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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시대(上古時代)와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의 의학(醫學)에 관(關)한 문헌적(文獻的) 고찰(考察) (A bibliographic study on medical science ancient period (上古時代) and the era of the old-Korea (古朝鮮時代))

  • 권학철;박찬국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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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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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8-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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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
  • As mentioned above, I got the next conclusion since I had considered the medical contents of the ancient period(上古時代) and the era of the old-Korea(古朝鮮時代) through several bibliographic records. 1. There were Pung-baeg(風伯), Uh-sa(雨師), Un-sa(雲師) that were the names of the governmental officials during the ancient period of Whan-ung(桓雄). Among them, Uh-sa specially managed the treatment for diseases. When we think of the significance of Pung(風)-which means the winds, Uh(雨)-which means the rain, Un(雲)-which means of clouds, we will find out that the human life will be affected by all kinds of phenomena of the nature. So I can infer that ancestries could prevent and treat diseases with adjusting them tn the changes in the weather. 2. There were five government officials(五事) in the ancient period of Whan-ung(桓雄上古時代). They are Uh-ga(牛加), Ma-ga(馬加), Ku-ga(狗加), Cheo-ga(猪加) and Yang-ga(羊加), and had charges of five important duties. Among them, Cheo-ga was set to a charge of treatment for diseases. So we can notice that there existed people who treated for diseases professionally. When we think of the meanings of Uh(牛)-which intends cows or bulls. Ma(馬)-which intends horses, Ku(狗)-which intends dogs, Cheo(猪)-which intends wild boars and Yang(羊)-which intends sheep, we can see that livestocks would be raised at that time, and they came to have more chances to digest meat. Since the digestion of meat became to be a burden on the stomach and the intestines, it might cause a lot of indigestive troubles. 3. When I compared Tan-gun Pal-ga(檀君八加) with the Oh-ga(五加) in the ancient period of Whan-ung(桓雄上古時代), I could tell that the community of Tan-gun's period is more advanced and specialized than one of Whan-ung's. When I think of the next sentence ; "The Prince Imperial, Bu-u(夫虞) become to be a Ro-ga(鷺加), who treat for diseases professionally.", I am sure that the treatment for diseases was more importment than any other things, because he was the third son of Tan-gun(檀君). 4. According to Tan-gun(檀君) mythology, Whan-ung(桓雄) came down from the heaven of the pure Yang(純陽) to the earth and then changed into a man who had had more Yang(陽) than Yin(陰). And a bear came up from the underground(or the cave) to the ground and then changed into a women who had had more Yin(陰) than Yang(陽). So both of them became to hold together. This story implicated that ancestors had taken a serious view of each of them, namely the ancestors didn't give the ascendance to the one side of them, and made much account of the mutual harmony. So I am sure that this fact coincided with the basic theories of oriental medical science. To refer to two proverbs of Tan-gun mythology that are "Ki-Sam-Chil-Il(忌三七日)" which means caring for twenty one days, and "Pul-Gyon-Il-Gwang-Baeg-Il(不見日光百日)" which means keeping indoors for one hundred days, I can tell you that "twenty-one-day" involves the principle of the birth of life, and "one-hundred-day" contains a preparatory period or the period of death to bear another life. 5. From the medical stuff, such as wormwood(艾), garlic(蒜), or wonder-working herbage(靈草), that had been written at the bibliographic papers of the ancient period(上古時代) and the era of the old-Korea(古朝鮮時代), I consider that many people might get a lot of women's diseases, indigestive troubles, and other diseases that were caused by the weakness, but with using various spices, such as the leaves of water pepper(蔘), they could prevent the occurrance of all kinds of diseases previously. So I regard this treatment as the medicine from food. 6. One of the sayings at Nae-gyong(內經) is that "The stone accupuncture(砭石) came from the orient." We can see both "wonder-wor-king wormwood(靈草)" and "dried wormwood(乾艾)" in the several bibliographic papers of the ancient history of the old-Korea(朝鮮上古史). From these records, I can be convinced that ancestors would utilize the acupuncture(針) and the moxa cautery(灸) to cure a patient of a disease. 