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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전통정원의 해외 보급 및 확산에 관한 역사적 고찰 - 1867년부터 1939년까지 만국박람회를 중심으로 - (A Historical Study on the Propagation and Diffusion of the Traditional Japanese Garden in Foreign Countries - Focused on World's Fairs between 1867 and 1939 -)

  • 윤상준;권진욱;홍광표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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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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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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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본 연구는 전통정원의 해외 보급 및 확산을 위한 기준점 마련과 기반 구축을 위한 기본연구로서 일본의 전통정원 보급 및 확산에 있어 초기 단계인 유럽과 미국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 통한 조성내용과 파급효과를 규명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일본이 박람회를 처음 참가한 186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까지 일본 정원이 조성된 박람회를 대상으로 조성된 정원을 파악하고 박람회 기간 중 그리고 폐막 이후 일본정원의 파급효과를 조사 분석하였다. 연구의 결과를 종합하면 문화적 측면에서 명치정부의 첫 박람회 참여에 있어 독일인 바그너의 충고에 따라 문화와 공예를 박람회 주제로 선정하고 정원을 전통 건축물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면서 국가적 정책으로 대외 홍보 수단으로 삼았다. 그 결과 만국박람회 일본관에 대표적으로 조성된 강호시대 회유식 정원 양식과 다정은 유럽과 미국 내에서 일본정원의 대표적 양식으로 인식되었다. 정치적 측면으로는 미국인에게 일본 정원은 도입된 '이국적 미'이자 '문화유산'으로 인식되면서 일본에 대한 친근감을 높이고 반일감정을 없애려는 일본 제국정부의 목적을 달성하였고 전통정원을 통해 유구한 역사를 가진 일본사회를 이상적으로 표현하여 서구 열강과의 차별성을 도모, '전통'과 '자연'을 키워드로 '영원한 평온'이라는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사회경제적으로는 박람회 이후 존치된 일본정원은 지속적인 일본정원의 모델 역할을 하였으며 박람회의 일본관을 조성하기 위하여 정원과 관련된 많은 전문가가 일본에서 미국과 유럽으로 간 후 현지 정착하며 일본 정원이 현지에 녹아드는 계기가 되었다.

화제한어 '도서관' 명칭의 변용과 쟁점에 관한 연구 (A Study on the Transformation and Issue of the Japanese-Chinese Word 'Library')

  • 윤희윤
    • 한국문헌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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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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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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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도서관(図書館)이란 말은 일본 메이지 중기에 서양의 library와 bibliothek를 번역한 화제한어다. 이를 한자문화권의 중국(도서관(图书馆)), 대만(도서관(圖書館)), 한국(도서관), 베트남(Dồ thư quán)이 수용하였다. 그렇다면 일본과 중국에서는 언제, 누가 서양 도서관을 최초로 소개하였는가. 일본의 중론은 계몽사상가 후쿠자와(福澤諭吉)의 『서양사정(西洋事情), 1866』이고, 중국은 개혁사상가 양계초(梁启超)의 『시무보(时务报), 1896년』 기사를 최초로 지목하는 견해가 많다. 이에 본 연구는 양국에 서양 도서관을 소개한 근대 사전, 저서, 역서, 논문, 신문기사 등을 중심으로 '도서관'이란 명칭이 등장한 시기와 인물을 추적하고 논증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모도끼(本木正栄)의 『안게리아어림대성(諳厄利亜語林大成), 1814』를 비롯한 여러 견문기 및 사전에서 다양한 용어로 서양 도서관을 기술하였기 때문에 1866년 후쿠자와 소개설은 오류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류정담(刘正埮)의 『한어외래사사전(汉语外来词词典), 1884』에 도서관이란 용어가 최초로 등장하므로 1896년 양계초 도입설은 사실이 아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한국에서 도서관이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시기, 1901년 일본홍도회 부산지회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도서관 명칭에 대한 추적과 논증이 요구된다.

