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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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단따의 '듣기·숙고하기·명상하기'(문·사·수)에 관하여 (On Listening, Reflection and Meditation in Vedānta)

  • 박효엽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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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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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5-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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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베단따의 주요 실천 방법인 '듣기 숙고하기 명상하기'(이하 '3수단'으로 부름)는 연속적인 단계(step)로서가 아니라 동일한 목적의 방편적 연장(extension)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즉 3수단은 듣기에서 직접적 지식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에 방편적으로 숙고하기, 명상하기로 연장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듣기 중심적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3수단이 암시하는 인도철학의 주요 특징들을 드러냄으로써 더욱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인도철학에서 해탈 중심적 전통에 속하는 베단따는 쉽게 말해 자기를 앎으로써 자기가 되려고 하는 '본래의 자기 되찾기' 프로젝트이다. 이 경우 본래의 자기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에, 3수단을 듣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베단따의 근본 가르침과도 부합된다. 게다가 '본래의 자기 되찾기' 프로젝트는 3수단을 통해 실행되므로, 3수단은 베단따의 형이상학이라는 그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되는 일종의 이벤트(event)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경우 듣기란 자신이 참가한 이벤트의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과정으로서, 스스로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그 시나리오를 듣기만 해도 프로젝트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언이라는 지식수단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듣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3수단에 대해, 후대에 점점 명상하기가 강조됨으로써 연장이 아닌 단계로 이해하고자 하는 해석이 등장한다. 이는 '증언되는 것 혹은 주어진 것'을 '특별하게 지각되는 것 혹은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반영된 결과이다. 지식의 간접성과 직접성을 나눈 채 전자에서 후자로 단계적 이행을 강조하는 이 해석은, 프로젝트의 실질적 실패로서 이벤트의 반복적 지연을 합리화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3수단에 삼매를 더하여 4수단을 언급하는 후대 베단따의 주장은 텍스트 바깥에서 텍스트와 별도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텍스트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 그 시나리오가 오직 그대로 재현되는 것을 깨달음으로 간주하는 초기 베단따의 주장과 양립하기 힘들다. 결국 3수단에 대한 베단따의 표준적 해석은 명상하기 중심적 혹은 삼매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듣기 중심적인 것이어야 한다.

앙드레 말로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등장인물의 실존의식과 존재의미 (Existential Consciousness and the Meaning of Characters in André Malraux's Literary Works)

  • 오세정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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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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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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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20세기의 서양사상 가운데 하나인 실존주의는 1 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파시즘의 확산, 스페인내란전쟁 등의 비극적 사건을 겪으며 이성과 과학발달이 인간을 순식간에 피폐와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낳게 되자 인간을 위해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시대정신이다. 앙드레 말로는 문학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운명으로써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제기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에 대한 실존적 고뇌를 기록한다. 말로의 등장인물들에게 있어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된 존재의 부조리는 실존적 자기 성찰을 의미한다. 작가는 생존의 위협이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전쟁과 테러, 혁명, 모험 속에서 그들이 죽음에 직면해 운명에 대한 실존적 의식과 행위를 숙고한다. 말로는 자신의 모든 문학 작품들 속에서 죽음의 문제를 밀도 있게 다루고 있으며 이는 철학적 사고의 중심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말로는 "정복자"(Les $Conqu{\acute{e}}rants$, 1928), "왕도의 길"(La Voie Royale, 1930), "인간조건"(La Condition Humaine, 1933), "희망"(L'Espoir, 1937)의 장편소설에서 비극적 상황에 놓인 등장인물들을 통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명제를 제시하며, 그들이 운명을 스스로 지배하려는 실존의식과 존재의미를 추구한다. 말로는 이러한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성과 삶의 긍정, 죽음을 부정하는 등장인물들의 의식과 행동을 나타낸다. 죽음의 고뇌는 예측할 수 없는 본능적인 욕구와 도박, 아편 등의 도피적 행동을 유발하지만, 그것은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며 자신의 존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연계된 것이다. 말로의 실존주의적 사고로서 항상 부각되는 점은 죽음에 대한 운명의식으로 인해 결국엔 인간이 얼마나 고독한 존재인가라는 숙명적 인간조건의 비극적 형이상학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모험과 혁명, 전쟁 속에서 동료들과 함께 행동하며 타인을 위하여 개인주의를 초월하는 동지애적인 연대의식은 인간존중이 된다. 인간애와 인간성 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두고 자발적으로 구성된 인간들 사이의 동지애는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로의 동지애는 휴머니즘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의식의 승리를 포함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개별선, 공동선, 최고선의 관계와 형이상학적 근거 (The Relation of Particular Good, Common Good and the Highest Good and its Metaphysical Foundation according to Thomas Aquinas)

