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요약/키워드: 청대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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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문인(文人)과 교류(交流)한 청조(淸朝) 학자(學者)들의 문자학(文字學) 연구(硏究)에 관한 소고(小考) (Study on the Chinese graphonomy's exchanges of Qing Dynasty and Joseon Dynasty)

  • 서한용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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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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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529-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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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Zu Wen-Zao(朱文藻), Li Tiao-Yuan(李調元), Hong Liang-Ji(洪亮吉), Peng Yuan-Rui(彭元瑞), Qian Dong-Huan(錢東垣), Sun Xing-Yan(孫星衍), Ruan Yuan(阮元), Chen Zhan(陳?), Wu Shi-Fen(嗚式芬), Feng Gui-Fen(馮桂芬), He Shao-Ji(何紹基), Fan Zu-Yin(潘祖蔭) made the contributions to the theoretical construction to the science of Chinese characters in their books "Shuwenxizhuankao(說文繫傳考異)", "Liushufenhao(六書分毫)", "Liushuzhuanzhulu(六書轉注錄)", "Xiqinggujian(西淸古鑒)", "Xiaoeryajiaozheng(小爾雅校證)", "Jiujingzhengsuzikao(九經正俗字考)", "Jiguzhaizhongdingyiqikuanshi(積古齋鐘鼎?器款識)", "Shuwenshengxi(說文聲繫)", "Shuwenjiuzizhengyi(說文解字正義)", "Jungulu(?古錄)", "Shuwenjiuzizhukaozheng (說文解字段注考正)", "Shuowenduanzhubozheng(說文段注駁正)", "Haidongjinshilu(海東金石錄)". They analyzed the rules behind character construction, and tried to find out the nature of Chinese characters, the relationship between Chinese characters, the evolutionary laws of Chinese characters, the characteristic of ancient Chinese characters etc.

청대(淸代) 설문학자(說文學者)의 금문(金文) 연구 - 금문(金文)에 대한 단옥재(段玉裁)의 학술적 관점을 위주로 (A Study of Bronze Epigraphy of ShuoWen's Scholar in the Qing Dynasty)

  • 오제중
    • 비교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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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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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17-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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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The Chinese Bronze Epigraphy is based on the study of the Ancient Bronze, which is excavated from the ground and it is also related to Archeology and Historical Science as well. From the Han dynasty, to the Song dynasty and to the Qing dynasty. Chinese Graphonomy had a splendid development. Including ShuoWenJieZi in the Chinese Graphonomy and the study of Bronze got a shining improvement. ShuoWenJieZi as a key for deciphering ancient Chinese characters. With constant reference to the ShuoWenJieZi, Qing scholars pioneered the earliest large scale interpretations of bronze inscriptions. Several Qing Dynasty ShuoWen scholars such as a WangYun and DuanYuCai have made research in the Bronze Epigraphy. Through this research, we can figure out whether there is any relevance between the traditional study of Epigraphy and the Qing dynasty's.

이불(李?)의 주육관(朱陸觀) 연구 - 『주자만년전론』을 중심으로 - (A Study of Li Fu's Appreciation of Zhu Xi and Lu Jiuyuan's Philosophy - Centering around Zhuziwannianquanlun -)

  • 임홍태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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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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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59-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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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 주희와 육구연 간의 논쟁은 송명이학의 전개 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학술논쟁이자 주희의 학술 생애 중 가장 격렬했던 논쟁 가운데 하나였다. 양자 간의 사상적인 이견(異見)으로 인해 전개된 논쟁은 그들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다만 학문 방법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고 한다면, 그들 사후 이로 말미암아 전개된 것은 양대 학술 유파 간의 분쟁이라 할 수 있다. 송 원 명대를 거쳐 학술계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주륙이동논쟁은 주희 사상의 변화를 고증하는 문제에 있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육자의 사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주자의 사상 역시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청대에 이르러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화되었고, 각각의 주장을 대표하는 인물들과 문장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청대의 육왕학자인 이불은 "주자만년전론"을 통해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주자와 육구연의 사상을 비교 검토하고 있다. "주자만년전론"이 비록 육왕학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쓰여진 면이 없지 않지만, 주륙 사상에 대한 비교 작업이 객관적인 고증학적 작업을 통해서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불의 주륙관은 육왕학을 기본 토대로 하여 주자학을 수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주륙 사상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불은 육왕학에 대해서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육왕학에 대해 선별 취사하여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

