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tle/Summary/Keyword: 평면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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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서탑 축조의 구조 원리에 관한 기초 연구 6~7세기 전반 목탑과의 비교분석을 중심으로 (Basic Study on the Building Principles of Structure in Mireuksaji Stone Pagoda)

  • 조은경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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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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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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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미륵사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창건한 사찰로 이와 관련한 창건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이(第二) 무왕조(武王條)에 언급되어 있다. 서원의 미륵사지서탑은 해체 전 6층까지의 일부가 남아있었으며 미륵사지 내의 유일한 현존 건축물로서 최근 사리장엄 발견으로 639년이라는 건립연대가 밝혀졌다. 또한 백제 사찰의 발굴조사 자료가 축적되고 동아시아의 학술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미륵사지서탑의 조영을 당시 불탑 건축의 발전 과정과 연관시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미륵사지서탑의 축조에 적용된 구조원리와 1층 평면의 형성을 중심으로 6~7세기 불탑 건축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대형의 불탑건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륵사지서탑은 내부와 외부가 독립적인 개념으로 축조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고층 불탑건축에서 나타나는 구조원리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영녕사 목탑지에서 확인된 탑실심체와 같이 내부의 구조체를 형성하는 개념과 유사하게 내부 적심을 형성하고 외부 부재를 부가하는 방식으로 축조된 것이라 판단된다. 둘째, 미륵사지서탑에서는 상부의 적심부와 동시에 심주석이 동시에 존재하는 혼합 구조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영녕사 목탑과 같은 실심체의 구조보다 발전된 것으로 조팽성 불사의 심초석과 항토 실심체의 구조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혼합 구조는 황룡사 목탑이나 일본의 목탑과 같이 내외진을 전부 목구조로 형성하고 심주가 독립적으로 지지되는 구조 방식보다 선행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미륵사지서탑의 경우 1층에 십자형의 공간이 형성된 것은 심주석에 위치한 사리 봉안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심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4방향의 구심적 공간이며 사리의 본질적 의미에 기인하여 백제 6~7세기의 횡혈식 석실분과 유사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횡혈식 석실분의 축조기법은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상징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된 서탑에 있어서 재료적 동일성으로 인하여 수용이 더욱 용이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지역 목관·목곽묘의 전개와 사로국 (Development of Wooden Coffin(木棺) and Chamber(木槨) Tombs in Gyeongju(慶州) and Sarokuk(斯盧國))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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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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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06-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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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 본고는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대까지의 목관묘와 목곽묘에 대한 구조분석과 그 변화양상을 추적하여 사로국의 정치, 사회적인 동향과 성장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가 기원전 2세기 후반 무렵 영남지방으로 파급되면서 경주지역에서도 철기가 부장된 군집묘(群集墓)가 조성되기 시작하며 이후 기원전 1세기 후반에는 한군현(漢郡縣)의 설치에 따라 대동강유역의 유이민이 진한(辰韓)으로 남하, 정착하면서 전한경(前漢鏡)과 와질토기(瓦質土器)가 부장된 중소형의 단순목관묘(單純木棺墓)가 경주지역에 등장하게 된다. 청동유물을 다량 부장한 독립묘(獨立墓)의 주인공은 군집묘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최상위 계층의 것으로 사제왕(司祭王)일 가능성이 높으며 경주의 각 곡간지역을 범위로 하는 지역집단의 수장묘(首長墓)로 추정된다. 