7. Even though someone claimed that the book, "medical science and chemistry(醫學化學)" and "medical treatment(醫學大方)" had had been written during the ancient period of the old-Korea(上古朝鮮時代), such a fact can't have been ascertained historical evidence. But it has been handed down that there existed the original phonetic alphabet, such as the "Ka-Im-To alphabet(加臨土文字)" at that time. The terms about the diseases, which had been occurred at the community of the old-Korea(古朝鮮地域), were recorded fragmentarily at other records after that time. The origin of confucianism came from the race of the eastern barbarians, and Tae-Ho-Pok-Hi(太嗅伏義) and the king. Sun(舜) came from the eastern barbarians, too. The divination of tortoise shells at the country of Un(殷) is another from which was developed at the eastern barbarians' fortune-telling of animal bones. From these facts, I can infer that, by all means, they might record the medical knowledge which had been stored for thousands of years while contacting with china direc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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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설계론과 수업구조화 - 일본 고등학교 도시단원을 사례로 - (The theory of lesson plannig and the instructional structuration : A case study for urban units in Japanese high school)

  • 심광택
    • 대한지리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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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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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6-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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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
  • 본 연구에서는 고등학교 지리수업이 안고 있는 대학입시 지도와의 관련성, 기초개 념의 중복성, 수업시간의 제한 등 세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수업을 구조화하여 고등 사고 기능을 기를 수 있는 수업을 설계하고자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행동이론과 구조분석 을 통합한 지리수업 설계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제 1 단계로서, 학습자는 경험적인 현상의 기술인 자료를 조사하고, 과학자의 시점에 따라서 객관 성과 정확성을 유지하면서, 가설-검증의 과정을 통하여 說明的 知識에 이른다, 제 2단계에 서는, 추론적인 진술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통하여 공간구조를 분석하는 것으로 槪念的 知 識을 이론적으로 설명한다. 제 3단계에서는, 지역주민의 행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파악 하기 위해 자료를 비판적으로 다시 검토하여 사회 제도 간의 관계까지 實踐的 解釋에 이른 다. 제4단계로서는,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事例地域 學習에 대해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행동이론과 구조분석의 통합을 통한 지리수업의 설계에서 본다면, 수업이 구조화되고 실증론에 대한 인식론적 입장에서 전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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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자료로 본 5~6세기 신라의 강릉지역 지배방식 (The Ruling System of Silla to Gangneung Area Judged from Archaeological Resources in 5th to 6th Century)

  • 심현용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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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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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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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 고는 강릉지역에서 발굴조사된 고고자료를 검토하여 문헌기록과 비교하면서 신라가 강릉지역으로 진출하여 재지 세력을 지배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 가설을 세워 본 것이다. 강릉지역의 고고학적 양상은 신라가 처음 이 지역을 복속하고 재지세력들에 침투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데, 필자는 이 지역의 5~6세기 고고학적 특이양상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강릉지역은 신라 진출 이전 예국이라는 읍락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신라는 4세기 4/4분기에 처음으로 강릉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기존의 예국을 복속한 후 지역 실정에 맞게 재지세력을 통치해 나갔다. 이에 대해 고고자료와 문헌기록을 비교검토해 본 결과, 신라가 강릉지역을 복속한 후 취한 지배정책은 간접지배와 직접지배의 2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간접지배는 다시 초입기(I 단계)와 정착기(II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I 단계는 신라가 처음 강릉지역으로 진출한 시기로 신라는 재지세력의 자치를 그대로 허용하며 간접지배를 실시하였으며, 그 시기는 4세기 4/4분기부터 5세기 2/4분기로 보았다. 그리고 II단계는 신라가 강릉지역의 재지세력들에게 위세품을 하사하여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동시에 신라 중앙에 의해 강릉지역 중심세력인 초당동과 병산동 세력에게 위세품을 분여하여 서로 견제를 하게 만들어 재지세력간 힘의 균형을 통제하였다. 그 시기는 5세기 3/4분기에서 5세기 4/4분기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강릉지역을 북진의 전초 기지로 인식하고 나서는 직접지배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즉, 신라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상주시켜 지방제도를 확립하고 재지세력에 대한 재편과정을 거쳐 중심세력을 초당동 병산동 세력에서 신라와 친연성이 가장 강한 영진리 방내리 세력으로 교체하고 강릉지역을 완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시기를 6세기 1/4분기부터로 보았다.

