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7세기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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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서탑 축조의 구조 원리에 관한 기초 연구 6~7세기 전반 목탑과의 비교분석을 중심으로 (Basic Study on the Building Principles of Structure in Mireuksaji Stone Pagoda)

  • 조은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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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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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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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창건한 사찰로 이와 관련한 창건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이(第二) 무왕조(武王條)에 언급되어 있다. 서원의 미륵사지서탑은 해체 전 6층까지의 일부가 남아있었으며 미륵사지 내의 유일한 현존 건축물로서 최근 사리장엄 발견으로 639년이라는 건립연대가 밝혀졌다. 또한 백제 사찰의 발굴조사 자료가 축적되고 동아시아의 학술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미륵사지서탑의 조영을 당시 불탑 건축의 발전 과정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미륵사지서탑의 축조에 적용된 구조원리와 1층 평면의 형성을 중심으로 6~7세기 불탑 건축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대형의 불탑건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륵사지서탑은 내부와 외부가 독립적인 개념으로 축조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고층 불탑건축에서 나타나는 구조원리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영녕사 목탑지에서 확인된 탑실심체와 같이 내부의 구조체를 형성하는 개념과 유사하게 내부 적심을 형성하고 외부 부재를 부가하는 방식으로 축조된 것이라 판단된다. 둘째, 미륵사지서탑에서는 상부의 적심부와 동시에 심주석이 동시에 존재하는 혼합 구조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영녕사 목탑과 같은 실심체의 구조보다 발전된 것으로 조팽성 불사의 심초석과 항토 실심체의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혼합 구조는 황룡사 목탑이나 일본의 목탑과 같이 내외진을 전부 목구조로 형성하고 심주가 독립적으로 지지되는 구조 방식보다 선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미륵사지서탑의 경우 1층에 십자형의 공간이 형성된 것은 심주석에 위치한 사리 봉안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심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4방향의 구심적 공간이며 사리의 본질적 의미에 기인하여 백제 6~7세기의 횡혈식 석실분과 유사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의 축조기법은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상징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된 서탑에 있어서 재료적 동일성으로 인하여 수용이 더욱 용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고대 건축의 부연(浮椽) 사용 시기에 관한 연구 (The Beginning of the Usage of Buyeon (浮椽) in Ancient Korean Architecture)

  • 한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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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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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9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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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한국 목조 건축에서 외형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요소로 지붕의 형태는 매우 중요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처마의 곡선은 한국 목조 건축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요소이다. 이 처마의 곡선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서까래와 부연(浮椽)이라는 부재이며, 특히 날렵한 처마곡을 만들어 육중한 지붕의 느낌을 보다 가볍고 역동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은 부연이다. 부연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져 있지만 처음 사용 시기와 관련해서 명확하게 알려진 바는 아직 없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 한국 건축에서 부연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한국·중국·일본의 고대 건축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는 문헌, 발굴 유구, 현존 건축물과 건축물이 표현된 회화 및 조각 등의 고찰을 차례로 진행하고 이를 종합하여 한국 고대 건축의 부연 사용 시기를 추정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경우 6세기 중반 북제에서 처음 부연 사용이 나타나지만 일반화된 것은 당대인 7세기부터로 판단된다. 둘째, 일본의 경우 수도를 비조 지역에서 나라 지역으로 이전하는 8세기 중반 이후 부연 사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중국의 당과 직접적인 문화 교류를 추진하는 시기와 겹친다. 셋째, 한국의 경우 부연 사용은 6세기 중반 중국 북제로부터 백제로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일반화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신라 통일기인 7세기 중반 중국 당과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호남지역(湖南地域)의 왜계자료(倭系資料)와 전방후원형고분(前方後圓形古墳) (The Relics of Wae Lineage and the Keyhole-Shaped Mounds in the Honam Area)

