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Korea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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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고농서를 통한 조선시대의 도작기술 전개 과정 연구 Ⅵ. 시비기술 (Transition of Rice Culture Practices during Chosun Dynasty through Old References. Ⅵ Fertilizing Practices)

  • 이숭겸;구자옥;이은웅;이홍석
    • 한국작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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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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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9-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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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
  • 도전의 분양법은 세역위양이었던 중국의 고대농법에서와 달리, 이미 우리나라는 여말에 상경화하였으며, 두과작물의 녹비이용법과 함께 분전법의 실현에 앞서 분종법이나 분과법이 순차적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15세기에 이르러 $\ulcorner$직설$\lrcorner$의 도전분전법은 재료를 객토류, 초본류, 분류로 확대분화시켰고 초경과 재경 사이에 시비토록 하되 토양조건이 특수한 도전에는 각각 적의한 시비법을 별도를 기술하였다. 또한 묘종법의 도전에서는 분묘처(못자리)와 묘종처(본답)의 시비술로 나누어 전문화시켰고, 개간지에서는 기경작업과 병행시키는 유기물 환원방식이 체계화 되어 있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ulcorner$직설보$\lrcorner$를 통하여 경상도의 속방을 체계화시켜 조도앙기처의 분양술을 완성시켰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분회, 요회 및 퇴비제조술과 사용법이었다. 18-19세기에는 황지회복과 수전이모작 확대를 지원하기 위한 지방보강법으로 시비재료를 최대한 확대하고 저분법과 추비법을 강조하였으며, 시비이론과 함께 작업능률을 높이기 위한 수레 이용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이상으로 보아 도전분양에 있어서는 분원재료상의 제약을 타파하고 추비체계를 확립시켰으며, 저분법과 함께 다비의 필요성에 대한 이론과 인식을 새롭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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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록평리 유적 석곽묘 석재의 재질특성 및 산지탐색 (Investigation of Source Area and Material Characteristics of the Stone Properties from Stone-lined Tombs in Cheongyang Rokpyeong-ri Site, Korea)

  • 최일규;송준호;이보선;이찬희
    • 자원환경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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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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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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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청양 록평리 유적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여러 기의 석곽묘가 발굴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15기의 석곽묘를 대상으로 암석광물학적 및 지구화학적 특성을 분석하여 암종과 점유율을 검토하고 석재의 산지를 해석하였다. 석곽묘 부재로 사용한 암석은 흑색 사암, 잡사암, 점판암, 역암 및 편마암 등 5종이다. 전암대자율 측정 결과, 석곽묘와 추정산지의 동종 암석은 모두 같은 범위에 도시되며, 지구화학적 거동특성도 연구대상과 추정산지 석재의 유사성이 높게 나타난다. 석곽묘의 석재는 추정산지 암석과 성인적으로 동일하며, 유적의 기반암과 500m 이내에 분포하고 있어 특별한 조달체계 없이 현장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재들은 특별한 치석 없이 약간의 할석을 통해 축조한 것으로 판단되나, 일부 석곽묘의 부석시설로는 균질한 흑색 사암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석재의 인위적인 선별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문화유산 광희문(光熙門)의 관광자원화를 위한 공간 활성화 콘텐츠 연구 (A Study on the Contents to Vitalize the Space for Making Traditional Gwangheemun A Tourism Resource)

  • 김지은;박은수
    • 한국과학예술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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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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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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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의 배경 및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서울성곽의 4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은 서민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조선시대 축성 기술의 변천 과정을 보여 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와 문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소통의 장(場)으로서 역할이 기대되는 곳이다. 그러나 현재 광희문은 주변 환경 낙후와 시설의 노후로 인한 주변 재정비가 요구되며, 지역적 특색이 부각된 새로운 전통 공간 활성화가 필요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연구방법 및 내용과 그 결과를 도출하였다.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아이덴티티를 수립하고 전통문화유산 광희문으로서 공간 활성화 콘텐츠를 제시하여 놀거리와 볼거리, 즐길거리가 있는 역사문화 공간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에 광희문의 역사문화적 특성을 바탕으로 달빛거리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하고, 광희문 정비계획, 성곽복원계획, 성안마을, 성밖마을, 패션예술거리라는 다섯 가지 공간 활성화 콘텐츠를 개발·제시하였다. 공간 활성화 콘텐츠는 구체적인 도시재생의 개발 방법으로 그 의미가 있으며, 전통 문화재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형성하여 거주자와 방문자 모두의 문화적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개발 방향으로 활용이 기대된다.