  • 이상섭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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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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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9-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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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개별선과 공동선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 또는 우월관계에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토마스 해석자들 사이에 대립적인 의견이 존재한다. 어떤 학자들은 토마스의 텍스트들이 개별선에 대한 공동선의 우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들은 반대로 개별선의 우위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면밀히 검토하면 토마스는 개별선과 공동선의 대립이 아니라 양자의 통일을 주장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토마스의 윤리학 및 정치철학은 개인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토마스에게서 개인은 단순한 개별자가 아니라 종적인 본성에서 일치하는, 개별화된 본성을 가진 개별화된 보편자이다. 한편 토마스에게서 선은 존재자의 완전성을 의미하며, 존재자의 가능성이 전체로서 완성되었을 때에만 그 존재자는 단적인 의미에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개인이 개인으로서의 완성만을 추구한다면 부분적 선만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단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의 선은 공동체를 통해서 실현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토마스에 따르면 공동체의 목적은 구성원들이 덕에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덕이 그것을 가진 인간과 인간의 행위를 선하게 만드는 것인 한 공동체는 구성원 각각의 완성을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개별선은 공동선을 통해서, 다시 공동선은 개별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일치가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공동선을 통해서 실현되는 개별선이 올바른 목적지향을 갖지 않는 한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단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의 선은 최고선과의 정당한 질서관계 속에 놓여 있는 공동선과 개별선의 통일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시뮬라시옹과 포스트-재현 - 알고리즘 아트를 중심으로 (Simulation and Post-representation: a study of Algorithmic Art)

  • 이수진
    • 기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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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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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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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르네상스 이후부터 지속되어 온 재현체계에 관한 포스트모던 철학의 비판은 시각주체의 경험과 대상을 분리하고, 환경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체계에 관한 비판으로 궤를 같이 한다. 1960년대 포스트모던한 흐름으로 등장한 일련의 작품에서 강조된 상호작용성은 1990년대 후반 디지털 아트의 인터랙티브한 차원으로 계승되었다. 디지털 아트의 핵심적인 특성은 현장에서 관객의 참여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결과 혹은 저마다의 미세한 변화를 반영한 무한대의 변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기존 프로그램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티스트가 직접 알고리즘을 작성하고 프로그래밍하는 경우 혹은 프로그래머와 협업을 통해 고유한 알고리즘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프로그래밍 자체를 창작 행위로 간주해야 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현재 주목받고 있는 시뮬레이션과 VR 기술은 현실의 감각과 시공간을 재현해내는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데, 시뮬레이션 기술이 예술 분야에 도입되면서, 실험적인 작품들이 창작되는 중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시뮬라시옹 개념은 '어떤 현실을 본따 매우 사실적으로 만듦'을 대변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실재하는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전혀 다른 현실'을 주목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이때 시뮬라시옹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따질 주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없는, 전통적인 실재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실재를 지칭한다. 전통적인 질서에서 이미지가 실재 세계의 재현에 대응했다면, 알고리즘 아트의 시뮬레이션 이미지들 그리고 시뮬레이션된 시공간은 '체험을 용이하게 만드는 예술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다수의 알고리즘 아트는 상황, 현실, 생태계, 생명체 등의 복합적인 속성을 시스템으로 모델화하여 (특정 혹은 개별) 대상을 구조화하고 활성화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으며, 세계의 시뮬라시옹에 주목한다. 본 논문에서는 세계의 시뮬라시옹을 다루는 이안 쳉의 작품을 통해, 21세기 인공지능 기술의 등장과 함께 변화하고 있는 문화예술의 패러다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안 쳉의 라이브 시뮬레이션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 역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사실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대면하는 순간은 전통적인 형식의 작품보다 훨씬 더 능동적인 입장을 요구한다. 본 논문이 제시하는 포스트-재현 형식의 문화예술 작품은 개인적인 경험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감각과 지각 과정이 완성이나 종결로 수렴될 수 없음을 기술로 구현하고 있다. 이때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능동적 인식과 상황적 지식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드와이따 베단따의 자아정체성 귀환과 사라진 타자의 이야기 (Return of Self-identity and Story of the Other which disappeared in Advaita Vedanta)

