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출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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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管子)』 4편(篇)에 나타나는 "심(心)"개념연구(槪念硏究)

  • 윤지원
    • 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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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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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9-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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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 "관자(管子)" 사편(四篇)은 전국 말 직하황노도가(稷下黃老道家)의 문헌으로 중국철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관자(管子)" 사편(四篇)은 문헌과 저자에 대한 기록이 불확실하고 제자백가의 사상을 포괄적으로 수용 복잡한 사상체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오랜시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40년대 학자들은 중국철학 사료를 다시 정리하였고 이때 곽말약(郭沫若)에 의해 "관자(管子)" 사편(四篇)의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1994년 "직하황노학파적비판(稷下黃老學派的批判)"과 "송견윤문유저고"에서 곽말약(郭沫若)이 "관자(管子)" 가운데 "심술(心術)" 상하(上下), "백심(白心)", "내업(內業)"의 사편(四篇)를 송견(宋?)과 윤문(尹文)의 저작이라고 주장한 이래 고문헌의 출토와 더불어 "관자(管子)" 사편(四篇)는 다시 학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관자(管子)" 사편(四篇)의 저작 시기는 전국말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사상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많은 학자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논리들로서 당시의 사회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던 시대였다.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교통의 발달로 많은 지식인은 제(齊)나라의 직하(稷下)에 모여 전대의 역사적, 철학적 유산을 기반으로 심(心)과 도(道)에 관한 논의를 벌였고, 그 통합적 저작물이 "관자(管子)" 사편(四篇)이다. 때문에 "관자(管子)" 사편(四篇)는 전국시대 제자학(諸子學)을 총정리하는 종합서의 성격을 가진다. 본 연구의 목적은 "관자(管子)" 사편(四篇)에 나타나는 심(心)개념의 연구를 통해 전국말 직하황노도가(稷下黃老道家)의 심(心)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는데 있다. 이를 위해 먼저, "관자(管子)" 사편(四篇)의 중심철학범주인 도(道), 기(氣), 정기(精氣)와 심(心)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고, 다음으로 "관자(管子)" 사편(四篇)에 보이는 심(心)의 개념분석을 통하여 구체적인 심(心)의 구조와 기능에 대하여 탐색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心)과 그 수양론(修養論)에 대하여 검토할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출토 "전신사리경"의 고찰 (A Study of Chonshin-sarikyung(sutra scroll) which was excavated at Palgakgucheungsuktab(Ortagonal Nine-storied stone Pagoda), Woljung-sa in Odae-san)

  • 송일기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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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3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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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1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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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 이 연구는 현재 오대산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는 $\boxDr$全身舍利經$\boxUl$에 대한 서지학적 고찰이다. 먼저 이 연구에서는 월정사의 연혁에 관한 문제를 문헌사료를 통해서 水多寺 장로 有緣이 13세기 중반 무렵에 改稱했던 것으로 새롭게 조명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月精寺 八角九層石塔의 건탑 및 全身舍利經의 조성 또한 유연의 중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고찰한 바, 이 중창시기에 석탑과 다라니경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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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초기 갑골(甲骨)의 특징과 그 변화양상 고찰 (A Study on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ing Patterns of Shell-and-Bone Inscriptions during Early Western Zhou)

