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Japanese Policies

검색결과 169건 처리시간 0.026초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 - 구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을 사례로 - (Conflicts between the Conservation and Removal of the Modern Historic Landscapes - A Case of the Demolition Controversy of the Japanese General Government Building in Seoul -)

  • 손은신;배정한
    • 한국조경학회지
    • /
    • 제46권4호
    • /
    • pp.21-35
    • /
    • 2018
  • 최근 산업유산, 근대 문화 유산,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공원 등 기억의 경관들이 공공 공간으로 새롭게 활용되고 있다. 여러 유형의 기억의 경관 중 19~20세기에 주로 형성된 근대 역사 경관(modern historic landscape)은 근대사에 대한 평가 및 인식 변화에 따라 보존과 철거 간 논쟁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경관이다. 본 연구는 1995년 철거된 서울의 구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을 사례로 근대 역사 경관을 둘러싼 보존과 철거 사이의 쟁점을 검토하고, 보존 및 철거를 결정하는 가치 판단 기준과 근대 역사 경관의 형성 방식을 탐구한다. 먼저 1980~1999년 사이 조선총독부 철거 논쟁을 다룬 신문기사, 뉴스, 토론 프로그램 자료와 관련 문헌을 검토하고, 철거 논쟁의 주요 쟁점으로 다음의 여섯 가지 항목을 도출한다: 상징적 위치, 새로운 역사적 사실의 발견과 대응, 관련 국가의 반응과 개입, 재정적 여건, 경관의 기능과 이용 방식, 도시 역사 건축 정책 변화. 이를 기반으로 근대 역사 경관을 형성하고 보존 혹은 철거를 결정하는 중요한 가치로서 상징적 가치 간 대립 양상과, 근대 역사 경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보완하고 비판에 대응하는 기능적 가치의 역할을 고찰한다. 특히 본 연구는 근대사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서 근대 역사 경관의 보존과 철거의 향방 또한 변화하지만, 오늘날에도 결정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여전히 상징적 가치라는 점에 주목했다. 근대 역사 경관은 오늘날 중요한 설계 대상지 중 하나로서 여전히 합의되고 해결되어야 할 역사적 쟁점을 갖는다. 본 연구는 근대 역사 경관의 가치를 상징적 가치와 기능적 가치로 나누어 평가하고, 그 배경에 자리한 사회적 맥락을 재검토했다는 점에서 동시대적 의의를 갖는다.

제국의 식민지·점령지 지배와 '전후보상' 기록의 재인식 조선의 식민지지배·보상처리 결재구조와 원본출처를 중심으로 (Rethinking the Records of the Japan's Korean Colonial Rule and the Post-War Compensation : Focusing on the Dual Decision Making System and the Sources of the Documents)

  • 김경남
    • 기록학연구
    • /
    • 제39호
    • /
    • pp.281-318
    • /
    • 2014
  • 본고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 지배와 '전후보상'처리와 관련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 식민지, GHQ와 점령지 일본에서 이루어진 결재 과정과 이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 원본의 출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10년부터 1952년까지를 대상으로 역사학과 기록학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식민지 지배와 그 처리문제를 시공간적으로 연속선상에서 파악함으로써 제국과 식민지 점령지 기록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강점지배에 대한 기록과 1945년부터 1952년까지 GHQ 점령기의 '전후보상'처리에 대한 결재원본은 한국, 일본, 미국 등에 분산 보존되어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일본제국정부와 조선총독부, GHQ와 일본종속정부의 결재구조에 있다. 즉, 중요정책, 인사, 예산에 대한 결재는 제국 본국에서 처리되고, 그 시행에 관한 결재는 식민지 및 종속국에서 처리되는, 상명하달식 이중결재구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결재 원본도 일국에 완결적으로 보존되는 게 아니라 제국과 식민지 종속국가에 각각 분산 보존되어 상호 보완적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최근 한일간 외교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 미불금 문제는 GHQ의 정책결정과 일본정부의 정령 시행으로 공탁처리되어, '채무'에서 '경제협력'으로 둔갑해 버렸다. GHQ-일본의 상명하달식 결재시스템에 의해, '전후보상'을 위한 기본적인 원본기록 역시 미국과 일본에 각각 분산 보존 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1910년부터 1952년까지, 일제에 의한 식민지지배와 '전후보상'을 둘러싼 문제는 의사결정 프로세스와 기록의 출처 분석 등을 통해 시간적 공간적 측면에서 구조적 종합적으로 재인식될 필요성이 있다.