세계 현대 판화속의 일본 현대판화의 국제성 연구 (Study on Internationality of Japanese Modern Print in the World Print)

  • 김승연;신지연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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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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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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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일본의 대중 미술로서의 판화는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의 우키요에 판화부터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인이 공동으로 제작하는 우키요에(浮世繪) 판화는 메이지시대(明治時代, 1868~1912)이후 새로운 인쇄 기술의 발달과 서구적 예술의 도입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그 이후 다이쇼시대(大正時代 1912~1926)가 되면서는 야마모토 카나에(山本 鼎)가 ${\ll}$명성${\gg}$지에 발표 했던 <어부(漁夫)>라는 작품을 계기로 한 창작 판화 운동이 일어났다. 창작 판화는 복제 우키요에 판화와는 달리 한 사람이 원화부터 인쇄까지를 스스로 제작하는 것으로, 작가가 주체가 되어 자신만의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전까지의 복제판화에 대해 반성하고 판화의 예술성을 인식하고자 한 이 운동을 시작으로 점차 많은 작가들이 판화 작품을 제작하였고 전시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사실 1900년대 전후만 해도 일본에서 판화는 서양화나 조각 등에 비해서는 낮은 평가를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부터 다수의 일본 판화가들이 국제 전람회에서 수상한 사실들은 국제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고, 일본에서도 1957년에 첫 국제 미술제인 동경 국제 판화 비엔날레가 개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점차 일본에서도 판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미술을 표현하기 위한 매체로서의 판화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판화가 독립된 장르가 아닌 현대 미술의 표현 양식의 하나로 종속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판화가들과 대학 교육 차원에서의 다양한 노력을 통해 위기를 뛰어넘고 하나의 예술 장르로써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전통적인 기법과 현대적인 표현 방식을 접목하여 새롭고 완성도 있는 작품을 제작하는 판화가들이 등장하여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활약 했다.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해외 활동과 판화에 대한 연구, 신진 판화가들의 양성을 통하여 일본의 현대 판화는 세계적으로 크게 인정받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일본의 현대 판화가 발생되었던 역사적인 과정을 되짚어보고, 국제적인 위상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조선 후기 유리거울의 수입과 공예품의 특징 (A Study on Glass Mirror Trade and its Characteristics of Craft after Joseon Dynasty)

  • 박진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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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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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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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유리거울을 서양경(西洋鏡), 양경(洋鏡), 파리경(玻璃鏡), 파려경(玻瓈鏡), 석경(石鏡)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고, 이를 경험하고 느꼈던 당시의 상황과 교역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17세기 이후 청·러시아와의 교역을 중심으로 유리거울이 수입되었고, 조선 후기에 들어와 수입금지 품목에 포함되는 등 18세기에 들어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신문물로 확인되었다. 19세기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품으로 더 크게 확대되었고, 특히 일본과의 교역이 눈에 띄게 성장하였다. 18~19세기의 유리거울은 개인이 용모를 확인하는 기본적인 용도에서 벗어나 상업적인 용도로까지 폭넓게 활용되었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에 관한 시각적 충격과 경험들을 글로 남겼고, 유리거울에 대한 유용함은 조선의 소비 욕구로 이어져 유리거울의 수입을 자극하였다. 이로 인해 18세기 이후 유리거울은 조선의 청동거울을 빠르게 대체하였고 유리거울을 이용한 새로운 공예품들이 제작 및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실내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으로 일체식 유리경갑(一體式 琉璃鏡匣)을 개발해 전통적으로 사용해왔던 빗접과 함께 이용해 편리하였다. 당시 경갑의 인기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를 비롯해 조선시대 풍속화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기형으로 볼 수 있는 경대(鏡臺)도 조선에서 많이 제작했는데 서랍 개수와 크기, 상자 형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한 여러 형태의 경대를 살필 수 있다. 또한 휴대용의 작은 면경도 조선만의 미감으로 표현한 길상 문양, 장식 기법을 통해 품격 있는 공예품들로 제작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에서도 유리거울을 수입했지만 19세기 말 이후에는 일본식의 공예품들이 성행하였다. 일본 명치~대정시대에 유행했던 유리경대가 수입되었고 대형의 유리거울을 이용한 공예품들이 사용되었다. 이른 시기부터 있었던 경병의 경우 응접실처럼 큰 공간에 진설하거나 연회를 위해 중국·일본으로부터 수입했으며, 서양식으로 거울을 벽에 걸거나 부착해 공간의 밝기를 조절하고 외부의 풍경을 들여와 실내를 장식하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일본(日本) 의학(醫學)의 '절충파(折衷派)'에 관(關)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 Zhe Zhong Pai'(折衷派) of the Traditional Medicine of Japan)

