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Modern Joseon Architecture

검색결과 51건 처리시간 0.019초

개항기 인천 근대정원의 조영특성에 관한 기초연구 - 리키다케 별장을 중심으로 - (A Basic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Modern Garden in Incheon During the Opening Period - Focused on Rikidake's Villa -)

  • 진혜영;신현실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8권3호
    • /
    • pp.83-91
    • /
    • 2020
  • 본 연구는 근대정원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인천 제물포의 조계지 형성 및 변화과정을 분석하고 이곳에 조성된 근대정원의 조영 내용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인천 조계지의 형성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과거 제물포는 황량한 어촌이었으나 1881년 개항 이후 일본 조계지와 청국전관조계 및 각국공동조계가 형성되었다. 이후 일본은 남쪽 갯벌지대를 매립하여 조계지를 확장했고, 조선지계(현신흥동 일대)로 진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전관조계를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도시경관을 이식하였으며, 조계지의 중심가 주변지역에 근대정원들이 분포하고 있다. 둘째, 리키다케 별장을 대상으로 정원의 조성과정을 살펴본 결과, 일본인 리키다케가 인천의 대지주였던 우리탕의 과수원 부지를 매입하여 정원을 조성하였다. 리키다케의 거주 당시에는 정원공간만 약 3,000평으로 매우 큰 규모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인천시에서 인수하여 율목어린이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부촌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율목동 일대 가장 높은 곳에 정원이 위치하여 인천항 일대의 조망이 용이했다. 또한 리키다케의 정미소와 직선거리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점 또한 입지선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셋째, 오늘날 리키다케 별장의 정원은 석축을 쌓은 사다리꼴 형태의 부지에 복층의 일본식 가옥이 위치하고, 남측에 약 990㎡ 규모의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남쪽에서의 진입과 북쪽 율목 어린이공원에서의 진입이 가능하나 과거에는 인천항과 조계지, 그리고 리키다케 정미소를 조망할 수 있는 방향이 가옥의 주 향이었을 것으로 보아 정원을 앞에 두고 가옥이 위치했을 것이다. 정원은 원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석등과 비석, 정원석, 수목 등을 배치한 다정양식에 해당하며, 주변에 주목, 스트로브잣나무, 단풍나무 등의 수목식재와 둥글게 전정한 철쭉과 영산홍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옥 주변에는 관목 중심의 식재를 통해 가옥 내부에서의 조망을 확보하였다.

근대 사직공원의 형성과 변천 (A Study on the Formation and Change in the Mordern Sajik Park)

  • 김서린;김해경;박미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2권4호
    • /
    • pp.120-131
    • /
    • 2014
  • 조선 개국 시 영조된 사직단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직공원으로 고착화되었고, 최근 복원에 대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통시적으로 분석된 사직단의 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 나라의 중요 국가제사를 지내던 장소로의 입지를 확보하고 강화되었던 조선시대 태조에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의 시기이다. 태조대에 인왕산 자락에 축조했으며 임진왜란 시 소실된 후 영조 대에 제례시설이 완비되었다. 그러나 1908년 일제의 간섭이본격화되자 공간 멸실과 제사가 폐지되었다. 둘째, 일제에 의해 공원화가 진행되어 고착화된 1910년부터 1944년까지이다. 공원 관련 시설과 경계부에 이질적인 건축물이 들어섰고, 단 영역 재실 사직단문이 고적과 보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셋째, 해방 이후 1984년까지 이질적 성격의 동상과 기념비, 건축물이 축조되어 혼재된 장소성을 지니게 된 시기이다. 사직터널의 개설로 사직단 문이 2번에 걸쳐서 이축되기도 하였다. 넷째, 사직단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1985년부터 현재까지이다. 사직단 권역의 복원 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나 주민에 대한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향후, 사직단의 원형 회복을 위한 복원을 위해서는 발굴조사를 통한 면밀한 고증과 주민의 이해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전통 원림에 도입된 비둘기 완상 문화 (The Culture of Appreciating Pigeons in Korean Traditional Landscape Gardens)

