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ompare the books exchange between china and Joseon dynasty. Books, ancient and modern are an essential part to publish, propagate, administer the books which is a matter of grave concern among nations. Also they are the most important information and the symbol of the government power. As a result the rulers had brought many necessary books from China and it is a national policy to govern in Joson dynasty. This study will discuss the introduction of chinese books from the Annals of the Joson Dynasty, especially from the first king of the Joson Dynasty, Yi Seong-gye to the ninth king. At that times, Joson Dynasty had attempted to reign various policies. So many books related with the absolute authority of China. In accordance with the book classification method in ancient china, they are have been categorized. Furthermore, it should have been a important clue to check the influence by being brought many books from China.
As a part of environmental pollution mitigation in China, the number of environmentally friendly vehicles in China is proliferating, attention to vehicles that use environmentally friendly energy continues to increase, and China's new energy vehicle market is also growing rapidly. Similar to existing research, the focus of the subsidy is to provide financial support for electric vehicle buyers and the expansion of new energy vehicle charging infrastructure. Under these circumstances, this study attempts to understand the influence of Chinese consumers' green responsibility and other psychological factors on electronic vehicle purchase intention based on norm activation theory and theory of planned behavior. PLS-SEM examined the proposed hypotheses with 369 valid Chinese consumers, and all were supported. Our findings contribute to the extension of the research scope of Chinese consumers' intention to purchase electric vehicles and provide practical information for domestic and foreign firms entering China, the world's largest electric vehicle market.
문헌기록에 숙신이란 명칭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사기(史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다. 그러나 숙신이 어떤 계통의 종족이고, 언제 처음 나타났으며, 주 활동지역이 어디이고, 어떻게 생활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그 실체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동안 숙신의 활동지역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으나, 중국의 경우 흑룡강성 동부지역을 숙신의 활동지역으로 보는 "숙신동북설"이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숙신동북설"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문헌비판에만 그치고 있어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문헌사적 연구성과를 토대로 중국측이 주장하는 숙신 활동 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를 분석해 봄으로써 "숙신동북설"의 문제점과 허구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흑룡강성 동부지역의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신개류유적, 소남산유적, 앵가령유적, 석회장유적, 진흥유적, 아포력유적 등이 있다. 이들 유적에서 생활한 선사인들은 어렵과 수렵 중심의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다만 목단강유역의 경우 어렵과 수렵 이외에도 일부 원시 농업이 행해지고 있다. 사회구조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씨족부락 단계에 해당되며, 복합사회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문헌에 중국 왕조와 숙신과의 교류 관계 기사는 요순시기와 주 무왕 시기 두 차례 보인다. 두 시기로 나누어 중원과 흑룡강지역 유적에 보이는 문화양상을 비교 분석한 결과, 양자간의 문화적 교류 가능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선사시대 흑룡강성 동부지역은 중원과 교류할 수 있을 정도의 복합사회 단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가부장적인 씨족부락단계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결과적으로 중국에서 주장하는 "숙신동북설"은 진수의 "삼국지" 저술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와 현재적 시점에서 중화민족통일론에 입각해 만들어진 허구적 학설에 불과하다.