  • 土田純子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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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1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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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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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호남지역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일 고고 고대사학 연구자 사이에서 항상 큰 관심을 받았던 지역이다. 근래 이 지역에서 왜계 고고자료 발견 사례가 양적 질적으로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선행 연구와 견해를 재검토할 필요가 커지고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기존에 13기로 알려졌지만 최근 발견 사례가 17기까지 증가했다. 한 곳에서 3기가 조영된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으며, 또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특징짓는 형상식윤(形象埴輪)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에 대한 선행연구는 특정 자료나 특정 유적 유구에 한정된 사례가 많았다. 본고에서는 호남의 모든 왜계 고고자료를 대상으로 수량 고고자료의 종류 출토 위치를 파악한 후 그 변천을 추적하였다. 시기별 특징이나 변화상 등을 바탕으로 왜와 마한세력의 관계 의도 동향을 문헌 자료 등과 관련시켜 검토하였다. 호남지역 출토 왜계 고고자료는 5세기 전엽부터 증가 및 광범위한 분포를 보여주며 7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에는 왜계 무구와 왜계 매장주체부,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5세기 말~6세기 전엽에는 전방후원형 고분과 왜계 횡혈식석실, 6세기 중엽~7세기 초에는 왜계 무구 석침이 중심을 이루어 시기마다 양상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4세기 말~5세기 전엽의 왜계 고고자료에 대해서는 이 시기에 집중된 백제와 왜의 왕래 기사를 근거로 외교 사절단을 수행했을 무인계층과의 관련성을 상정했다. 5세기 중엽~후엽에는 수혜기(須惠器)(계(系)) 토기가 호남 내륙부로 확산되었다. 물자의 집적에 유리한 지점에서 주로 출토되는 경향이 엿보인다. 전방후원형 고분의 피장자를 북구주(北九州) 제세력에 속한 왜인을 중심으로 한 교역자 집단으로 해석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대체로 기본적으로 기존 수장묘가 조영되지 않던 지역에서 특별한 세력 기반 없이 돌연 출현했다. 그러나 재지인의 협조 없이 전방후원형 고분을 축조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일본 현지와 호남지역 전방후원형 고분의 구축 기술 차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한편 일부 전방후원형 고분은 재지 수장묘와 동시기 아니면 직후에 조영되었다는 점에서 재지 집단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5세기 초 금관가야가 몰락하자 왜 제국(諸國)은 새로운 교섭 상대로 호남지역을 선택하였다. 그 배경에는 왜에서 구하기 어려운 (지하)자원이나 물자를 확보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약 200년에 걸쳐서 사용되고 매장된 호남지역의 왜계 고고자료는 왜인의 다양한 교섭 노력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된다.

석실로 본 나주 복암리 세력과 주변 지역의 동향 (The Character of Bogamni group and trends in the surrounding area seen through the stone chamber)

  • 김낙중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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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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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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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이글에서는 최근에 영산강유역권 및 서남해 도서에서 발굴조사된 횡혈식석실을 나주 복암리 고분군의 석실과 비교하여 영산강유역 중핵지역의 유력세력인 복암리 집단의 성격과 영산강유역권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복암리 고분군에 처음 축조된 석실은 북부규슈계(北部九州系)의 영산강유형 석실이다. 그런데 최근 조사가 진전되면서 그러한 석실의 조영에 이어지는 흐름이 이미 서남해안의 연앙항로를 따라 5세기 전 중엽에 축조된 왜계 고분에서부터 보이고 있다. 즉, 백제와 왜의 통교 이후 서남해안을 통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연안항로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섬이나 해안가에 왜계 수혈식 고분이 축조되었다. 처음에는 부장품도 왜계 일색이었으나 점차 그런 고분이 축조된 지역 내에 현지의 묘 장제 요소가 가미된 고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당시 내해에 해당하는 영산강 하구의 바닷가에 위치한 영암 옥야리 장동 1호분이다. 그런데 이와 흡사한 매장시설을 사용한 고분이 5세기 중엽경에 나주 복암리 고분군과 인접한 곳에 축조되었다. 나주 가흥리 신흥 고분이 그것인데 이 고분의 축조에 복암리 집단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는지는 밝히기 어려우나 지리적인 인접성이나 동일한 원통형토기편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신흥 고분은 영산강 본류 가까운 저평구릉의 말단이나 섬에 위치하여 5세기 전 중엽 서남해안 일대에 축조된 왜계 고분과 유사한 배경, 즉 해로 혹은 수로의 이용이나 장악과 관련하여 입지가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다음 단계에는 복암리 고분군과 동일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생각되는 정촌 고분에서 영산강유형 석실이 매장시설로 사용되어 이러한 내륙수로 이용의 주도권이 복암리 집단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촌 고분의 축조는 복암리 집단의 급격한 성장의 배경을 보여준다. 이후 복암리 집단은 복암리 3호분 '96석실을 시작으로 7세기까지 고분군을 지속적으로 조영하여 영산강유역에서 주도적인 세력으로 번성하였다. 사비기에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에도 왜와의 밀접한 관계를 지속하며 영산강유역은 물론 서남해 항로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신안의 여러 섬들에서 발견된 복암리유형 석실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백제의 심초 및 사리봉안 (A Study on the Simcho of Wooden Pagodas in Baekjae)