기원후 2세기에 접어들면서 단순목관묘는 규모가 확대되고 부장유물의 종류와 양이 풍부해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사라리 130호묘이다. 이것은 피장자의 주관 옆에 부장품을 넣은 목갑(木匣)을 설치하여 칠기(漆器)나 동경(銅鏡) 등의 위신재(威信財)를 부장한 것으로, 이와같은 구조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낙랑지역의 목곽묘에서 보이고 있다. 기존의 목관묘와 구조상에서 차이가 보이는 이러한 목관계목곽묘(木棺系木槨墓)의 출현은 변 진한의 철(鐵)을 매개로 한 낙랑과 이 지역과의 활발한 교섭관계를 대변해 주는 것이며 지리적으로 물류의 집산지 역할을 한 사라리 집단은 외부와의 유통과 교역을 장악하여 경주지역의 정치와 사회문화적인 거점으로서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2세기 후반대 이후 정치체의 규모가 크게 성장한 경주지역의 분묘시설에는 부장유물의 안정적인 공간을 위한 곽(槨)이라는 개념이 정착하게 되었고, 소형묘와 입지상에 있어 차별성을 가진 대형의 장방형목곽묘가 3세기 전엽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지배집단 내 계층분화의 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대형묘가 소재하는 지역이 소국의 중심지로써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 목곽묘의 평면구조가 점차 길어지는 경향은 묘곽 내에 보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 3세기 후반대 부곽이라는 시설을 갖춘 경주식목곽묘(慶州式木槨墓: 동혈주부곽식목곽묘)의 등장을 가져온다. 소형의 부곽은 점차 길이가 길어져 4세기대에는 주곽의 크기에 이르는데, 이는 집단 내 계급의 분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권력의 집중화가 표면화된 것으로 경주와 주변지역 대소집단간의 통합이 진전되는 분위기 속에서 집단 내의 질서를 일원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함안 용산리 함안층 새발자국 화석산지의 보존과학적 진단 및 평가 (Conservation Scientific Diagnosis and Evaluation of Bird Track Sites from the Haman Formation at Yongsanri in Haman, Korea)

  • 이규혜;박준형;이찬희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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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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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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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함안 용산리 함안층 새발자국 화석산지(천연기념물 제222호)에서는 Koreanaornis hamanensis와 Jindongornipes kimi로 명명된 두 종의 새발자국이 발견되었으며, 용각류 발자국과 생흔화석 Cochlichnus도 보고되었다. 특히 Koreanaornis hamanensis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기록된 새발자국 화석종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이 일대는 구들장용 판석의 채석장이었으며, 1969년에 세계적 희귀 화석지로 알려지면서 크게 훼손되어, 현재는 지정 당시의 25% 정도가 잔존한다. 함안층은 경상누층군의 하양층군에 속하며 주로 적회색의 미사암과 흑색의 이암이 교호하는 암상을 보인다. 미사암과 이암의 경계는 점이적이며, 연흔과 건열 등의 퇴적 구조가 뚜렷하다. 연구 지역의 퇴적암은 퇴적순서와 구조 및 암상에 따라 총 7개의 지층으로 구분되며, 새발자국 화석은 최상부층에서 나타난다. 비파괴 손상도 평가 결과, 화학적 생물학적 손상은 7개 지층에서 모두 매우 낮게 나타났다. 물리적 손상도의 경우 박락 0.49%, 박리 0.04%, 탈락 0.28%로 매우 낮은 손상률을 보였다. 그러나 절리 등 불연속면의 균열지수는 6.20으로 비교적 높으며, 배면과 북서측의 표면은 하등생물의 피복이 심하여 지층의 단면을 중심으로 염에 의한 백화현상이 관찰된다. 화석산지의 초음파 물성은 전반적으로 중간풍화단계(MW)를 보였다. 특히 공룡발자국이 있는 남서측 부근이 상대적으로 신선하며, 보호각 기둥 주위로 풍화가 진전된 양상을 보였다. 이 화석산지에 발달한 불연속면은 5종류로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보이는 불연속면은 층리면이다. 평사투영으로 사면의 안정성을 분석한 결과, 평면 및 쐐기파괴에는 안정적이지만 전도파괴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화석산지의 종합적인 손상 정도 및 안정성은 양호한 것으로 판단되나, 화석층의 물리화학적 풍화와 보호각 기둥과 접하는 모르타르의 백화현상 등은 제어하기 어려운 상태로 보여,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보존처리 및 관리가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4단지 문지 출토 소조편(塑造片)을 통해 본 회암사 사천왕상 (Four Heavenly Kings Statues of Hoeamsa in the Early Joseon Dynasty: Seen Through Clay-Fragments Excavated From the Yangju Hoeamsa Site)