일제 강점기 사설철도의 변화와 특징에 관한 연구 (A Study of the Status and Characteristics of a Private Railwa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 이용상;정병현
    • 한국철도학회논문집
    • /
    • 제20권1호
    • /
    • pp.128-141
    • /
    • 2017
  • 본 연구에서는 그간의 연구를 참고하여 연구가 미진한 부분인 조선에 있는 사설철도의 법과 제도 그리고 인력, 보조금의 변화와 함께 사설철도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분석하여 일제강점기의 사설철도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사설철도의 특징은 조선 내에서의 사설철도는 조선 내에서의 간선철도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국책사업성격의 사설철도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변화과정을 보면 관련법의 개정에 의해 보조율이 증가하였고 일본의 철도정책에 따라 좌우되는 양상을 보였다. 조선의 사설철도 특징은 일본 본토 보다 보조금이 높았으며, 외부자본의존형의 자본조달과 사철종사 임원의 경우도 조선철도국 출신이 많았다. 수익은 국유철도보다 낮아 이는 보조금으로 보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조선내의 사설철도는 국책사업과 연관성이 깊은 철도회사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내의 사철회사는 지역의 산업과 연관이 깊었다. 사설철도의 노선 분포를 보면 거의 간선을 보조하는 노선 혹은 산업개발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아울러 사설철도의 성격상 다양한 부대사업을 운영하여 일본국내의 사철의 부대사업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철도운영을 해 나가는 사설철도본래의 기능도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성격의 철도라고 할 수 있다.

해상 수입물동량, 상대적 실질실효환율, 지역경기의 동태적 인과성과 충격반응 : 전남지역의 무역항을 중심으로 (Dynamic Causality and Impulse Response between Maritime Import Volume, Relative Real Effective Exchange Rate, and Regional Industrial Activity : Focusing on a Trade Port of the Jeonnam Province)

  • 김창범
    • 한국항만경제학회지
    • /
    • 제33권1호
    • /
    • pp.47-59
    • /
    • 2017
  • 본고는 전남지역 수입물동량의 결정요인으로 전남지역 산업생산지수와 상대적인 실질실효환율(미국, 중국, 일본의 실질실효환율 대비 원화 실질실효환율)을 고려하여 분석하였다. 분석결과, 적어도 한 개의 장기균형관계 또는 공적분벡터가 존재하였다. 이에 따라 장기균형식을 추정하여, 지역경기와 상대적 실질실효환율은 비탄력적이며, 경기가 환율보다 탄력성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동태적 인과관계 검정을 실시한 결과, 모든 모형에서 전남의 지역경기와 상대 실질실효환율이 전남 수입물동량에 단기와 장기 모두 일방적인 인과성이 성립하였다. 또한 모든 모형에서 상대적인 실질실효환율이 지역경기에 대한 단기적인 인과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게다가, 충격반응 결과는 모든 모형에서 장기균형관계 추정식과 동일한 부호를 보였으며 모든 변수의 충격이 4개월부터 그 효과가 소멸되었다. 그리고 상대 실질실효환율이 전남의 지역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엔화에 대한 원화의 상대 실질실효환율이 수입물동량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의 실증분석 결과들은 실질실효환율과 지역실질소득이 전남지역의 수입물동량에 장 단기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요인임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전남지역의 수입물동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국가 차원의 거시적 측면과 지역 차원의 미시적 측면에 기반한 실질실효환율과 실질소득의 기대되지 않는 변동을 감소시키려는 정책적 조치들이 필요하다.

공예라는 전통과 캐논의 성립: 고미술과 미술공예 (The Invention of Tradition and Canon in Korean Crafts: Antiques and Art Craft)

  • 노유니아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 /
    • 제53권3호
    • /
    • pp.128-141
    • /
    • 2020
  • 이 논문은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와 일련의 사업을 통해 한국에 미술공예 개념이 수용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 성립된 공예의 전통과 캐논에 대해 고찰한 글이다.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과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의 제정을 통해 법률상으로 제시된 공예는, 조형물을 만들어낸 정교하고 뛰어난 기술, 더 나아가 회화, 조각과 같은 미술의 한 장르를 의미했다. 이왕가박물관과 총독부박물관은 미술공예라는 용어를 대중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고, 여기에 전시된 공예는 과거의 전통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하였다. 이와 같이 공예라는 용어는 고미술을 가리킬 때 빈번히 사용되었고, 구체적으로는 법률상의 보물로 지정되거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지키고 보존해야 할 전통이 되었다. 공예의 전통과 캐논이 성립되자 당대에 제작되는 공예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는 일본의 문화 정책과 제국적 취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일반적으로 근대기에 성립된 공예 개념은 산업으로서의 공예와 미술로서의 공예, 두 가지로 구분되어 왔으나, 미술로서의 공예라는 개념 안에도 여러 층위가 존재했다. 캐논이 된 고미술은 동시대 제작의 준거가 되었으며, 실제로는 동시대에 제작되던 공예의 양상도 모두 같지 않았다. 이제까지 일괄적으로 논의되던 미술공예 개념을 세분화하는 작업이 공예에 있어서 '만들어진 전통'과 근대기 공예계의 양상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기초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동아시아 공(工) 개념의 기원과 근대적 재구성 (Origin and Modern Reconstruction of the Concept of Gong in East Asian Countries)