  • 정자영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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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1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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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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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
  • 최근 들어 삼국~통일신라시대 목탑지 발굴조사가 증가되고 목탑 조영과 관련된 자료들이 새롭게 확인되어 이 분야의 연구 진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지금까지 우리나라 목탑 연구는 평면형태, 축기부 축조기법, 사리장엄구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이러한 신자료의 확보를 통해 기단 구축과정 및 변천과정 더 나아가 목탑 복원 등의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동일한 맥락을 보이는 탑지가 조사되어 한 중 일 고대 목탑 비교 연구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삼국시대 중 가장 많은 목탑이 조사 된 백제 목탑을 주요 대상유적으로 삼았으며, 목탑 가운데 심초와 사리기 봉안 장소에 대해 중점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심초는 지하 ${\rightarrow}$ 반지하 ${\rightarrow}$ 지상으로 그 위치가 점차 변해가는 양상이 파악되었는데, 백제 목탑은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A.D. 567), 왕흥사지(A.D. 577) 목탑 조영시 기인 6세기 중반까지 심초가 지하에 안치되다가 이후 반지하식, 지상식으로 구축된 것으로 판단되며, 제석사지(A.D. 639)나 황룡사지(A.D. 645) 목탑 조영시기인 7세기 전반기에 지상식으로 고착화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사리기는 초창기에 심초 이외의 장소에 봉안되다가 점차 심초 내부인 사리공에 안치되는데, 사리공 안치 위치도 심초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하던 것이 점차 중심부로 옮겨지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특히, 이 가운데 왕흥사지 축조 시기인 6세기 중반에 가서야 심초에 사리공이 결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확인된 비조사(飛鳥寺 A.D. 588) 심초 보다 약 11년 정도 앞서는 것이며 중국에서 조사된 영녕사(永寧寺 A.D. 516)나 조팽성 불사(趙彭城 佛寺 A.D. 535~561) 목탑 심초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어 왕흥사지 심초가 이런 유형으로는 현재까지 가장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고대 목탑의 기단 및 심초부 축조기법에 관한 고찰 - 백제 사지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Structure of the Foundations of Wooden Pagodas in Ancient Korea)

  • 정자연;탁경백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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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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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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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지금까지 한국 고대 목탑에 대한 연구는 발굴조사와 사료를 통한 평면 배치계획, 사리장엄구, 복원 등에 중심을 두고 진행되어 왔다. 이에 비해 목탑의 기단 및 심초부 축조기법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조사된 삼국시대 사찰 중 목탑지로 확인된 유구의 검토를 통해 각각 기단토 구축방법과 심초석의 형태, 안치 방법, 심주의 입주 등에 대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목탑지 기단 구축방법은 지상성토형 굴광판축형 지상삭토형으로 구분되며, 심초석은 지하(반지하)와 지상에 안치되는 형식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심초석의 위치가 지하에서 지상으로 상승함에 따라 심주의 위치도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목조건물의 구조 변화에 따른 것으로 특히 7세기 백제 무왕(武王)대에 목탑이 대형화되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대형화된 목탑의 조탑술은 신라 황룡사지 목탑, 일본 백제대사(百濟大寺) 목탑의 건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공주 공산성 원형연못의 지반에 대한 탄성파 굴절법 탐사