  • 박효엽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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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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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9-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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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자기를 탐구하는 인간학이자 구원론인 아드와이따 베단따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는 '아뜨만'(자아)이고, '아뜨만이 아닌 것'(타자)과 관계하는 다른 모든 어휘들은 오로지 아뜨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아뜨만은 베단따의 형이상학, 인식론, 수행론을 모조리 성립시키는 단 하나의 어휘이기에 리처드 로티의 '마지막 어휘'에 비견될 수 있다. 그리고 이 학파의 핵심 가르침은 개별자아가 본질적으로 아뜨만임을 깨우치는 것인데, 이는 전적으로 거짓된 자아가 본래의 참된 자아에로 되돌아오는 자아정체성의 귀환 과정이다. 결국 베단따에서 아뜨만이 아닌 것들 즉 타자에 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결코 의의를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베단따에서는 타자의 담론도 충분히 그 의의를 가질 수 있다.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가르는 '분별'의 특별한 의미, 진실(자아) 확립보다 더 중요한 허위(타자)의 타파, 깨우침 이전과 이후에 진실과 허위의 치환 등등은, 베단따에서 깨우침의 과정이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방식이 아니라 '정'(자아)과 '반'(타자)의 치환과 지속적 이항대립의 방식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타자는 그 방법적 역할을 완수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채 단지 숨겨질 뿐이고, 타자의 담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베단따에서 망각된 어휘들을 되살리는 것은 담론의 중심을 자아에서 타자로 이동함으로써 평가 절하된 이야기를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시도에서 중요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은폐된 '노력'이라는 개념과 본래적 의미를 상실해버린 '탐구'와 같은 개념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자기 탐구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시나리오(잠정적 믿음)가 주어져 있고 그것을 중단 없이 체험 속에 활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다. 베단따의 잃어버린 서사를 복원하는 일은 '자아로서의 자아'보다 '타자로서의 자아'를 그 대상으로 삼는 자기 탐구의 역사를 베단따에 재기입하는 방식으로 가능하다.

판단력과 덕 그리고 활동여지 (Latitude within Judgement and Virtue)