  • 김서린;성종상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9권3호
    • /
    • pp.1-14
    • /
    • 2021
  • 본 연구에서는 전통 원림에서 행해진 비둘기 애호 문화를 살펴보고, 전통 원림의 동물 소재로서 비둘기의 면모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비둘기의 종류와 명칭을 파악하고, 쓰임과 상징적 의미를 분석하여 비둘기에 대한 인식을 파악하였다. 비둘기를 통한 원림 향유 문화를 살펴보기 위해 한국고전종합DB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비둘기'로 검색하여 도출된 고문헌의 번역본을 대상으로 내용 분석하였으며 옛 그림을 참고하였다. 비둘기는 귀소성이 있는 새로서 전서구(傳書鳩)로 이용되었으며, 약용, 식용으로도 쓰였다. 비둘기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데, 풍요(豐饒)와 환우(喚雨)를 의미하였으며, 장수를 상징하였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궁원(宮苑)과 사가 원림에서 비둘기를 길러왔으며, 조선 후기에는 관상용 비둘기의 애완문화가 일시적으로 유행하였다. 비둘기는 원림을 풍부하게 향유하게 하는 공감각적 소재였다.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비둘기는 움직이는 조경 소재로서 원림의 가변적 경관을 창출했다. 비둘기의 움직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방울 소리는 경관의 청각적 체험을 풍부하게 유도했다. 비둘기 집은 비둘기와 더불어 원림을 풍부하게 하는 완상 요소였다. 원림 조영자는 비둘기 집을 만들고 원림에 배치하는 행위를 통해 원림 조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또한 문인들은 봄을 상징하는 수목이자 비둘기의 먹이 제공원으로서 매실나무,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산사나무 등과 더불어 부귀와 은일을 상징하는 모란과 국화를 식재하여 비둘기와 함께 향유했으며, 이를 시와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본 연구는 전통 원림의 공감각적 소재로서 비둘기에 주목하여 전통 원림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동물 요소로서 원림에 도입된 비둘기의 완상 요소와 조영자의 향유 행태에 대한 조경사적 컨텐츠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본 연구에서는 번역문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는 한계를 가지며, 향후 원림에서 비둘기를 기른 구체적 사례와 근현대 시기 조경 공간에서의 비둘기 기르기에 대한 후속 연구가 촉구된다.

경복궁 후원 수림의 변화과정 및 주요 노거수군의 역사적 가치규명 (A Study on the Historical Values of the Changes of Forest and the Major Old Big Trees in Gyeongbokgung Palace's Back Garden)

  • 신현실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40권2호
    • /
    • pp.1-13
    • /
    • 2022
  • 본고는 최근 74년만의 개방으로 수많은 관람객이 방문하고 있는 청와대 경복궁 후원 공간의 변화과정을 통하여 후원 경관의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고자 조선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도성대지도, 북궐도형, 경복궁 복원기본계획 등의 사료와 도면 등을 근거로 경복궁 후원의 시원과 발달과정을 고찰하였고 이를 통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은 고려시대부터 명당으로 이름난 지역이었고 당시 남경으로 명명되며 신궁이 조성된 지역이었고 고려시대 이미 풍수도참사상과 주국의 고공기의 영향을 받아 궁성과 궁궐이 조영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전기 경복궁 후원은 궁궐의 후원으로 각광받지 못하였으나 고종 시기부터 현재까지 국가 통치권자의 생활공간으로서의 장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둘째, 후원의 경계는 도성지도, La Coree, 경무대일원, 일본지리풍속대계, 한국사진첩, 조선건축도집, 경성부 도시계획 조사서 등의 문헌을 통해 신무문 밖 현재의 청와대 권역이 경복궁의 경외에 조성된 후원임을 규명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황폐화된 지역을 고종시기 중건과정을 거쳐 공사(公私)가 결합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후원의 전각들이 이건되거나 훼철되며 법궁의 후원으로서의 장소성이 훼손되었으나 광복 후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며 다시금 통치자의 장소라는 가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셋째, 경복궁 후원은 왜란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공간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지형적 변화가 가장 큰 곳은 조선총독부관저가 건립되었던 경농재 일원으로 토지의 용도변화가 빈번하였다. 반면 현 경무대지역과 소정원 옆 수림과 백악의 수림은 전통적 수림의 형태를 계승하며 보존되었다. 이를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1:1200의 경무대관저경내부지배치도와 위성사진을 신무문 기준으로 중첩하였고 그 결과 백악에서 발원한 물길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물길을 따라 오늘날까지도 수림지역이 변화하지 않고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넷째, 전통적 수림경관이 계승된 지역들은 지형의 기능적 변화가 미비하였고 더불어 주요 노거수군이 존치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확인되는 노거수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는 지표수종들이었다. 대표적으로 녹지원에 자리한 반송은 융문당 옆 식재된 반송 중 일부가 보존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국가원수와 중요 귀빈들의 만찬 시 포토존으로 활용되어온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와대 내 경복궁 후원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사료들에 대한 발굴을 통해 공간의 가치를 명확히 규명하고 시대별 정원고고학적 층위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또한 경복궁으로부터 청와대로 이어지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역사경관을 보존하기 위한 근거는 과거부터 영속되어온 청와대 경복군 후원 노거수군의 영역대를 훼손하지 않아야하며 청와대 내 수림을 전수 조사하는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이용과 상징성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Utilization and Symbolizes of the Joseon Dynasty Flowering Plant)