이 글은 조선시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기록관리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그 특징을 소개한 것이다. 조선시기에 기록관리 제도가 구축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1894년 갑오정권에서 근대적 기록관리 제도가 성립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국의 행정학과 기록관리 방식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기록관리제도가 정립되게 된 과정을 소개하였다. 끝으로 1999년 이후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후 현대 기록관리제도가 확립되게 된 과정을 설명하였다. 조선시기에 기록을 잘 관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관료제를 기반으로 한 조직사회이어서 기록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둘째 조선왕조의 성립과정에서 왕권과 신권이 대립하였는데, 그 대립과정의 타협물로서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이 남게 되었다. 셋째 현재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비슷한 일을 치룰 때에 참조하도록 하였다. 넷째 당대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후세에 역사적 평가를 받고자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왕조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1894년 갑오정권은 권력을 장악하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면서 개혁정책을 실시해갔다. 그것은 기록관리 부문에서도 나타났다. "명령반포식"을 공포하면서 법령의 제정과정을 규정하였고, 공문서 형식을 변화시켰다. 공문서 형식에서는 중국의 연호 대신에 '개국기년'을 사용하였으며, 사용 문자를 한자로부터 한글 혹은 국한문 혼용으로 바꾸었으며, 공문서 양식을 인쇄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정권의 독자성 및 자립성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병탄하면서 조선의 기록관리 전통은 단절되고, 일제는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기록관리제도를 구축하였다. 1945년 한국은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고,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1950년대에 한국 정부는 일제의 기록관리제도를 그대로 원용하였다가, 195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의 행정학과 기록관리 방식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서관리방식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료들의 기록관리에 대한 인식은 희박하였으며, 대통령기록 등 중요한 역사기록은 많이 파기되거나 유실되는 등 기록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국에서 기록관리가 제대로 행해진 것은 1999년 이후였다. 1999년에 "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기록관리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었고, 2005년 "국가기록관리혁신 로드맵"이 작성되고 추진되면서 한국의 기록관리제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2005년 이후 기록관리 프로세스와 시스템의 정비, 기록관리 표준의 제정, 법과 제도의 정비,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배치 등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의 기록관리는 한 단계 진전되게 되었다.
이 논문 ""경제문감 별집"에 나타난 주례 이념"을 고찰한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은 후세의 평가가 어떻든간에 조선의 건국이념을 제시하고 관료 체제의 정비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조선 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정도전은 "주례"를 사회개혁의 이념 모델로 삼아 태조 3년(1394)에 "조선경국전"을 찬진(撰進)하였다.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이 신왕조의 문물제도를 정하는 일환으로 저술한 새로운 법전(法典)의 지침서(指針書)로서, 신왕조의 지배 사상인 유교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에 비해 "경제문감"은 "조선경국전" 치전(治典)의 내용을 보완한 것으로, 주로 재상의 직책과 재상의 직무를 비롯해 대간(臺諫)과 감사(監査)는 물론 지방 수령의 직책에 대해 논했다면, "경제문감별집"은 임금의 도리를 논한 "군도(君道)"와 임금의 도리를 역철학(易哲學)의 입장에서 부연한 "의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경제문감"이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재상 제도의 변천과 득실(得失)은 물론 재상의 직책과 진퇴의 자세를 상세히 기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간(臺諫), 위병(衛兵), 감사(監司), 수령(首領)의 직책과 직무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경제문감별집"은 군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군주수신(君主修身)을 통해 마음을 바로잡고 덕을 닦아 어질고 유능한 재상을 임명해 정치하게 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하였다.
본고에서는 청말(淸末)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한 황제신화(黃帝神話)와 전통적인 황제(黃帝)전설과의 괴리를 살피고, 나아가 근대중국 '네이션(민족)'구조 형성의 역사과정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 또 그로 인해 야기되었던 수많은 사회적 충돌에 대해 살피고자 하였다. '네이션(혹 민족)'은 일종 '상상(想像)의 공동체'로서 근대적인 창조물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상상'을 하는 행위자들은 항상 그 시선을 아득히 먼 과거에로 돌리고자 한다. 즉 민족의 기원에 확실한 '역사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황제(黃帝)'라는 존재가 바로 이러한 청(淸)왕조 말기라는 시대상황의 수요에 의해 '중화민족'의 시조로 정립되었던 것이며, 20세기 중국 민족의 기호[심볼]로 자리매김하였다. 황제(黃帝)라는 이 기호[심볼]를 중심으로 한 중국 민족의 창조는 청(淸)의 통치를 종식시키고자 한 반만혁명(反滿革命)이라는 현실 정치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으며, 혈연적인 연관성에 바탕을 둔 배타적인 공동체 구성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에 관한 '상상'은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논란의 초점으로 된 '황제기년(黃帝紀年)'과 '공자기년(孔子紀年)'의 논쟁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민족관념의 충돌이었다. 또 일부 한족(漢族) 지식인들은 '황제(黃帝)'의 종족개념을 확대하여 '대민족주의(大民族主義)'로써 '소민족주의(小民族主義)'를 대체하고자 하였다. 