  • 변성환;오진용;서만철
    • 한국지구물리탐사학회:학술대회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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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지구물리탐사학회 2004년도 대한지구물리학회.한국지구물리탐사학회 공동학술대회 초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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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3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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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탄성파 탐사는 인공지진파를 이용하여 지표면 하부의 물성을 알아내는 지구물리탐사로서 20 세기 초부터 석유탐사와 공학적 지반조사에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굴절법 탄성파 탐사는 지층의 탄성파 속도를 알아내는 방법으로서 최근에는 석조문화재 등의 지반특성 조사에서 사용된 예가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공주 공산성의 쌍수정 광장에 위치하는 공산성 원형연못 주변의 지반에 대하여 굴절법 탐사를 실시하였다. 쌍수정 광장은 기존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백제 추정왕궁지가 위치한 곳으로 알려졌으며, 광장 남쪽에 원형연못(상면직경 7.3 m, 바닥직경 4.78 m, 높이 3 m)도 발굴되었다. 원형연못 주변에 5개 탄성파 측선을 설치하였고, 해머 타격점과 수신기의 배열을 3가지 다른 방식을 적용하여 24 m, 31 m, 48 m 측선깊이의 굴절법 자료를 얻었다. 대체로 공산성 원형연못 주변의 지반은 3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층의 겉보기 속도는 약 261${\~}$391 m/s, 약 591${\~}$992 m/s, 약 1950${\~}$3230 m/s이며, 첫 번째와 두 번째 층의 두께는 각각 약 2${\~}$2.4 m 와 4.6${\~}$8.6 m이다. 일반적으로 최하부 층의 속도는 기반암, 상부층들의 속도는 풍화토에 대응한다. 그러나 두 번째 층의 주시곡선 형태와 속도범위는 국내 석탑 문화재 하부의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공산성 연못주변은 인공적인 기초지반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그렇다면 공산성 원형연못은 파내려 간 것보다는 쌓아 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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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와를 통해 본 익산의 기와에 대한 연구 (Study on roof tiles of Iksan featuring Stamped-Roof Tiles)

  • 이다운
    • 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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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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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9-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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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 인각와는 백제기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익산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종류와 출토량 그리고 출토유적의 성격을 살펴보면 왕실과 관계 깊은 유적에서 주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작기법이 같다는 것은 특정 와공집단에 의해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생산시기에 대해서는 간지명인각와를 참고하였다. 그 결과 크게 무왕 즉위를 전후한 시기와 기축년(629)을 중심으로 한 7세기 제2/4반기 두 시기로 나뉘어 생산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와 함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의 창건기 수막새도 문양과 출토량 등을 검토한 결과 인각와와 같이 두 시기로 나뉘어 생산 공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생산배경에 대해서는 제작기법 생산시기와 함께 오부와 오항을 나타내는 인각와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무왕 주체의 조영사업에 필요한 기와생산에는 왕실만으로 그 재원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부뿐만 아니라 오항에서도 원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하에 성립된 기와생산은 관 주도의 일원화된 체제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 생산된 인각와의 인장을 인증 또는 검정을 위해 만든 것으로 날인 주체는 기증자도 생산자도 아닌 정해진 수량을 확인하고 날인할 수 있는 검사관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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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콜라겐의 탄소와 질소 안정동위원소에 기록된 6세기대 나주 영동리 고분군 피장자 집단의 식생활 양상 (Palaeodietary Reconstruction of 6th Century Naju Yeongdong-ri People Recorded in Stable Carbon and Nitrogen Isotope Analysis of Human Bone Collagen)