  • 김승민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2권2호
    • /
    • pp.134-147
    • /
    • 2014
  •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고문헌과 옛 그림에서 나타나는 화훼식물을 재료로 궁궐정원과 민가정원에 나타나는 지피식물의 이용특성과 상징성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문화재 지역 및 현대 조경공간에 활용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었다. 첫째, 조선시대 고문헌과 옛 그림에서 출현한 화훼식물의 출현빈도는 매화, 연꽃, 모란, 국화, 파초, 영산홍, 장미, 진달래, 작약 등이 10회 이상으로 높은 빈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다음으로 비교적 출현 빈도가 높은 식물은 치자, 석류(8회), 패랭이꽃, 포도(7회), 난초, 정향, 봉선화, 원추리, 맨드라미, 무궁화, 철쭉류, 창포, 접시꽃, 황매화, 유자(5회), 부용, 동자꽃, 금전화, 베고니아, 해바라기, 양귀비, 수선화, 서향화, 옥잠화 등(4회)이였으며, 그 외에는 29분류군 총 81종의 화훼식물이 조사되었다. 둘째, 궁궐과 민가에서 사용되었던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이용은 분에 심어 가까이 두고 완상하거나 화단, 화계, 화오, 연못 및 담장주변 등에 주로 식재하였음을 고문헌의 기록과 정원도 및 민화의 그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산홍의 식물재료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에서 다루어지고 연구되어진 민가정원의 관련된 문헌(6점)이나 옛 그림(766점)에서 출현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대중에게 유통이 극히 일부에 국한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조선시대 화훼식물 상징성은 유교의 절개, 군자, 청빈, 충효사상을 나타낸 경우, 도교의 신선사상이나 불로장생을 나타내는 경우, 민간신앙의 부귀영화나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경우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는 식물을 덕성함양의 대상이나 기복의 대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조선시대 이용했던 화훼식물은 선비가 닮고 싶은 이상과 지향하는 정신세계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선조들의 상징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조선시대 이용하였던 화훼식물은 수목종류에 따른 보편적인 판단기준이 아닌 다양하고 주관적이며, 또한 정신적인 측면으로 접근하여 해석할 때에 조선시대 화훼식물의 조경공간에서의 활용범위 또한 넓어질 것으로 사료된다.

한(韓)·중(中) 문화교류를 통한 전통조경의 비교 연구 (A Comparison Study of Traditional Landscape through Cultural Exchange between Korea and China)

  • 펑홍쉬;장징;장치엔두어;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8권4호
    • /
    • pp.49-57
    • /
    • 2020
  • 전통조경은 선현(先賢)들이 현대사회에게 남긴 문화적 자산으로, 고대의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조경설계에도 새롭고 창의적인 소재를 제공할 수 있다. 한·중 양국은 고대부터 문화교류를 통해 전통 조경문화의 계승과 보호 및 발전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전통과 현대' 및 '지역성과 국제성'이 서로 어우러져 발전하여 왔음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본 연구는 한·중 전통조경의 비교 연구를 목적으로 우선 양국 전통조경문화를 선행연구 문헌을 통해 분석하였다. 다음으로 양국의 문화적 배경을 종교사상, 전통문화, 자연관으로 나눠 해석하고 양국의 조경 역사와 원류관계를 조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중 조경 사조(思潮)의 비교 및 전통조경의 발전과정, 한·중 조경의 예술적 공간과 경지(境地) 등 세 방향에서 분석 고찰하였으며, 양국의 전통조경의 조성 방식에 있어 차이점을 분석하고, '의경조성' 및 '의경수법'을 구명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전통조경의 이론적 배경 및 조경의 경의성(景意性)에 대해 전통조경의 배치 및 주변 환경과 형식 그리고 전통조경의 색채 등을 명·청시대의 '이화원(頤和園)'과 조선 시대의 '경복궁(景福宮)'을 사례대상으로 비교 분석하였다. 이를 통하여 한·중 조경의 특징을 토대로 국제화를 위한 전통적인 조경문화의 계승과 혁신방안을 모색하였다. 한·중 조경사의 발전 추세에 따른 양국 간 문화교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앞으로 양국 조경의 발전은 전통문화에 대한 국제 간 협력 및 지역 특색의 창조적 결합, 화이부동(和而不同)한 전통조경 환경의 조성, 다양한 문화의 다층적 상생이 양국의 우호증진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문헌을 통해 본 녹나무[장(樟)]의 오류 고찰 (The review of Cinnamomum camphora SIEB.'s mistake in historical documents)