  • 김덕수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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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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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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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칸트의 덕 이론은 인간 행위의 한계를 규정하는 도덕법칙과 함께 개별적 상황에서 행위자가 도덕적으로 행위 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행위자가 어떤 행위의 준칙을 정식화하는 단계에서 일종의 활동의 여지가 마련되는데, 그 안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와 같은 도덕적 판단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가 "덕론"에서 '자기 자신의 완전함', '다른 사람에 대한 행복'이라는 두 종류의 덕 의무를 제시하고, 각각의 사항에 대해 결의론적인 물음들을 제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덕 법칙의 적용에 의한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한 연습과 훈련이었다. 더욱이 칸트는 윤리학은 행위를 위한 법칙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준칙을 위해서만 법칙을 제공한다고 보았으며, 나아가 결의론적 물음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적절한 방식 속에서 실천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결의론은 단편적인 방식에서만 윤리학과 관계될 뿐이고 또한 그 체계에 대한 주석으로서만 윤리학에 부가된다고 지적한다. 칸트에게 덕과 판단력은 "도덕형이상학정초"에서 확립한 최고의 도덕법칙을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 적용하기 위해, 달리 말하면 본성적 경향성에 따라 행위할 가능성 높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의 명령에 따라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다. 이에 그는 광의의 의무를 협의의 의무로 가져가기 위해서 인간에게 의지의 강한 힘인 덕의 연마와 판단력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더욱이 법의무(협의의 의무)와 덕의무(광의의 의무)의 구분은 결국 그 의무들의 적용에 있어서 활동의 여지가 있는지임을 감안한다면, 행위자의 준칙의 채택과 관련하여 활동여지 속에서의 판단력의 훈련과 덕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상세히 말하자면, 의무가 더 광범위해짐에 따라, 그래서 행위에 대한 인간의 책무는 더 불완전해지지만, 그러나 의지에 관한 그의 태도에서 그가 이런 의무를 준수할 준칙을 협의의 의무(법)으로 더 가까이 가져가면 갈수록 그의 덕스러운 행위는 그 만큼 더욱 더 완전해진다. 이는 결국 비판기 시기에 칸트가 확립했던 최고의 도덕법칙, 즉 정언명령을 현실세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노력이었다.

강제로부터의 자유와 필연으로부터의 자유: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의지자유개념 비교연구 (Freiheit vom Zwang und Freiheit von der Notwendigkeit: Eine Untersuchung des Begriffs der Freiheit des Willens bei Kant im Vergleich mit Leibniz)

  • 윤선구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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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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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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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칸트의 의지자유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모호하다. 그 이유는 "실천 이성비판"의 목적이 순수실천이성의 존재를 밝히려 하는데 있듯이 칸트의 자유 개념이 강제로부터의 자유에 중점이 놓여있고, 필연으로부터의 자유에 해서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 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해 라이프니츠의 자유개념은 인간의 의지는 정념의 강제로부터 뿐만 아니라 필연으로부터도 자유이다라고 말하듯이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다.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자유이론의 구조는 많이 다르지만 자유와 필연의 조화가능성을 논하는 성격론은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자유개념은 매우 명료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라이프니츠와 칸트의 자유개념을 비교함으로써 칸트에게서도 강제로 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도 가능함을 밝히고자 한다. 라이프니츠는 처음부터 합리주의자들이 모두 인정하는 정념의 강제로부터의 자유와 스피노자가 부정하는 필연으로부터의 자유 등 두 서로 다른 개념을 전제하고 출발한다. 그러나 칸트는 자유를 자연법칙으로부터의 독립성으로 규정함으로서 이 개념은 처음부터 모호한 개념이 된다. 칸트는 처음에는 이 개념의 이의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혼용하여 사용하다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의 재판에 서 의지자유의 두 가지 개념이 서로 다름을 인식하게 되고 "도덕형이상학" 법론에서는 선택의 자유를 부정한다. 그러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와 필연의 조화가능성을 논하는 부분을 보면 칸트도 라이프니츠와 함께 인간의 예지적 성격이 자유로운 선택을 반복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가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는 이유는 자유의 개념이 하나의 통일적인 개념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개념은 하나로 규정되어야 할 필요가 없고, 강제로부터의 자유와 필연으로부터의 자유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므로 이들은 동일한 의지에 동시에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만이 자율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16~18세기 영·호남 누정에 깃든 문화경관의 의미론적 해석 - 지정 문화재를 중심으로 - (Semantic Interpretation of the Nu-Jeong Cultural Landscape During the 16~18th Century at Youngnam and Honam Area -Focusing on the Designated Cultural Properties-)