<진주검무>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의 변화에 관한 소고 (An Essay on the Change of Jinju Sword Dance after being designated as 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Asset)

  • 이종숙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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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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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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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진주검무>가 1967년 1월 16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이래 변화되고 있는 모습과 그 변화의 특징 및 보존 전승의 현황을 파악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진주검무>가 대를 이어가면서 변화를 거듭했고, 그로써 현재의 춤을 정립하게 된 정황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진주검무>는 1967년부터 2015년 현재 3대째의 보유자를 인정하였다. 제1세대 보유자는 권번 기녀 출신 8인이 1967년 인정되었다. 보유자들 간의 불화와 일부 보유자의 사망, 개인적인 경제활동 등의 이유로 전승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따라서 전승교육과 활동의 구심점이 필요한 가운데 1978년 6월 21일에 성계옥이 제2세대 보유자로 추가 인정되었다. 비 기녀출신 성계옥의 활동 시기에는 <진주검무>의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가장 크게 보였다. 2009년 성계옥의 사망 후 제3세대 보유자는 김태연과 유영희로 2010년 2월에 인정되었다. 1966년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부터 2014년의 영상을 기초하여 비교한 춤과 그 주변의 변화 결과는 다음과 같다. 반주음악편성에 3세대 간 변화가 있었다. 1세대 영상(1970년)은 약 15분 공연했는데, 2세대 영상(2002년)는 25분여를 춤추도록 했다. 염불도드리 장단을 긴염불(상령산)로 해석하여 느리게 연주하였고, 본래 염불 15장단의 춤을 39장단까지 추가함으로써 시간을 길게 했다. 3세대(2013 2014년)에는 다시 15장단으로 환원된 춤을 추고 있다. 다만 긴염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1세대 때는 3분간 추었던 염불을 3세대에서는 5분여를 춤추고 있어서, 2세대로부터 느림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춤 구성면에서 2세대에는 긴염불을 20여 장단 추가하면서 아(亞)자 모양의 춤 대형구성이 추가되었다. 3세대 공연에서는 실시하지 않고 있다. 춤사위 면에서 방석돌이 동작의 허리재기가 눈에 띄게 유연성을 잃어가고 있는 양상이다. 또 1장단의 시가가 늘어진 경향을 보인다.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1967년에는 칼 목이 돌아가는 것을 사용했는데, 2세대 보유자에 의해 1970년대 말부터 현행과 같이 칼목이 돌아가지 않는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칼의 모양도 1966년의 "조사보고서"는 반월형의 뾰족한 모습인데, 현재와 같은 직선형 칼을 사용한 것은 1970년 영상에서부터 보인다. 전립과 전복, 한삼착용의 기본 양식은 변화가 없으나, 한삼 색동 배열이 "조사보고서"와 달라졌다. 또 남색치마를 입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이상의 결과로 볼 때, <진주검무>는 지정 이후 약 50년 동안 변화가 능동적으로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제2세대 성계옥 보유자를 주축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중요무형문화재의 전승과 보존이라는 명제에서 볼 때, 춤 종목은 장단과 춤의 조화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서 검무의 오랜 전통성을 보존 전승하려는 노력이 강화될 수 있기를 