  • 심영신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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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4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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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8-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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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1997년부터 2015년까지 진행된 회암사지 발굴조사 중 2001년에는 4단지 문지에서 사천왕상을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소조편들이 출토되었다. 회암사 사천왕상은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있었던 여말선초에 4단지 문이 건립되면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회암사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양주 회암사지 4단지 문에 봉안되었던 사천왕상의 특징 및 도상과 조성 시기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우선 출토 소조편을 천왕문에 봉안된 조선시대 사천왕상들과 비교하여 각 편의 대략적인 위치와 기능을 밝혔다. 또한 4단지 문지의 크기와 평면 형태를 조선시대의 다른 천왕문과 비교하여 회암사 사천왕상은 입상이었을 것이며 그 크기는 또 다른 입상인 법주사 천왕문의 사천왕상과 비례했을 것으로 보았다. 회암사 중창의 역사를 고려했을 때 4단지 문의 건립 완공 시기는 1376년과 1473년의 두 시기 중 하나로 볼 수 있고 회암사 사천왕상의 조성 시기 역시 이와 연동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출토 소조편 가운데 화염형 장식편은 조선시대 사천왕상 보관의 일반적인 장식 요소로서 고려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편의 존재는 회암사 사천왕상의 조성 시기가 고려시대보다는 조선시대일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유구 분석을 통한 건축사 연구에서도 4단지 문의 건립 시기를 대체로 15세기 후반으로 보는 의견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1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회암사 사천왕상은 이후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도상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새로운 전통으로서 정립되었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또한 거꾸로 4단지 문지의 건립 시기를 15세기 후반으로 보는 건축사학계의 의견에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릉 연지(蓮池)의 특성과 전형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and Model of Lotus Pond in Joseon Royal Tombs)

  • 고승관;구본학;최종희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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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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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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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조선왕릉 연지보존 및 복원을 위한 기초연구로 고문헌(춘관통고, 광릉지)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며,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남양주 광릉, 효릉, 김포 장릉, 숭릉의 연지를 대상으로 형태, 재료, 구조 및 공법, 식생적 특성 및 전형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조선왕릉 연지형태는 평면적으로는 방지원도형 혹은 방지형이며, 크기는 가로 7.5~81m, 세로 6.5~45m, 섬의 직경은 8~16m, 수심은 0.5~1.2m, 단면은 연지의 밑 부분은 좁고 윗부분으로 갈수록 넓은 형태로 조성되었다. 연지바닥은 진흙이 쓰인 것으로 볼 때 흙이 주재료이며, 연지의 구조 및 공법은 토축으로 들여쌓은 지안이 전형으로 보이며, 물의 입수와 배수는 암거수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연지식생은 현재 많은 수종이 재식되어 있으나, 문헌과 현황을 비교해 보았을 때, 연지 내부는 연꽃, 연지 주변은 소나무 전나무 기타 화훼류 그리고 섬 안은 소나무가 재식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 궁궐 연지를 비교한 결과, 형태와 식생적인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장대석이라는 재료의 차이에 따라 그 구조 및 공법에도 차이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조선왕릉 연지의 특성을 분석하고 전형을 구명함으로써, 향후 조선왕릉 연지를 재현하는데 기본적 준거를 제공하였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신라 십이지신상 능묘의 특징과 순서에 대한 일고찰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and Order of the Zodiac Statues Tombs in the late Silla Dynasty)