  • 이현우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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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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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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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본 연구는 국가지정 또는 시도지정 문화재 중 총 22개의 영 호남 소재 누정을 중심으로 16~18세기 명리를 등지고 초야에 은거한 사림(士林)의 누정 문화를 고찰함으로써, 조영자의 자연관과 누정건립 등의 문화형성과정에서 축적된 미의식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개별 누정에 작용된 의미론적 경관특성을 밝히기 위한 제안으로 '풍수적 입지 누정명 분석 누정문학 분석' 등의 해석을 시도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확인된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누정의 '입지[風水] 명칭[懸板] 문학[板上詩]' 등의 분석 및 해석 결과를 토대로 한국 누정만이 갖는 특수성을 논한다면, 누정의 입지는 풍수가 지향하는 목표와 일맥상통함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땅의 모양(物形)을 의미론적 풍수형국으로 해석함으로써 은유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터잡기' 한 특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풍수형국론(風水形局論) 관점에서 본 누정의 입지는 배산임수의 요건을 모두 충족했으며, 지향했던 전형적인 좌향은 남동향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땅의 모양에 대한 직관적이거나 자연론적인 표현보다는,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은유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전통적 경관짜임의 특징을 형이상학적인 해학(諧謔)으로까지 승화시키고자 하는 보편성이 발견된다. 더 나아가 누정의 입지를 광역적 경관인식 체계로 본 의미론적 낙토(樂土) 개념이 표출되고 있다. 한편 누정명은 누정이 위치한 서로 다른 개별적 경관을 응축함으로써 상정된 의미론적인 어휘였다. '누정명의 어의 분석'에서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인 것은 주변경관을 간명한 어휘로 함축한 것인데, 그 특징은 첫째 '자연예찬(自然禮讚)' 즉 승경(勝景) 및 사시경물(四時景物)에 대한 흥취, 둘째, '유가사상(儒家思想)'과 관련된 경서(經書) 문장(文章) 성리학적 가치관 중국의 고사성어, 셋째, '선현칭송(先賢稱頌)'에 관한 상고성(尙古性), 넷째, 유유자적과 안빈낙도의 전형으로 청빈하지만 자존적인 삶의 '풍류(風流)', 다섯째, '도가사상(道家思想)'과 관련하여 좌절된 자아를 달래기 위한 치유수단으로써의 '선경(仙境) 갈구' 등이 깊이 내포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16세기 초반까지는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명칭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16세기 중반을 넘기며 '자연예찬 및 선현칭송'의 제재가 증가하면서 유가사상에만 편중되지 않는 제재 상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문학이란 예술장르를 빌어 아름다운 자연에 비긴 작가의 심상을 투영시킴으로써 내면의 문제를 완곡히 토로한 누정문학의 주요한 특성으로는 '자연예찬 풍류 도가사상 및 유가사상 선현칭송' 등의 보편성과 '우국충정 연군지정 과거회상' 등의 키워드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팽배했던 '성리학적 유교관'에도 불구하고 누정문학을 주도한 일의적(一意的) 개념이 '자연예찬 및 풍류'였음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통해 본 운조루(雲鳥樓)의 공간배치계획과 경관 고찰 (A Study on the Space Planning and Landscape of 'Unjoru(雲鳥樓)' as Illustrated in the Family Hereditary Drawing, "Jeolla Gurye Ohmidong Gado(全羅求禮五美洞家圖)")