당진 신암사 금동여래좌상의 표면특성 분석과 비파괴 정밀진단을 통한 제작기술 해석 (Interpretation of Making Techniques through Surface Characteristic Analysis and Non-destructive Diagnosis for the Gilt-bronze Seated Buddha in Dangjin Sinamsa Temple, Korea)

  • 최일규 ;양혜리 ;한두루 ;이찬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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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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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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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 당진 신암사는 고려 후기에 창건된 사찰이며, 경내의 극락전에는 금동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의 개금층은 박락과 광택이 저하되는 등 여러 손상이 발생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재료학적 분석과 비파괴 진단을 통해 불상의 내부와 외부에 대한 보존상태를 정밀 검토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제작기법을 해석하였다. 이 결과, 개금층은 순금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되며 안료에서 흑색은 먹, 녹색은 석록과 염화동 및 동록 등으로, 적색은 연단 또는 진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손상도 평가 결과, 개금층의 벗겨짐, 균열, 탈락 및 박리 등이 확인되나 보존상태는 비교적 건전하다. 그러나 개금층의 광택은 유지부에 비해 저하부가 더 넓게 산출된다. 이 불상에 대한 초음파 속도측정 결과 1,230~3,987(평균 2,608)m/s로 비교적 넓은 범위를 보였으며, 적외선 열화상으로 박리는 확인되지 않았고 특별한 접합흔도 발견되지 않는다. 내시경 검사에서는 내부 소지금속의 부식과 생물학적 피해가 다소 관찰되었으며, 봉안된 복장물이 확인되었다. 이를 종합하여 제작기법을 검토한 결과, 이 금동여래좌상은 통주조로 제작하였으며 주형을 거꾸로 뒤집어 용탕을 주입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강점기 전후 대산평야 농촌경관의 형성과 변화 (The Characteristics of the Rural Landscape of Daesan Plain Around the Japanese Colonial Era)

  • 정재현;이유직
    • 농촌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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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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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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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The study primarily aims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transition from natural landscape to modern agricultural landscape on the Daesan plain in Dong-myeon, Changwon-si, in the lower reaches of the Nakdong River. The periods covered in the transition include the late Joseon Dynasty, the early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lat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study concluded the following: It was found that the Daesan Plain used to function as a hydrophilic landscape before it formed into a rural landscape. This is characterized by the various water resources in the Plain, primarily by the Nakdong River, with its back marsh tributaries, the Junam Reservoir and Jucheon. To achieve its recent form, the Daesan Plain was subjected to human trial and error. Through installation of irrigation facilities such as embankments and sluices, the irregularly-shaped wetlands were transformed into large-scale farmlands while the same irrigation facilities underwent constant renovation to permanently stabilize the rural landscape. These processes of transformation were similarly a product of typical colonial expropriati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Japanese capitalists initiated the construction of private farms which led to the national land development policy by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These landscape changes are indicative of resource capitalism depicted by the expansion of agricultural production value by the application of resource capital to undeveloped natural space for economic viability. As a result, the hierarchical structure was magnified resulting to the exacerbation of community and economic structural imbalances which presents an alternative yet related perspective to the evolution of landscape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addition, considering Daesan Plain's vulnerability to changing weather conditions, natural processes have also been a factor to its landscape transformation. Such occurrences endanger the sustainability of the area as when floods inundate cultivated lands and render them unstable, endangering residents, as well as the harvests. In conclusion, the Daesan Plain originally took the form of a hydrophilic landscape and started significantly evolving into a rural landscape since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Human-induced land development and geophysical processes significantly impacted this transformation which also exemplifies the several ways of how undeveloped natural landscapes turn into mechanized and capitalized rural landscapes by colonial resource capitalism and development policies.