바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해 본 왕의 위락활동 유형과 변천 (A Study on the Types and Changes of the King's Amusement Activities through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 강현민;신상섭;김현욱;마일초;한서정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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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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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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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분석한 조선시대 제왕들의 위락활동과 변천에 관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궁중 안팎 외부공간에서 행해진 왕의 위락활동은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연회형은 회례연, 진연(進宴), 풍정(豊呈), 진찬(進饌), 양로연, 사신연, 수연(壽宴), 곡연(曲宴) 등이었고, 강무형은 활쏘기, 격구, 사냥 등이며, 유희형은 나례(가면놀이), 처용무, 풍두희(?頭戱), 그리고 화산붕(불꽃놀이), 꽃놀이(賞花), 투호, 수박희(手搏戱), 낚시, 뱃놀이, 각투(角鬪), 상희(象戱), 잡희 등이었다. 위락 활동은 고려시대 답습기[1기, 태조~세조(예종)], 확립기[2기, 군사문화가 성리학 문화로 전환되었고 연회의 규례가 제도화, 성종~중종]. 단절기[3기, 임진왜란 등 불안한 정세 속에서 침체, 단절 초래, 성종~현종]. 중흥기[4기, 위락 문화 재정비, 수준 높은 왕실 문화의 자긍심 표출, 숙종~정조]. 그리고 쇠퇴기[5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추락하면서 위락 활동이 급격히 퇴조, 순조~순종] 등 5단계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왕들의 사냥 관련 기사는 600건 이상 추적 되는데, 태종, 세종, 세조 등은 각 100여회 이상이었다. 사냥 대상은 호랑이, 곰, 사슴과 노루, 표범, 멧돼지, 매 등 이었고, 한양의 동북쪽 산림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산수풍광이 수려하고 지리에 익숙한 풍양, 철원지역 등 북방의 정세와 안전을 살피기 위한 방안, 그리고 풍양이궁(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장소성 등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단오절 세시풍속으로 대중에 확산된 격구놀이는 조선 초 왕과 신하들의 최상류층 마상격구로부터, 중기이후 무과시험의 마상격구와 상류층의 보상격구로 전환되는 과정을 거쳐,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확산되어 겨울철 남성들의 집단유락문화로 전승되는 과정이 추적된다. 특히, 강무형 위락문화는 봄(활쏘기), 여름(투호), 가을(활쏘기), 겨울(격구) 등 심신수양을 겸한 4계절 행위요소로 작용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왕과 왕비들의 연향과 같은 위락 활동은 공식적 의례의 경우 내정(內庭)에서, 비공식적 관유(觀遊)의 경우 궁궐 후원이나 별궁에서, 특수 연회의 경우 모화관과 태평관, 기로소 등 별원(別園)에서, 활쏘기의 경우 성균관 사단에서, 사냥의 경우 금표가 설치된 강무장(금원과 원유)에서, 매사냥의 경우 한강변 광나루에서, 격구의 경우 보격구 중심으로 내정이나 별궁에서 다양하게 행해졌다. 즉, 외조, 치조, 연조, 후원의 범위를 넘어서 별원과 금원, 원유 등 한양에서 최대 100리 범위 까지를 활동영역으로 설정하는 위락문화 확장성(정(庭)${\rightarrow}$원(園)${\rightarrow}$원(苑)${\rightarrow}$원유(苑?))을 추적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본 연구를 통해 수준 높은 기록문화의 추적을 통해, 역대 왕들의 위락문화를 연회형, 강무형, 유희형으로 유형화 할 수 있었고, 위락 활동(진찬, 회례연, 양로연, 대사례, 사신연 등은 물론 사냥, 활쏘기, 격구, 투호, 처용무, 낚시, 뱃놀이, 불꽃놀이 등) 전모와 장소성, 그리고 상징적 의미, 역사적인 전승과정과 위락문화 등을 복합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다.