  • 최현구;신지영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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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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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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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뼈에서 추출된 탄소와 질소 안정동위원소 정보는 과거 사람들의 식생활, 영양상태, 생계경제와 고환경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본 연구에서는 6세기대 나주 영동리 고분군 제1호분 돌방무덤과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된 옛사람 뼈 9개체에서 추출된 콜라겐의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실시하였다. 탄소와 질소 안정동위원소 결과는 다음과 같다(${\delta}^{13}C=-19.5{\pm}0.7$‰, ${\delta}^{15}N=9.6{\pm}0.7$‰, (n=9)). 탄소 안정동위원소 분석 결과 나주 영동리 고분군 피장자 집단은 벼, 보리, 콩 등 $C_3$ 작물 위주의 섭취를 하였다고 추정되며, 질소 안정동위원소 값으로부터 동물성 단백질은 주로 육상 동물로부터 얻었다고 추정된다. 이 결과로부터 백제식 무덤 양식을 갖고 영산강유역 토착 세력의 매장 양식이 보이는 피장자 집단의 식생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과 왕도의 위치 관계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Location Relationship between Ancient Royal Garden and Royal Capital in North-East Asia)

  • 전용호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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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0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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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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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왕도와 왕궁에서의 위치 관계에 따라 왕궁 내부의 북쪽, 왕궁 외부의 북쪽, 왕궁 내부나 외부의 남쪽에 위치하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중국 고대 궁실제도를 따른 전형적인 궁원이다. 두 번째는 왕궁과 독립적으로 위치하거나, 금원(禁苑)으로 확장되는 궁원이다. 세 번째는 왕궁의 남쪽에 위치하면서 유락(遊樂)이나 향연(饗宴)으로 특화한 궁원이다.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유형은 정궁(正宮)과 별궁(別宮) 혹은 이궁(離宮), 금원(禁苑)과의 관계에 따라 구분되고 각각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익산 왕궁리 유적의 궁원을 비롯하여 한 장안성, 북위 낙양성과 남조 건강성, 당 대명궁 등에 이르기까지 정궁의 궁원으로 자리잡아왔다. 여기에서는 왕궁 안으로는 궁원이 내원(內苑)으로, 왕궁 밖으로 금원이 외원(外苑)으로 분리되어 있다. 반면에 두 번째는 궁원(宮苑)과 금원(禁苑)이 일체화되어 있다. 세 번째는 왕궁의 일부분을 구성하거나 왕도에서 정궁과 독립된 공간으로 별궁이나 이궁의 궁원으로 특화되어 왔다. 중국은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의 전형(典型)을 만들었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한국의 백제와 신라, 일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나름대로 독창성을 발휘하여 독특한 궁원을 발전시켜 나갔다. 백제왕도 익산의 궁원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궁원을, 사비도성의 궁원은 진·한대와 수·당대의 궁원을, 신라왕경의 궁원은 사비도성과 당의 궁원을, 일본 아스카~나라시대의 궁원은 백제와 신라의 궁원을 영향을 각각 받았다. 그렇지만 이들 궁원은 각각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궁원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은 지역에 따라 계통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평양 안학궁은 궁원으로 보아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영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안학궁 하부의 유구 중복 관계나 유물로 보아 그 초축 시기는 5~6세기로 올려보기 어렵고 대체로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평양 안학궁의 궁원은 평양 장안성의 정궁에 대응하는 별궁 혹은 이궁의 궁원으로서 한국 통일신라시대 동궁과 월지나 일본 나라시대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으로 보아, 평성궁 동원정원(東院庭園)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궁원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동북아시아의 고대 왕도라는 큰 틀에서 궁원의 위치 관계로 그 특징과 변천을 중점적으로 다룬 연구로 적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한계들을 조금씩 해결하여 나간다면, 동북아시아 고대 궁원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지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