  • 한경희
    • 공학교육연구
    • /
    • 제22권6호
    • /
    • pp.51-63
    • /
    • 2019
  • This study aims to present concept of "gong" which was shared by traditional East Asian societies (Korea, China and Japan) and to identify how it has been developed through their respective process of modern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Despite the territorial proximity of the three countries, their industrial and technological development followed different patterns, and the notion of engineering from the Occident was also accepted and reconstructed with a certain difference in each country. Japan had developed its own concept of engineering as part of industrialization in Western style and in the context of establishment of an imperialist nation. What was important for Japan was how engineering could contribute to the national development of technology and industry, and to the development of Imperial Japan. For China, which attached importance to resistance to Western civilizations and to strengthening the competitiveness for and which needed to resolve domestic political conflicts, engineering constituted more than a simple issue on technological and industrial dimension; it was also associated with obtaining ethical and political legitimacy which would allow the nation to gain support from the working and peasant classes. Though belated, Korean attempted to build an independent modern state, yet experienced a considerable nuisance from the invasion of Japan and the protracted colonial period. Engineering of Korea had to take a long time before emerging from backwardness especially because of Japanese policies which tended to restrict technological development and avoid fostering qualified engineers in the colony. Therefore, engineering in Korea started to contribute to the nation's development and the improvement of technological competitiveness only after it was combined with modern higher education after liberation, under the name of engineering science (工學, gong-hak). This study argues that our recognition of what engineering was for and who engineers were in East Asia will allow us to evaluate current status of engineering education and provide us with significant insight which will be useful when we imagine the future society. Identity of engineering in Korea, China, and Japan has been developed along with historical contexts such as clash of civilizations, wars, recovery of sovereignty and obtaining of national competitiveness; now, what will be combined with engineering in the next generation? This question will lead and motivate engineering students to think and imagine about what future engineering should be and how they respond to it.

임적조사사업(林籍調査事業)(1910)에 관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Forest Survey Project(1910))

  • 배재수
    • 한국산림과학회지
    • /
    • 제89권2호
    • /
    • pp.260-274
    • /
    • 2000
  • 본 논문에서는 임적조사사업(林籍調査事業)(1910)의 수립 배경, 실시 과정, 결과 및 평가와 이 사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국임야정리(韓國林野整理)에 관한 의견서(意見書)"가 일제의 초기 식민지 임정에 끼친 영향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임적조사사업(林籍調査事業)은 일본인 관료 목내중사랑(木內重四郞)과 재등음작(齋藤音作)의 주도하에 조선의 소유별, 임상별 산림분포를 파악하고자 실행되었다. 그러나 경비부족과 짧은 조사기간으로 인해 조사의 정확도는 매우 낮았다. 특히 북부지방의 많은 촌락공유림(村落共有林)과 특수지역림(特殊地役林)이 임적조사사업(林籍調査事業)의 간략성(簡略性)과 자의성(恣意性)으로 인해 "관리기관이 없는 국유림"으로 편입되었다. 그럼에도 당시 일제는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조선의 임야정리에 관한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 정책은 "한국임야정리(韓國林野整理)에 관한 의견서(意見書)"로 종합되었는데, 그 중 임야정리에 관한 제안은 이후 삼림령(森林令)(1911) 및 일련의 임야정리과정을 거치면서 구체적이고 구속력을 더한 식민지 임정으로 현실화되었다. 결론적으로 임적조사사업(林籍調査事業)은 조사의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일제 강점기 초기 식민지 조선의 임정을 수립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서 이용되었고 "한국임야정리(韓國林野整理)에 관한 의견서(意見書)"는 임야정리(林野整理)에 관한 구체적인 방향(方向)과 식민지 임정의 각론(各論)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책제안서(政策提案書)라고 볼 수 있다.

  • PDF

일본의 자연환경보전사조 및 관련제도의 변천에 관한 연구 (Studies on the Current Ideas and Institution of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in Japan -Policy and Institution of Open Space and Forest -)