  • 박현국;김기욱
    • 동국한의학연구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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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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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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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The outline and characteristics of the important doctors of the 'Zhe Zhong Pai'(折衷派) are as follows. Part 1. In the late Edo(江戶) period The 'Zhe Zhong Pai', which tried to take the theory and clinical treatment of the 'Hou Shi Pai (後世派)' and the 'Gu Fang Pai(古方派)' and get their strong points to make treatments perfect, appeared. Their point was 'The main part is the art of the ancients, The latter prescriptions are to be used'(以古法爲主, 後世方爲用) and the "Shang Han Lun(傷寒論)" was revered for its treatments but in actual use it was not kept at that. As mentioned above The 'Zhe Zhong Pai' viewed treatments as the base, which was the view of most doctors in the Edo period. However, the reason the 'Zhe Zhong Pai' is not valued as much as the 'Gu Fang Pai' by medical history books in Japan is because the 'Zhe Zhong Pai' does not have the substantiation or uniqueness of the 'Gu Fang Pai', and also because the view of 'gather as well as store up'(兼收並蓄) was the same as the 'Kao Zheng Pai'. Moreover, the 'compromise'(折衷) point of view was from taking in both Chinese and western medical knowledge systems(漢蘭折衷). Generally the pioneer of the 'Zhe Zhong Pai' is seen as Mochizuki Rokumon(望月鹿門) and after that was Fukui Futei(福井楓亭), Wadato Kaku(和田東郭), Yamada Seichin(山田正珍) and Taki Motohiro(多紀元簡). Part 2. The lives of Wada Tokaku(和田東郭), Nakagame Kinkei(中神琴溪), Nei Teng Xi Zhe(內藤希哲), the important doctors of the 'Zhe Zhong Pai', are as follows. First Wada Tokaku(和田東郭, 1743-1803) was born when the 'Hou Shi Pai' was already declining and the 'Gu Fang Pai' was flourishing and learned medicine from a 'Hou Shi Pai' doctor, Hu Tian Xu Shan(戶田旭山) and a 'Gu Fang Pai' doctor, Yoshimasu Todo(吉益東洞). He was not hindered by 'the old ways(古方)' and did not lean towards 'the new ways(後世方)' and formed a way of compromise that 'looked at hardness and softness as the same'(剛柔相摩) by setting 'the cure of the disease' as the base, and said that to cure diseases 'the old way' must be used, but 'the new way' was necessary to supplement its shortcomings. His works include "Dao Shui Suo Yan(導水瑣言)", "Jiao Chiang Fang Yi Je(蕉窗方意解)" and "Yi Xue Sho(醫學說)". Second. Nakagame Kinkei(中神琴溪, 1744-1833) was famous for leaving Yoshimasu Todo(吉益東洞) and changing to the 'Zhe Zhong Pai', and in his early years used qing fen(輕粉) to cure geisha(妓女) of syphilis. His argument was "the "Shang Han Lun" must be revered but needs to be adapted", "Zhong Jing can be made into a follower but I cannot become his follower", "the later medical texts such as "Ru Men Shi Qin(儒門事親)" should only be used for its prescriptions and not its theories". His works include "Shang Han Lun Yue Yan(傷寒論約言)". Third, Nei Teng Xi Zhe(內藤希哲, 1701-1735) learned medicine from Qing Shui Xian Sheng(淸水先生) and went out to Edo. In his book "Yi Jing Jie Huo Lun(醫經解惑論)" he tells of how he went from 'learning'(學) to 'skepticism'(惑) and how skepticism made him learn in 'the six skepticisms'(六惑). In the latter