고려의 원시영역 유목초지, 그 부르칸(불함)이즘과 한국축산의 비전 (Burqanism from the Origin of the Pastoral Nomadic Koryo Region and the Vision of Korean Livestock Farming)

  • 주채혁
    • 한국초지조사료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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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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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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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
  • Khori(高麗) refers to the Chaabog(reindeer) that live on lichens(蘚) on Mt. Soyon(鮮) in which pastures are the cold and dry plateau of North Eurasia. Thus, the origin region of the Khori or Koguryo that are the ancestors of the reindeer-herding pastoral nomads(馴鹿 遊牧民) can be said to be the Steppe-Taiga-Tundra pastoral areas of North Eurasia and North America. When the pastoral nomads moved on to the great mountain(大山) zone of the Jangbaek(長白) to the Baekdu(白頭) Mountains, they could have been in contact with pastoral farmers or agricultural farmers living there and they became the farmers remaining on agricultural farms. They were the Koryo people, the ancestors of Korea. Staying in one place, they gradually forgot the origin of their reindeer-herding pastoral nomadic history in the Northwest area of Mt. Soyon, the small mountain(小山) zone of the Steppe-Taiga-Tundra pastoral areas. In other words, they lost their identity as reindeer-herding pastoral nomads when they entered the agricultural area after leaving the pastoral area. However, since their basic genes had already formed when they lived on the cold and dry plateau of North Eurasia, it is possible to study their pastoral nomadic history focusing on 'the minority living in the broad area(廣域少數)', by utilizing highly advanced biotechnological science and focusing on genes and information technology innovation, and removing various past hindrances in research. Therefore, it is not so difficult to restore the reindeerherding pastoral nomadic history of the Koguryo(高句麗) people and secure their pastoral nomadic identity, of which the first steps have already been taken into their historical stages. The Eurasian continent and the Korean peninsula, especially the cold and dry plateau of North Eurasia and the Korean peninsula have been closely related to each other ecologically and historically. They can never be a separate space at all. The Eurasian continent lies horizontally east to west and thus, the continent forms an isothermal zone. Also, since the time of producing their own foods, it was relatively easy for people with their technology to move to other places owing to the pastoral nomadic characteristic of mobility. Unlike the Chungyen(中原) region, western Asia and the regions covering the Siberia-Manchu-Korean peninsula where food production revolution was first made were connected to the Mongolian lichens route(蘚苔之路: Ni, ukinii jam) and steppe roads. Although the ecological conditions of nature have changed a bit throughout a long history, it was natural for the many tribes in North Asia living on the largest Steppe-Taiga-Tundra area in the world to have believed 'the legends related to animals in relation to their founders and ancestors(獸祖傳說)'. Assuming that Siberian tigers and the tigers living on Mt. Baekdu were connected ecologically and genetically because of the ecological characteristics of the animals, and their migration from plateau to plateau, we would suspect that the Chosun(朝鮮) tribe living on Mt. Baekdu were ethnically and culturally more closely connected to the farther removed Ural-Altai tribes that lived on the cold