옹방강(翁方綱)의 시경학(詩經學) - '한송겸채(漢宋兼采)'의 경향을 중심으로 - (Weng fang-gang(翁方綱)'s Studies on the Book of Odes - Focused on Adoption of research methods of hanxue(漢學) and songxue(宋學))

  • 양원석
    • 동양고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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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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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85-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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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 본 논문은 청대(淸代) 건가(乾嘉) 시기의 학자 옹방강(翁方綱)의 경학(經學) 가운데, 특히 시경학(詩經學)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 주요 내용과 특징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옹방강(翁方綱)은 한학(漢學)과 송학(宋學) 연구 방법의 장점을 동시에 채용한 경학 연구, 즉 '한송겸채(漢宋兼采)'의 경학 연구 방법론을 주장한 학자였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한송겸채(漢宋兼采)'의 경학 연구 방법론이 실제 그의 경학 연구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고찰하기 위해 그의 시경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연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옹방강(翁方綱)은 "시경(詩經)" 연구에 있어서, 시서(詩序)를 존신하고 "모전(毛傳)"의 해석을 신뢰하였으며 고훈(古訓)을 중시하였고 의경(疑經)의 풍조를 반대하는 등 한학적(漢學的) 경향을 보이면서도, 또한 정현(鄭玄)과 공영달(孔穎達)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주희(朱熹)의 "시집전(詩集傳)"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등 송학적(宋學的) 경향도 보이고 있었다. 즉 옹방강(翁方綱)은 "시경" 연구에 있어서 한학과 송학의 연구 방법을 적절히 채택하여 이를 운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모유지의 예서 해석 및 참고 의의 (Analysis and Reference Significance of Mo Youzhi's Letter)

  • 장국신
    • 문화기술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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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0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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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6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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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
  • 莫友芝(모유지)(1811-1871)는 청나라 말기의 저명한 학자, 시인, 서예가이다. 모유지는 일생 동안 경력이 풍부하고 시야가 넓으며 특히 증국 번 막부에 들어간 10년 동안 많은 정치, 문화 엘리트를 사귀었다. 모유지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학문에 열중했으며 당시 각계각층의 유명인들과 교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다. 청대에는 금석학이 전례 없이 번영했고, 서예에서는 비학(碑學)이 서단의 절대적인 주도가 되었으며, 전예서는 진한(汉漢) 이후 처음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시대에 순응한 모유지는 학문에 몰두하고 한묵을 돌보며 자신만의 서예의 길을 걷는것이 사실이다. 그의 글씨 중 전서, 예서, 해서, 행, 특히 전서 예서가 정교하다. 본 고는 예서를 바탕으로 전형적인 풍격과 비정형 형태을 각각 설명하고 예서와 다른 서체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논의한다. 마지막으로 당대 예서 창작에 대한 예서의 참고 의의를 간략하게 요약하였다. 논술 과정에서 서예를 근거로 관련 문헌을 탐독하고 모유지의 인생 경험을 결합하여 객관적이게 진술하였다.

『참동계』와 태극(태일)-음양-오행 체계 (Cantongqi and Its Relation to the System of Taegeuk (Taeil), Yin-yang, and the Five Movements)