years Xi Zhe(希哲) combines the "Shen Nong Ben Cao Jing(神農本草經)", the main text for herbal medicine, "Ming Tang Jing(明堂經)" of accupuncture, basic theory texts "Huang Dui Nei Jing(皇帝內經)" and "Nan Jing(難經)" with the "Shang Han Za Bing Lun", a book that the 'Gu Fang Pai' saw as opposing to the rest, and became 'an expert of five scriptures'(五經一貫). Part 3. Asada Showhaku(淺田宗伯, 1815-1894) started medicine at Zhong Cun Zhong Zong(中村中倧) and learned 'the old way'(古方) from Yoshimasu Todo and got experience through Ouan Yue(川越) and Fu Jing(福井) and received teachings in texts, history and Wang Yangmin's principles(陽明學) fmm famous teachers. Showhaku(倧伯) meets a medical official of the makufu(幕府), Ben Kang Zong Yuan(本康宗圓), and receives help from the 3 great doctors of the Edo period, Taki Motokato(多紀元堅), Xiao Dao Xue Gu(小島學古) and Xi Duo Cun Kao(喜多村栲窻) and further develops his arts. At 47 he diagnoses the general Jia Mao(家茂) with 'heart failure from beriberi'(脚氣衡心) and becomes a Zheng Shi(徵土), at 51 he cures a minister from France and received a present from Napoleon, at 65 he becomes the court physician and saves Ming Gong(明宮) Jia Ren Qn Wang(嘉仁親王, later the 大正天皇) from bodily convulsions and becomes 'the vassal of merit who saved the national polity(國體)' At the 7th year of the Meiji(明治) he becomes the 2nd owner of Wen Zhi She(溫知社) and takes part in the 'kampo continuation movement'. In his latter years he saw 14000 patients a year, so we can estimate the qualjty and quantity of his clinical skills. Showhaku(宗伯) wrote over 80 books including the "Ju Chuang Shu Ying(橘窻書影)", "Wu Wu Yao Shi Fang Han(勿誤藥室方函)", "Shang Han Biang Shu(傷寒辨術)", "Jing Qi Shen Lun(精氣神論)", "Hunag Guo Ming Yi Chuan(皇國名醫傳)" and the "Xian Jhe Yi Hua(先哲醫話)". Especially in the "Ju Chuang Shu Ying(橘窻書影) he says "the old theories are the main, and the new prescriptions are to be used"(以古法爲主, 後世方爲用), stating the 'Zhe Zhong Pai' way of thinking, In the first volume of "Shang Han Biang Shu(傷寒辨術)" and "Za Bing Lun Shi(雜病論識)", 'Zong Ping'(總評), He discerns the parts that are not Zhang Zhong Jing's writings and emphasizes his theories and practical 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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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 의학醫學의 '절충파(折衷派)'에 관(關)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Zhe Zhong Pai'(折衷派) of the Traditional Medicine of Japan)

  • 박현국;김기욱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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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0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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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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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The outline and characteristics of the important doctors of the 'Zhe Zhong Pai'(折衷派) are as follows. Part 1. In the late Edo(江戶) period The 'Zhe Zhong Pai', which tried to take the theory and clinical treatment of the 'Hou Shi Pai (後世派)' and the 'Gu Fang Pai (古方派)' and get their strong points to make treatments perfect, appeared. Their point was 'The main part is the art of the ancients, The latter prescriptions are to be used'(以古法爲主, 後世方爲用) and the "Shang Han Lun(傷寒論)" was revered for its treatments but in actual use it was not kept at that. As mentioned above The 'Zhe Zhong Pai ' viewed treatments as the base, which was the view of most doctors in the Edo period, However, the reason the 'Zhe Zhong Pai' is not valued as much as the 'Gu Fang Pai' by medical history books in Japan is because the 'Zhe Zhong Pai' does not have the substantiation or uniqueness of the 'Gu Fang Pai', and also because