탑을 연구하는 데 한국적 연구모델로서 기여하리라 기대된다.
본고는 조형적으로 일반 그릇과 차별화되는 청자 주기의 형태에 주목하여 왕실 연례 문화와의 관계를 조명하고 조형적 상징성과 시기별 조합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에서 확인되는 국왕의 재위별, 연례의 유형별 설행 횟수와 설행 목적을 통해서 청자 주기와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왕실 연례는 군신(君臣) 간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유대감을 구축하는 왕권 강화의 수단이자 왕의 업적과 성덕을 찬양하여 국왕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 주는 통치 행위이기도 하였다. 왕실 연례의 설행 횟수는 실제 왕권 강화를 시도했던 예종대(1105~1122), 의종대(1146~1170), 충렬왕대(1274~1308), 공민왕대(1351~1374)에 늘어나는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왕실 연례의 설행이 급증하고 연례 문화가 바뀌는 예종대와 충렬왕대를 기점으로 청자 주기의 기종 및 조형이 변화하는 상황에 주목하였다. 연례에서 국왕과 신하는 다양한 음주 행위를 통해서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거나 태평한 시절을 찬미하였기 때문에 술을 담고 따르는 주기의 조형은 시각적 상징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연례에서 음주 방법은 국왕이 신하에게 또는 신하가 국왕에게 직접 술을 따르기 때문에 주자와 잔의 조형은 참석자들에게 시각적으로 큰 효과가 있었다. 따라서 12세기에 신선, 난(鸞), 귀룡, 어룡, 호로병 등의 도교적 소재나 황촉규와 같은 유교적 소재가 청자 주자와 잔으로 조형화되는 현상은 국왕에 대한 송축(頌祝)과 충성,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연례의 목적이 시각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연례에서 부르는 헌선도(獻仙桃)나 환궁악(還宮樂)의 내용이 청자 주기의 조형과 일치하는 점이 주목되었다. 연례에서 사용하는 당악(唐樂)의 가사는 국왕의 불로(不老), 난로(難老), 장생(長生)을 기원하고 왕업의 번창과 태평성대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가사 내용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 인물형 주자>나 시카고미술관 소장 <청자 승난인물형 주자> 등의 조형에 반영되었다. 주기의 조형에 연례 문화의 일면이 시각화된 사례는 고려청자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주기의 조합은 연례의 분위기나 술의 종류에 따라서 시기별로 변화를 보인다. 고려가 몽골제국으로 편입된 이후에 새로운 술이 유입되고 연례 문화가 변화하면서 주기의 용도와 조합에 큰 변화가 있었다. 충렬왕대부터 원 황실의 영향으로 왕과 공주가 함께 연례를 개최하거나 몽고식 연회인 보르차연[孛兒扎宴]이 열리고 몽고 여인들이 쓰는 고고관(姑姑冠)을 쓰고 연회를 여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충렬왕대에 연례 문화가 변하기도 하지만 설행 횟수가 132회로 급증하는 것은 원 황실 공주와의 혼인으로 인한 왕권 강화의 측면도 있다. 급증한 연례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포도주, 동락(湩酪), 소주 등의 새로운 술과 함께 고족배(高足杯), 옥호춘병, 이(匜), 용두잔 등 신기종의 청자 주기가 등장하였다. 새롭게 나타난 청자 주기는 모두 원 황실이나 몽골제국의 일원인 칸국에서 사용된 금속기 등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이다. 고려 후기에 청자 주기의 변화는 기존 연구보다 시야를 확대하여 유라시아 일대에 위치했던 칸국들의 잔치 모습이나 주기와 비교하여 좀 더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전에 없었던 고족배, 이, 용두잔, 옥호춘병 등 새로운 형태의 주기가 유입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맞춰서 청자 주기의 조합과 용도도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청자 주기는 공간적, 지리적으로 연결될 것 같지 않은 고려와 몽골제국의 칸국을 연결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다. 본고는 청자 주기와 왕실 연례 문화와의 관련성을 조명하였지만 이는 고려청자의 용례를 연구하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앞으로 좀 더 다양하고 폭넓은 관점에서 청자의 사용처와 사용례를 밝히는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을 받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2019년)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작품인 <경포대도>와 <총석정도>는 조선시대 회화사 이해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지대하다. 