황룡사 창건 구층목탑 단상 (A Study on the Architecture of the Original Nine-Story Wooden Pagoda at Hwangnyongsa Temple)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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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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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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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황룡사 구층목탑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에 의해 선덕여왕 13년(645)에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이후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략으로 사찰이 완전히 불타버리기 전까지 약 700년 동안 당시대인의 정신문화 속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이자 호국불교의 구심체로서 존재하였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문헌기록과 발굴조사 자료를 근거로 황룡사 창건 목탑에 대한 구조와 전체적인 형태에 대한 다양한 복원안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황룡사 목탑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현재 남아 있는 목탑지의 외형적인 형태와 단순한 목구조를 가정한 사각구층의 형태였다. 이는 관련 자료의 부족과 제한된 지식으로 인해 황룡사 창건 목탑의 기술적 계보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부족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고대 대형 불탑의 구조 체계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 충분히 수정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2005년부터 진행된 <황룡사 복원 연구>를 통해 정리된 목탑지에 대한 재분석 자료를 근거로 동아시아 고대 불탑의 구조 체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 속에서 황룡사 창건 목탑의 계보와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함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황룡사 창건 목탑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걸쳐 적어도 두 번의 큰 중창을 겪는 동안 기단의 규모와 평면 형식 등이 변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상부 구조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유구에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하는 구층목탑과 관련된 흔적은 현재 판축으로 조성된 기단토와 심초석 정도이며, 그외 초석과 기단 석재 등 대부분은 9세기 이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황룡사 창건 목탑의 실질적인 구조는 당시 동아시아 대형 불탑의 변화과정 속에서 이해하여야 하며, 기술적 계보는 북조의 영향을 받은 백제의 대형 불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에 표현된 9층 마애탑의 모습과 황룡사지 강당지에서 출토된 금동제 불탑 난간편 분석을 통하여 파악된 고고자료를 근거로 황룡사 창건 목탑의 이미지를 추정해본다면 외형상으로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하고 있던 순수한 목구조를 한 사각구층탑과는 다른 형태로 파악되는데, 아마도 실심체를 갖춘 이원 구조의 팔각구층탑일 것으로 파악된다.

누항도(陋巷圖)와 누항록(陋巷錄)을 통해 본 이만부의 공간철학과 식산정사의 원형경관 (A Study on Lee, Man-Bu's Thought of Space and Siksanjeongsa with Special Reference of Prototype Landscape Analyzing Nuhangdo(陋巷圖) and Nuhangnok(陋巷錄))

  • 강병선;이승연;신상섭;노재현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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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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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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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천운정사(天雲精舍)'는 식산 이만부가 1700년에 건립한 식산정사이다. 본 연구에서는 식산정사와 관련한 이만부의 생애와 은일관을 알아보고, 그의 정사경영의 결과물인 「누항록」과 《누항도》를 분석해 정사의 풍수적 입지와 영역성 및 원형경관을 추정하고, 은거한 선비가 자신의 공간에 담고자 했던 철학을 고찰하여 다음의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식산 이만부는 조선 후기 대표적 은둔형 유학자이다. 정사의 이름이자 이만부의 호인 '식산'은 마을의 뒷산(主山)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는 생각(思), 몸(躬), 말(言), 사귐(交) 네 가지를 쉬고자 했다. 다난했던 숙종년간 남인 집안의 이만부는 '식산'이라는 호를 통해 은둔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표상하였다. 둘째,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입지, 공간구조, 건축물 및 조경시설물, 수목, 주변경관, 이용행태 등을 「누항록」에 기록하였고, 《누항도》화첩을 남겨 원형에 가까운 식산정사 복원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 셋째, 이만부는 외노곡이 밖에서 보면 사면이 두로 막혀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아늑하고 깊숙하며 멀리까지 내다보인다는 풍수적 지리관을 언급하고 있으며, 노곡마을 전체를 일컬어 식산정사라 했는데 이는 명명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영역을 형성·확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식산정사의 공간구성은 연식공간, 교육공간, 후원공간, 휴식공간, 채원 및 약초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당과 루, 연지로 구성된 연식공간은 개인적 공간으로 호연지기, 천인합일의 흥취, 군자의 도리, 인을 생각하는 이만부의 거처이자 강학을 베풀던 공간이다. 다섯째, 양정재 영역은 교육공간으로서 양정재는 주역 몽괘에서 취한 이름으로 어린 학생들의 학문과 덕이 크고 밝게 성장하기를 기원한 이름이다. 여섯째, 간지정, 고반대, 세한단 등으로 구성된 후원공간은 식산정사 가장 안쪽의 숲이 우거진 곳을 정리하고 자연 입석과 고송을 병풍삼아 작은 정자를 지을 축대를 쌓은 곳으로, 멈춤의 미덕과 은자의 여유, 군자의 지조 등에 관한 뜻을 담고 있다. 일곱째, 식산정사 담장 밖 동쪽 시내 건너 고목이 우거진 곳에 단을 조성하여 영귀사라 하고 괴석을 쌓고 화초를 심어 휴식의 장소로 삼았다. 여덟째,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채소와 약초의 효능을 상세히 알고 있던 이만부는 정사 내에 채원과 약초밭을 가꾸었다. 아홉째, 식산 이만부는 식산정사의 각 공간별 건축물과 조경시설물에 대한 명명을 통한 의미 부여와 고사(古事)를 따른 식재를 통해 자신의 정사에 성리학적 이상향을 실현했음을 알 수 있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과 왕도의 위치 관계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Location Relationship between Ancient Royal Garden and Royal Capital in North-East Asia)