  • 박재복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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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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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7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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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
  • 기존의 갑골연구는 상후기 은허갑골문에 편중되어 갑골실물에 대한 연구나 서주시기 갑골문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서주초기 전형적인 갑골의 정치(整治)방식, 찬(鑽) 착(鑿) 작(灼)의 형태와 배열, 갑골문의 특징과 서사방식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형성배경과 변화양상에 대해 전래문헌과 출토된 갑골실물을 중심으로 심도있게 고찰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내용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첫째, "시경(詩經)", "상서(尙書)", "일주서(逸周書)" 등의 전래문헌에서 선주(先周)시기 고공단부(古公亶父)가 거북점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당시의 복갑(卜甲)은 아직 출토되지 않았다. 점복내용은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시기에 집중되고 복(卜) 명(命) 점(占) 서(筮) 길(吉) 흉(凶) 구(龜) 등 점복관련 단어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주원갑골문도 절대다수가 이 시기의 기사각사(記事刻辭)이며 주공(周公)과 관련된 내용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둘째, 서주초기 중심지역에서는 복갑(卜甲)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여 복골(卜骨)의 비중이 낮지만 주변지역에서는 복갑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복골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정치(整治)방식은 복갑과 복골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상중기 조연장(曹演莊)유형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상(商)후기 섬서지역의 북촌(北村)유형과 선주(先周)문화의 점복방식을 직접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서주초기 갑골은 대부분 찬(鑽) 착(鑿) 작(灼)을 겸용하였는데, 그 형태와 배열에서 상후기 은허갑골과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은허갑골은 모두 원형 찬(鑽)과 대추씨 모양의 착(鑿)을 한 세트로 하고 있지만 서주초기 복갑은 모두 방형 찬(鑽)과 장방형 착(鑿)을 한 세트로 설치하였고, 복골은 모두 원형 찬(鑽)과 세로의 가느다란 착(鑿)이 한 세트로 고양이 눈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찬(鑽) 착(鑿) 작(灼)의 배열은 복갑에서는 천리로(千里路)를 경계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어 상후기 은허 복갑과 대동소이하지만 복골에서는 하나의 복골에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어 상중기 조연장(曹演莊)유형의 특징을 띠고 있다. 넷째, 상주(商周)시기 갑골문의 서사방식은 갑골 정면의 복조(卜兆)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복조(卜兆)는 갑골 뒷면의 찬(鑽) 착(鑿) 작(灼)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갑골을 배치하는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고, 각 부위에 따라 일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상후기 은허갑골문은 복갑을 세로로 배치하여 천리로(千里路)를 경계로 좌우대정(左右對貞)을 이루고, 복골은 좌우견갑골을 한 세트로 하여 좌우대칭을 이룬다. 선주(先周)시기의 갑골문에서도 이러한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서주초기에 이르면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서주초기 복갑은 가로로 배치하여 갑수(甲首)가 옆을 향하게 하며, 복골의 중간부분은 대부분 가로로 배치하고 병부(柄部)와 선부(扇部)는 골구(骨臼)를 아래로 향하게 배치한 다음 모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쓰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주례(周禮)"에 보이는 점복과정 중에서 '시고(視高)'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서주초기 예악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점복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서주초기 갑골은 상후기 은허갑골의 선진적인 점복방식을 수용함은 물론 상중후기 섬서지역에서 유행하던 점복방식을 기초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 점복방식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 안사국(安邪國) (A Study of Dohang-Ri wooden coffin and Anya-Kuk)

  • 이주헌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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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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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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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
  •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성격과 성립시기(成立時期)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 상황이나 모두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헌자료의 기록과 고고자료상에서 서로 공통적으로 관련지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며, 연(燕)의 철기문화(鐵器文化)를 갖춘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성립은 근본적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뿐 만 아니라 중 남부지역에 이르기까지 큰 파장을 미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철기문화(鐵器文化)의 도입단계에는 철기(鐵器)의 실용적이고 희소적인 가치에 의해서 매장유구(埋葬遺構)에는 쉽게 부장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기원전 2세기 전반경부터는 일부 한정된 철기(鐵器)만이 매장유구(埋葬遺構)에 부장되는 경향이다. 따라서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성립시기는 철기의 도입과 보편적인 활용으로 보아야하며 목관(木棺)을 사용한 서북한지방(西北韓地方)의 토광묘문화(土壙墓文化)를 포함하여 중남부지역(中南部地域)에 있어서 목관(木棺)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 단계, 즉 기원전 3세기전반대의 어느 시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한편 함안(咸安) 도항리고분군(道項里古墳群)에서 확인된 목관묘(木棺墓)는 목관(木棺)의 형태에 있어서 판재조립식목관(板材組立式木棺)과 통나무목관(木棺)의 2종류가 확인되며, 판재목관(板材木棺)의 사용 비율이 3배 이상 높은 편이다. 출토유물(出土遺物)은 비교적 단순한 조합상(組合相)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영남지역(嶺南地域)을 중심으로 한 목관묘유적(木棺墓遺蹟)에서도 모두 확인되고 있는 특징이므로 전반적으로 변(弁) 진한사회(辰韓社會)의 매장문화는 동일한 흐름 속에서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통나무로 제작한 목관(木棺)은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므로 한국식동검문화(韓國式銅劍文化)와 함께 목관(木棺)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며,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과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에서만 이러한 목관(木棺)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변한사회내(弁韓社會內)에서 양지역간(兩地域間)의 유기적인 관계를 살피는데 있어서 주목되어야 한다.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에서 출토되고 있는 철기류((鐵器類)도 거의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의 그것들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도항리(道項里) 67호묘(號墓) 출토 주조철부(鑄造鐵斧)는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주조철부(鑄造鐵斧)와 같은 지금(地金)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소형철부(小形鐵斧)의 구성비율이 다른 철기류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것과 기경구(起耕具)로 이용되는 철제따비의 출토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단계에는 목제농기구(木製農器具)의 제작과 사용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에 비해 절대적으로 빈약한 철기유물은 안사국(安邪國)의 내적(內的)인 한계(限界)를 보여주는 것이며 소국(小國) 수장(首長)의 신분적(身分的)인 상징(象徵)으로서 사용하였던 동경(銅鏡)과 의기류(儀器類)의 출토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항리목관묘(道項里木棺墓)를 조영한 집단(集團)은 당시 대외문화교류(對外文化交流)의 중심적인 선진지역(先進地域)에 비해서 사회문화적(社會文化的)인 변동(變動)이 덜한 주변 지역적인 성향이 강한 집단(集團)일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후 2세기 후반경 영남지역의 목관묘(木棺墓)는 목곽묘단계(木槨墓段階)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도항리(道項里)와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에서도 목관묘(木棺墓)는 2세기대를 종점(終點)으로 사라진다. 고고자료상으로도 3세기에서 4세기대에 해당되는 적극적인 유구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3세기 전반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일어났던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과 관련지어 합리적으로 추론하고자 한다. 즉 변한사회내(弁韓社會內)에서 도항리(道項里)와 다호리유적(茶戶里遺蹟)의 양집단(兩集團)은 낙동강(洛東江)과 남강수계(南江水系)를 장악한 교역(交易)의 중심지(中心地)로서 서로 경제적(經濟的) 정치적(政治的)인 공조체제(共助體制)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보이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대상국은 가나(加羅)와 아라국(砑羅國)이며, 가나(加羅)는 다호리집단(茶戶里集團)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시기도 기원 3세기 전반대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전반대 이후의 사건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양지역(兩地域)에서 뚜렷한 목곽묘(木槨墓)의 축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도 두 집단(集團)이 전쟁(戰爭)의 피해를 직접 받은 당사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소주(蘇州) 서광사탑(瑞光寺塔) 출토(出土) 북송초기(北宋初期)의 불교문헌(佛敎文獻) 연구(硏究) (A Study on the Early North Sung Period Buddhist Literatures Found in the Pagoda of Suzhou Ruiguangsi)