and dry plateau region than to the Han(i14;) tribe who lived in Chungyen(中原) that was close to Mt. Baekdu. More evidence is the structure of the Korean language which has the form of 'Subject + Object + Verb', which is assumed to have originated from the speedy lifestyle of the reindeer-herding pastoral nomads. The structure is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the Han(漢) language, which is based on agricultural life. Also, it is natural for reindeer riding reindeerherding pastoral nomads or horse-riding sheep-herding pastoral nomads(騎馬, 羊遊牧民) to have held military and political power over the region and eventually to have established an ancient pastoral nomadic empire in the process of their conquest of agricultural regions. The stages for founding global empires in the history of mankind maybe largely divided into two, in terms of ecological conditions and occupations. They are the steppes and the oceans. Of course, the steppe-based empires were established based on the skills to deal with horses and the ability to shoot arrows while riding horses, along with the use of iron ware in the 8th century BC. The steppe-based empires became the foundation for an oceanic empire, which could have been established by the use of warships and warship guns since the 15th Century. Based on those facts, we know that Chosun, Puyo(夫餘), and Koguryo are the products of a developmental process of pastoral nomadic empires on the steppes. Maybe we can easily find the pastoral nomadic identity of the Koguryo more than we expected when we trace the origins and history of the Korean tribe living in the pastures located in the northwest area of Mt. Jangbaek by focusing on pastoral nomadic mobility and organization just as we have investigated the historic origins of Anglo-Saxons in America by focusing on the times before the 15th Century. In the process, we should keep in mind that English culture originated from the Industrial Revolution and was directly delivered to the American continent, although America was far from England and was not an intermediate point on long sojourns either. Further, American culture came back to England in a more advanced form later. The most important thing currently to be resolved is to cause Koreans to look back on their own history in a freer way of thinking and with diverse, profound, and sharp insight, taking away the old and existing conventional recognition that is entangled with complicated interests with Korean people and other countries. The meanings of Chosun, Khori, and Solongos have been interpreted arbitrarily without any historic evidence by the scholars who followed conventional tradition of fixed-minded aristocrats in an agricultural society. If the Siberian cultural properties of the stone age, the earthenware age, the bronze age, and the iron age are analyzed in such a way, archaeological discovery will never be able to contribute to the restoration of the Koguryo's pastoral nomadic identity. One should transcend the errors that tend to interpret the cultural properties discovered in the pastoral nomadic regions as not being differentiated from those of agricultural regions and just interpret them altogether from the agricultural point of view. A more careful intention is required in the interpretation of cultural properties of ancient Korean empires that seem to have been formed due to mutual interactions of pastoral nomadic and agricultural cultures. Also, it is required that the conventional recognition chain of 'reverse-genes' be severed, which has placed more weight on agricultural properties than pastoral nomadic ones, since their settlement on agricultural farms was