  • 이봉호
    • 대순사상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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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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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263-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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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
  • 지금까지는 주돈이의 <태극도>가 『주역참동계』에서 연원한다는 학설이 정설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최근 몇몇 학자들은 기존의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논쟁이 일었다. 이들은 <태극도>의 『주역참동계』 연원설에서 청대 학자들이 근거로 사용한 책들과 도상이 주돈이 이후의 것이거나, <태극도>에 기초해서 후대에 그려진 것임을 주장한다. 반면에 최근 학자들의 주장에서 <태극도>의 『주역참동계』 연원설을 최초로 제기한 남송 시대의 주진(朱震)과 양갑(楊甲)의 학설은 해명하지 못하였다. 이들 남송 시대 학자들은 주돈이와 주희 사이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이러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보았다. 주돈이의 <태극도>는 태극-음양-오행의 체계를 골자로 한다. 따라서 이 체계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주역참동계』가 직접 연관이 있음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태극-음양-오행의 체계 형성 과정은 한대의 종교적 사상적 영향에 의한 것이다. 한무제의 태일신(太一神) 신학체계에서 태일-음양-오행의 체계가 신학적으로 정립된다. 동중서에 의해 유학의 육예(六藝) 해석에 음양오행이 도입되며, 이는 한대 역학자들이 『주역』 해석에 오행을 개입하게 하는 사상적 흐름을 형성한다. 그러나 한대 역학자들은 음양재 이설을 중심으로 하였기에 태일-음양-오행의 체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한시기에 쓰여진 『주역참동계』는 한 대 역학자들이 『주역』을 해석한 다양한 『역위(易緯)』 이론과 연단 이론을 결합하면서, 태일-음양-오행의 체계를 사상적으로 형성한다. 이때 『주역참동계』는 '감리위역설(坎離爲易說)'을 중심으로 한 역학 이론을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주역참동계』와 그 주석들에는 <태극도>와 같은 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리위역설'을 중심으로 한 태일-음양-오행의 체계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태극도>를 구성하는 도상의 부분들을 그려낼 수 있는 내용은 존재한다. 이 체계에서 '태극'이 아니라 '태일'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태일'을 '태극'으로 해석할 사상적 이론은 등장하고 있었다. 한대 역학자들은 역에 원기(元氣) 개념을 적용하였고, 공영달에 의해 태극이 '원기'이자 '태일(太一)'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주역참동계』가 <태극도>와 같은 도상을 담고 있지 않아도 태일(태극)-음양-오행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태극도> 도상의 부분들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음을 해명하였다.

중국 역대 북경팔경(北京八景)의 경관인식 변화에 대한 고찰 (A Study on the Changes of Landscape Perception for 'Bejing-Palgyeong(北京八景)' in China)

  • 권지영;김성균
    • 한국전통조경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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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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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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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 본 연구는 북경팔경과 관련된 시문과 서화를 비롯하여 고지도·고문헌 등을 분석하여 북경팔경의 시대별 변천과정과 경관인식 변화, 북경팔경의 물리적 경관요소 및 구조분석과 국가경영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북경팔경의 장소화과정을 고찰하였다. 북경팔경의 경점은 도성 밖과 안으로 각각 네 곳씩 분포하고 있으며, 도성 밖은 모두 황제의 휴식처이자 북경의 산수경관의 중심인 서산 지역에 집중되었고, 도성 안의 경점은 궁궐의 황제원림에 두 곳, 성곽 주변의 마을 두 곳에 분포하고 있다. 즉 북경팔경은 초기 조성될 때부터 황실, 황제, 황궁과 밀접하게 관련된 장소로 선정하였으며, 금 이후 원·명·청대를 거치면서 황제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이 국가경영에 활용함으로써 점점 도성팔경으로서 성격이 짙어졌다. 도성 내 두 곳은 신선과 황제를 동격화하여 칭송하였으며, 도성 밖 두 곳은 도성주변의 마을 경관의 모습을 담고 있으면서 통치를 받는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팔경의 대부분 조망지역은 황궁과 황제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북경팔경의 물리적 경관을 요소별로 살펴보면, 수도방비·인재선발·농사에 대한 내용을 담은 국가경영과 황제 칭송, 북경 민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건륭제는 중국의 팔경(경관) 문화를 소상팔경(북송)→서호팔경(남송원말)→연경팔경(금대)→북경팔경(명대)→건륭제의 연산팔경(청대)으로 역사적 맥락을 계승하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석과 원림 조성을 통해 북경팔경의 장소화하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상한(傷寒) 의학사(醫學史)에 관(關)한 연구(硏究) (III) - 상한학파(傷寒學派)의 형성과 발전시기(명${\sim}$청)(明${\sim}$淸)를 중심으로 -