  • 송일기
    •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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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5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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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8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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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
  • 이 논문은 지난 1978년 서광탑의 수리를 위한 조사과정에서 3층 탑심부의 천궁에서 다량의 불교문화재를 수습하였다. 당시 수습한 문화재에는 당대에서 북송초기에 조성된 귀중한 불교문헌 123점이 포함되어 있다. 소주 서광사는 적조(赤鳥) 4(241)년에 오나라 첫 번째 왕이었던 손권(孫權)이 강거국에서 온 승려 성강(性康)을 맞이하기 위해서 세워진 사찰이며, 창건 당시에는 보제선원(普濟禪院)으로 부르다가 북송 초기 원희 연간에 와서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지금의 서광사(瑞光寺)로 개명하였다. 서광탑은 서광사가 완공된 직후인 적조(赤鳥) 10(247)년에 손권이 모친의 극락왕생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사찰 내에 13층탑을 세웠으며,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이 탑이 크게 파손되어 천희(天禧) 1 (1017)년에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다보탑(多寶塔)이라 하였다. 서광탑에서 출토된 불교문헌은 크게 다라니류 3건 107점과 전적류 5종 16권 등 모두 123점으로 파악되었다. 특히 전적류 가운데 법화경사경은 당대에 감지에 금자로 조성된 것으로 전 7권이 비교적 완전한 상태이며, 동아시아 국가에 현존하는 감지금자사경 가운데 최선본으로 평가할 만하다. 또한 북송초기에 간행된 목판본이 6권이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동안 일본학자 나가자와(長澤)가 이와 동일본인 중촌본(中村本)을 초당본(初唐本)으로 잘 못 소개한 이후 모든 개설서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이 연구를 통해 오류를 수정할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의미가 있다.