  • 전용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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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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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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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왕도와 왕궁에서의 위치 관계에 따라 왕궁 내부의 북쪽, 왕궁 외부의 북쪽, 왕궁 내부나 외부의 남쪽에 위치하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중국 고대 궁실제도를 따른 전형적인 궁원이다. 두 번째는 왕궁과 독립적으로 위치하거나, 금원(禁苑)으로 확장되는 궁원이다. 세 번째는 왕궁의 남쪽에 위치하면서 유락(遊樂)이나 향연(饗宴)으로 특화한 궁원이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유형은 정궁(正宮)과 별궁(別宮) 혹은 이궁(離宮), 금원(禁苑)과의 관계에 따라 구분되고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익산 왕궁리 유적의 궁원을 비롯하여 한 장안성, 북위 낙양성과 남조 건강성, 당 대명궁 등에 이르기까지 정궁의 궁원으로 자리잡아왔다. 여기에서는 왕궁 안으로는 궁원이 내원(內苑)으로, 왕궁 밖으로 금원이 외원(外苑)으로 분리되어 있다. 반면에 두 번째는 궁원(宮苑)과 금원(禁苑)이 일체화되어 있다. 세 번째는 왕궁의 일부분을 구성하거나 왕도에서 정궁과 독립된 공간으로 별궁이나 이궁의 궁원으로 특화되어 왔다. 중국은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전형(典型)을 만들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한국의 백제와 신라, 일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름대로 독창성을 발휘하여 독특한 궁원을 발전시켜 나갔다. 백제왕도 익산의 궁원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궁원을, 사비도성의 궁원은 진·한대와 수·당대의 궁원을, 신라왕경의 궁원은 사비도성과 당의 궁원을, 일본 아스카~나라시대의 궁원은 백제와 신라의 궁원을 영향을 각각 받았다. 그렇지만 이들 궁원은 각각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궁원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지역에 따라 계통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평양 안학궁은 궁원으로 보아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영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안학궁 하부의 유구 중복 관계나 유물로 보아 그 초축 시기는 5~6세기로 올려보기 어렵고 대체로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평양 안학궁의 궁원은 평양 장안성의 정궁에 대응하는 별궁 혹은 이궁의 궁원으로서 한국 통일신라시대 동궁과 월지나 일본 나라시대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으로 보아,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궁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동북아시아의 고대 왕도라는 큰 틀에서 궁원의 위치 관계로 그 특징과 변천을 중점적으로 다룬 연구로 적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한계들을 조금씩 해결하여 나간다면,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지리라 기대해 본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9~20세기 갓끈 재질 조사: 호박, 대모, 플라스틱, 유리를 중심으로 (Investigation of the 19th~20th century Hat String Materials at the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Amber, Tortoise Shell, Plastics, Glass)