  • 김기욱;박현국;정성채
    •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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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3권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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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146-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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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
  • 통과이상적연구(通過以上的硏究), 장상한학술적성숙기(將傷寒學術的成熟期), 칙지명대여청대관여상한의학사적내용정리(則至明代與淸代關與傷寒醫學史的內容整理) 여하(如下). 1. 명청시대적시대배경사상한학적내용갱풍부(明淸時代的時代背景使傷寒學的內容更豊富), 촉진상한학술적발전(促進傷寒學術的發展) 병차출현료흔다관여상한적저작(幷且出現了?多關與傷寒的著作), 단실제상야출현료상한론내용적중복여지론술일반부분(但實際上也出現了傷寒論內容的重複與只論述一般部分), 혹저자립안조잡적처방지폐단(或著者立案粗雜的處方之弊端). 차기우출현각종상한학파적리유(此期又出現各種傷寒學派的理由), 시인위당시류행적사조(是因爲當時流行的思潮), 칙정주리학적영향여명대문단부고(則程朱理學的影響與明代文壇復古), 의고적추향(擬古的趨向), 환유금원시대적백가쟁오등(還有金元時代的百家爭嗚等), 성료형성상한학파적기초(成了形成傷寒學派的基礎). 2. 위료불실거상한론적본래의식(爲了不失去傷寒論的本來意識), 주장정리화고정원문회부왕숙화이전모양적착간중정파시왕안도기료개단(主張整理和考訂原文恢復王叔和以前模樣的錯簡重訂派是王安道起了開端), 방유집확대료기의식(方有執擴大了其意識). 유창여침명종시대표저학파학자(喩昌與沈明宗是代表這學派學者), 장로(張?) 정응모(程應?) 주양준(周揚俊) 오겸등수료저학설(吳謙等隨了這學說). 3. 주장(主張)'존왕(尊王)(숙화(叔和))찬성(贊成)(무기(无己))'적유호구론파(的維護舊論派), 주장료불능수변개상한론삼음삼양편적배렬여순서(主張了不能隨變改傷寒論三陰三陽篇的排列與順序), 문자(文字), 구문(句文), 문장(文章), 고세식(高世?), 진념조등인(陳念祖等人). 4. 주장상한론적정수재어변증론치(主張傷寒論的精髓在於辨證論治), 선우운용칙능득상한핵심리론적학파시변증론치학파(善于運用則能得傷寒核心理論的學派是辨證論治學派). 저학파분사개계통(這學派分四?系統), 이처방수집증상적의가유허굉(以處方收集證狀的醫家有許宏), 가금(柯琴), 서대춘(徐大椿); 이치법수집증상적의가유오인구(以治法收集證狀的醫家有吳人駒), 우이(尤怡); 이분유륙경찰증상적의가유진념조(以分有六經察證狀的醫家有陳念祖), 포성(包誠); 이증상분류증후적의가유류순(以證狀分類證候的醫家有劉純), 왕긍당(王肯堂), 진지정(秦之楨), 침금오등인(沈金鰲等人). 5. 회통파유량종류형(?通派有兩種類型), 일시수통상한여온병적학파(一是誰通傷寒與溫病的學派), 간칭회통파(簡稱?通派), 대표의가유도화(代表醫家有陶華), 오정(吳貞), 유근초등인(兪根初等人), 령일개유회통중의여서의적립장상해석상한적의가당종해(?一?有?通中醫與西醫的立場上解釋傷寒的醫家唐宗海). 6. 경전학파시이상한론위보귀적경전래인식(經典學派是以傷寒論爲保貴的經典來認識), 병차지유숭상차경여사상적학파(幷且持有崇尙此經與思想的學派), 차리분량개편우원문적고증래연구적경전고증파(此里分兩?偏于原文的考證來硏究的經典考證派), 화인위지유상한론(和認爲只有傷寒論), 재능총괄치료외감병(才能總括治療外感病), 부정온병학설병배척적경전림상파(否定溫病學說幷排斥的經典臨床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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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측면 지붕부 결구의 구성방식에 관한 재고(再考) - 중국 원대(元代) 이전 목조건축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Hipped-and-Gable-Roof Framework of Muryangsujeon of Buseoksa Temple)