양구 방산 칠전리 출토 백자의 성분분석을 통한 원료특성 연구 (Study of Material Characteristics by a Componential Analysis on the Whiteware from the Kiln of Chiljeon-ri, Bangsan-myeon, Yanggu-gun)

  • 안송이;황현성
    • 보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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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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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1-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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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본 연구에서는 양구 방산 칠전리 1, 2호 가마터에서 출토된 백자의 특성을 성분분석을 통하여 양구지역 백자 및 원료와 분원 백자의 연관성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제작시기에 따라 칠전리 1, 2호 백자의 유형을 분류하였으며, 칠전리 백자는 태토 조성 및 유약 성분에서 이 유형 분류와 관련하여 구분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미량원소 분석 결과, 칠전리 백자는 지질학적인 특성이 동일한 원료로 제작되었으며 제작시기별로 원료의 정제 및 조합에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소성온도는 $1,100{\sim}1,200^{\circ}C$ 정도로 추정되어 칠전리 백자의 소성온도가 일반 백자에 비해 낮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화 안료의 성분분석에서는 전이금속원소나 희토류원소가 소량 함유된 이질적인 청화 안료의 특성을 보였다. 한편 문헌 기록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조선 후기 분원리 요지 백자와 양구지역 원료 사이에 연관성이 보이나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분원의 다양한 원료 사용 및 조합 때문으로 여겨진다.

상박초간 『주역』 감괘(欽卦) 연구 (A Study on Gan hexagram 感卦 in the Shanghai Museum Zhou Yi manuscript)

  • 원용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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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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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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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이 논문은 상박초간 "주역" 감괘(欽卦)를 중심으로 중국고대 점복문화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점서였던 "주역"의 경문을 유가가 어떻게 유가 윤리로 만들어갔는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상박초간 "주역" 감괘는 현행본의 함괘(咸卦)에 해당하며 '감(感)'의 뜻으로, 괘 전체의 주제는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과 결혼이다. 청화간(淸華簡) "서법(筮法)" 등 고대의 점술에 남녀 간의 결혼을 점친 예는 상당히 많은데 이런 자료들도 감괘가 단순히 사랑과 결혼에 대한 점술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상박초간 "주역"과 마왕퇴백서 "주역"의 감괘 효사 및 현행본 함괘 효사를 비교분석해보면 상박초간본 ${\rightarrow}$ 마왕퇴본 ${\rightarrow}$ 현행본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주역" 텍스트가 많은 변화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한편 "순자" "대략(大略)"편, 현행본 "주역" "단전(彖傳)"은 함괘의 주제를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에서 추상화하여 부부의 도, 나아가 음양 '이기(二氣)'의 철학으로 확대한다. 이러한 확대는 결국 자연철학 방면으로는 세계, 우주를 구성하는 '이기'의 감응에 의한 만물생성론을, 인간사회 방면으로는 성인의 감화를 통한 천하화평을 주장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서괘전"도 함괘를 '부부의 도리'로 보고 이에 기초하여 부자, 군신, 상하, 예의로까지 확대시킨다. "서괘전"이 함괘를 서술할 때 '남녀'가 아닌 '하늘과 땅'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단전"의 논의를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주적 질서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예의로 귀결을 맺는 것은 철저한 유가적 사유로, 따라서 "서괘전"이 만들어진 시점에서 "주역"의 유교경전화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상해박초간(上海博楚簡) 『주역(周易)』의 부호와 그 의미 (A study on the special signs In Shanghaibochujian-ZhouYi)