  • 박형열;이지향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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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5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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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5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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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십이지신상이 표현된 능묘는 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하지만 내부 매장시설에 대한 조사나 출토유물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능묘는 근본적인 연구에 한계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에서는 능묘에 표현된 가시적인 특징을 토대로 십이지신상의 조각수법의 변화나 표현기법의 변화, 그리고 외부호석 및 난간석을 별개의 조건으로 다루어 연구를 진행해왔다. 외부호석 및 난간석을 별개의 조건으로 다룬 것은 다른 제속성들과 정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기존 연구의 제속성을 다시 분석하여 십이지신상에 표현된 기법의 변화가 능역 구성요소의 변화와 부합되는가를 확인하였다. 제속성의 특징은 첫째, 호석의 갑석과 지대석의 치석방법의 차이와 면석의 이격 칸수는 1단(무단) 치석에서 2단, 3단의 순으로 양의 상관관계를 보인다. 둘째, 십이지신상의 지물은 방망이, 창, 낫형지물, 봉, 삼지창 등으로 배열되며 연속성을 띤다. 또한 석상의 지물은 십이지신상에서 사라진 이후에 석인상에 표현된다. 셋째, 십이지신상은 조각수법에 따라 곡면각과 평면각으로 크게 구분되고, 세부적으로 두향과 복장은 화면비율에 따라 시간성을 갖는다. 넷째, 상석의 안상형태는 돌기의 수가 9개에서 5개, 3개 등으로 줄어들고, 보주형의 중앙돌기에서 돌기의 높이가 낮아져 편평한 형태로 변화한다. 이들 각 제속성들의 상관관계를 살피면 정합되는 특징을 보인다. 이를 토대로 신라 후기 십이지신상의 능묘는 5단계로 변화함을 확인하였다. 왕릉의 입지 또한 서악동고분군과 전선덕여왕릉처럼 초기에는 구릉 능선에서 원성왕릉 단계에는 산기슭으로, 나아가 전 헌덕왕릉에서는 평지 순으로의 변화를 보인다. 더불어 능묘의 상대순서에 대해 다시 한 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음을 인지하였다. 이 능묘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의 한계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기 때문이다. 결국, 전 진덕왕릉과 구정동방형분은 원성왕릉보다 이른 왕릉일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신라 후기 십이지신상의 능묘는 능과 석상, 배례공간, 신도, 능비가 조합된 완성형 능역구조를 갖추며 고려와 조선왕릉에 기본 모티브가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17~18C의 네덜란드 꽃정물화 조형적 특성 연구 -네덜란드 꽃정물화의 조형적 특성과 미술수요의 관계를 중심으로- (Dutch Flower Still Life from the 17th Century to the Early 18th Century : A formal characteristics of Dutch Flower still life and its Relationship demand for artworks)

  • 이옥근
    • 한국화예디자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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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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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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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본 논문은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까지의 네덜란드 꽃정물화를 대상으로 조형적 특징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꽃정물화의 조형적인 특성이 꽃정물화 수요의 관계 안에서 변화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네덜란드의 꽃정물화는 외국에서 수입된 희귀하고 값비싼 꽃들을 조화롭게 구성헌 그림으로 감상과 수집 취미를 동시에 충족할 할 수 있는 가치가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가장 일반적이고, 꽃정물화의 본질을 잘 나타내는 화병에 꽂힌 꽃다발 그림을 연구 대상으로 한정하였다. 17세기 초반의 네덜란드는 유럽 최고의 경제적 중심지로 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는 시민계층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미적 취향의 충족, 그리고 부를 과시하고자 미술작품을 구매하였다. 그중에 꽃정물화의 인기는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온 희귀한 꽃들에 대한 집중된 수요와 관계있었다. 사업에 성공한 부유한 시민계층의 취향은 꽃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실제와 똑같은 그림이 중요했다. 따라서 초기 꽃정물화는 희귀한 꽃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묘사하고, 공간감을 강조하여 실제 공간 속에 놓인 꽃처럼 보이게 하는 사실감이 뛰어났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네덜란드의 경제적 성장이 둔화되고, 부유한 시민계층이 금리 생활자인 도시 귀족으로 변화하면서 꽃정물화의 수요는 주관적인 감성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귀족적이면서도 비대칭적이고, 극적인 키아로스쿠로의 표현이 두드러졌다. 