  • 김규섭;이창훈;김세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3권2호
    • /
    • pp.58-66
    • /
    • 2015
  • 본 연구는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고문헌에 출현한 녹나무의 기록을 고찰한 논문이다. 녹나무의 한자 표기인 '장(樟)' 자를 바탕으로 녹나무의 정의와 용도를 살펴보았고, 현대적 개념과의 오류 사례를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제시하고자하였다. 첫째, 녹나무에 대한 정의와 사례를 분석한 결과, 현재 녹나무로 해석되는 남(枏) 남(楠) 예(豫) 장(樟) 가운데, '장(樟)'이 현대적인 개념의 녹나무에 가장 부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과거의 기록에서 녹나무가 생육 불가능한 지역에 출현하는 모습을 확인하였는데, 녹나무는 대표적인 남부수종이니 녹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를 녹나무라 지칭한 오류로 사료된다. 셋째, 다른 수종과 오인한 사례들을 추적하여 기록을 고찰한 결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중 "침뇌변증설"에서 모감주나무와 혼동했을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이상 본 연구에서 살펴본 녹나무의 경우 외에도 여타 문헌에 나타난 오류 사례의 검증이 요구된다. 또한 현대의 성상별 기준과 문헌의 대조를 통해 선별하는 과정을 병행하여, 녹나무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도출할 후속연구를 기대하는 바이다.

노마드적 관점에서 본 전통 정자의 평면구성에 관한 연구 - 안동하회마을 내의 정자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Potential for Korean Traditional Pavilion from the Perspective of Nomad - Focused on Korean Traditional Pavilion in Andong Hahoe Folk Village -)

  • 조정화;김개천
    • 한국실내디자인학회논문집
    • /
    • 제19권6호
    • /
    • pp.59-66
    • /
    • 2010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ow the perception of lives and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and the concept of its sculptures can be reflected in Korean traditional pavilion place, from the perspective of Nomadism as a western philosophy of this era. Nomadism literally refers to way of life of peoples who do not live continually in the same place but move cyclically searching for temporary centres whose stability depends on the availability of food and water supply or pastures for their livestock. In recent years, the term encompasses three general types: job nomads, digital nomads and ubi-nomads, which represent distinct features of modern society. Its concept implies looking for the new creative possibility through the liberation of desire and the breakaway to another thinking through continuous formation and transformation. Likewise, Korean traditional pavilion is the architecture to take a quick rest while walking in the mountains. This open place thus connects surroundings with people who are allowed to assimilate with nature as well as train their mind by following the law of nature, in order to finally reach the celestial state of mind. Knowing how to see, enjoy and appreciate the arts very close to nature, our ancestors were able to learn aesthetic activities. After recognizing Korean traditional pavilion as the potential place of unification of heaven and men which is Korean scholor's lifestyle and outlook on the world, this study accordingly will identify the value and meaning of Korean traditional architecture according to Nomadism in the occidental point of view.