일부 만주족(滿洲族) 출신의 학자들도 '황제(黃帝)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스스로의 역사기억을 새롭게 쓰고자 시도하게 된다. 결국 근대 중국의 민족구조를 당시의 정치 문화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분석해봤을 때, 지극히 구조적인 기호[심볼]로써 '황제(黃帝)'관념은 사실상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키고자 각축전을 벌였던 하나의 치열한 투쟁의 장(場)이었던 것이다. 한 중 일 동아시아 3국은 역사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이성적(理性的)인 접근보다는 항상 민족주의라는 감성적(感性的)인 목소리를 앞세우곤 한다. 특별히 중국은 경제대국화와 함께 사회 구성원들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중화민족'이라는 가상의 공동체 형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이러한 시도가 극에 치달을 경우, 자칫 동아시아에 커다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역사적 경험으로부터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것이다. 역자(譯者)로서는 이러한 서양에서 이미 거의 폐기되다시피 된 구시대적인 민족주의 일변도의 접근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베네딕트 엔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윤형숙 역, 나남출판, 2002)가 한국 학계에 널리 소개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민족주의에 관한, 특히나 중국의 민족주의의 형성에 관한 본고가 가져다주는 의미 또한 남다르다. 물론 본고 역시 이론의 틀은 "상상의 공동체"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러한 이론의 틀에 '중국민족의 형성' 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끼워 맞춰 봤을 때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전연 다른 새로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한 시도라고 보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의 틀에로의 대입이,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우도 검토해볼 계기를 마련해 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람에서 본고를 번역하여 학계에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옥동(玉洞) 이서(李?)의 장편 영사시(詠史詩) "역대가(歷代歌)"를 대상으로, 그 속에서 확인되는 옥동의 역사인식을 살펴보고자 한 글이다. 옥동 이서가 도덕적 수양을 최상의 가치에 둔 도학자(道學者)였다는 점에서 옥동의 "역대가"는 유가적(儒家的) 인식세계(認識世界)와 구분하여 설명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옥동의 "역대가"는 7언 526구로 구성된 장편(長篇) 고시(古詩)인데, 지금까지 알려진 "역대가" 계열의 작품들과 그 구성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옥동의 "역대가"는 두 개의 큰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단락은 태초부터 명(明)나라 멸망시기까지 중국의 사적을 서술한 부분이고, 두 번째 단락은 당대 현실의 부조리를 서술하여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드러낸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역대가" 계열의 작품들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하여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사적만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옥동의 "역대가"는 그의 유가적(儒家的) 역사인식(歷史認識)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이라 생각된다. 옥동에게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는 역사적 사실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덕적 수양을 추구해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는 도구로 작용하였다고 보인다. 옥동은 자신이 익힌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예리한 비판, 그리고 도덕적 수양의 필요성에 대한 자극을 모두 더하여 526구의 장편 영사시 "역대가"를 창작하였다. 그런 점에서 옥동의 "역대가"는 예술성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문학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하기에는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옥동의 "역대가"는 그 나름의 문학성을 통해 이전까지 저작된 여타의 "역대가" 작품들과 비교하여 문학적으로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옥동의 "역대가"는 문학성과 함께 그 스스로의 학습과 자기 신념의 강화를 위한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와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의 도구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지는 우리의 옛 선조들의 뛰어난 기술과 장인정신으로 오늘날에도 그 가치와 기술을 높게 평가받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이는 그 시대의 장인정신과 축적된 기술, 한지제조에 적합한 천혜의 자연조건인 닥섬유와 물과 햇빛과 더불어 환경친화적이고 보존성이 우수한 천연자숙제 및 점질물 등이 잘 어우러진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저피(楮皮))을 가공하여 손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는 것으로 조선 말엽 일본을 통하여 서양식 기계로 제조한 종이가 생산되면서 그간의 종이는 한지라 하고 서양의 종이를 양지라 구분하여 부른다. 한지는 재료 및 초지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고 사용되어져 왔으며, 그 기능 또한 다양하게 활용되어져 왔다. 또한 한지는 과거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양 3국(한국, 중국, 일본) 중에서 독특하고 우수한 품질로 각광을 받아왔고, 오늘날 한지 특유의 우수한 보존성으로 수많은 국가지정 지류문화재들이 지금까지 잘 전승되고 있다. 아울러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한 UNESCO 세계기록유산에 한국은 모두 11건이 등재되었는데 그 중 전통한지로 구성되어 있는 기록물은 8건으로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난중일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한지의 우수한 보존과학적 특징을 규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연구 사업들이 진행되어져 왔다. 한지에 대한 분석기술과 제조기술개발, 복원기술연구 등을 통하여 우리 전통한지에 대한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재입증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문화유산의 하나로써 그 명맥을 유지해 나가야할 것이다.