made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ir ancient pastoral nomadic empires. There is no reason at all to place priority on stoneware, earthenware, bronze ware, and iron ware than on wooden ware(木器) and other ware which were made of animal skins(皮器), bones and horns(骨角器), in analyzing the history in the regions of reindeer or sheep pastures. Reading ancient Korean history from the perspective of pastoral nomadic history, one feels strongly the instinctive emotions to return to the natural 'mother place'. The reindeer-herding pastoral nomadic identity of the Koguryo people that has been accumulated in volumes in their genes and hidden deep inside and have interacted organically could be reborn with Burqanism(Burqan refers to 不咸 in Chinese), which was their religion by birth and symbolized as the red willow(紅柳=不咸). The mother place of the Koguryo's people is the endless vast green pastures of North Eurasia and North America, where we anticipated the development of Korean livestock farming following the inherent properties in the genes of the reindeer-herding pastoral nomads with Korean ancestors. We anticipate that the place would be the core resource that could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life of living creatures following the inherent properties of their genes and biotechnological factors. In other words, biotechnology used for a search for clues on the well-being of humans could be the fruit brought by Burqanism of the Koguryo people and the fruit of the globalization of Korean livestock farming. It is the Chosun farmer in China come from the vast nomadic reindeer pastures of North Eurasia that resolved the food problem of a billion Chinese people with lowland paddy rice seeds (水稻) by transforming Heilongjiang Province(黑龍江省) into an oceanic lowland paddy rice field(水田). Even Mao Tse-tung(毛擇東) could not resolve the food problem by his revolution campaigns for tens of years. Today is the very time that requires the development of special livestock farming following the inherent properties of the ancient Korean reindeer-herding pastoral nomads that respected the dignity of life on the cold and dry plateau of North Eurasia and the America continent. I suggest that research should be started from the pastures of the Dariganga Steppe in East Mongolia that was the homeland of Hanwoo(韓牛) and the central horse-herding steppe place(牧馬場) of Chingis Khan's Mongolia. The Dariganga Steppe is awash with an affluent natural environment for pastoral nomadic living however, the quality of life of the pastoral nomads there is still low. I suggest we Koreans, the descendents of the Koguryo, should take our first steps for our livestock farming business project and develop the Northern nomadic pastures, here at the pastures of the Dariganga Steppe, which is the Mongolian core place of state-of-the-art technology for military weapons.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임지제도(林地制度)에 관(關)한 연구(硏究) (A Study on the Forest Land System in the YI Dynasty)

  • 이만우
    • 한국산림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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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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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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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