더 나아가 18세기에는 환영주의를 포기한 평면적인 표현방식으로 장식적인 효과를 강화하는 새로운 미를 추구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대미술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낭만주의는 네덜란드 시민문화의 미적 취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고분해능 X-선 분말 회절을 이용한 Cs-, Cd-, Pb-, Sr-으로 치환된 합성 모데나이트의 격자상수 비교 연구 (Comparative Crystal Chemistry of Exchanged by Cs-, Cd-, Pb-, and Sr-synthetic Mordenite Using High Resolution X-ray Powder Diffraction)

  • 이수진;이현승;성동훈;김표상;김현수;이용문
    • 광물과 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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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5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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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4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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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
  • 본 연구는 합성 모데나이트(Na6.6Al6.6Si41.4O96·20.4H2O, Na-MOR)를 이용한 다양한 중금속의 포획 연구를 하기 위한 기초 단계로, 고분해능 X-선 분말 회절을 이용하여 치환체의 격자상수 및 부피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험을 진행하였다. 열중량 분석법(Thermogravimetric analysis, TGA)으로 측정한 결과, 1가 양이온 치환체(Cs-MOR, Na-MOR)는 단위포 당 19.4, 20.4개의 물분자가 존재하였으며, 2가 양이온 치환체(Pb-MOR, Sr-MOR, Cd-MOR)는 단위포 당 21, 23.1, 23.2개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측정한 모든 물질은 사방정계에 속하는 Cmcm의 공간군을 가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치환 전 물질인 Na-MOR과 비교했을 때, 치환체의 (110)면과 (200)면의 회절강도가 명확하게 변화하였으나, 전체적인 피크의 위치는 거의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Na-MOR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았던 (220)면의 피크가 Pb-, Cd-, Sr-MOR에서 뚜렷하게 관찰되었다. 이를 통해서 양이온 치환에 따른 원자들의 분포 변화가 주로 ab-평면상에서 나타나지만, 격자상수의 변화는 미세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Whole profile fitting 방법을 사용하여 치환된 모데나이트의 미세한 격자상수의 변화를 관찰하였다. 치환체의 격자상수 및 격자부피의 변화는 치환된 양이온의 반경 및 전하수에 따라 서로 다른 경향성을 보였다. 1가 양이온의 경우, 이온반경이 증가할수록 a-축의 길이는 증가하지만, 반면에 b- 및 c-축의 길이는 감소하였다. 2가 양이온의 경우, 이온반경이 증가할수록 대체적으로 a-축의 길이가 감소하고, b- 및 c-축의 길이는 증가하였다. 격자부피는 1가 또는 2가 양이온 치환체들이 각각 독립된 경향성을 가지며, 이온반경에 따라 증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체 크기의 자동 식별을 위한 split beam 음향 변환기의 재발 (Development of a split beam transducer for measuring fish size distribution)

  • 이대재;신형일
    • 수산해양기술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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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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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6-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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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
  • 체장어군탐지기(fish sizing echo sounder) 의송.수파기로서 사용하기 위한 split beam 음향 변환기를 개발하기 위한 시도로서, Dolph Chebyshev배열 기법을 이용하여 36개의 압전 진동소자에 진폭 가중치를 부여한 평면배열 음향 변환기를 설계.제작하고, 이 변환기의 수중음향방사 특성에 대해 분석.고찰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split beam 음향 변환기의 4 개의 독립적인 진동자 블록에 대한 수중에서의 평균적인 공진 및 반공진 주파수는 각각 69.8 kHz. 83.0 kHz이었고, 이들 공진과 반공진 주파수에서의 임피던스는 49.2$\omaga$. 704.7$\omaga$이었다. 음향변환기의 4 개의 모든 진동자 블록 (sum beam)에 대한 수중에서의 공진 및 반공진 주파수는 각각 71.4 kHz, 82.1kHz이었고. 