  • 오준석;이새롬;황민영;노수정;이영민;박성희;임성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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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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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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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갓끈은 조선시대 남성용 모자인 갓을 고정하는 실용적인 면과 함께 사용하는 재료의 다양화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는 장식적인 구실도 하여, 금, 은, 옥, 마노, 호박, 명박, 산호, 청금석, 수정 등 다양한 고급 재료가 사용되어 왔다.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갓끈의 재질이 어떻게 변천되었는지,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중 19~20세기 갓끈에 대해 재질을 조사하였다. 갓끈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전통적인 재질로는 호박, 대모, 나무, 대나무가 사용되었으며, 상아, 유리(소다유리, 납유리, 알칼리혼합유리)와 19세기 이후 발명된 신소재인 플라스틱(셀룰로오스 나이트레이트, 페놀-포름알데히드, 폴리스티렌, 아크릴)이 갓끈 장식에 새롭게 사용되었다. 갓끈의 중앙 장식, 구슬, 대롱에 사용된 재료는 대모가 가장 많이 차지하며, 대나무, 나무, 호박 순으로 전통 재료의 사용 빈도가 높았다. 대나무는 대롱으로 사용하여 다른 재질의 중앙 장식과 구슬을 조합한 갓끈이 많아, 흥선대원군 집정시 의관과 문물의 간소화시책에 따른 죽영이 유행을 보여주고 있다. 호박은 갓끈의 중앙 장식과 구슬에 사용되었으며, 산지는 한국에서 발견되고 있는 호박 유물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발틱 호박으로 동정되었다. 갓끈에 사용된 유리는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에서 출토되거나 전승되어온 소다유리나 알칼리혼합유리도 사용되었지만, 납유리에서는 Na2O가 검출되어 한국에서 발견되는 납유리 성분에서 벗어난 특징을 보여주어, 개항 후 해외에서 들어온 새로운 공예용 유리로 추정된다. 셀룰로오스 나이트레이트나 페놀-포름알데히드 등과 같은 플라스틱은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통재료인 대모, 호박, 산호 등을 대체하는 새로운 합성재료로써 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셀룰로오스 나이트레이트는 열화에 의해 균열과 미세 균열, 부서짐과 황변이 관찰되고 있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9~20세기 갓끈 재질에 대한 조사를 통해, 개항이후 전통적인 재료의 사용과 함께, 대모나 호박과 같은 천연재료를 대체하기 위해 유리와 플라스틱과 같은 신소재의 도입이 확인되었다.

현대 한국미술과 민족주의란 두 개의 얼굴 (Dual Faces of Nationalism reflected in Contemporary Korean Art and Society)

  • 최태만
    • 미술이론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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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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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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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
  • In Korea, nation and nationalism are undeniable justice, absolute virtue and moreover system of desire. From the late Chosun Dynasty when the Korean Peninsula had to survive from the critical situation of being the arena of competition, and through the colonial period under Japanese imperialism, nationalism became stronger as a logic of survival. The policy of seclusion under closed and exclusive nationalism that didn't recognize the world situation well enough, eventually gave more pain to the nation. Nationalism in colonial Korea which was as reformed nationalism and on the other hand, as intransigent, resisting nationalism. Since the purpose of this writing is not for clarifying the argument raised on Korean nationalism, there is no use mentioning how it went with the change of time. But we have to focus on the fact that the word 'nation' which appeared under the influence of popular revolution and capitalism meaning 'a group of people', was translated and understood as a racial concept for strengthening the unity of 'single-race nation with five thousand years' history. First of all, there is nationalism used to fortify the system. 'The Charter of National Education' and 'The Pledge of Allegiance' were ornaments to intensify the ruling ideology and dictatorship to militarize entire South Korea for 'settling Korean democracy' professed nationalism. Also, another ruling ideology armed with 'self-reliance' put North Korea into the state of hypnosis called nationalism. Nationalism, claiming 'nation' outwardly, but in reality, being an illuminating, instructing ideology isolating each other was indeed a body with two faces. This made 'nation' in Korea mysterious and objective through work such as. The statue commemorating patriotic forefathers' and picture of national records' in South Korea art. Nationalism used to strengthening the system encountered the magical 'single-race' and made 'ghost' being an extreme exclusion to other nations. We can find pedigreed pureness not allowing any mixed breeds from the attitude accepting western art -via Japan or directly- and making it vague by using the word Korean and Asia. There's nationalism as a resistant ideology to solidify the system on the other side. It came out as a way of survival among the Great Power and grew with the task of national liberation to became as a powerful force facing against the dictatorship dominating South Korea after the liberation. This discussion of nationalism as a resistance ideology was active in 1980s. In 1980, democracy movement against the dictatorship of 5th Republic originated from military power which came out suppressing the democratic movement in Gwangju, spread out from the intellects and the students to the labors, farmers and the civilians. It is well known that the 'Nation-People(Minjoong)'s Art Movement could come out under this social condition. Our attitude toward nationalism is still dual in this opening part of 21st century. On one hand, they are opposing to the ultra-nationalism but are not able to separate it from nationalism, and on the other, they have much confusion using it. In fact, in a single-race nation like Korea, the situation of being nationalism and jus sanguinis together can cause dual nationalism. Though nationalism is included in the globalization order, it is evidence that it's effective in Korea where there are still modern fetters like division and separation. In particular, in the world where Japan makes East Asia Coalition but exposed in front of nationalism, and China not being free from Sinocentrism, and American nationalism taking the world order, and Russia fortifying nationalism suppressing the minority race after the dissolution of socialism, Korean nationalism is at the point to find an alternative plan superior to the ruling and resisting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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