the view of 'gather as well as store up' was the same as the 'Kao Zheng Pai', Moreover, the 'compromise'(折衷) point of view was from taking in both Chinese and western medical knowledge systems(漢蘭折衷), Generally the pioneer of the 'Zhe Zhong Pai' is seen as Mochizuki Rokumon(望月鹿門) and after that was Fukui Futei(福井楓亭), Wadato Kaku(和田東郭), Yamada Seichin(山田正珍) and Taki Motohiro(多紀元簡), Part 2. The lives of Wada Tokaku(和田東郭), Nakagame Kinkei(中神琴溪), Nei Teng Xi Zhe(內藤希哲), the important doctors of the 'Zhe Zhong Pai', are as follows First. Wada Tokaku(和田東郭, 1743-1803) was born when the 'Hou Shi Pai' was already declining and the 'Gu Fang Pai' was flourishing and learned medicine from a 'Hou Shi Pai' doctor, Hu Tian Xu Shan(戶田旭山) and a 'Gu Fang Pai' doctor, Yoshimasu Todo(吉益東洞). He was not hindered by 'the old ways(古方), and did not lean towards 'the new ways(後世方)' and formed a way of compromise that 'looked at hardness and softness as the same'(剛柔相摩) by setting 'the cure of the disease' as the base, and said that to cure diseases 'the old way' must be used, but 'the new way' was necessary to supplement its shortcomings. His works include "Dao Shui Suo Yan", "Jiao Chiang Fang Yi Je" and "Yi Xue Sho(醫學說)" Second. Nakagame Kinkei(中神琴溪, 1744-1833) was famous for leaving Yoshirnasu Todo(吉益東洞) and changing to the 'Zhe Zhong Pai', and in his early years used qing fen(輕粉) to cure geisha(妓女) of syphilis. His argument was "the "Shang Han Lun" must be revered but needs to be adapted", "Zhong jing can be made into a follower but I cannot become his follower", "the later medical texts such as "Ru Men Shi Qin(儒門事親)" should only be used for its prescriptions and not its theories". His works include "Shang Han Lun Yue Yan(傷寒論約言) Third. Nei Teng Xi Zhe(內藤希哲, 1701-1735) learned medicine from Qing Shui Xian Sheng(淸水先生) and went out to Edo. In his book "Yi Jing Jie Huo Lun(醫經解惑論)" he tells of how he went from 'learning'(學) to 'skepticism'(惑) and how skepticism made him learn in 'the six skepticisms'(六惑). In the latter years Xi Zhe(希哲) combines the "Shen Nong Ben Cao jing(神農本草經)", the main text for herbal medicine, "Ming Tang jing(明堂經)" of accupuncture, basic theory texts "Huang Dui Nei jing(黃帝內徑)" and "Nan jing(難經)" with the "Shang Han Za Bing Lun", a book that the 'Gu Fang Pai' saw as opposing to the rest, and became 'an expert of five scriptures'(五經一貫). Part 3. Asada Showhaku(淺田宗伯, 1815-1894) started medicine at Zhong Cun Zhong(中村中倧) and learned 'the old way'(古方) from Yoshirnasu Todo and got experience through Chuan Yue(川越) and Fu jing(福井) and received teachings in texts, history and Wang Yangmin's principles(陽明學) from famous teachers. Showhaku(宗伯) meets a medical official of the makufu(幕府), Ben Kang Zong Yuan(本康宗圓), and recieves help from the 3 great doctors of the Edo period, Taki Motokato(多紀元堅), Xiao Dao Xue GU(小島學古) and Xi Duo Cun Kao Chuang and further develops his arts. At 47 he diagnoses the general Jia Mao(家茂) with 'heart failure from beriberi'(脚氣衝心) and becomes a Zheng Shi(徵I), at 51 he cures a minister from France and received a present from Napoleon, at 65 he becomes the court physician and saves Ming Gong(明宮) jia Ren Qn Wang(嘉仁親王, later the 大正犬皇) from bodily convulsions and becomes 'the vassal of merit who saved the national polity(國體)' At the 7th year of the Meiji(明治) he becomes the 2nd owner of Wen Zhi She(溫知社) and takes part in the 'kampo continuation movement'. In his latter years he saw 14000 patients a year, so we can estimate the quality and quantity of his clinical skills Showhaku(宗伯) wrote over 80 books including the "Ju Chuang Shu Ying(橘窓書影)", "WU Wu Yao Shi Fang Han(勿誤藥室方函)", "Shang Han Biang Shu(傷寒辨術)", "jing Qi Shen Lun(精氣神論)", "Hunag Guo Ming Yi Chuan(皇國名醫傳)" and the "Xian Jhe Yi Hua(先哲醫話)". Especially