이들 공진과 반공진 주파수에서의 임피던스는 15.2$\omaga$, 17.3$\omaga$이었다. 2 split beam 음향 변환기의 4 개의 독립적인 진동자 블록에 대한 최대 송파전압감도(TVR)는 공통적으로 70.0 kHz에서 165.5 dB이었고, -3 dB 점에 대한 송신 주파수 대역폭은 10.0 kHz이었다. 또한. split beam 음향 변환기의 4 개의 조합된 진동자 블록에 대한 최대 수파감도(SRT)는 공통적으로 75.0 kHz에서 -177.5 dB이었고, -3 dB 점에 대한 수신 주파수 대역폭은 10.0 kHz이었다. 3.split beam 음향 변환기의 모든 진동자 블록에 대한 송신 지향성패턴은 원형이었고, -3 dB점에 대한 수평 및 수직방향에 대한 반감각(half beam angle)은 공통적으로 $9.0^\circ$이었다. 또한. 수평방향에 대한 제 1차 부엽 준위는 $22^\circ$$-26^\circ$에서 각각 -19.7 dB. -19.4 dB이었고. 수직방향에 대한 제1차 부엽 준위는 $22^\circ$$-26^\circ$에서 각각 -20.1 dB, -22.0 dB로서 설계 목표치 -20 dB과 매우 유사한 값을 나타내었다. 4.split beam 음향 변환기의 송파응답파형과 수파응답파형은 각각 송신 및 수신 공진주파수 부근인 70.0 kHz와 75.0 kHz에서 전기 입력펄스파형과 가장 유사한 특성을 나타내었다. 5. 본 연구에서 설계, 개발한 split beam 음향 변환기의 성능을 분석하기 위해 반사강도 보정을 위한 지향성손실과 물표의 위치각을 추정하기 위한 실험을 행한 결과 실험적으로 추정한 위치각은 실제적인 위치각과 잘 일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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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창건 구층목탑 단상 (A Study on the Architecture of the Original Nine-Story Wooden Pagoda at Hwangnyongsa Temple)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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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2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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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9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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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황룡사 구층목탑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에 의해 선덕여왕 13년(645)에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이후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군의 침략으로 사찰이 완전히 불타버리기 전까지 약 700년 동안 당시대인의 정신문화 속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이자 호국불교의 구심체로서 존재하였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문헌기록과 발굴조사 자료를 근거로 황룡사 창건 목탑에 대한 구조와 전체적인 형태에 대한 다양한 복원안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황룡사 목탑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현재 남아 있는 목탑지의 외형적인 형태와 단순한 목구조를 가정한 사각구층의 형태였다. 이는 관련 자료의 부족과 제한된 지식으로 인해 황룡사 창건 목탑의 기술적 계보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부족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고대 대형 불탑의 구조 체계에 대한 인식 정도에 따라 충분히 수정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2005년부터 진행된 <황룡사 복원 연구>를 통해 정리된 목탑지에 대한 재분석 자료를 근거로 동아시아 고대 불탑의 구조 체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 속에서 황룡사 창건 목탑의 계보와 구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함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황룡사 창건 목탑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걸쳐 적어도 두 번의 큰 중창을 겪는 동안 기단의 규모와 평면 형식 등이 변화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상부 구조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유구에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하는 구층목탑과 관련된 흔적은 현재 판축으로 조성된 기단토와 심초석 정도이며, 그외 초석과 기단 석재 등 대부분은 9세기 이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황룡사 창건 목탑의 실질적인 구조는 당시 동아시아 대형 불탑의 변화과정 속에서 이해하여야 하며, 기술적 계보는 북조의 영향을 받은 백제의 대형 불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에 표현된 9층 마애탑의 모습과 황룡사지 강당지에서 출토된 금동제 불탑 난간편 분석을 통하여 파악된 고고자료를 근거로 황룡사 창건 목탑의 이미지를 추정해본다면 외형상으로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지금까지 우리가 인식하고 있던 순수한 목구조를 한 사각구층탑과는 다른 형태로 파악되는데, 아마도 실심체를 갖춘 이원 구조의 팔각구층탑일 것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