  • 차주환
    •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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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9권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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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7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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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 본 연구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 구조에 관한 연구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일제시대에 해체 보수한 기록이 있으며, 팔작지붕의 측면 지붕부 결구 구조기법과 추녀, 귀서까래 등의 결합 수법들이 정연한 형태로 결구되지 않고, 조선시대 팔작지붕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와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원형이 아닌 것으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그 편년에 대해 다양한 의견(13세기, 12세기 건축)들이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왔었다. 본 연구는 동아시아 목조건축 구조틀이라는 관점에 근거하여, 중국 당 송대 팔작지붕에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 기법과 유사한 건축을 대상으로 평면비 및 어칸과 퇴칸의 비례를 상호 비교하여 살펴 본 결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는 팔작지붕에서도 볼 수 있는 기법으로 판단하였다.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측면 서까래가 내부 보(량(梁))에 직접 접하는 기법은 중국 당 송대 팔작지붕 건축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는 수법으로, 중국의 팔작지붕은 당대(唐代) 이후에 산화(山花, 합각) 양가(梁架)를 구성하여 팔작지붕의 측면을 구성하는 기법이 발달되어, 명청대 이전까지 크게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귀서까래의 발달과정 중 평행서까래에서 말굽서까래로 전환되기 이전 방식인 평행복사연(平行輻射椽)이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의 귀서까래 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추녀의 중간부분부터 귀서까래가 걸치지 않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방식은 중국에서도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은 방식으로 부석사 무량수전의 특성으로 보인다. 이런 기법들을 살펴본 결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는 중국 남방지역에서는 볼 수 없으며, 북방 지역의 당 송대(唐 宋代) 및 요대(遼代) 시기에 볼 수 있는 기법으로, 건축물의 편년시기와 평면에서 어칸과 퇴칸의 비례 관계를 고려해볼 때 동아시아 북방지역에서 볼 수 있는 고식(古式)의 구조 기법으로 판단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가 변형된 것이 아니고, 팔작지붕 고유의 방식일 가능성이 있는 만큼 향후 부석사 무량 수전의 평면과 어칸 및 퇴칸의 비례,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이전 폐사지 중 팔작지붕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측면 지붕부 결구구조에 대해 복원 설계에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性理學)과 산수화(山水畵)의 발전에 관한 연구 - 송대를 중심으로 - (Research of the Neo-Confucianism and the development of Landscape painting in Song Dynasty)

  • 장완석
    • 한국철학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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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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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p.309-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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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본 연구는 성리학과 문화예술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데에서 출발하며, 특히 송대에 흥성한 산수화의 발전에 이론적 근거가 되었음을 연구하였다. 성리학은 고대 동양사회의 정치, 경제, 사상, 문화 예술 심지어 생활에 전반에 걸쳐 근간을 이루어 왔던 유학의 새로운 경향이다. 성리학은 중국의 북송(北宋)대 다섯 학자인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가 그 기틀을 새우고 남송(南宋)의 주희가 집대성한 학문이다. 중국의 원(元)나라를 통해 고려후기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조선의 건국의 기틀이 되었고,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거쳐 '문화 전반'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성리학과 예술론과 관계하여 격물치지, '리', 우주의식, '생의', '기상', '예'와 '도'의 관계 등이 산수화와 산수화론을 통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연구하였다. 산수화나 화조화에서도 신유학에서 말하는 천지의 '생의'의 미와 '어진 사람은 만물과 더불어 하나'라는 사상을 화폭에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시와 회화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동양에서는 송대 이전부터도 시와 회화의 관계를 중시했지만, 송에 이르러 시와 회화의 통일을 이루게 된다. 예를 들어, 명나라 때 조성된 졸정원(拙政園)과 같은 강남 정원 문화는 송대 산수화로부터 기인했다. 산수에서 등장하는 산속의 작은 정자나 가옥들이 정원에 옮겨진 것이다. 이는 곽희가 "임천고치"에서 말한 "가볼 수 있고, 바라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닐 수 있고, 살 수 있는 곳"을 화폭 속에 그려야 한다는 것이 명 청대에 이르러서는 현실로 옮겨진 것이다. 또한 현대에 있어서는 환경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지속적인 연구는 앞으로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 디자인 발전 연구, 더 나아가 문화산업의 기초자료로서 복합학문, 학제간 교류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