in the "Ju Chuang Shu Ying(橘窓書影)" he says "the old theories are the main, and the new prescriptions are to be used"(以古法爲主, 後世方爲用), stating the 'Zhe Zhong Pai' way of thinking. In the first volume of "Shung Han Biang Shu(傷寒辨術) and "Za Bing Lun Shi(雜病論識)", 'Zong Ping'(總評), He discerns the parts that are not Zhang Zhong Jing's writings and emphasizes his theories and practical 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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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셀나무(Tamarix aphylla)의 명칭문제에 대한 고찰 (An Investigation of Local Naming Issue of Tamarix aphylla)

  • 김영숙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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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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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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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성경에 쓰인 에셀나무(Tamarix aphylla)의 올바른 명칭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서 식물의 형태분류학적인 특성 분석, Tamarix속에 대한 상징성 고찰, 한국고전과 중국고전에서의 용례 분석, 그리고 한중일 성경에 나타난 에셀나무 번역상에 나타난 문제점에 대한 고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식물분류학적으로 Tamarix속 유사종의 구별은 잎과 꽃의 형태로 구분하지만, 그 크기가 2-4mm 정도로 매우 작기 때문에 육안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스라엘 광야에 분포하는 T. aphylla와 중국과 한국의 T. chinensis는 가지가 처지는 모양이나 개화기간에서 확연한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Tamarix속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한(漢)나라에서는 궁궐 안뜰에 심을 정도로 귀한 나무였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나무로 여겼다. 또한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드러내는 계약의 표지로, 예언자 사무엘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무엘의 법정을 상징하였다. 한국고전 용례를 통해서 볼 때 Tamarix속은 이미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용어로 쓰였는데 '정류(檉柳)'는 의학적인 용어로 많이 쓰인 반면에, '위성류(渭城柳)'는 문학적 용어로 쓰였다. 중국의 본초서 가운데 정류(檉柳)와 관련된 문헌들의 연대와 명칭을 고증한 결과에 의하면 모두 16개 용어가 쓰였는데, 이 용어들 가운데 중국 성경에 쓰였던 '수사류(垂絲柳)'라는 단어는 없었다. 또한 당나라 왕유(王維 699-759)의 시 때문에 생겨난 '위성류(渭城柳)'라는 단어도 없었고, 오히려 주나라와 관계있는 '하류(河柳)'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중국의 학술용어를 조사해 보면 '수사류(垂絲柳)'와 '정류(檉柳)'가 대등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중국성경에서 에셀에 관한 번역은 '수사류(垂絲柳)'로 하던지 '정류(檉柳)'로 하던지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일본성경은 명치역 "구신약전서(舊新約全書)(1887)"에서 'やなぎ(버드나무)'로 번역하는 오류가 있었는데, "구어역(口語譯) 성서(聖書)(1955)"부터 'ぎょりゅう(정류(檉柳))'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ぎょりゅう(정류(檉柳))'는 야생종이 아니라 에도시대 도입종이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용어 설정을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한국고전 용례분석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한국의 T. chinensis는 약용 및 관상용으로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생육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한국 성경에서 의약학 용어인 '정류(檉柳)' 사용하거나 혹은 문학적인 용어인 '위성류'를 사용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성류'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조차 사용빈도가 극히 낮은 용어이고, 조선시대 문학하던 분들의 모화사상과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므로 이 용어 사용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논란이 있는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에셀나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의 성문화를 통해 본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의 선정성 (Pornographic Animation's Sexuality through Japanese Sex Culture)

  • 최은혜;오진희