두 작품이 1557년의 관동 유람을 계기로 그려진 병풍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어서 16세기 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획기적인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밝히기 위해서 본고에서는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에 담긴 경물의 내용을 살펴보고 제작시기와 양식상의 특징을 분석한 후, 다른 작품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 작품에 담긴 회화사적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작품의 제작 배경은 <총석정도>의 발문으로 알 수 있다. 본고에서 박충간(朴忠侃)(?~1601)으로 비정한 정상일로(商山逸老)가 1557년 봄에 홍연(洪淵)(?~?)과 함께 금강산(풍악산)과 관동 지역을 유람하고 유산록(遊山錄)을 작성하였으며 시간이 흐른 뒤 그중 몇몇 명승지를 그려 병풍을 만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홍연은 자가 덕원(德遠)으로 1551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84년까지는 생존했던 인물이다. 박충간은 호가 남애(南崖)로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을 고변하여, 그 공으로 형조참판으로 승진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된 후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 글로 작품의 제작 시기를 1557년의 유람 후이자, 발문을 쓴 박충간이 50대 이상이 되는, 1571년 이후 곧 16세기 후반경으로 보았다. 산수나 나무 표현 등의 화풍을 기준으로도 16세기 후반의 시대 양식과 부합한다. 전술한 발문의 내용으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가 병풍의 일부였던 것을 알수 있으며, 발문이 써 있는 <총석정도>가 마지막 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포대도>를 보면 구도면에서 조선 초기 안견파(安堅派)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편파(偏頗) 3단 구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으나 실경(實景)을 대상으로 하여 그 배치와 화법이 현실화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시점(視點)에 있어서도 여러 경물간의 관계나 경관의 특징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사선각(斜線角)의 부감시(俯瞰視), 정면시(正面視) 등을 활용하여 경포대의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다각적(多角的)인 관점(觀點)을 보여준다. 산의 형태나 태점(苔點)의 사용은 1557년작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와 매우 유사하다. 16세기 안견파의 특징인 짧은 선이나 점으로 질감을 내는 단선점준(短線點皴)과 구름 모양 운두준(雲頭皴)은 현장감 있게 변모되었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통적인 구도와 연결성을 찾을 수 있는 <경포대도>와 달리 <총석정도>는 그 구도가 매우 파격적이다. 화면에 중심축을 두고 돌기둥들이 첩첩이 도열하여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데 근경(近景)의 돌기둥, 중앙의 사선봉(四仙峯), 절벽 위의 사선정(四仙亭)을 삼단계 정도의 깊이감으로 배치하여 화면에 공간감을 조성하였다. 중앙의 사선봉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비중을 점하고 있으나 수직적인 돌기둥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분질적(分節的), 평면적(平面的)인 양상으로 그려져 아직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조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기둥의 아랫부분은 희게 하고 윗부분은 어둡게 하여 고원(高遠)의 상승감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각 기둥을 묘사하는 준법을 보면 기둥으로 설정된 면에 담묵을 바르고 그 위에 농묵의 가는 선들을 그어 총석의 질감과 쪼개짐을 묘사하였다. 붓끝을 사선으로 누르며 수직으로 내려 긋고 있어서 부벽준(斧劈皴)의 초기적 양상을 보인다. 일관되게 보이는 이러한 흑백의 대조, 수직적 준법의 구사는 앞으로 전개될 절파계(浙派係) 화풍의 유행을 예시해준다. 한편 기둥의 윤곽 및 균열문이 각각 다 달라서 실제의 특징을 살리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둥 위에 올라앉은 새들의 묘사, 파도와 흰 거품의 표현 등에서 반복적인 붓질을 찾을 수가 없고 매우 생생한 묘사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경물 배치는 이후 변화를 보인다. <경포대도>는 아래쪽에 죽도(竹島)를 두고 경포호를 넘어 위쪽에 위치한 경포대 건물과 오대산 일대를 올려보는 구도였다. 