  • 김승환
    • 한국조경학회지
    • /
    • 제17권1호
    • /
    • pp.1-16
    • /
    • 1989
  • ^x As mentioned above, I consider the change of role that is related with Japanese thought of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and I divide each part of periods into forest, farmland, open space, urban planning, environmental conservation etc. To summary the content of each period of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thought is as follows. 1) Previous period before formation(before 1919) In the previous period of Meiji, it could be said that the consciousness of the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was coming to existence. In this, so called,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the thought of Forest Preservation was the main current and it was the thought of territorial integrity for the security of resource, the forestry conservancy and flood control in the forestry farmland. Since the age of Meiji, the theory of Natural Conservation appears from the theory of Japanese landscaping and systematic management about public parks was enforced, but the regular theory of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did not attain full growth. 2) The period of formation(1919~ 1954) In the period of formation, the base of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had been established. Parks and Open spaces were admitted as a public facilities in each city, and legislations which supported it had been continuously enacted and so on. In this period, the afforestation counter plan was emphasized on the side of territorial integrity. In the mountainous district. tree planting was emphasized to recover the forest which had been destroied by war. 3) The period of development(1955~ 1974) In the period of development, varied policies was institutionalized for the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However, all sorts of development policy had performed simultaneously, thus development had complicated relation with preservation. But after 1970's the framework of system of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improvement was constituted to control the many kinds of development, and the spontaneous campaign of nature preservation by private lead was being taken root. This is the more progressive period. 4) The pried of root(after 1975) After the latter of 1970's, the role of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began to take root not in the direction of control but inducement, and, getting out of development - oriented policy, aimed at relation between human being and natural environment and the side of amenity of human environment. Besides, the current of Natural Environmental Conservation had been seperately progressed in the cities and forests. Since this period, it was the character that cities and forests began to be unified as 'amenity'space of man.

  • PDF

Comparative Study on Themes of Research Papers on the Research Trends of Parks and Green Spaces in Japan and Korea

  • Naoko Fujita;Chong Soo-Jin;Yoichi Kumagai;Akio Shimomura
    • Journal of the Korean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International Edition
    • /
    • 제2호
    • /
    • pp.81-87
    • /
    • 2004
  • The objective of our research was an international comparison focusing on studies conducted on parks and green spaces undertaken in Japan and Korea. We also aim to clarify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 two countries and consider the key features of the researches on the field of landscape architecture. We compared the recent trends of Japanese institute with Korean observed in the theme of research papers adopt title of them. The research period spanned approximately twenty years, from 1980 to 2003. We employed the Table of Contents information search system to research academic journal articles and to select the journals that included articles with the key words [park(s)] or [green space(s)] in their title. We chronologically arranged the journals for each country, based on the total number of journals and classification categories. We then conducted a comparative examination among the two countries. We also contributed information on the circumstances behind the formulation or amendment of some policies and laws and we checked the results against the research trend. Among the selected journals, the number of papers was the highest by the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But the reason for increase of the number of papers on green spaces in Japanese journals was not published by the Institute of Landscape Architecture but by the City Planning Institute and the Architecture Institute. In Japan, the papers on parks categorized under historical study were the highest among all categories. On the other hand, in Korean journals, papers on parks categorized under historical study were few. A similar trend was recognized in papers on green spaces. Every society is concerned with the study of function and effect. However, some exact differences have been observed by category classification. In Japan, the percentage of function and effect papers on parks was less than those on green spaces. In Korea, both percentages for these groups were high. The category of system and policy accounted for $17\%$ of the papers on green spaces in Korea. This result was higher than the number of papers on green spaces and parks in Japan and parks in Korea. Recently, the number of papers focusing on large-scale green space system has decreased in Japan. The trend in the study of parks and green spaces on a regional scale or at an individual level will be closely monitored. Systems and modeling studies have been focusing in Korea. The understanding between the administration and the citizens was peculiar to each country.

  • PDF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 기법을 활용한 『제1차조선교육령』과 『조선교육요람』(1913, 1920)의영어번역본 분석 (Analysis on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e First Chosen Educational Ordinance, Manual of Education of Koreans (1913), and Manual of Education in Chosen 1920 (1920) Using Text Mining Analytics)

  • 탁진영;곽은주;진실로;손민주;김동미
    • 문화기술의 융합
    • /
    • 제9권6호
    • /
    • pp.309-317
    • /
    • 2023
  • 본 논문의 목표는 1911년에 공포된 『제1차 조선교육령』, 1913년에 발행된 『조선교육요람』과 1920년에 발행된 『조선교육요람(1920)』의 영어 텍스트를 비교 분석하고, 이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조선 통제 수단으로 활용된 식민지 교육정책을 추적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의 전체적인 흐름과 그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기존의 단편적이고 질적인 역사서 연구와는 달리 통시적·양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상위 50개 단어 빈도 순위와 워드 클라우드(Word Cloud)와 CONCOR(CONvergence of iteration CORrelation)의 텍스트 마이닝 기법을 활용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하였다. 첫째,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은 '전체적인 규정'이나 '교육과정 및 운영'에 초점을 두었고 둘째, 1913년의 『조선교육요람』은 '교육 방식 및 매체'와 전반적인 '교육 내용'에 대한 지침을 싣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20년 『조선교육요람(1920)』은 교육의 구체적인 '교육 실행 및 교육의 주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