    •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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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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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8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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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인류는 본능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발전을 지속해왔다. 인간의 욕구중 성욕은 식욕과 함께 가장 본능적인 것의 하나로 분류되며, 선사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성적인 이미지 표현은 사회적, 윤리적 제약 하에서도 시대의 변화와 매체의 발전을 수용하며 더욱 앞서 진화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사진기술의 발명으로 인해 포르노그래피 이미지는 매우 극적인 변화를 보였다. 영상은 사진보다 직접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써 이러한 변화를 더욱 촉진하였고, 영상매체 중 하나로서 애니메이션은 장치에 의한 이미지인 실사영상이 가진 재현성의 한계를 넘어 실험을 거듭해왔다. 이 논문에서는 애니메이션에서 성적욕망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와 이를 있게 한 사회적 배경으로서의 성문화를 연결하여 논의하고자 하며, 그 분명한 사례로써 일본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을 선정하여 분석하였다. 일본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은 문화와 사회제도적 역사로부터 비롯된 결과물로써 해석되어야 한다. 헤이안시대와 에도시대를 거쳐 메이지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성문화는 매우 개방적이고 때로 파격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변신, 변태, 미소년 소녀 성애, 촉수성교, 신체 특정부위의 빈번한 노출 등은 와카슈, 처방혼, 혼숙, 남색 등과 같은 고대 일본의 개방적인 성 풍습을 통해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본 특유의 성문화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성적 표현으로 자리한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에 이르러 2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외부로부터 강제된 서구 근대화에 의해 제도적으로 단절되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현재까지도 일정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에서는 고대 일본의 자유로운 성문화가 제도에 의해 변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 또한 문화현상이라는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논의하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전반에서 발견되는 선정성은 그들의 역사로부터 비롯되며,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표현은 제도적으로 규정된 성 의식에 의해 굴절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는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에 성적표현의 자유로움을 부여함과 동시에 타자화 된 여성 신체에 대한 두려움이자 뿌리칠 수 없는 매혹이라는 이분법으로 변형되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문(學問) 개념의 근대적 변환 - '격치(格致)', '궁리(窮理)' 개념을 중심으로 - (How has 'Hakmun'(學問, learning) become converted into a modern concept? focused on 'gyeogchi'(格致) and 'gungni'(窮理))

  • 이행훈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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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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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77-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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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근대 이전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지적 체계와 학문은 인간과 자연을 통일체적으로 사유하는 가운데 인간의 본성을 발현함으로써 사회적 실천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특히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송대 신유학은 '이기(理氣)' 개념으로 인간과 사회, 우주와 자연을 일통의 유기적 구조로 설명하였으며, 이러한 철학체계 내에서 인간학과 자연학은 통합되어 있었다. 동서의 충돌과 교류는 동아시아의 지적 체계에 균열을 일으켰고, 전통적 학문 개념의 전이와 변용을 가져왔다. 개화와 진보의 욕망을 내면화하고, 동도(東道)와 서기(西器), 신학(新學)과 구학(舊學) 논쟁을 거치면서 유학은 비판과 쇄신, 부정과 폐기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 본성의 자각과 도덕 실천의 이상(理想)은 문명개화와 근대 국가 설립의 제한적 수단으로만 논의될 뿐 더 이상 학문의 본령으로서 위상을 갖지 못했다. 서구 근대의 광휘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를 규준했던 학문의 내용과 방법은 물론 목적까지 변화시켰다. 근대 계몽기 서구 문명 수용과정에서 한자(어)로 구성된 전통 학술 용어나 개념은 외래 학문을 번역, 소개하는데 여전히 유효한 기제였다. '격치(格致)'와 '궁리(窮理)'는 자주 인용되었는데, 인간과 우주 만물에 내재한 본성을 탐구하는 전통적 의미는 점차 퇴색되고, '격치학(格致學)', '궁리학(窮理學)' 등 개별 학문을 지칭하는 명사로 변환되었으며, 때때로 철학(philosophy), 과학(science) 등 상이한 학문 영역을 넘나들며 사용되었다. 학문 개념과 지적 체계의 이러한 변동은 외래 학문의 수용 양상을 보여주는 한편 동아시아 전통 학문이 지닌 특성을 드러낸다. 이제 가치와 사실의 분리, 인간학과 자연학의 분리, 학문의 분과화를 진행해 온 근대학문은 또 하나의 전통이 되었고, 계승과 극복의 양가적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