이러한 배치는 경포대를 화면 아래쪽에 두고 위쪽의 바다를 향하는 18세기 이래의 전형적인 구성과 차이를 보인다. 바다 쪽에서 총석을 바라보며 그린 <총석정도> 역시 이후의 작품에서는 내륙에서 바다를 향하는 것으로 관점의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정선(鄭敾)(1676~1759)과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의 작품이 제작된 이후, 두 사람의 구도를 따라 관동도의 유형이 정착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라진 듯 했던 16세기 <경포대도>의 구도가 조선 말기 <강릉 경포대도>에서와 같이 민간 회화에서 전승된 것도 확인해 볼 수 있다. 관동 지역의 명승도는 이른 시기부터 그려져 고려 김생(金生)(711~?)의 관동도(關東圖), 조선 초 안견(安堅)(15세기 활동)의 낙산사도(洛山寺圖) 등 여러 화가가 단폭이거나 여러 폭의 관동도를 병풍이나 첩 형태로 그렸던 것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록은 많으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는데 본고에서 고찰하는 이 두 점은 현존하는 관동도 중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예로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관동도(關東圖) 병풍(屛風)의 제작 양상을 알게 해주어 회화사적인 의미가 크다. 특히 발문의 내용에 따라 8폭 병풍일 것으로 생각되어 16세기 후반에 이미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 형식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성격에 있어서 현존하는 16세기 실경산수화의 예로 거론되는 작품들이 모두 실용적, 공적인 목적의 계회도나 기록화로 제작되어 실경산수화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실제 경관을 대상으로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발문을 쓴 박충간은 유람할 때 지었던 감상시를 곁들여 자연의 진면목을 반추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기존에 알려진 실경산수화의 성격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으로 순수 감상을 목적으로 한 본격적인 실경산수화의 예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이처럼 <경포대도>와 <총석정도>의 두 작품은 유람의 결과를 시화(詩畫)로 제작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현존 작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예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지대하다. 또한 그간 확인할 수 없었던 16세기 실경 산수화의 다양한 형태와 구도 및 시점의 면모를 보여주어 한국 실경산수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한 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본 연구는 제주도 한라산에 서식하는 산굴뚝나비의 분포와 개체군 동태를 알아보기 위하여 선조사법과 포획-재포획 조사법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산굴뚝나비는 해발 1500m 이상부터 관찰되기 시작하여 정상부까지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포획-재포획 조사에서 산굴뚝나비의 포획 개체수는 1,493개체로, 이중 수컷은 978개체, 암컷 515개체가 확인되었다. 재포획된 개체수는 518개체이며, 수컷과 암컷의 비율은 284:234로 나타났다. 그리고 암컷과 수컷의 평균생존일수는 2.31로 나타났으며, 이중 수컷 2.14일, 암컷 3.47로 나타나 암컷이 수컷 보다 오래 생존한 것으로 나타났다. 포획-재포획 조사를 통한 일일 추정개체수는 수컷이 7월에 약 1000개체를 유지하다가 점차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8월에는 개체수가 200개체 이하로 나타났다. 그리고 암컷은 7월에 335개체를 최고로 하였다가 점차 감소하고, 이후 8월에 이르러 개체군 크기는 120개체 이하로 나타났다. 추정개체수의 크기는 암컷이 수컷의 약 1/3수준으로 나타났다. 산굴뚝나비의 평균 이동거리는 수컷 $116.8{\pm}191.9m$, 암컷 $118.4{\pm}161.5m$로 나타나 암수간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 산굴뚝나비는 한라산 백록담을 중심으로 넓게 형성된 초지공간에서 단일 개체군을 이루고 있다. 