  • 원용준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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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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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6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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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상해박초간 "주역"에는 지금까지의 "주역" 텍스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적색과 흑색의 특수부호가 존재한다. 상해박초간 주역을 처음 정리한 복모좌(?茅左)는 이 부호를 " ▧, ?, ■,?,?, ⊏"의 6종류로 나누고 음양사상을 도입하여 설명한다. 이상신(李尙信)은 이 부호를 7종으로 나눈 후 이 부호를 통해 상해박초간 "주역"의 괘서(卦序)는 현행본 "주역"의 괘서와 완전히 일치하며 역시 음양사상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하함이(夏含夷)(Edward L. Shaughnessy)는 죽간의 물질적 상태를 분석하여 상해박초간 "주역"의 괘서와 현행본 "주역"의 괘서는 동일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근등호지(近藤浩之)(Kondo Hiroyuki)는 부호를 9종류로 나누어서 상해박초간의 괘서를 도출한 후, 상해박초간본의 괘서는 괘획 단위로 고안되었기 때문에 6효(爻)로 이루어지는 대성괘(大成卦)를 문제로 삼고 있고, 3효(爻)로 이루어지는 소성괘(小成卦)의 조합법은 고려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견해에는 모두 장단점이 있지만 아래의 두 가지 점은 공통된다. 첫째로 상해박초간 "주역"의 괘의 배열은 현행본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 둘째로 형식대립적 상반괘는 같은 부호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 두 점으로부터 상해박초간 "주역"이 8괘 시스템을 기초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상해박초간 "주역"의 부호 체계는 8괘(卦) 시스템이 아닌 64괘(卦)(64 trigrams) 시스템을 상정할 때 가능한데 이는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통설, 즉 8괘가 64괘보다 먼저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해 재검토를 요구한다. 출토자료와 문헌자료를 통해 8괘와 64괘의 성립 관계를 살펴보면 8괘 체계의 "주역"이 선행하여 존재하였고, 후에 64괘 체계의 "주역"이 등장하였다고 보기 힘들며 "주역"은 아마도 성립초기부터 64괘 체계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일제강점기 장무이묘의 발견과 조사 (The Discovery and Exploration of the Tomb of Jang Mui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 정인성
    • 박물관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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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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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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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일제강점기에 발견되어 조사된 장무이묘는 문헌 속의 대방군을 황해도 사리원으로 비정하는 결정적인 고고자료가 되었다. 무덤 축조에 사용된 전돌 중에 대방태수라는 관직명이 찍힌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무이묘의 발견은 1909년에 발견된 대동강변 벽돌무덤군을 낙랑군과 관련된 유적으로 확정 짓는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이래로 대수(帶水)와 대방군의 위치를 둘러싼 논란이 고고학적으로 정리된 일대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고대사와 고고학 연구에서 이토록 중요한 유구임에도 불구하고 그 발견 경위와 조사 내용이 제대로 검토되었다고 할 수 없다. 1912년 세키노의 발굴에서 출토된 문자 전돌과 기와류는 현재 도쿄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다수의 장무이묘 출토 전돌이 소장되어 있는데 개별 자료의 조사 주체는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노모리 등의 조사에서 수집된 자료에는 이를 명시한 주기가 있음을 확인한 정도이다. 이 외에도 도쿄국립박물관과 일본의 몇몇 대학에도 관련 문자 전돌이 반출되어 있다. 이들 자료를 망라한 종합 보고서가 작성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장무이묘는 무덤의 구조에 대한 재해석(정인성 2010)을 바탕으로 그 시기를 4세기 중엽인 348년으로 보는 설이 우세해 졌다. 대방군 시기의 무덤이 아닌 것이다. 대방군과 군치의 위치를 둘러싸고 가장 유력한 고고학 증거가 사라진 셈이다. 관련하여 대방군과 군치문제 등을 둘러싼 논의의 활성화를 기대한다.

익산 왕궁리 백제궁원에서 출토된 괴석에 관한 연구 (Research on Odd-Shaped Stones at Baekje's Palace Backyard in Wanggung-ri, Iksan)

  • 노재현;신상섭;박율진;김화옥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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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8권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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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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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
  • 본 연구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괴석의 쓰임새, 형태, 규모 및 재질 그리고 산출지 등을 분석 고찰하여 백제 궁궐 후원의 성격과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주요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익산 왕궁리 궁궐 후원에 활용된 괴석은 후원내 입수구 폭포석조를 위한 첩석(疊石)과 돌 자체의 아름다움과 기괴함을 완상하기 위한 치석(置石)의 2가지 쓰임새로 분류된다. 이 때 폭포석조에 활용된 괴석은 여러 형태와 재질의 돌을 혼합 배치시켜 축경형의 산수경관을 입체적으로 연출하고자 한 것인 반면, 치석으로 활용된 괴석은 돌 자체의 아름다움과 형태미를 감상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치석으로 활용된 총 26개 괴석의 크기는 대석 4개, 중석 4개, 소석 18개로 분류되었으며, 폭포석조에 이용된 총 24개의 괴석은 모두 소석으로 분류되었다. 이 두 부류의 괴석은 대부분 한 시야에 들어오고 친근감 있는 인간척도에 부합되는 규모였다. 치석으로 활용된 괴석의 재질은 석회암이 대부분이며, 그밖에 대리암, 석영, 녹색암, 점판암, 천매암 등의 변성암 계통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괴석의 특징으로는 무늬가 미려할 뿐 아니라 자연의 모습을 닮은 산형석과 거북, 자라, 돼지, 곰, 코끼리 등 동물 모양에 가까운 형상석이 대부분이었으며, 치석으로 이용된 괴석 중 일부는 특정한 형상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가공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괴석의 이용실태와 성격 등을 보아 왕궁리 궁궐 후원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는 '괴석 정원'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편, 왕궁리 출토 괴석의 출산지에 대한 문헌조사 및 관계자 인터뷰와 탐문조사 그리고 추정 채석지에 대한 현장 관찰 결과, 주산지는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천호산과 왕궁면 도순리 시대산 등으로 추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