일제강점기 조선통감부 건축재료의 물리화학적 특성과 평가 (Evaluation and Physicochemical Property for Building Materials from the Japanese Ministry of General Affairs in Joseon Dynasty)

  • 박석태;이정은;이찬희
    • 자원환경지질
    • /
    • 제55권4호
    • /
    • pp.317-338
    • /
    • 2022
  • 근대건축으로 알려진 조선통감부 자리의 콘크리트와 토관 및 벽돌을 대상으로 3시기로 세분하여 물리화학적 특성과 평가를 검토하였다. 콘크리트는 모두 비슷한 가비중과 흡수율을 보였으며 다량의 골재와 석영, 장석, 방해석 및 포틀란다이트가 검출되었다. 벽돌의 공극률은 1907년의 것이 1910년 및 1950년 벽돌보다 높았다. 토관도 유사하나 초기의 것이 보다 치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벽돌과 토관은 암적색에서 암갈색을 띠며 많은 균열과 기공이 관찰되나, 상대적으로 토관의 기질이 균질하다. 벽돌에서는 석영, 장석 및 적철석이 검출되었으며, 토관에서는 석영 및 장석과 뮬라이트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모두 1,000~1,100℃의 소성온도를 거친 것으로 해석된다. 콘크리트는 유사한 CaO 함량을 보이나, 벽돌과 토관은 1907년 시료에서 SiO2는 낮고 Al2O3가 높다. 그러나 이들은 유사한 지구화학적 거동특성을 갖는 등 성인적 동질성이 높다. 콘크리트 기초의 초음파속도와 반발경도는 잔존상태에 따라 다르나 물성은 다소 낮았다. 이를 일축압축강도로 환산하면 1차 증축구역이 평균 45.30 및 46.33 kgf/cm2로 가장 높고, 2차 증축구역이 가장 낮은 평균치(20.05 및 24.76 kgf/cm2)를 보였다. 특히 CaO 함량과 흡수율이 작을수록 초음파속도와 반발경도가 높았다. 조선통감부 건축에 활용한 콘크리트는 시기별로 비슷한 배합특성과 비교적 일정한 규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과 토관은 거의 동일한 점토질 원료를 사용하여 유사한 제작과정을 거친 것으로 해석된다.

옛 시문과 그림으로 살핀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형상화 및 정착시기 (A Study on the Formation Process and the Settling Period of the Gwandong-Palkyung by the Thematic Exploration of Joseon Landscape Poetry and Paintings)

  • 노재현;손희경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 /
    • 제35권1호
    • /
    • pp.10-24
    • /
    • 2017
  • 관동팔경의 형성과정에 주목하여, 문헌 및 도상자료의 분석과 해석을 통해 관동 명승의 집경에 따른 팔경 형상화 및 정착시기를 탐색한 본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이란 최초 용례(用例)는 이황의 "답홍응길(答洪應吉)"로 볼 때, 관동팔경은 이미 16세기 이전 당시 인들의 인식 속에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론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지리지 분석 결과, 관동팔경은 16세기 초 중반에 관동십경으로의 확장 또한 이루어졌다. 최초의 관동팔경에 대한 집경은 신즙의 "영관동팔경(詠關東八景)"으로 확인됨에 따라 관동팔경이라는 용어는 문학 분야에서는 최소한 16세기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며 현재의 세트화된 관동팔경으로 정착된 시기는 늦어도 17세기 초반이라 추정된다. 관동 명승의 출현빈도 분석 결과, 시문에 등장한 관동 명승은 관동팔경 경물에 대한 집중현상이 뚜렷하였다. 한편 회화 분야에서 오로지 관동팔경만을 모은 그림은 허필의 "관동팔경도병(關東八景圖屛)"에서 최초로 확인되는데 실경산수화에서 표현된 관동팔경은 시문에서의 집경 양상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지만 화제 출현률 순위로 볼 때 시각적 결속력과 응집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이는 일정한 관념체계 상 특정 의의를 지닌 회화의 도상(圖像)을 중요시하는 특성이 반영된 결과로 판단된다. 더불어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들어 제작된 다수의 민화 형식의 팔폭병풍(八幅屛風)은 관동팔경의 문화현상이 보편적 수용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증좌이다. 또한 조선후기 성행한 남승도놀이 등 명승유람놀이에 등장하는 강원도내 13개의 명승에는 관동팔경이 오롯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조선 말기 관동팔경은 놀이문화 속에서도 확고하게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결과를 종합할 때, 관동팔경의 인식은 15세기 전반 이전부터 있어 온 것으로 보이고, 16세기 형상화 과정의 지속적 전개를 통해 17세기 정착되었으며 18세기에 들어 관습화 보편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궁극적으로 관동팔경은 고려시대부터 별개의 경물로 명성을 얻은 지역 명승이 17세기 후반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동 명승 중에 관동팔경은 오랜 기간 여러 사람의 탐승과 유람문화 향유(享有)를 통해 오직 여덟 개의 최상의 명소만을 추리기 위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배태된 국내 대표적 팔경임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