  • 토지국유원칙(土地國有原則)을 표방(標榜)하고 "공사(公私) 공리(共利)"를 기본원칙(基本原則)으로 하고 있었던 고려조(高麗朝)의 시전과제도(柴田科制度)도 집권력(執權力)의 약화(弱化)로 인(因)하여 조만간(早晩間), 붕괴(崩壞)되고 말았던 것이나 임지제도(林地制度)에 있어서는 분묘설정(墳墓設定)의 자유(自由)와 개간장려(開墾奬勵)를 이용(利用)한 삼림(森林)의 광점(廣占) 및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로 인(因)한 시지(柴地)의 수조권위양(收租權委讓)으로 유래(由來)된 사적수조권(私的洙組權)이 결부(結付)된 삼림(森林)의 사점현상등(私占現象等)이 점차(漸次) 발전(發展)하여 고려중기(高麗中期)의 국정해지기이후(國政解地期以後)에는 대부분(大部分)의 삼림(森林)이 권력층(權力層)의 사점지(私占地)로 화(化)하여 왔었다. 고려조(高麗朝)의 모든 제도(制度)를 그대로 계승(繼承)한 이조(李朝)는 건국후(建國後) 국가소용(國家所用)의 삼림확보(森林確保)를 위(爲)한 삼림수용(森林收用)의 제도확립(制度確立)이 긴요(緊要)하였음으로 전국(全國)의 삼림(森林)을 국가권력(國家權力)에 의(依)하여 공수(公收)하고 국가(國家)와 궁실소용이외(宮室所用以外)의 모든 삼림(森林)은 사점(私占)을 금(禁)한다는 "시장사점금지(柴場私占禁止)"의 제도(制度)를 법제화(法制化)하였고 도성주변(都城周邊)의 사산(四山)을 금산(禁山)으로 함과 아울러 우량(優良)한 임상(林相)의 천연림(天然林)을 택(擇)하여 전조선용재(戰漕船用材)와 궁실용재(宮室用材)의 확보(確保)를 위(爲)한 외방금산(外方禁山)으로 정(定)하고 그 금양(禁養)을 위(爲)하여 산직(山直)을 배치(配置)하였다. 그리고 연병(練兵)과 국왕(國王)의 수렵(狩獵)을 위(爲)한 강무장(講武場)과 관용시장(官用柴場), 능원부속림(陵園附屬林)의 금벌(禁伐), 금화(禁火)를 제정(制定) 등(等) 필요(必要)에 따라 수시(隨時)로 삼림(森林)을 수용(收用)하였으나 고려조이래(高麗朝以來)로 권력층(權力層)에 의(依)하여 사점(私占)되어온 삼림(森林)을 왕권(王權)으로 모두 공수(公收)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이조초기(李朝初期)에 있어서의 집권층(執權層)은 그 대부분(大部分)이 고려조(高麗朝)에서의 권력층(權力層)이었던것 임으로 그들은 이미 전조시대(前朝時代)로부터 많은 사점림(私占林)을 보유(保有)하고 있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권력(權力)을 장악(掌握)하고 있는 한(限) 사점림(私占林)을 공수(公收)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들은 오히려 권력(權力)을 이용(利用)하여 사점림(私占林)을 확대(擴大)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왕자(王子)들도 묘지(墓地)를 빙자(憑藉)하여 주(主)로 도성주변(都城周邊)의 삼림(森林)을 광점(廣占)하고 있던 터에 성종(成宗)의 대(代) 이후(以後)로는 왕자신(王自身)이 금령(禁令)을 어기면서 왕자(王子)에게 삼림(森林)을 사급(賜給)하였음으로 16세기말(世紀末)에는 원도지방(遠道地方)에 까지 왕자(王子)들의 삼림사점(森林私占)이 확대(擴大)되었고 이에 편승(便乘)한 권신(權臣)들의 삼림사점(森林私占)도 전국(全國)으로 파급(波及)하였다. 임진왜란후(壬辰倭亂後)에 시작(始作)된 왕자(王子)에 대(對)한 시장절급(柴場折給)은 삼림(森林)의 상속(相續)과 매매(賣買)를 합법화(合法化)시켰고 이로 인(因)하여 봉건제하(封建制下)에서의 사유림(私有林)을 발생(發生)시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권신(權臣)들도 합법적(合法的)으로 삼림(森林)을 사점(私占)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조시대(李朝時代) 임지제도(林地制度)의 기본(基本)이었던 시장사점금지(柴場私占禁止)의 제도(制度)는 건국초(建國初)로부터 실행(實行)된 일이 없었으며 오로지 국가(國家)의 삼림수용(森林收用)을 합법화(合法化)시키는 의제(擬制)에 불과(不過)하였던 것이다. 금산(禁山)은 그 이용(利用)과 관리제도(管理制度)의 불비(不備)로 인(因)하여 산하주민(山下住民)들의 염오(厭惡)의 대상(對象)이 되었음으로 주민(住民)들의 고의적(故意的)인 금산(禁山)의 파괴(破壞)는 처음부터 심(甚)하였고 이로 인(因)하여 국가(國家)에서는 용재림확보(用材林確保)를 위(爲)한 금산(禁山)의 증설(增設)을 거듭하였으나 관리제도(管理制度)의 개선(改善)이 수반(隨伴)되지 않았음으로 금산(禁山)의 황폐(荒廢)는 더욱 증대(增大)되었다. 영조(英祖)는 정국(政局)을 안정(安定)시키기 위(爲)하여 경국대전이후(經國大典以後) 남발(濫發)된 교령(敎令)과 법령(法令)을 정비(整備)하여 속대전(續大典)을 편찬(編纂)하고 삼림법령(森林法令)을 정비(整備)하여 도성주변(都城周邊)의 금산(禁山)과 각도(各道) 금산(禁山)의 명칭대신(名稱代身) 서기(西紀) 1699년(年) 이후(以後) 개칭(改稱)하여온 봉산(封山)의 금양(禁養)을 강화(强化)시키는 한편 사양산(私養山)의 권한(權限)을 인정(認定)하는 등(等) 적극적(積極的)인 육림정책(育林政策)을 퍼려하였으나 계속적(繼續的)인 권력층(權力層)의 삼림사점광대(森林私占廣大)는 농민(農民)들로부터 삼림(森林)을 탈취(奪取)하였고 농민(農民)들 이 삼림(森林)을 상실(喪失)함으로써 국가(國家)의 육림장려등(育林奬勵策)은 효과(効果)를 나타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후(壬辰倭亂後)의 국정해이(國定解弛)로 인(因)한 묘지광점(墓地廣占), 왕자(王子)에 대(對)한 삼림(森林)의 절급(折給) 권세층(權勢層)에 대(對)한 산림사점(森林私占)은 인허(認許)하는 입안문서(立案文書)의 발행등(發行等)으로 법전상(法典上)의 삼임사점금지조항(森林私占禁止條項)은 사문화(死文化)되었고 이조말기(李朝末期)에 있어서는 사양산(私養山)의 강탈(强奪)도 빈발(頻發)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와 같이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시장사점금지조항(柴場私占禁止條項)은 오로지 농민(農民)에게만 적용(適用)되는 규정(規定)에 불과(不過)하였고 이로 인(因)하여 농민(農民)들의 육림의욕(育林意慾)은 상실(喪失)되었으며 약탈적(掠奪的)인 삼림(森林)의 채취이용(採取利用)은은 금산(禁山), 봉산(封山) 및 사양산(私養山)을 막론(莫論)하고 황폐(荒廢)시키는 결과(結果)를 자아냈으며 권력층(權力層)의 삼림점탈(森林占奪)에 대항(對抗)한 송계(松契)의 활동(活動)으로 일부(一部) 공산(公山)이 농민(農民)의 입회지(入會地)로서 보존(保存)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不拘)하고 일제(日帝)는 이조말기(李朝末期)의 삼림(森林) 거의 무주공산(無主公山)이 었던것처럼, 이미 사문화(死文化)된 삼림사점금지조항(森林私占禁止條項)을 활용(活用)함으로써, 국가림(國有林)으로 수탈(收奪)한후(後) 식민정책(植民政策)에 이용(利用)하였던 것이나, 실제(實際)에 있어서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삼림(森林)은 금산(禁山), 봉산(封山), 능원부속림등(陸園附屬林等)의 관금지(官禁地)와 오지름(奧地林)을 제외(除外)하고는 대부분(大部分)의 임지(林地)가 권세층(權勢層)의 사유(私有) 내지(乃至)는 사점하(私占下)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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