개체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은 훼손지 복구지역으로, 이는 한라산의 훼손된 지역을 복구하는 작업과정에서 먹이식물인 김의털이 넓은 면적으로 자라고 있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개체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국의 소비자들이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단일불포화 지방산이 풍부해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오리고기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 오리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토종오리의 개발 및 보급이 필요한 실정이며, 이는 종자주권의 확립 및 농가 소득 증대에도 매우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24개의 microsatellite 마커를 확보하였으며, 이들 마커의 대립유전자수는 1~16개, 이형접합도는 0~0.865, 다형성은 0~0.841로 확인되었다. 이들 마커를 이용하여 임의 집단에서 동일개체 출현빈도를 계산한 결과는 임의 집단 $1.64{\times}10^{-16}$, 전형매 집단 $2.60{\times}10^{-7}$, 반형매 집단 $1.30{\times}10^{-12}$으로 높은 개체식별률과 친자확인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마커를 이용한 계통분석 결과, 토종오리와 실용오리 집단을 정확하게 구분하기에는 어려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추가연구를 통해 토종오리의 순종화 및 더 정확한 토종오리와 실용오리 집단 구분이 가능한 마커 개발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2009년 9월 전남 신안군 압해도 지역의 백악기층에서 완벽하게 보존된 공룡알둥지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압해도 백악기층의 퇴적시기와 공룡들의 활동시기를 밝히기 위하여 이 지층과 동시퇴적구조를 보이는 화산암역, 이 지층을 정합으로 덮는 산성응회암 그리고 이들을 관입하는 산성맥암에 대하여 K-Ar 전암연대측정을 수행하였다. 이 지층에서 관찰되는 화산암은 렌즈상의 역암과 역질이암층의 역으로 발견되며 그 직경은 3-20 cm이다. 이 층에 포함된 공룡알 둥지와 동시퇴적 구조를 보이는 6개의 화산암역을 대상으로 K-Ar 전암연대측정을 실시하였으며, 그 값은 후기 백악기의 세노마니안($97.6{\pm}1.9$ Ma), 코니아시안($87.6{\pm}1.7$ Ma), 산토니안($84.5{\pm}1.7$ Ma), 캄파니안($82.5{\pm}1.6$, $77.3{\pm}1.5$, $75.7{\pm}1.5$ Ma)에 해당한다. 이 백악기층을 부정합으로 덮는 산성응회암에 대하여 동일 조건으로 K-Ar 전암연대를 측정하였으며 그 결과는 캄파니안($79.2{\pm}1.6$, $77.3{\pm}1.5$Ma)에 속한다. 상기의 모든 암층을 관입하는 산성맥암에 대한 K-Ar 전암 연대측정 결과는 $70.9{\pm}1.4$ Ma로 캄파니안에 속한다. 압해도지역에 분포하는 백악기층의 퇴적시기와 공룡의 활동시기는 77-83 Ma 사이이며 이 결과는 공룡알을 포함하는 보성 선소층(81 Ma)과 공룡, 익룡 및 물갈퀴 새발자국을 포함하는 해남 우항리층의 형성시기에 대한 지질연대(79-81 Ma) 등이 서로 대비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국산 긴몰개 (Squalidus gracilis majimae)의 난발생 과정을 연구하기 위하여, 긴몰개의 친어와 생태적 조사는 충청남도 보령시에 위치한 보령댐과 웅천천에서 실시하였다. 자연 산란에 의해 수정된 난과 배 발생의 형태학적 설명은 다음과 같이요약된다. 수정란의 형태는 둥글고, 점착성이 있으며 투명하였고, 수정란의 평균직경은 2.9${\pm}$0.3 mm (n = 30)였고, 유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수정란의 발생은 수온 $26{\pm}1.5^{\circ}C$에서 관찰되었다. 수정 후 20분에 배반이 형성되었으며, 48분 뒤 2세포로 나뉘어졌고, 포배기는 수정 후 5시간 40분에 나타났으며, 낭배기는 수정 후 6시간 55분에 관찰되었다. 배체의 형성은 수정 후 12시간 58분부터 시작되었고, 안포와 9개의 체절이 수정후 17시간 05분에 발견되었다. 수정 후 23시간 30분에 이포가 생겼으며, 25${\pm}$26개의 체절과 함께 안포안의 렌즈가 수정 후 32시간 35분에 발견되었다. 수정 후 37시간 27분에 뇌의 분화와 함께 배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으며, 심장박동과 안포내의 흑색소포가 수정 후 44시간 46분에 발견되었다. 수정 후 50시간 36분 가슴지느러미의 형성과 함께 몸 부분의 흑색소포가 형성되는 것을 끝으로하여 수정 후 57시간 49분에 수정란은 부화되었다. 이때 갓 부화된 자어는 전장이 3.3${\pm}$0.2 mm(n = 120)이었다. 본 연구 결과는 최근 수질오염 및 종 다양성 감소가 시급한 상황에서 종 및 개체군 보존에 기여할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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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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