  • 신상섭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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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6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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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4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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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계화기법(界畵技法)으로 그린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통해 운조루(雲鳥樓) 살림집의 공간배치계획과 경관 기법을 고찰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미동가도'는 창건주 류이주(柳爾?)가 용천부사로 재임할 때(1782년) 설계도면을 보내 집을 짓게 하였다는 점, 정형화된 풍수적 사신사 구조의 자리잡기와 기본계획도 성격이 농후한 점, 그리고 합각지붕이 1804년에 솟을대문으로 중수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운조루 창건시기(1776~1783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운조루는 지리산 노고단(祖山)과 형제봉을 주산(主山)으로, 오봉산(案山)과 계족산(朝山)을 안대로 자리했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동방천(外明堂水)을 표현하는 등 배산임수 풍수국면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셋째, 운조루는 직교 축선에 위계를 설정하여 품(品) 자형 건물군이 5영역으로 분화된 구조인데, 바깥뜰 외원과 뒤뜰 후원을 갖춘 5동(棟) + 6마당(庭) + 2원(園)의 토지이용체계를 가진다. 넷째, 심미성과 풍수적 화기비보(火氣裨補)를 겸한 바깥뜰(외원)의 조성은 연못(방지원도형)을 중심으로 유교와 도교적 관념 등 상징적 경물(景物)을 대입시켜 지속 가능한 생태정원을 구축하고 있다. 다섯째, 사랑마당에는 화계(花階)와 화오(花塢)를 가꾸었고, 괴석, 학과 매화나무, 소나무, 위성류, 초화류 등 조경 요소를 활용하여 선경의 이상세계를 구축함은 물론 정심수를 도입하는 등 형이상학적 상징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사랑채 누마루에서 조망되는 원경과 중경, 그리고 앙부(仰俯) 경관 등 자연의 경(景)이 내부로 관입되거나 외부로 확장되는 차경(借景)과 관경(觀景)의 미를 발견할 수 있다. 여섯째, 북쪽 담장 밖의 소나무 총림과 조산(造山)은 주거환경의 쾌적성 제고 측면은 물론 풍수적 채움의 미학이 고려된 전통조경기법 사례라 하겠다.

다산의 인간관과 효(孝)·제(弟)·자(慈)의 실천 (Tasan's Viewpoint of Human Being and Practice of Xiao (孝)·Ti(弟)·Ci(慈))

  • 정상봉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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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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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7-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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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형이상학적 설명을 한 주자의 관점을 비판하였던 다산이 어떻게 인간을 이해했는가, 그리고 인간의 윤리실천에 대하여 어떤 주장을 하였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다산에 따르면, 신체와 정신의 결합체인 인간은 신체적 성향과 도덕적 성향을 타고난다. 특히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성향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이것은 상제로서의 하늘이 인간에게만 부여해 준 것이다. 또한 인간은 자율적 판단능력과 주체적 실천의지인 자주지권(自主之權)을 갖추고 있다. 향선(向善)의 경향성이 있지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의 행실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이에 상제(上帝)는 인간의 동기와 행위의 선악 여부를 언제 어느 때고 감찰한다. 상제의 목소리는 인간의 도심(道心)을 통해 울려나온다. 이것이 윤리실천의 외적 동인(動因)이요, 내적 동인이다. 인간의 제반 실천윤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을 표상한 개념어가 바로 인(仁)이다. 즉 인간은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친구 등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상에 합당한 도리의 실천을 통하여 인(仁)의 덕을 쌓아간다. 인(仁)의 덕(德)을 이루는 데는 효(孝) 제(弟) 자(慈)가 기본이다. 이 천륜에 관한 윤리에는 유가윤리의 쌍무적 정신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다. 효(孝)를 바탕으로 임금을 섬기고, 제(弟)를 바탕으로 어른을 섬기며, 자(慈)를 바탕으로 백성을 부려야 하는 것이다. 이 효(孝) 제(弟) 자(慈)를 토대로 한 윤리실천의 방법이 바로 '서(恕)'다. 서(恕)는 나의 마음을 미루어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추서(推恕)로서 신체적 성향에 관한 것과 도덕적 성향에 관한 것을 두루 포괄한다. 전자의 경우, 자기 욕구의 절제나 양보가 필요하다. 후자의 경우는 공동체 사회내의 당위의 구현을 목표로 삼는다. 결론적으로 다산의 윤리학은 도덕적 성향과 자주지권을 갖고 타고난 인간은 상제의 뜻이 투영된 도심(道心), 즉 도덕적 양심에 귀 기울여 효(孝) 제(弟) 자(慈)의 윤리를 서(恕)의 방법에 따라 실천해 나감으로써 인(仁)의 덕(德)을 쌓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요, 또한 상제인 하늘을 섬기는 길인 것이다. 이에 다산은 수사지학(洙泗之學), 즉 공맹철학의 핵심사상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