김유신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신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아 있을 때는 태종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일통삼한'의 대업을 이룩한 최고의 신하로 평가받았다. 당나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일본에서도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유신은 죽은 뒤에도 태종을 도와 대업을 이룬 '좋은 신하' 또는 '성스런 신하'라고 인식되었다. 또, 문무왕과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불교적으로 33천의 한 사람이 내려온 것이 김유신이라고 인식되었다. 신라 하대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어 '무(武)를 일으킨 대왕'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고려시기에는 신라에 이어서 진천현 태령산의 사당에서 국가제사로 받들어졌다. 김부식은 김유신과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의 처지를 보여주려 했는데, 김유신을 두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큰 공을 이룬 인물로 평가했다. 또 윤관은 김유신이 신령스러운 기적을 많이 일으킨 장군으로 인식했고, 이승휴는 김유신이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고려 말의 정추도 김유신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장수이고 큰 무공을 세웠다고 인식했다. 조선시기에서도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신하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의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이거나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중국의 인물에 견줄만한 능력과 공훈이 있는 인물이라고 인식되었다. 조선에서도 김유신이 병법에 뛰어났고 쇠뇌와 같은 훌륭한 무기를 활용했다고 보았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들은 김유신이 왜적을 소탕해주기를 바랐다. 김유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김유신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충신이라고 인식했다.
미륵사지 서탑은 현존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탑이다. 현재까지 연구 진행된 결과에 따르면 미륵사지 서탑은 9층 석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규모의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탑에 대한 직접적인 창건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다만 미륵사의 창건기사가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왕조(武王條)"에 연기설화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설화적인 역사의 기록은 사실성에 대한 규명에 있어 다양한 분야에서의 연구가 필요하다. 건축사적 측면에서 평면형식의 시대 위치에 대한 고찰은 탑의 창건 연대 규명에 하나의 가시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나아가서 미륵사지 서탑의 양식과 계통사 연구에 근간이 된다고 판단하여 수행코자 한다. 목조번안 석탑으로도 유명한 미륵사지 서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그동안의 연구에서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 불탑은 인도에서 발생되어 중국을 거쳐 도입되었다. 국내에서는 미륵사지 서탑보다 앞선 시기의 유례를 볼 수 없는 상태이므로 중국의 실 예를 참고하여 접근해 보고자 했다. 본 고에서는 한국(韓國)과 중국(中國)의 전석탑(塼石塔) 평면의 시대별 변천과정을 고찰하여 미륵사지 서탑의 평면형식이 7세기 초에 위치함을 결론으로 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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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4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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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서비스 이용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 2년 이상 서비스를 이용한 적이 없는 경우
- 기타 정상적인 서비스 운영에 방해가 될 경우
② 상기 이용제한 규정에 따라 서비스를 이용하는 회원에게 서비스 이용에 대하여 별도 공지 없이 서비스 이용의
일시정지, 이용계약 해지 할 수 있습니다.
제 17 조 (전자우편주소 수집 금지)
회원은 전자우편주소 추출기 등을 이용하여 전자우편주소를 수집 또는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없습니다.
제 6 장 손해배상 및 기타사항
제 18 조 (손해배상)
당 사이트는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와 관련하여 회원에게 어떠한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당 사이트가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손해발생을 제외하고는 이에 대하여 책임을 부담하지 아니합니다.
제 19 조 (관할 법원)
서비스 이용으로 발생한 분쟁에 대해 소송이 제기되는 경우 민사 소송법상의 관할 법원에 제기합니다.
[부 칙]
1. (시행일) 이 약관은 2016년 9월 5일부터 적용되며, 종전 약관은 본 약관으로 대체되며, 개정된 약관의 적용일 이전 가입자도 개정된 약관의 적용을 받습니다.